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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도 불교사
10. 불교의 성립과 전파
1) 불교와 인도사상
싯다르타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5세기에서 6세기 사이다. 인도철학의 형성기(B.C. 1500 - B.C. 200년경)로 보면 말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때는 베다 문명에서 길러진 인도의 사상계가 우파니샤드의 철학으로 완성되어, 인도 종교의 근저根柢를 형성하고 있던 때다.
불교 또한 이러한 토양에서 발아하여, 불교가 전적으로 싯다르타의 사상체계는 아니다. 싯다르타나 육사외도六師外道 등 신흥 종교사상가들은 기존의 브라만교에 반발하여 새로운 종교관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 바탕에는 베다-우파니샤드 사상체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인도의 형이상학은 공통적으로 고苦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실천적 목표를 지향하는 쪽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싯다르타 또한 고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그 역시 출발은 베다-우파니샤드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다 이전으로 올라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히려 베다의 사상과 문화는 화려했던 토착 인더스(인도) 문명인 비 아리안Aryan 계통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점차 연구가 진전되자 불교나 지나교가 바라문 사상과 전연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기반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는 바라문 문화와는 다른 문화에 입각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아니, 오히려《베다》이래 바라문 사상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고, 신앙 면에서나 사색 면에서도 이질적인 것을 그 안에 지녀온 비(非)아리아계 문화라는 사실이 점점 더 밝혀지고 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90~91.)
19세기 중엽 인도 서북부 펀자브 지방 모헨조다로와 하랍파에서 거대한 계획 도시 유적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벽돌로 만들어진 이들 고대 도시에는 넓은 도로와 공공 목욕탕, 수도 시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모헨조다르와 하랍파는 로마가 번영하기 전까지는 최첨단 도시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문자와 후세 인도의 시바신Shiva의 원형으로 보이는 인장 등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사실 시바신은 비쉬누(Vishnu, Viṣṇu)신과 함께 브라만교에서 최고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신이다. 시바신은 브라만교의 오래된 베다 성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를 보면 브라만의 시바신은 비 아리안 계통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더스 문명의 유품에서 추정된 종교의 형태는《베다》의 종교와는 다르면서도 훗날의 인도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좌선(坐禪) 요가가 그 한 예다.《베다》에도 요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나 후세의 요가파에서 실천하는 것과 같은 요가는《베다》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이와 같은 요가에 대한 생각이나 실천은 아리아 인종의 바라문교와는 다른 사회에서 나와 발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93.)
그 외에 산에 사나운 신을 모시는 풍습이나 여신女神 신앙도 비 아리안에서 온 것이고, 환생과 카르마의 개념이나 윤회사상 또한 인더스 문명을 일군 비 아리안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 아리안족의 전통이 접목된 것으로 아리아 인들이 인도 고대 문명을 수용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아리안이 인도를 점령한 시기는 기원전 1500-800년경으로 늦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싯다르타가 속한 석가족이 백색인종인 아리아인이 아니라 황색인종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연구가 축적됨에 따라 지금은 가장 유력한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2) 불교와 상카의 논쟁
북北 인도를 통일 지배한 굽타 왕조 시대[320년-550년]에 이르면, 불교의 왕성한 활동에 자극 받은 인도 사상계가 “육파철학六派哲學”으로 체계화된다. 불교의 철학적 성공에 영향을 받은 인도의 사상계가 분발하면서 이론적인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파 중 유독 상캬 학파와 불교계는 오랫동안 서로를 공격하면서 논쟁을 벌인다.
그것은 상캬(삼키아 sāmkya)와 불교가 “삶은 필연적으로 고苦이고 그의 원인은 무지無知”라는 공통된 가정으로부터 시작하는 등 사상체계의 전개도 매우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고관苦觀이나 해탈관解脫觀, 12연기설 등 여러 면에서 유사하여 그 태생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까? 아직도 그 선후를 두고 논쟁중이기는 하지만, 오랜 전통의 상캬가 조류潮流로서는 불교보다 빨랐지만, 학파의 성립으로는 불교보다 약간 늦는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즉 상캬가 불교의 Pāli 문헌에서 언급된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역사로 보나 문헌으로 보나 적어도 초기엔 상캬가 불교에 선행했다고 하면서, “상캬의 문헌들이 불교의 경전보다 늦어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하지만, 상캬의 관념이 불교보다 앞서며 불교로부터 나올 수 없었음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또 “많은 학자들은 數論이 불교보다 빠르므로, 불교는 수론의 영향을 받아 다시 한 단계 진보해 갔다고 단정하는 것이 통례였다.”고 한다.
인간의 苦와 윤회, 그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같았지만, 불교의 연기관緣起觀으로는 불변의 고정된 근본 실체를 주장하는 상캬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상캬의 전변설이 불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苦와 윤회를 해명하고, 그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불변하는 고정된 근본 실체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연기관이라는 골격을 유지하는 불교의 다양한 이론들 속에서 상캬의 사고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교와 상캬 철학은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아 선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이들은 인도 속에서 여러 사상들과 교류하면서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사소한 종교적 논쟁이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지구촌 곳곳을 피로 물들이는 종교 분쟁을 일으키는 단초가 된다.
물론 “결정 없는 토론이 토론 없는 결정보다 낫”기 때문에 토론은 필요하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회의석상에서 어떤 의견을 발표했는데, 누군가가 반대의견을 낼 경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개는 그 의견이 자신의 의견보다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변호를 통해서 자신의 의견이 낫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곧바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것은 일종의 허세나 고집 같은 표면적인 심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유지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이케가야 유지 지음 · 김성기 옮김, 『착각하는 뇌, 뇌는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을 속인다!』 p. 83.)
옳고 그름을 떠나 타인에게 들은 정보나 의견에 쉽게 흔들리다 보면 자칫 “자기 붕괴”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변명辨明”도 자기 유지나 항상성 유지를 위한 본능인 것이다. 그 본능을 거스를 수 있어야 올바른 논쟁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조셉 주베르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자는 진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사람들이 정의正義를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챙긴 다음의 일이라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무아”를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려야 진리도 정의도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능을 거슬러 자기 자신을 버릴 때 세상은 바로 부처의 세계가 될 것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의 본 뜻이기도 하다.
싯다르타는 당시 난무하던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논리를 혁파하고, 단순하고 실천적인 불교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아에 대한 고정적 관념을 부정하였고[無我],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들만을 가르쳤으며, 불합리한 것은 가차 없이 배격하였다. 와서 보라는 평범하고 단순한 진리를 아주 쉬운 언어로 설파하였던 것이다. 그런 실천이 다른 사상가들과 구분되는 점일 것이다. 그런 싯다르타의 사상이 그대로 담긴 불교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3) 불교의 첫걸음
우루벨라 보드가야佛陀伽倻에서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바라나시로 발걸음을 옮긴다. 전법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바로 옆 마가다magadha국 라자그리하Rajagriha (왕사성王舍城)에는 싯다르타가 고타마로 불리던 시절부터 부처가 되거든 꼭 돌아와 가르침을 들려달라던 빔비사라(Bimbisara, 甁沙) 왕이 있었다. 그런데 왜 싯다르타는 240 km나 떨어진 바라나시로 향했을까? 경전에는 맨 처음 설법할 대상이 바라나시에 있었으므로 그 곳에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법의 상대로서 우선 머리에 떠오른 것은 전에 스승이었던 아라다 카라마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 두 사람인데, 그중 한 사람은 7일 전에, 또 한 사람은 전날 밤(사흘 전이라고도 함)에 각각 죽었다는 것을 불안(佛眼)으로 보고 알게 된다.
다음에 생각하게 된 것이 다섯 사람의 친구, 이 다섯 사람은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했을 때 그를 호위하기 위해 나중에 부왕으로부터 파견되었다고도 하고 또는 수행 시절의 동료들이 고타마의 덕을 사모하여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이 다섯 사람은 고타마의 격심한 고행을 보고 감탄했었는데, 어느 날 고행을 그만두고 보리수 아래로 가는 것을 보자, “고타마는 이제 타락했다.” 하고는 실망하여 그의 곁을 떠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바라나시의 교외에 머무르면서 출가자로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56.)
범천의 ‘권청勸請’을 받아들여 진리를 설파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그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알고, 그 다음으로 떠올린 대상이 보드가야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같이 수행했던 도반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붓다가 수자타의 우유죽을 받아먹었을 때, 이를 비난하면서 그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무려 600여리를 걸어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라나시가 지닌 종교사상적인 위치를 두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바라나시는 수행자들이 모이는 종교 도시였다. 이런 종교사상적 위치를 고려해 볼 때 그의 바라나시 행은 단지 구도 여행의 한 여정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드가야(佛陀伽耶)에서 성도한 석가모니가 왜 2백 킬로나 떨어진 갠지스강 맞은편 언덕인 바라나시까지 가서 제일성(第一聲)을 울렸을까. 오래전부터 빔비사라 왕을 비롯해 많은 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마가다국에서 왜 최초의 설법을 하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 실제적으로나 교리적인 면으로 보아 여러 가지 해답이 나올 수 있다. 하기야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녹야원에서 우연히 최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을 나중에 전기 작가들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처럼 설명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56.)
깨달음을 얻고 나서 ‘얼굴빛이 환하게 빛났다’고 경전에는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지만, 실상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렇게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수행자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사상가들과 토론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선종 선사들이 수행이 무르익을 때쯤 선지식들을 찾아 떠나는 구도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면 상황적으로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이를테면 검객이 오랜 수련 끝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면 강호江湖로 나가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 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갠지스강의 중류에서 웃타르프라데쉬주(州)의 동쪽으로 1백 킬로쯤 더 가면 비하르주(州)로 들어가는 입구다. 강은 여기에서 몇 개의 갈지자(之)를 긋고 있는데,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흐름이 갑자기 북으로 꺾인 한 모서리에 바라나시(베나레스)시(市)가 있다. 철도의 분기점으로 네 개의 노선이 모인 교통의 요지. 이곳은 예전부터 종교 도시로 알려져 있다. 65만 남짓 되는 인구인데 적어도 150 이상의 사원(寺院)이 있다. 연간 1백만 이상의 순례자가 각지로부터 모여든다. 인도교와 지나교, 이 밖에 여러 종교의 성지(聖地)다. 강기슭에 마련된 돌층계나 물속에서도 신자들이 떼를 지어 ‘성스러운 물’을 다투어 마신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62.)
