불이 꺼진 비행기 안에서 조용히 색칠 공부를 하는 아이, 그리고 그 옆에서 함께 색연필을 쥔 아이 엄마가 보입니다.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모습이 지극히 평화롭습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제법 야무지게 색칠하는 손놀림을 보며, 어느덧 부쩍 자란 아이와 그만큼 나이 들어가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는 늘 바쁩니다. 버거운 직장생활에, 쌓여가는 집안일에, 양가 행사까지 챙기면서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밀린 뉴스도 따라가야 합니다. 늘 피곤합니다. 그렇게 세월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자칫 아이에게 소홀해질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커다란 태블릿 PC에 동영상을 담아 보여줄 수도 있고, 스마트폰 게임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심심하다며 몸을 베베 꼬며 칭얼대던 아이도 금세 몰아치는 도파민과 함께 몰입의 경지에 오릅니다. 덕분에 피곤한 내 몸을 조금 더 쉴 수 있으니, 참 매력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스마트폰 대신 굳이 색연필과 책을 챙겨왔습니다. 동영상을 보여주는 것, 게임을 하게 하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관계의 크레바스는 더욱 깊고 넓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단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틈날 때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려 합니다. 엄마는 다양한 전집과 동화책을, 아빠는 영어 동화와 학습 만화를 맡아 역할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교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와 같은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세계 여행이기도 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시간 여행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영웅과 함께 악당을 물리치는 스릴 넘치는 모험이 되기도 합니다.
바쁜 부모에게는 값비싼 장난감, 유명 브랜드의 옷, 유명 강사가 가르치는 학원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낡은 인형 하나로 하는 역할극, 베개를 들고 하는 레슬링, A4용지에 서로 낙서를 하며 깔깔거리는 시간이 훨씬 더 소중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더 잘해줘야지, 좋은 기회가 오면 그때 해줘야지 하면서 행복을 유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서둘러 자랍니다. 절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순간이 너무나도 귀합니다. 이 귀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일이 아무리 바빠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나누면, 관계가 조금씩 조금씩 깊어집니다. 그 관계의 알맹이는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켜켜이 쌓여 갑니다. 이렇게 교감이 짙어질수록 행복의 농도도 점점 진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힘들고 지칠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줍니다.
캐나다의 유명한 작가 올랜도 바티스타는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매일 몇 분이라도 함께하는 시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유산을 남겨줄 수 없을지라도, 함께한 추억이라는 최고의 유산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아이와 함께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같은 바람을 맞고, 해가 지면 하루의 일과를 나누고, 그날그날 새롭게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감정을 가만히 바라봐 주는—사소하지만 중요한 순간들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