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있어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자주 그리고 나름의 가슴을 담아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예도 드물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에 매달려 평생을 살다, 결국 이 말의 품에서나 아니면 이 말에 진저리치며 도망치다 생을 마치게 되는 존재이어서다. 둘러보면 세상 어느 것 하나 사랑을 근원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굳이 이 어휘를 입에 담아 내놓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이 범주 안에 들지 않는 것이 없어서다. 어떻든 애써 내려놓으려고 해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에로티시즘eroticism뿐만이 아니다. 치사랑도 있고 내리사랑도 있다. 다만 주는 데 그치는 사랑도 있고 받기만 하는 일방적인 사랑도 있다. 잡으려 따라가는 사랑도 있고 도망쳐 숨는 사랑도 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웅대한 사랑도 있고 오직 하나에만 집착해 주변의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랑도 있다. 사랑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과연 무엇에 기대 신이 허락한 시간을 살아냈을 것인가. 사랑의 노래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치지 않고 계속 불러질 것이다.
만약에 사랑이 없다면 인류의 역사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할 것이 뻔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사랑은 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겨서라도 사랑의 주체가 되려고 한다. 다만 주체로서 만족하지 않고 객체로 존재하기도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보니 어떻든 우겨서라도 쟁취하려고도 한다. 우기면 다 사랑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전사처럼 살고 있어서다. 향기로워야 할 ‘사랑’이라는 단어가 살벌한 느낌까지 들게 하는 경우도 가금 있다. 스토킹stalking의 예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엔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씩은 내재되어 있어 병적으로 돌출하기도 한다. 대상의 어느 일면에 대한 집중적 소유욕이 그 원인이다.
진정한 사랑은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줄 때만 안개처럼 일어 변함없이 상황을 유자할 수 있다. 따라서 보든 경우에 ‘사랑한다’라는 사실이 만병통치의 약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사실이 절망으로 내모는 경우 사랑은 독약으로 곧바로 바뀐다. 가장된 사랑은 기어이 그 흉악한 몰골을 내보일 수밖에 없다. 감동은 진심이 동반되지 않고선 좀처럼 우려지는 것이 아니어 서다.
사랑의 위력 / 조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당신들의 말마다 모래가 날고 있다 언제나 이곳이 가파른 때문인가 내 곁에 쌓인 모래들만 비탈져 오늘도 반짝인다 지쳐 누운 낙타인가 이모래 언덕을 허물며 버둥대는 저것은 나를 꿈꾸게 할 것들은 수시로 문을 걸고 꺽꺽 울고 어두운 곳에선 별을 치부처럼 들추며 날렵하게 당신들의 달이 살찐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위력으로 날고 있는 모래의 말들아
사랑이 깊고 깊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시인이 굳이 ‘나’를 강조해 친근감을 잃게 헸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것은 특정한 지칭의 ‘나'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굳이 ’나‘를 넣어 공주병 환자로 오인 받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일종의 우쭐거림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다. 또 “나를 꿈꾸게 할 것들은 수시로 문을 걸고 꺽꺽 울고 어두운 곳에선 별을 치부처럼 들추며 날렵하게 당신들의 달이 살찐다”에서 ’어두운 곳에선 별을 치부처럼 들추며 날렵하게 당신들의 달이 살찐다‘가 선명하게 와 닿지 가 않는다.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시로서의 성숙도가 그만큼 낮다는 말이다. 시는 특정한 어느 누구의 개인적 소유물이 아닐 때 가치를 지닌다. 문학의 덕목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오염된 공기처럼 떠다니는 세상을 비난하려 함은 알겠다. 그러나 어떤 존재로든 ’나‘를 시의 중심인물로 게재시킴으로써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시의 가치는 반감되거나 오히려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가능한 한 분별없이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미덕이다.
생각해보면 개인이란 존재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실존적 의미의 발견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조은의 시 속의 ‘나’와 김춘수 시의 ‘나’는 그 성격부터가 다르다. 앞 시의 ‘나’는 독자적 자아라는 인상이 짙은 데 비해, 뒤 시의 ‘나’는 일체의 개체적 성격이 배제된 자아, 이른바 보편적 의미의 자아고, ‘우리’로 의미 확대 될 준비를 갖춘 자아다. 작품의 품위가 여기서 갈린다.
고백 / 최문자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헌신적일 때, 그 진가가 인정되고 감동을 발아시킨다. 후회되는 점을 고백하고 있다. 좀 더 헌신적이지 못했던 바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