당시 바라나시는 붓다가 자신의 사상에 대해 토론을 벌일 사상가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다른 종교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붓다는 그런 바라나시로 향해 간 것이다. 이는 가는 길에 만난 ‘우파카’라는 한 수행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그가 ‘당신의 모습은 맑고 얼굴빛은 환희 빛나고’ 있다고 하자 붓다는 ‘나는 부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우파카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떠나는데, 이는 바라나시로 가는 길에도 다른 수행자들과 토론을 벌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지바카교에 소속된 우파카라는 고행자는 부처님의 얼굴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모습은 맑고 얼굴빛은 환희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따라 출가했으며, 누구를 스승 삼고 누구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까?”
이 물음에 부처님은,
“나는 모든 것을 이긴 자(一切勝者)이고 모든 것을 안자(一切智者)이다. 나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스승은 없다. 또 내게 견줄 만한 사람도 없다. 나는 부처다.”
라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우파카는,
“혹시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라고 말하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다른 길로 가고 말았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57.)
구도여행 중이거나 혹은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을 수 있는 장면이다. 싯다르타는 여전히 구도여행 중이었고, 그 길에 헤어졌던 도반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싯다르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청한다면 앉을 자리를 내어주기는 하겠지만 일어서서 마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등등의 경전의 내용도 도반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들과 벌였을 격렬했던 토론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보면 어떨까.
4) 녹야원에서의 전법傳法과 전도傳道 선언
옛 도반들은 처음에는 부처가 됐다는 싯다르타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설법을 듣는 것조차 거부하였으나, 결국 보름달이 환히 비추는 장중함 속에 붓다는 진리의 수레바퀴 굴릴 수 있었다. 역사적인 초전법륜初轉法輪이 있었고, 다섯 수행자들은 콘다나, 바파, 바디야, 마하나마, 앗사지 순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이에 붓다는 자신을 포함해 여섯 아라한의 탄생을 선언하는데, 그의 평등사상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로써 비구比丘가 최초로 출현하게 되었고, 최초로 불교교단이 생겨나게 된다.
이들은 바라나시 교외(바라나시 북방 약 7㎞)에 위치한 사르나트Sarnath, 즉 녹야원(鹿野苑, mṛgadāva)에서 교대로 탁발하며 수행에 전념한다. 전법에도 힘썼는데, 한 장자의 아들인 야샤스[耶舍]와 그의 부모를 출가시키고, 이어 그의 친구인 상류층 자제들을 출가시킨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60인으로 늘어나자, 붓다는 역사적인 “전도 선언”을 하며 제자들을 떠나보낸다.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가르침)을 설하라. 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베라의 세나니가마[將軍村]로 가리라.」(相應部經典 四·五 係蹄(2). 同本, 雜阿含經 三九·一六 繩索, 增谷文雄 著/李元燮 譯,『阿含經 이야기』 p. 69.)
붓다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갠지스 강 남쪽에 있는 마가다국 우루벨라로 향한다. 우루벨라는 싯다르타가 우유죽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오랜 사색 끝에 정각을 이룬 곳이다. 우루벨라는 싯다르타가 붓다로 새로이 태어난 땅이 되면서, ‘보드가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아소카 비문에는 ‘보디’로 나와 있는 이곳은, 가야시 남쪽 8km 지점으로 지금은 대보리사大菩提寺 대탑이 있는 곳이다.
5) 불의 설법
붓다는 가는 길에 “젊은이들이여, ‘여자를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설법으로 숲에 놀러왔던 30여명의 청년들을 출가시켰으며, 우루벨라에서는 바라문인 카샤파[迦葉] 3형제를 비롯한 1,000명의 신도들을 설복시켜 출가시킨다. 바라나시에서 최초의 설법을 한 붓다가 마가다국으로 간 목적 중에는 이 3형제와 그들의 신도들을 교화하는 데도 있었다고 하는데, 카샤파 3형제는 당시 우루벨라에서 가장 큰 종교 집단을 이끌고 있었다.
그 당시 마가다국에는 종교활동이 한창이었다. 그중에도 카사파(迦葉) 3형제는 빔비사라왕을 비롯하여 마가다국과 그 동쪽에 있는 앙가국에서 많은 신자들로부터 숭배를 받고 있었다. 세 사람은 나이란자나(尼連禪河) 강변에 살았는데, 맏형인 우루빌바 카사퍄는 5백 명, 다음의 나디 카사파는 3백 명, 셋째 가야 카사파는 2백 명의 제자를 각기 거느리고 있었다. 바라문의 집안에 태어나서 출가한 고행승으로, 머리에는 나계(螺髻)라고 하는 커다란 상투를 틀고 있었다. 바라문의 전통에 따라 <베다>의 성전(聖典)을 읽고 성스러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켰다. 담을 쌓아 호마(護摩)를 사르고, 화신(火神) 아그니를 제사지내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고 있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72.)
나이란자나(Nairañjanā, 尼連禪河) 강변에서 수행할 당시 싯다르타는 카샤파 3형제에 대한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고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붓다가, 이들과 진검승부를 하러 그곳으로 향한 것이다. 이들과의 첫 만남은 “화당火堂에서의 독룡전毒龍戰”으로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그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자들은 모두 포교의 길로 떠나보내고 난 부처님은 다만 홀로 맏형인 우루빌바 카샤퍄를 찾아갔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야(귀족 무사 계급)출신의 사문(沙門 · 바라문 이외의 수행자)이므로 바라문인 카샤파를 만나본다는 것은 물론 쉽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하룻밤 자고 갈 것을 청했다. 더욱이 신성한 불을 때는 화당(火堂)에서 자게 해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카샤파는 대답하기를,
“나는 상관없으나 저 화당에는 무서운 용이 살고 있으므로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이럴 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간청하니 카샤파도 할 수 없이 허락하였다. 여기에서 용이라고 함은 뱀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불가사의한 마력을 가진 뱀을 말한다. 어떤 경전에 보면, 이 화당의 용은 카샤파가 하는 말을 잘 들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가했다고 한다. 또 다른 경전에는, 동료를 원망하고 죽은 병든 수행자의 넋[化身]이라고도 했다.
부처님은 화당에 들어가 법식대로 풀방석을 깔고 좌선한다. 부처님이 들어온 것을 보자, 용은 노해서 독 연기를 내뿜는다.
‘이 용의 몸에 상처를 주지 말고 신통력만을 뺏어버리자.’
부처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자신도 신통력으로 연기를 내뿜는다. 용은 점점 더 노해서 불꽃을 토한다. 부처님도 화계삼매(火界三昧)에 들어 불꽃을 토한다.
그때 화당은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불꽃이 나와 벌겋게 비친다. 바라문 수행자들은 화당을 멀리서 에워싸고 이 광경을 바라보며,
“가엾게도 그 훌륭한 사문도 용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구나.”
하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하룻밤을 화당에서 지낸 부처님은 이튿날 아침이 되자 신통력을 잃어버린 용을 바리때에 넣어 가지고 카샤파에게 내보이며,
“이것이 당신의 용이오.”
라고 말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173~174.)
과히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이 설화를 통해, 우리는 붓다의 신통력보다는 붓다의 전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화당의 하룻밤을 위시해서 부처님은 카샤파에게 3,500의 신변神變, 즉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전하는데, 기존의 종교집단과의 교리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어쨌든 그들을 설복시킨 붓다는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로 가는 길에 가야산伽倻山에 올라 그들에게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는 “불의 설법”을 한다.
한때 세존께서 천명의 수행승들과 함께 가야의 가야산 정상에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중략)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시각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상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의식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싫어하여 떠난다.
(중략)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서 이와 같이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세존께서 이처럼 말씀하시자 그들 수행승들은 만족하여 세존께서 하신 말씀을 기쁘게 받아 지녔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에 그 천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전재성역, 아딧땅경 (Ādittaṃ, 연소경, 상윳따니까야 S34.3. 6)에서 인용.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부분은 생략하였다.)
뒤의 두 단락은『무상경無常經』『염리경厭離經』등에서 이미 보았던 형식이다. 그런데 하고많은 비유 중에 왜 하필 불이었을까? 설법을 듣는 상대가 밤낮으로 불을 섬기던 바라문의 수행자였기 때문(그들에게 불만큼 친숙한 대상은 없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을 섬기던 그들을 조복시킨 것을 강조하기 위한 미장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 죽림정사竹林精舍의 탄생
당시 마가다국은 당시 인도 최대의 강국이었으며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 즉 왕사성王舍城은 학문과 기술이 가장 앞서 있었던 첨단 도시였다. 당시 내로라하는 종교가들이 활동하던 곳이었는데, 붓다가 왕사성에 도착할 무렵에는 마가다국에서 가장 큰 교단을 가지고 있었던 카샤파 3형제를 비롯한 천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있었으니 마치 개선장군 같았을 것이다.
거기다 왕사성에 이르자 붓다를 수행자일 때부터 알고 있던 빔비사라왕이 붓다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앞서 말했지만 빔비사라왕은 붓다 출가 당시 만약 깨달음을 얻으면 반드시 자기한테 와서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한 바 있었다. 빔비사라왕은 크게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일찍이 태자였던 시절에 다섯 가지 소원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국왕이 될 것, 둘째는 내 영토에서 부처님이 출현하실 것, 셋째는 그 부처님을 섬기고 받들 것, 넷째는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설법을 해 주실 것, 다섯째는 내가 부처님의 법을 깨달을 수 있을 것 - 이상 다섯 가지 소원이었는데 이제 모두 이루었습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81.)
그렇게 말한 후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고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왕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된 것이다. 종교의 이상을 실현한 사람을 가리켜 아라한이라고 한 것은 여러 종교에 공통된 점이었지만, 왕의 말에 따르면 지나(승리를 얻은 자) 혹은 붓다(깨달은 자)라는 칭호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부처라는 칭호가 보통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키지만, 불교이전에도 부처라는 개념은 있었던 것이다.
빔비사라왕은 붓다와 그 제자들이 머물 곳 또한 마련해주었는데, 왕사성王舍城 부근에 있는 죽림(竹林, 베루바나)이 그곳이다. 그곳은 도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으로, 다니기 편하면서도 낮이나 밤이나 고요해서 속세를 떠나 조용히 명상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 곳이 바로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다. 이곳에서 붓다의 대표적인 제자인 사리풋타[사리불舍利弗]와 못가라나[목건련目犍連], 그리고 부유한 바라문의 아들이었던 마하카샤파[마하가섭摩訶迦葉] 등 세 사람이 교단에 합류하게 된다.
7)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犍連
왕사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파팃샤, 콜리타라는 마을에는 각기 명문 집안이 있었다. 그 집안에 같은 날 사내아이가 태어나는데, 이들이 훗날 사리불과 목건련이 되는 (마을이름 그대로)우파팃샤와 콜리타다. 두 사람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랐는데, 이들은 산정제山頂祭라는 축제에 참가하여 구경도 하고 돈도 뿌려주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때 둘은 이런 놀이에 회의를 느끼고 해탈의 길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 무렵 왕사성에는 산자야Sanjaya라는 사상가가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우파팃샤와 콜리타는 같은 또래의 청년 5백 명을 데리고 가 출가하게 된다. 그들은 며칠 만에 산자야가 가르침을 완전히 체득하였지만, 그들이 바라던 해탈은 이룰 수가 없었다. 실망한 이들은 어디엔가 어진 바라문이나 사문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달려가 가르침을 청했지만 만족할만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때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들은 다섯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슈바짓(阿濕波誓, 馬勝,『잡아함경雜阿含經』1024. 아습파서경阿濕波誓經에 등장)이라는 제자가 여러 나라를 편력하다 막 돌아와서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가간 우파팃샤는 그대의 스승이 누구냐고 묻게 되고, 위대한 사문이신 세존 밑에서 출가하여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이어 그 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우파팃샤는 콜리타와 함께 같이 출가한 500명중 250명을 이끌고 죽림정사에 가게 된다.
붓다는 이때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고 있다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큰 제자[二大弟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하는데, 붓다의 설법을 듣고 이 두 사람을 제외한 250명은 단번에 아라한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콜리타[목건련]는 출가한 지 이레째 되는 날에, 우파팃샤[사리불]는 출가하여 반달이 되는 날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경전에는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입문한 250명은 곧 아라한이 되었는데, 두 큰 제자는 각각 한 주일에서 반달이나 걸렸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더구나 두 사람 중에서 지도적인 입장에 있는 사리불 쪽이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 속에 말하자면 종교의 비의(秘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숨겨져 있다(그리스도와 그 제자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더러 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92.)
마하카샤파[마하가섭]는 8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종교적 비의秘儀라고 하기 보다는 후대의 작가들이 조작한 느낌이 든다. 물론 빨리 깨쳤다고 더 위대한 것은 아니겠지만, 가장 위대한 제자로 꼽히는 사리불이 가장 늦었다고 하고, 그 위에 마하가섭을 배치한 것은 의도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시험처럼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식적인 임명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후대에 꾸며졌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이 또한 당시 사리불의 위상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사리불과 목건련은 붓다보다 연장자年長者로 먼저 입멸하는 바람에 가섭을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가섭이 귀의한 곳도 죽림정사인데, 붓다보다 나이가 아래였던(다섯 살 정도) 그는 붓다 입멸 후 사실상의 후계자가 되어 교단을 이끌게 된다.
8) 마하가섭摩訶迦葉
가섭은 붓다 입멸 후 경전의 편찬을 주관하고, 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중요한 인물로, 붓다 제세시에도 대리를 맡을 만큼 중요한 제자다. 제자들 중에는 가섭(訶葉, 카샤파)이라고 불리던 인물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앞에서 말한 카샤파 3형제 외에 십력가섭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마하가섭은 “위대한” 이라는 뜻의 마하摩訶를 붙여 불리게 된다.
가섭은 마가다국의 마하티르타라는 바라문 촌에서 태어났다. 핏파리라고 불리던 가섭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혼을 거부하고 일찍부터 출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부모의 권유로 바드라라는 여인과 결혼하지만, 둘은 모두 출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부의 정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 이들의 출가 동기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핏파리는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일터를 둘러보러 갔다. 논두렁에서 서서 보고 있으니, 보습으로 파헤쳐진 흙 속에서 벌레가 나온다. 어디선지 갑자기 새가 날아와 벌레를 쪼아 먹어버린다. 그 살생의 허물이 자기에게 있음을 깨닫자, 그처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으로부터 싫어졌다. 그는 재산과 노예를 모두 아내인 바드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출가할 것을 결심했다.
바로 그날, 바드라는 뜰에서 참깨를 말리고 있었다. 새떼가 몰려와 깨에 붙어 있는 벌레를 먹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보고 바드라는 그 살생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고 모든 재산을 남편에게 맡기고 자신은 출가할 것을 결심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95.)
둘이 출가하게 되는 동기가 싯다르타의 어린 시절 겪었던 일화와 비슷하다. 아마 가섭을 따르는 집단에서 붓다에 맞추어 편집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데, 다만 창작력의 부족으로 그대로 인용한 듯하다. 거기다가 붓다와의 만남 또한 다른 제자들하고는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핏파리(가섭)의 출가 당시 붓다는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다른 때는 없었던 “지진地震”이 일어남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특별한 까닭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붓다는 불안佛眼으로 핏파리 부부가 출가하려고 길을 나선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붓다는 바리때와 가사를 손에 들고 아무 제자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정사를 나선다. 이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붓다가 영접하러 나가는 모양새다.
어쨌든 붓다는 왕사성과 나란다 중간에 있는 니그로다 나무 아래 단정히 앉아 좌선을 하면서 가섭을 기다린다. 탁발하러 나갈 때는 눈에 띄지 않도록 평범한 출가자의 모습을 하였으나 이 때만은 특별히 여래의 존귀한 모습으로 빛을 말하며 앉아 있었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가섭에게 선택 받으려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 또한 재미있다.
붓다는 가섭을 보고, “카샤파여!”라고 불러 곁에 앉도록 하고는 오직 가섭 한 사람을 위해 법을 설한다. (선종 오조홍인五祖弘忍이 육조혜능六祖慧能에게『금강경』을 설한 장면과 겹친다.) 가섭은 붓다의 말씀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짧은 시간 안에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이해하였고, 동시에 그 몸에 위덕威德이 갖추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드레 되는 날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장치를 하나 더 마련되는데, 그것이 “분소의糞掃衣의 전수傳受”다.
부처님이 라자그리하로 돌아오는 도중 어떤 나무 아래 앉으려고 하자, 마하카샤파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네 겹으로 접어서 깔아 부처님을 앉게 했다. 부처님은 그 위에 앉아 손으로 만지면서, 그 옷이 부드럽고 보기 좋다고 칭찬했다.
마하카샤파는 그 겉옷을 부처님께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묻자, 그는 부처님이 입고 있던 다 낡아빠진 분소의(糞掃衣)를 주었으면 하고 원했다. 분소의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묘지 같은 데 버려진 헝겊 조각들을 모아서 만든 누더기를 말한다.
마하카샤파가 부처님의 누더기를 받아서 입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영광이었다. 그 자신 뒷날에까지 이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197.)
그렇게 해서 가섭은 붓다의 누더기를 받아서 입게 된다. 가섭이 붓다의 분소의를 물려받아 입었다는 것은 이후 중대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를 모방하여 선종 육조 혜능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활용된 것이다. “의발衣鉢을 전수한다.”는 것이 스승이 후계자를 정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도 이때 시작된 것이다. 이 장면도 후대에 조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붓다가 손으로 만지면서 옷이 부드럽고 보기 좋다고 하는 장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여기에 적은 마하카샤파의 귀의(歸依)에 대한 이야기는 팔리문 성전의 주석부(註釋部)에 의한 것이다. 팔리문과 한역본의 여러 경전을 보면, 카샤파 3형제나 샤리푸트라와 목갈리나 등의 귀의는 불타 전기의 모든 경전에 나와 있는데도, 이 마하카샤파의 귀의에 대해서는 기록된 경전과 기록되지 않은 경전이 있다.
그러나 한역본 중에서도 <과거현재 인과경>이나 <불본행집경>같은 경전에는 마하카샤파의 귀의에 대한 것이 적혀 있다. 특히 <불본행집경>에는, 위에서 말한 이야기의 출전인 팔리문 주석부보다도 한층 더 상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중략)
팔리문 <율장 대품>은 부처님의 성도(成道)로부터 시작해서 대체로 지금까지 서술한 순서대로 초기 교단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마하카샤파의 귀의에 대한 기록은 들어 있지 않다.
논자는 교단의 초기 역사를 기록한 <율장 대품>에 그의 귀의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그 귀의에 대한 대목은 대중 앞에 공개할 만한 통상적인 사건의 범위를 벗어나 있어 말하자면 일종의 비의이므로, 일부러 교단사敎團史에 싣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런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후대에 작가가 창작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9)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설립과 화상和尙제도
갠지스 강 지류인 랍티강 유역에는 또 하나의 강대국, 코살라국이 있었다. 그곳 수도인 슈라바스티(Sravasti, 사위성舍衛城)에는 수닷타(Sudatta, 수달다須達多)라는 대부호가 살았다. 아내가 마가다국 출신이라 장사를 겸하여 친척들을 보러 왕사성에 갔다가 붓다를 만나게 된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는 재가신자가 되는데, 붓다에게 사위성에서도 우안거雨安居를 지내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붓다의 허락을 받고 돌아온 수닷타는 붓다 일행이 머물 승원을 만들게 되는데, 그가 만든 승원이 코살라국 제타 숲에 세워진 “기원정사祇園精舍”이다. 붓다는 생전 30여회의 우안거중 19번을 기원정사에서 보내게 되어, 이곳은 붓다의 교화기간 중 가장 오랜 기간 머문 곳이기도 하다. 경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설법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데, 현존하는 경전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설해진 것이다.『금강경金剛經』과『원각경圓覺經』등의 무대도 이곳이다. 이로써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이래 갠지스 강 남쪽에는 죽림정사를, 그리고 서북쪽에는 기원정사를 갖게 되었다.
한편, 수행자의 수가 늘어나고 교단이 커짐에 따라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수행하다 보니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붓다는 제자들이 악행을 할 때마다 그 행위의 금지와 벌칙을 규정하는데, 규칙을 “계戒”라 하고 이 계들을 모아놓은 것을 “율律”이라고 한다.
교단이 확장되고 사람들이 증가함에 따라 ‘계율(戒律, Vinaya)’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계율은 ‘제거除去’, 즉 악행惡行을 제거하는 훈련·규율을 뜻하는데, 이는 나중에 행사나 회의 방법 등의 규정과 함께 성문화되어, 불교 삼장(三藏, Tripiƫaka)의 한 축인 ‘율장律藏’을 구성하게 된다.
또, 제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데도 변화가 생기게 된다. 불교 초기인 녹야원에서처럼 붓다 혼자 모든 제자들을 돌봐주고 지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다른 종교교단에서 행해지고 있던 “화상和尙제도”가 불교 교단에도 도입되게 된다. 화상을 지도자로 한, 오늘날로 하면 일종의 지부조직이 생기게 된 것이다.
교단의 내부에 사제관계를 제도화하기로 했다. 비구는 자기의 화상(和尙)을 선택하여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화상은 범어(梵語) 우파댜야를 한자로 옮긴 것인데, 이 말은 바라문교에서도 종교적인 교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었다. 지나교에서도 같은 말로 “성전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화상이라는 말은 불교만의 독특한 용어가 아니다. 다른 교단에서도 쓰고 있던 것을 불교에서 채용한 것이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204.)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를 ‘아라한’이라 하는데, 이 아라한들이 “화상”의 역할을 맡아 붓다 대신 제자들을 이끌게 된 것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사정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붓다는 불교교단의 창시자로 모든 교단을 통솔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역시 ‘아라한’으로 그의 지부(교단)를 이끄는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원초 교단에 있어서 석존도 또한 ‘아라한’이라 불려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아라한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지도자가 되어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즉, 각자의 아라한의 이름을 붙인 지부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면 마하까시아빠 지부, 그 지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석존 임종의 땅으로 달려가는 마하까시아빠가 5백 명의 수행자를 인솔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때 석존은 아난다 한 사람(혹은 다른 수명의 제자가 있었는지 모르지만)을 데리고 여행하고 있었다. 이 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얼른 생각하면 晩年의 석존은 은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p. 142~143).
이 화상 제도는 붓다 사후 교단 분열의 단초가 되는데, ‘법등명자등명法燈明自燈明,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하여 공식적인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던 붓다가 입멸하자, 비구들은 지도하던 화상을 중심으로 (지부별로) 교단이 재편再編될 수밖에 없었다. 각 지부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고 계율에 대한 견해 차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을 계속하여 부파불교 시대로 나타난다.
10) 붓다의 고향, 카필라바스투
붓다는 남쪽에서는 죽림정사에, 북쪽에서는 (현재 네팔 국경에서 가까운) 기원정사에 주로 머물렀지만, 이외 이 둘 사이에 있었던 카필라파스투(Kapilavastu, 혹은 카필라, 가비라성迦毘羅城)나 지나교의 본거지인 바이샬리Vaisālī 등에도 방문하여 가르침을 폈다. 붓다가 카필라파스투, 즉 고향인 카필라를 찾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두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집을 떠나 6년의 수행 끝에 마침내 성도를 이루고 난 다음 해라는 설과, 성도 후 6년이 지나 기원정사에 머물 때라는 설이다. 붓다가 활동할 시기, 카필라는 강대국인 코살라국의 보호 아래 있어 사위성에 사신을 주재시키고 있었는데, 그런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붓다가 사위성에 머물 때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부처님이 되고 나서 맨 처음으로 카필라를 찾아간 것은 언제였을까.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순서에 따르면, 부처님이 수닷타의 초청을 받아 슈라바스티(사위성)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석가족의 사신(使臣) 우다인의 연락으로 카필라로의 초대가 결정됐다는 것이다. 혹은 일찍부터 친교가 있던 프라세나짓왕이 슛도다나왕에게 알려 이 초대가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다른 경전에 의하면, 카필라의 방문은 슈라바스티로 가기 전이라고 되어 있다. 즉 부처님이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머무르고 있을 때 슛다도나왕은 여러 차례 사자를 부처님께 보내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런데 사자들이 부처님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출가하여 그대로 교단에 머무르게 되었기 때문에 부왕에게 돌아가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슛도다나왕은 신뢰하는 대신의 한 사람인 우다인을 사자로 보내게 되었다. 출가하는 것은 좋으나 반드시 부처님을 모시고 온다는 것을 굳게 약속시킨 다음 보낸 것이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226.)
코살라국 프라세나짓(Prasenajit, 파사닉波斯匿 혹은 파세나디Pasenadi)왕은 석가족 여인과 결혼하여 붓다의 아버지인 슈도다나(Śuddhodāna, 정반왕淨飯王)와도 친교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혼 때문에 아들인 비두다바(Viḍūḍabha, 비유리毘瑠璃)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는 신세가 되었고, 석가족의 카필라는 멸망하게 된다. 왕이 된 비두다바가 어머니 나라인 카필라를 공격하여 석가족(釋迦族, 샤키야Sākya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붓다를 흠모하던 코살라국 파세나디왕은 붓다의 일족인 석가족 여인과 혼인하기를 원했다. 강력한 파워를 가진 파세나디왕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석가족 사람들은 순수한 왕족 혈통의 여성 대신 여종의 딸을 보내게 된다. 붓다의 사촌이기도 한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那摩 또는 마하남摩訶男)가 비천한 신분(바사바Vasava 종족)의 여인과 낳은 딸인 바사바캇티야(우시찰리禹翅刹利)를 대신 시집보내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파세나디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정비로 삼았고 얼마 후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훗날 왕이 된 비두다바다.
그런데 비두다바 태자가 열여섯이 되었을 때 생모 고향이자 외가인 카필라에 갔다가, 자신이 비천한 신분의 하녀下女에게서 태어났다는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어 어머니 혈통을 둘러싼 내막을 알게 된다.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게 된 비두다바는 돌아와 부왕인 파세나디에게 이를 고했고, 파세나디왕은 분노해 즉시 정비와 태자의 지위를 박탈한다. 붓다의 조정으로 다시 복구되었지만 이후 태자는 장성하여 부왕을 쫓아내고 왕권을 탈취하게 되는 빌미가 된다.
왕이 된 비두다바는 원한을 갚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카필라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비두다바왕이 석가족을 모조리 죽이려하자 당시 카필라 왕이었던 마하나마(비두다바왕의 생모인 바사바캇티야의 아버지)가 “내가 저 연못에 들어가 있을 터이니, 그동안만이라도 성문을 열어 도망치는 사람들은 살려 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비두다바가 이를 허락하자, 마하나마는 연못에 들어가 머리카락을 나무뿌리에다 묶고 나오지 않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고 한다.
석가족은 아리아 인종이 아닌 아시아계통으로 오랜 역사와 독자적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 그들이 보인 행동을 보면 다른 종족과의 혼인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 정도로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인종적 자부심은 강했지만 약소국이라는 한계는 넘지 못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비두다바 역시 석가족을 몰살시키고 돌아가다, 큰 강가에서 야영 중, 갑자기 불어난 홍수로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 얼마 못가 코살라국 또한 마가다국에 병합되고 만다. 카필라의 유적을 발굴해보면 화재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석가족 몰살 이야기는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후손들은 지금도 파탄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한다.
11) 아난다의 아라한 되기
카필라 성에 머물 때, 붓다는 자신의 사촌 동생인 아난다阿難陀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아난다는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하나로 다문제일多聞第一로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도 붓다 사후 결집 시에는 경전편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또 붓다를 어릴 적부터 길러준 이모 파자파티 고타미(Prajapati Gotami)의 출가出家를 도우므로 해서, 처음으로 여자를 교단에 받아들인다. 비구니 교단의 시작이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붓다는 결혼을 앞둔 아난다를 출가시켰을 뿐 아니라, 붓다에게 “저에게 물려줄 재산을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그의 아들 라훌라 역시 출가시킨다.
그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라훌라를 부친 곁으로 보내어 재산을 물려 달라고 말하도록 시켰다. 라훌라는 세존을 따라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에게 재산을 물려주세요. 제발 저에게 재산을 물려주세요.”
이 때 부처님이 손가락을 펴시자 라훌라는 부처님의 손가락을 잡고 따라서 걸어갔다. 이렇게 부처님은 라훌라를 데리고 고요한 숲에 이르자 장로 사리불을 불러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라훌라를 출가시켜라.”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제55권 나후라 인연품 상, 한글장 15책 pp. 382~383.
조카인 아난다에 이어 손자까지 출가하는 것을 보고 실의에 빠진 슈도다나왕은 “앞으로는 부모의 허락 없이 미성년자를 출가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게 되고, 붓다는 이를 받아들여 이후 교단의 규칙으로 삼는다. 슈도다나왕은 후계자를 잃고 한때 상심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자기 가문에서 부처가 나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뿐 아니라, 석가족 청년들에게 출가를 권하여 500여명이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들 중 훗날 반역자로 낙인찍힌 아난다의 형 데바닷타도 있었다.
데바닷타는 아난다와 함께 붓다의 비妃 아쇼다라의 동생으로, 불교 성립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아난다는 최후까지 충실한 제자로서 교단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배반하고 독립된 교단을 만들어 나간 반역자로 남는다. 형제인 두 사람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리게 되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들은 출가부터 다른 사람들하고는 달랐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의하면, 그 청년들 가운데서 아난다와 데바닷타 이 두 사람만은 이때 부처님으로부터 출가를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히말라야 기슭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발야슬타승가(跋耶瑟吒僧伽)라는 장로(長老)가 수행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이 사람 밑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수행을 계속한 다음 스승의 양해를 얻어 부처님한테 찾아가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235~236.)
유독 이들 두 사람만 붓다로부터 비구계比丘戒(구족계具足戒)를 받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왜 같이 출가한 모든 청년들은 구족계를 받았는데, 두 사람만 받지 못했을까? 우리가 아는 아난다는 붓다가 입멸할 때까지 20여년을 붓다의 곁을 지키며 섬긴 제자다. 거기다 붓다 사후 ‘경장經藏’을 정리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붓다로부터 구족계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경장을 구술하고 완성하여 ‘다문제일’로 알려져 있는 그가, ‘아라한’이 아니었다는『대지도론大智度論』등 경전들의 기록이다. 결집할 때 모인 500명의 장로들 가운데 유독 아난 혼자만 아라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든 경전을 구술할 정도로 우수한 두뇌와 오랜 시자 생활로 인해 누구보다 붓다와 같은 경지에 올랐을 그가 아라한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지금은 이름도 알 수 없는 500인은 아라한이었고, 그 유명한 아난은 아라한이 아니었다?
아난다는 이만큼 중요한 지위와 소임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이따금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부처님의 주요한 제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아라한(阿羅漢 · 聖者)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는데, 아난다만은 부처님이 입멸할 때까지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며, 다른 제자들은 슬픔을 참고 있는데도 그만은 눈물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집할 때에도 선발된 5백 명의 장로들 가운데서 아라한이 아닌 사람은 오직 아난다 한 사람뿐이었다. 그날 아침에야 깨달음을 얻어 가까스로 결집에 참가할 수가 있었다고 성전에 적혀 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236~237.)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거기다 수상한 것은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아라한이 아니라고 하여 가섭존자에게 쫓겨난다는 대목이다. 왜 가섭이어야 했는가? 그리고 다행이도 아난은 용맹정진 끝에 아라한이 되어 집회에 참가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라한이 되는데 가섭의 도움을 받는다는 구도다. 가섭의 인가를 받게 만드는 구도는 앞서 보았던 가섭의 출가과정과 같이 매우 작위적作爲的이다. 도대체 왜 모두들 받는 구족계를 아난다는 받지 못했고, 또 500명이 모인 대중 속에서 아난다만 유일하게 아라한이 아니라는 설정자체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한 마디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아라한의 지위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붓다가 제자 간 서열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때에 석존은 어떤 정사에 머물러 계시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석존은 기침을 하셨다. 그에 응답하듯 창밖의 한 그루 나무 옆에서 기침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세존이시어, 저입니다. 샤리뿌뜨라(舍利佛)입니다”라는 대답이었다.
샤리뿌뜨라는 창 밖에서 밤을 새웠던 것이다. 왜냐……? 그는 석존에게 대답했다.
그것은 어제 밤 그들이 이 정사에 도착했을 때 제자들이 앞 다투어 정사에 들어와 나중에 늦게 들어온 샤리뿌뜨라의 잠잘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석존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비구들이여, 누가 第一座 · 第一水 · 第一食을 받을 것인가”라고 질문하였다.
제자들은 그것은 끄샤뜨리야(王族)에서 출가한 자이다. 바라문에서 출가한 자이다…… 등등의 대답을 했다.
“그렇지 않다”고 석존은 가르쳤다.
“그것은 장유(長幼)의 순서이다.” 장유의 순 - 이것은 물론 세속의 연령이 아니다. 계를 받고 불교교단의 사람이 된 선후의 순, 즉 법랍이다. 법랍의 순에 의해서 第一座 · 第一水 · 第一食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석존이 제정한 질서이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p. 151~152.)
붓다는 누가 ‘제일좌第一座 · 제일수第一水 · 제일식第一食을 받을 것인가’라고 묻고는 ‘그것은 장유長幼의 순서’라고 말한다.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서열은 오로지 출가 순서에 따른다고 공표公表한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나 깨달은 순서에 대한 내용은 없다. 다시 말해 비구계를 받은 후의 연수年數, 그것만이 붓다가 정한 불교 교단의 유일한 서열인 것이다.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 그것은 제2차적인 것이었다. 결과는 어떻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향한 결의이다. 그것이 석존의 진의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를 차별하는 사고 방법은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그것은 석존 입멸 후 나타난 것이 아닐지……?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152.)
동감이다. 사실 수행을 조금 한 사람이라면 깨달았느니 깨닫지 못했느니 하는 것이 그렇게 무 자르듯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맹정진 했다고 갑자기 아라한이 되었다고……?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붓다가 열반에 들자 마하가섭은 500 명의 수행자를 인솔하고 나타난다. 이 기록으로 보면 결집 때 모인 500인의 장로는 가섭이 이끌던 지부의 수행자였을 것이고, 이들이 결집하였을 때 아난다는 그들의 초청을 받아 경을 구술해 주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최소한 가섭과 같은 스승의 입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가섭 집단으로서는 가섭보다 명성이 높은 아난을 가섭의 제자로 두고 싶었을 것이다. 경을 자유자재로 암송하는 그의 뛰어남과 무엇보다도 붓다를 오래 모신 제자로서의 위상을 가섭아래 배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써 가섭의 지명도를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적통으로써의 그들 교단의 위상 또한 높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인가認可”를 받게 하는 구도였으리라. 지극히 유아적인 발상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까지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다.
부연하자면 아난다가 붓다로부터 구족계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라한이 아니었다는 것은 가섭 집단이 만든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종의 그들만의 아바타Avatar인 것이다. 그 아바타는 선종의 화두에까지 등장하고 있어 아직도 작동중이다. 그래도 시자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아난다는 그가 이끄는 집단이 없었으므로 이 정도에 그친다. 데바닷타는 아난다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문자적 린치를 당한다.
12) 데바닷타는 누구인가
아난다의 형인 데바닷타(Devadatta, 提婆達多)는 붓다의 부인인 아쇼다라의 동생으로 붓다와는 사촌간이다. 데바닷타는 싯다르타의 결혼 시 열렸던 무술대회에서 아쇼다라를 얻기 위한 경쟁에 나선 것으로 되어 있어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왜 그는 반역자가 되었을까? 그에 대한 경전 기록들을 기반으로 한 일반적인 평가는 이렇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며 아난다(阿難陀)와 형제 사이이다. 카필라성에서 태어난 샤카족의 왕족으로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했으며 질투가 대단했으나 재능만은 출중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카필라성에 돌아왔을 때 바드리카, 난다, 아니룻다 등의 왕족들과 함께 출가했다. 어느 날 부처님이 당시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라자가하(王舍城) 에서 빔비사라왕 등 여러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나서서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연로하십니다. 이제는 편히 쉬실 때가 되었습니다. 차후 제가 교단을 통솔하겠습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수행자로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도 있었지만 두 번 세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 부처님은 거절했다. 이에 분개한 그는 빔비사라왕의 아들 아쟈타삿투를 찾아갔다. 왕자는 부왕이 부처님을 믿고 외호하는 것과는 반대로 교단 내에서 유력한 인물로 믿어지는 데바닷타를 주목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왕자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꾀하였다. 이제 당신은 부왕을 죽이고 마가다의 왕이 될 때가 되었습니다. 나도 부처님을 없애고 교단의 주인이 되겠습니다. 권력욕이 무척 강했던 왕자는 그의 말대로 왕위를 찬탈했다. 이때부터 그는 반역을 도모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아쟈타삿투왕을 꾀어서 부처님을 살해하려 했다. 한번은 자객을 보내 부처님이 지나는 길목의 산 위에서 큰 돌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객들이 부처님께 교화되었다. 다음에는 포악한 코끼리를 보내 죽이려 했으나 역시 코끼리도 주인 앞에 선 개처럼 부처님께 순종해 버렸다.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독립 교단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이제 갓 들어온 베살리 출신의 수행자 500여 명을 회유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수행자들을 설득했고 이들 역시 부처님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어 다시 부처님 교단에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그의 반역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그는 아쟈타삿투왕에게도 외면을 당해 어디론지 사라졌다. (문화콘텐츠닷컴 용어사전.)
이외 다른 기록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대개 이렇다. 1) 재능은 뛰어났지만 교만하고 방탕했으며 질투가 심했다. 2) 붓다로부터 불교교단의 통솔권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3) 마가다국 아자타샤트루 태자와 함께 붓다를 죽이려고 하였다. 또, 4) 수행자들을 회유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으며, 5) 끊임없이 분열을 꾀하다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이렇게 그는 극도의 파렴치한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중에서 데바닷타가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 분파하게 된 과정만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데바닷타는 붓다를 찾아가 자신에게 교단을 물려달라고 하다 거절하자 다음 붓다를 죽이려 한다. 그리고 그런 시도들이 실패로 끝나자 붓다를 다시 찾아가 두 번째 제안을 한다.
데바닷타의 두 번째 제안은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는 항상 수행자는 소욕으로 만족하고 조심스럽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하며 신심과 노력이 긴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다음 다섯 가지는 이 취지에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출가 수행자는 한평생 숲 속에서 생활할 것, 사람 사는 마을에서 살게 되면 죄가 된다.
둘째, 걸식 탁발(托鉢)에 의해서만 음식을 먹을 것, 식사의 초대를 받으면 죄가 된다.
셋째, 분소의(분소의糞掃衣 · 누더기)만 입을 것, 재가신자(在家信者)들에게 옷을 받으면 죄가 된다.
넷째, 나무 아래 앉을 것, 지붕 밑에 들어가면 죄가 된다.
다섯째,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말 것, 먹으면 죄가 된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310~311.)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다시 스승을 찾아가 위의 제안을 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지만, 후계자를 자임하고 붓다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한 제안치고는 몹시도 소박하다. 필요하다고 여겼다면 본인이나 본인이 이끄는 집단에서나 행하면 될 그런 사안이다. 일부 경전에는 ‘승가에 좀 더 엄격한 생활 규범을 도입하여 승가를 개혁하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교단을 넘기라는 첫 번째 제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데바닷타의 주장은 허심(虛心)하게 이것만을 읽으면 오히려 고행자적이다. 아마도 그는 고행자의 계열에 속하는 불교자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주류파 - 마하까시야빠를 리더(leader)로 하는 대동단결파 - 의 주장은 어떠한 것일까?《律藏》小品은 앞의 인용에 계속해서 데바닷타에 대한 질책의 말을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석존을 구실삼아(석존의 말을 빌려서) 데바닷타에게 반론을 펴 나간 것이다.
그만 두어라 提婆達多여, 만약 원한다면 항시 숲 속에서 살 것이며, 만약 원한다면 村邑(촌락)에 살지니라. 만약 원한다면 항시 걸식하고 만약 원한다면 請食(초대)를 받을지니라. 만약 糞掃衣(누더기 조각의 옷)을 입을 것이며 만약 원한다면 居士衣 (資産家가 布施한 옷)을 받을지니라…….
나는 이 석존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한다. 석존의 말씀이 옳다 - 하는 것은 이상한 말이나, 그것은 석존 멸후, 주류파가 데바닷타의 주장을 여지없이 깡그리 없애버리려고 창작한 말로 나는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것을 창작이라 해도 과연 이것은 석존이 하실 만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석존이라면 이와 같은 말을 틀림없이 했으리라 생각된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p. 145~146.)
붓다는 매우 유연한 사람으로 그런 것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라는 추론이다. 붓다는 고행을 멈추고 우유죽을 먹었으며 사색을 통하여 연기법을 발견한다. 그런 붓다에게 이런 조항들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체험하였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계율로 정하여 모든 출가 수행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데바닷타가 이상한 것인가……?
그러나 데바닷타의 관한 한 석존도 승인하였을 것이다. 석존의 방법은 ‘응병여약’에 있으므로 데바닷타에게는 데바닷타의 방법이 있다는 것이 석존의 진의인 것이다. 각자는 각기 자신의 道를 行해 가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道를 ‘통일’하고자 했기 때문에 무리한 일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146.)
그러나 제안한 내용들이 불필요하다고 보았더라도 그런 수행을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전통을 깬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마하가섭도 대체로 이와 같은 수행을 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는 명성을 얻지 않았던가? 오히려 이 기록을 뒤집어 보면 데바닷타가 가섭에 뒤지지 않는 철저한 두타수행자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데바닷타에 대한 현장玄裝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진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선 현장(玄裝)의《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보면 슈라바스티의 기원정사 가까이에,
‘데바닷타가 독약을 가지고 부처님을 해치려다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고 하는 깊은 구렁이 있고 그 부근에는 데바닷타의 제자로,
‘코칼리카(瞿伽梨)가 여래를 비방하여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깊은 구렁과,
‘친차(戰遮)라는 바라문 여인이 여래를 비방하다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라고 하는 깊은 구렁이 있는데, 이 세 구렁이 모두 깊이를 알 수 없고,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물이 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장은, 또 마가다의 옛 서울인 라자그리하(王舍城) 부근의 비푸라산(山) 북문의 왼쪽 벼랑 뒤로 해서 동으로 2, 3십 리쯤 가면 거기 데바닷타가 옛날 선정(禪定)에 든 석실(石室)이 있다고 적어놓았다. 이 기록을 보면 데바닷타는 평온한 최후를 마친 것 같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304~305.)
현장은 데바닷타와 그의 제자들이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구렁들과 함께, 데바닷타가 선정에 들었고 평온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석실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지옥으로 떨어지게 했다는 전설의 구렁은 그냥 전설처럼 들리고, 데바닷타가 선정에 들고 평온한 최후를 마친 석실은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둘을 놓고 옥석을 가리자면 석실 쪽이 보다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구렁에 대한 이야기는 허위로 꾸며낼 수 있지만, 석실은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법현法顯과 현장의 여행기에는 데바닷타를 따르던 교단에 대한 기록들도 발견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갠지스강이 델타를 이루고 있는 바로 그 근처에 카루나수바르나의 서울이 있는데 여기서 현장이,
‘가람(伽藍)은 10여 개소, 승도(僧徒)는 2천여 명, 소승 정량부(小乘正量部)의 법을 학습...’ 이라고 적은 다음,
‘따로 세 개의 가람이 있는데, 유락(乳酪)을 먹지 않고 데바닷타의 유훈을 받들고 있다’
라고 기록한 점이다. 이 지방은 지금 벵골주에 속하고 있으며, 인도 본토 중에서는 최후까지 불교가 번창한 고장이다.
현장보다 앞서 불적(佛蹟)을 답사한 법현(法顯)은 그 여행기에서 기원정사에 대해,
‘조달(調達·데바닷타)이 독 묻은 손톱으로 부처님을 해치려다가 산채로 지옥에 떨어진 곳’
이라고 설명한 다음 계속해서,
‘조달에게도 따르는 무리가 있어 항상 과거 삼불(三佛)을 공양하면서도 다만 석가모니불만은 공양하지 않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305.)
이를 보면 법현이나 현장이 인도에 갔을 때만 해도, 유제품을 먹지 않고 데바닷타의 유훈을 받드는 집단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데바닷타가 실재로 경전에서 말하듯 흉악한 사람이고 또 지옥에 떨어져 죽었다면, 그렇게 오래도록 데바닷타를 따르는 교단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데바닷타가 경전에 나오는 파렴치한이 아니고 붓다에 버금가는 훌륭한 지도자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종합해 보면 경쟁상대에 있었던 가섭 집단이 데바닷타를 흉악한 인물로 꾸몄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아마도 가섭이 이끌었던 집단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던 그들에 대한 후대의 각색으로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가 아난다와는 다르게 강력한 집단을 이끌었고, 그런 그의 교단이 오랫동안 존속하였기에 가섭을 따르는 집단과는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데바닷타에 대한 진면목은『법화경法華經』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법화경 제파달다품(法華經 堤婆達多品)》에는 과거세(過去世)에서 데바닷타는《법화경》을 수지(受持)하던 선인(仙人)이었고, 석가모니의 전신인 그 당시의 국왕은 그 제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게 된 것도 오로지 데바닷타가 지도한 덕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308~309.)
그대로 읽으면 붓다가 데바닷타를 전생의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법화경法華經』어디에도 데바닷타가 악인이라고 쓰여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로 보인다.
정리하면 이렇다. 석가족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부처님을 받드는 종교가 있었고, 신자들은 과거불을 받들면서 유제품을 먹지 않았다. 붓다의 새로운 불교운동과는 별도로 계속 전통을 고수하며 수행한 종교 집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데바닷타는 붓다의 제자가 되고 나서도 앞서 거론한 제안, 즉 ‘오사五事’를 준수하며 엄격하게 수행한 사람이었고, 그와 같이 계속 전통을 고수하며 수행한 종교 집단이 천년 넘게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였던가? 후기에 올수록 경전들은 데바닷타를 극악한 사람으로 묘사하기 시작하였고, 온갖 누명을 덧붙여 각색하면서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역사의 평가와는 다른 그들만의 기록인 것이다.
불교 교단 안에서 데바닷타의 일파가 특수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은 최근 국내외 학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결국, 승원(僧院)에서 생활하고 일반 시민들과 어느 정도까지 접촉을 가지면서 출가 수행한다는 불교 교단의 주류파(主流派)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속세와 절연하여 산과 숲에서 살면서 엄격한 고행주의를 지켜나가려는 반주류파(反主流派)가 데바닷타에 의해 대표되는 은둔주의파로 된 셈이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311~312.)
붓다를 따르던 주류파 집단의 입장에서 보면 “데바닷타와 그의 추종자들”이 분파주의자일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데바닷타 같은 보수적인 사람들 편에서 보면 붓다가 오래도록 내려온 수행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분파한 집단이 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데바닷타가 분파해 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싯다르타가 전통 수행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수행집단을 만들어 분파해 나간 것이다.
경전에는 붓다가 고행을 멈추고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은 것을 유독 강조하고 있는데, 유제품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하는 사소한 차이가 당시에는 이들과 구별되는 넘을 수 없는 커다란 간극間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행을 멈추고 우유죽을 먹은 행동은 고행을 중시한 보수적인 집단에서 보면 이단으로 보였을 것이고, 이런 붓다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보고 다섯 비구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고 하면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법현의 여행기에 있듯 그런 이유로 전통을 따르던 무리들은 과거의 삼불을 공양하면서도 석가모니 붓다를 공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제품이나 소금,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는 계율은 데바닷타의 발명품이 아닌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예수를 기다리던 구세주(메시아)로 믿은 제자나 신자들은 이른바 기독교를 이루어놓았지만, 유태인의 대부분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진정한 메시아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유대교를 그대로 지켜나갔다.
만약 이것이 데바닷타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면 다음과 같이 추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석가족을 포함해서 히말라야의 남쪽에 살던 민족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부처님을 받드는 종교의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과거에 이미 몇 사람의 부처님이 출현했다고 믿고 장래에도 부처님이 도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 수행하여 자기가 그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확신, 선교를 개시하여 널리 제자와 신자를 모았었다.
그러나 같은 석가족 중에는 과거불(過去佛)의 신앙을 지키면서 유제품(乳製品) 같은 것을 먹지 않는다는 낡은 형식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데바닷타였던 것이다.
이상은 현재의 내 추리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에 가까운 의견을 발표한 외국의 학자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렇다고 단정하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런 가능성은 상당히 짙다고 생각된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306.)
싯다르타의 전생담이나 경전 등을 보면, 이전에도 이른바 과거불에 대한 신앙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붓다 입멸 후 2백년 경에 즉위한 아소카왕도 과거불을 예배하고 있어, 과거불에 대한 신앙은 불교와 함께 계속 있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과거불 가운데서 어떤 이는 역사상 실제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싯다르타 태자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민족 종교를 보편적 종교로까지 발전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수행할 땅을 남쪽에서 찾아, 그 당시 많은 종교의 집결지이던 마가다에 가서 성도를 하였다. 그리고 예전부터 온갖 종교의 성지로 알려진 바라나시에서 제일성을 올렸던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왜 남쪽으로 내려갔던가. 이것에 대한 해답도 물론 추측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지만, 첫째로는 무엇보다 근친적인 갠지스강 북쪽에서 수행자의 양상을 견학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사사했다고 한 아라다 카라마는 그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비아리아계다. 둘째로는 아리아계 종교의 중심지인 마가다에 들어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라는 스승에게 배운다. 이 사람은 그 이름으로 미루어 분명히 아리아계다.
이리하여 6년 동안 수행한 결과 본래 입장을 최고로 발휘한 부처로서 최고의 자각에 이르렀다. 따라서 석가모니가 주창한 불교가 민족 종교의 입장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종교로 승화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315.)
이런 바탕위에 성립된 불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어 드디어는 국경을 넘어 아시아의 대종교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13) 유마거사의 도시 바이샬리
바이샬리라고 하면 얼른 생각나는 것이『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維摩居士, 비말라끼르띠Vimalakirti)다. 그는 사회인이면서도 사리불과 같은 붓다의 제자들을 쩔쩔매게 만든 통쾌한 인물로 그려진다. 실재 이 사람은 재가신자로서 가정과 직업이 있는 비非아리아 계통의 리차비(Licchavi)족 출신의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샬리를 건설한 리차비족은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기풍을 가지고 있었고,『유마경』은 이와 같은 자유스러운 토양 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장의 여행기에는 유마거사가 거주했다고 하는 집이 바이샬리의 망고 밭에서 동북쪽으로 3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며, ‘불이법문不二法門’으로 유명한 방도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維摩居士)는 속가의 사람이며 ‘거리의 도인’ ‘거리의 철인(哲人)’이라 불리었고, 재산가였으며, 정치 법률에도 정통하였고, 모든 이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처신을 잘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어느 틈엔가 바른 길로 인도했고, 어디에 있던지 더러움에 물드는 법이 없었고 악에 동화되는 법이 없었다. 이처럼 훌륭한 유마거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보시하여 선근(善根)을 심고, 신통력을 얻어 뛰어난 기억력을 가졌고,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는 자신을 가졌으며,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는 방편력(方便力)을 가진 인물이다. (승오스님,『유마경』.)
바이샬리는 또 지나(자이나Jainism, ─敎)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 종교는 바라문교와는 달리 제사보다 개인의 수행을 중히 여긴 점으로도 불교와 흡사했다. 불교와 지나교 모두 다 갠지스 강 북쪽 기슭에서 히말라야 산맥에 걸친 지방의 출신자에 의해 세워졌다. 그 때문에 신자 층도 공통되어 있었는데, 불교 신자와의 사이에 더러는 마찰도 있었고, 부처님에 대한 모함까지 생겨나기도 했으나 불교는 점차 세력을 펼쳐갔다.
남쪽의 마가다나 북쪽의 코살라는 왕국이고 아리아 인종의 나라라는 점에서도 비슷했지만 바이샬리는 공화제(共和制)의 도시국가고서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런데다 인종은 아리아계가 아니고 황색인종으로, 티베트나 히말라야 산지(山地)의 민족과 같은 계통에 속해 있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점으로 보아 부처님 출신지의 석가족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부처님이 바이샬리의 거리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화가 몇 가지 전해온다. 특히 부처님이 그의 마지막 편력의 길에 이 거리를 떠나면서,
“이것이 바이샬리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서도 그러한 친근감을 엿볼 수 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239~240.)
붓다가 입멸하고 100년이 지나면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갈라지는데, 그 분열의 한 가운데에 바로 바이샬리 리차비 종족 출신의 승려들과 재가불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이 운동은 뒤에 대승불교로 발전한다.
14) 이심전심의 후계자, 그는 누구인가
붓다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중 수행과 지혜가 특출한 제자 10인을 “십대제자十大弟子”라고 부른다. 지혜제일智慧第一 사리불(舍利佛, Sariputta), 신통제일神通第一 목건련(目健連, Moggallana),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 천안제일天眼第一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다(阿難陀, Ananda),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優婆離, Upali), 설법제일說法第一 부루나(富樓那, Purana),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須菩提, Subhuti),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迦旃延, Katyayana), 밀행제일密行第一 라후라(羅喉羅, Rahula) 등이 그들이다.
그중 가장 뛰어난 제자는 사리불과 목건련이었다. 사리불은 붓다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여겨졌던 인물로, 자이나교의 성전인『성선聖仙의 말씀』에는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고 사리불의 가르침이라고 되어 있을 정도다. 그는 아슈바짓(阿濕波誓)이라는 붓다의 제자를 통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는 친구인 목건련과 함께 붓다에게 귀의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붓다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붓다에게 귀의하는 자가 늘어났다고 한다. 당시 그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목건련은 신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붓다의 법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신통력으로 물리쳤다고 한다. 무거운 업장으로 인해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는 내용의『목련경目連經』으로 유명하다. 지옥순례기인『목련경』은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를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가르치고 있다. 이는 우란분盂蘭盆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원래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유명한 사상가 산자야Sanjaya의 제자였다. 산자야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회의론懷疑論을 주장하였는데, 그는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인도의 대표적 사상가이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붓다가 왕사성에 등장하자 동문 250인을 이끌고 그를 떠나 붓다의 제자가 된다. 이 사건은 당시 새롭게 등장한 불교가 산자야의 회의론을 뛰어 넘는 혁명적이고 매력적인 사상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마하가섭은 붓다의 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엄격하게 수행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두타頭陀’란 두다杜多, 두수抖擻라고도 하는데, 찢어진 옷과 망가진 삿갓, 또는 ‘먼지를 털어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가섭은 검소하고 간소한 생활을 했으며, 철저하고 엄격한 금욕생활로 의식주 어느 것에도 집착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그리 뛰어난 제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그의 수행 정신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가섭은 붓다 사후 제각각이던 붓다의 가르침을 통일하는 등 불교 교단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를 따르는 설일체유부는 불교의 교敎를 확립하는 주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불교 교단의 주류로서 활약하게 된다. 그 결과 가섭은 교단의 후계자로 받아들여지고는 있지만, 그가 후계자로 부각되게 된 데에는 붓다보다 연장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붓다보다 먼저 입멸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시불교 시대 붓다는 본인을 교단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단의 후계자를 지목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말해주는 일화가 전하는데, 어느 때 아난다가 붓다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는 황망히 달려간다. 붓다가 무사한 것을 보고 마음이 놓인 아난다는 ‘교단에 아무 말씀도 없이 입멸하실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넋두리를 한다. 그런데 평범하게 들리는 이 말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吐露 한다.
“아난다야, 교단이 내게 아직도 무엇을 더 기대한단 말이냐. 나는 지금까지 안팎을 가리지 않고 많은 법을 설해 왔다. 만약 내가 교단을 통솔한다거나 교단이 내게 매여 있다고 생각했다면, 교단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아난다야, 나는 이제 노쇠해졌다. 어느새 여든 살이 되었구나. 비유를 들자면, 낡은 수레가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내 몸도 겨우겨우 움직이고 있다. 내가 모든 형체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정신 통일의 명상에 들어갈 때 내 몸은 비로소 평안해질 것이다. 아난다야,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할 곳으로 삼아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법(진리)을 등불 삼고, 법을 의지할 곳으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336~337.)
그리고는 또 “아난다야, 현재에도, 내가 입멸한 후에도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의지처로 하여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라. 법을 등불 삼고 의지처로 하여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만이 수행에 열성이 있는 수행승으로서 가장 내 뜻에 맞는 사람이다.”라고 재차 강조한다. 요컨대 자기 자신을 등불삼고 의지처로 삼을 것이지 자신[붓다]에게 의지하려 하지 말라는 다짐의 말이다. 다른 경전에는 보다 더 격렬한 어조語調로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난다여, 너는 나를 믿지 말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나의 말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형상(形相)을 보지 말라. 사문(沙門)이 소유한 견해를 따르지도 말며, 사문에게 공경심을 내지도 말라. ‘사문 고타마가 나의 위대하신 스승이다’라고 말하지도 말라. 그러나 다만 내가 스스로 증득(證得)한 법에 대하여 홀로 조용한 곳에서 사량(思量)․관조(觀照)․성찰(省察)하고, 항상 많이 수습(修習)하여 용심(用心)의 관찰한바 법을 따라 바로 법의 관상(觀想)에서 정념(正念)을 성취해 머물러 있음이 옳은 일이다. (이 수창(摩聖, 팔리문헌연구소 소장,「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에 대한 고찰」).
이 경전에는 자신을 믿고 따르지 말라고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을 스승이라고 칭하지도 말라고 역설力說하고 있다. 더군다나 견해도 따르지 말고 공경심도 내지 말라고 하면서 각자 자신에게만 의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자신 외에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라!” “홀로 조용한 곳에 앉자 스스로 증득證得한 법을 관조하고 성찰하라!”
과연 붓다가 이런 말을 하였을까? 과장된 듯 보이기는 하지만 붓다는 왜 스승으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까? 이 의문은 수행승의 구도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히말라야의 성자들』에서 그 단초端初를 찾을 수 있다.
책의 저자 스와미 라마는 수행초기 (보통의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스승의 넘치는 자비를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 ‘스승은, 마음이 준비되고 진리를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단다.’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래도 스와미 라마는 여전히 ‘왜 스승께서는 이토록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시는 걸까? 스승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이런 의문은 스승이 되어 보지 않고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위치에 서 보지 않고는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체험, 혹은 경험에 비추어 판단할 수밖에 없다. 성장한 후 그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한다.
스승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스승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은 호의에 넘치는 의무이며, 그것 자체가 그의 삶의 목적일 뿐이다. 스승이 우리를 이끌어 줄 때 절대 강요하는 법이 없다. 스승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승의 삶에서 느끼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켜 구루라고 하는 것이다.
(중략)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이기심이 뒤섞여 있다. 사람들은 뭔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흔히 세상에서는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 없이 자발적으로 행동할 때 그것은 참 사랑이 된다. 참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다. (스와미 라마 지음/박광수·박재원 옮김,『히말라야의 성자들 下』 pp. 175~176.)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하면 사랑을 하고 또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대가를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루guru’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한다. 구루는 무아無我로 살기 때문이다. (구루란 보통 힌두교에서 영적 혜안慧眼을 얻은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를 말하는데, ‘구gu’는 어둠을 ‘루ru’는 빛을 뜻하여 미망의 어둠을 쫓아버린다는 의미라고 한다.)
참된 구루는 무아로 산다. 그들의 깨달음의 토대가 무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구루는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방사한다. 세상은 그들을 알지 못하고, 그들도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당신 앞에 와서 ‘나를 숭배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믿지 말라. 예수나 붓다조차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구루가 목적지가 아님을 결코 잊지 말라. 구루는 강을 건네주는 배와 같다. 좋은 배를 갖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물이 새는 배는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나 일단 강을 건너고 난 뒤에는 배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 배를 숭배하지 않을 것이다. (스와미 라마 지음/박광수·박재원 옮김,『히말라야의 성자들 下』 p. 176.)
구루는 무아로 살기 때문에 그의 사랑도 참된 무아에서 나온다. ‘그들은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으며 숭배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마음이 준비되고 진리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뿐’이다. 구루는 강을 건네주는 배와 같다. 그리고 배는 강을 건너면 버려지는 숙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그 배를 숭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스승의 운명인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그는 진정한 무아로 살았기 때문이다.
한 선승이 조주에게 말한다. “오래 전부터 조주 땅에 돌다리가 유명하다기에 와 보니 그저 외나무다리가 아닙니까[久響趙州石橋 到來只見略]?” 조주는 “그대는 외나무다리만 보고, 돌다리는 보지 못하는가[汝只見略 且不見石橋]?” 그럼 “어떤 것이 그 돌다리입니까[如何是石橋]?” 이에 조주는 말한다.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渡驢渡馬].”
천하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조주대화상은 매일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면 일체중생의 밑받침이 되어 매일 모두가 밟고 지나가는 다리 구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우주를 자기의 마음 가운데 포용하는 선(禪)의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겸허하게 모든 사람의 밑받침이 되어 그들을 다 건너가게 해주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조주의 심경이었습니다. (山田無文 老死, 한재훈 옮김,『부처님의 자비로운 목소리』 p. 25.)
이제 왜 붓다가 자신을 스승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였는지 실마리가 풀린다. 나를 따르지 말고 너 자신을 따라라. 나는 다만 진리를 보여줄 뿐이다. 수행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의 ‘마음’이고 진정한 스승의 모습인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2,500년을 지나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정신은 시공을 넘어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빛을 발견하여 깨닫고 마침내 무아anatta(無我)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스와미 라마 지음/박광수·박재원 옮김,『히말라야의 성자들 下』 p. 78.)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이(程頤, 1033~1107)는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강漢江을 건너다 폭풍을 만나 강 한복판에서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이때 배안의 사람들은 모두 아우성을 치는데도 정이는 홀로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배가 무사히 언덕에 닿자 한 노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정이는 마음에 성실함[誠]과 경건함[敬]을 보존할 뿐이라고 대답한다. 노인은 이에 대해 “성실과 경건함을 보존하는 것은 정말로 좋지만 무심無心만은 못하다.”라고 말한다.(구스모토 마사쓰구 지음, 김병화 · 이혜경 옮김,『송명유학사상사』 p. 186.) 이 무심이 바로 무아일 것이다.
15) 사람을 따르지 마라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跋迦梨」경에는 붓다가 라자그리하(Rajagriha, 王舍城) 교외 죽림정사에 머물 때, 병석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박카리[跋迦梨]라는 장로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때, 한 비구가 어느 옹기장이 집에서 앓고 있었다.「박카리」라는 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그의 병은 매우 중해서, 도저히 회유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간호해 주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나는 이제 죽어야 할 몸이다. 만일, 붓다를 다시 한 번 뵈옵고 인사드릴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 그러나, 이 몸을 가지고는 정사까지 갈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벨바나에 가서, 여기까지 행차해 주실 수는 없겠느냐고 붓다께 여쭈어 주었으면 고맙겠다.」
이 말을 전해들은 붓다는, 기꺼이 옹기장이네 집을 찾아갔다. 박카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들었다.
「박카리야, 고요히 누워 있어라. 일어날 필요는 없다.」
붓다는 굳이 그를 눕게 하고, 그 머리맡에 앉았다. 박카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붓다여, 저는 가망이 없나이다. 병이 악화되기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이오니, 얼굴을 우러러 뵈오면서, 붓다의 발에 정례(頂禮; 이마를 땅에 대는 경례. 최대의 존경의 표시.)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때, 붓다는 힘을 주어 이렇게 말씀했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그만두라, 박카리야. 이 썩을 몸을 보아서 무엇하겠다는 것이냐. 박카리야, 법(진리)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리라.」(增谷文雄 著/李元燮 譯,『阿含經 이야기』 pp. 82~84.)
붓다는 자기에게 예배하겠다는 박카리 장로의 청을 듣고, 나한테 예배하지 말고 법을 보라고 말한다. 즉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오직 법(진리)에 의지하라고 말한 것이다. 썩어 없어질 ‘이 더러운 나의 신체를 보아서 무엇 하겠느냐.’ 법을 보려하고 법을 구하라. 왜냐하면 ‘法을 보는 자는 나를 보는 자이며, 나를 보는 자는 法을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법에 의지하지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붓다의 유훈과도 일치한다.
원시 교단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못가라나가 “부처님은 입멸 전에 누구(특정한 사람)를 멸후에 있어서의 의거할 곳, 즉 교단의 우두머리(上首)로서 정하지 않았는가?” 하고 질문한데 대해서, 석존의 시자였던 아난다는 “세존께서 ‘이 사람이야 말로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의거할 곳이 되리라’고 추천한 수행승이 한 사람도 없으니 너희들이 오늘날 귀이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거할 곳이 없는데 모두가 협력할 수 있는 원인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아난다는 “우리가 의거 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거 할 곳이 있습니다. 즉 ‘법을 의거할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즉 특정한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교도는 석존의 입멸에 의하여 의거할 곳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법’이야말로 우리들의 의거 할 곳이라는 것이다. “법에 의하라. 사람에 의하지 말라”는 뜻으로 귀착한다. (中村元 著 楊貞奎 譯,『佛敎의 本質』 pp. 66~67.)
아난다는 의거依據할 곳을 묻는 못가라나[목건련]에게 의거할 곳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라고 말한다. 붓다는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지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사람에게 의거하는 것을 혐오하기까지 하였다. 이는『잡아함경』「837. 과환경過患經」에 ‘만일 사람을 믿으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긴다는 붓다의 설법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붓다는 사람을 의지 할 경우 생기는 폐해를 조목조목 소박하게 나열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을 믿으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길 것이니, 저 사람이 혹 계(戒)를 범하고 율(律)을 어겼을 때에는 대중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공경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존경하는데, 대중 스님들은 그를 버리고 천대한다. 그러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塔寺]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첫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다음에는 사람을 공경하고 믿을 때 공경을 받는 사람이 계를 범하거나 율을 어겨서 대중 스님들이 그를 칭찬하지 않으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지금 대중 스님들은 칭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에 들어가겠는가?’
(중략)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두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또 만일 저 사람이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다른 지방을 유행하게 되면, 그를 공경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공경하는 사람이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인간 세상을 유행하고 있으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에 들어가겠는가?’
(중략)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세 번째 허물이니라.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그는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갔으니, 나는 이제 그 절에 들어갈 수 없다.’
(중략)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네 번째 허물이라고 하느니라.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나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목숨을 마쳤으니, 이제 무슨 인연으로 그 절에 들어가겠는가?’
(중략)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다섯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그런 까닭에 비구들아, 마땅히 ‘부처님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과, 법과 승가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성취하고 거룩한 계를 성취하리라’고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김월운 저,『잡아함경雜阿含經』제30권「837. 과환경過患經」, 동국역경원.)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법[法]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人]에 의지하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기나니, 1) 자신이 의지하던 사람이 계율을 어겨서 대중들에게 버림을 받으면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고, 2) 자신이 의지하던 사람이 계율을 어겨서 대중들에게 칭찬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고, 3) 자신이 의지하던 사람이 다른 지방을 유행하게 되면 도량을 찾지 않게 된다는 것이고, 4) 자신이 따르던 사람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고, 5) 자기가 따르던 사람이 목숨을 마치면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도량을 찾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며, 그렇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고, 그러므로 해서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길게 서술되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는 가아(假我, 가짜 나)와 진아(眞我, 참나)에 대한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依法不依人]’는 가르침은 후에 더욱 확장되어 깨달음을 위한 네 가지 의지처, “사의四依(법法, 의義, 지智, 의경義經)”로 정리된다.
첫째,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 법(진리)에 의지하되,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둘째, 의의불의어依義不依語, 뜻에 의지하지,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말라.
셋째, 의지불의식依智不依識, 지혜를 의지하지,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말라.
넷째, 의료의경불의불료의경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바른 뜻의 경전에 의지할 것이며, 바르지 못한 경전에 의지하지 말라.
사람이 아니라 법에 의지하라는 말은 후대에 이르면 진아(眞我, 참나)와 가아(假我, 가짜나)의 문제로 발전한다. 가아, 즉 사람에 의거하지 말고, 진아, 즉 법에 의거하라는 말인 동시에 가짜 나를 따르지 말고(사람) 참나를 따르라는(법) 말과 같다고 하겠다. 사의四依는 ‘참나 찾기’라고 할 수 있다.
부연하자면 붓다 재세 시에는 교단도 명확하게 형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단의 우두머리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물론 후계자를 정하는 일도 없었다. 원시 불교에서는 교단의 우두머리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고, 대를 이어가는 현상 또한 없었던 것이다. 다만 덕이 높은 수행승에 대해서는 존자尊者라고 부르고, 교단의 연장자를 장로 또는 장로니長老尼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는 불교 뿐 아니라 자이나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남방에는 아직도 이런 전통이 남아있다.
일찍이 고타마 붓다의 시대에도 제자들과 그와는 떨어져서 따로 생활하고 행동했었는데, 저 광대한 지역에서 스승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란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의 사후에는 전 교단을 지배 통솔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했고, 그가 설파한 가르침과 계율이 의지처가 되고 길잡이가 된 것 같다. 최고 권위를 가진 전 교단의 통솔자가 차례로 대를 이어가는 현상은 인도 불교에서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中村元 著 楊貞奎 譯,『佛敎의 本質』 p. 166.)
앞장에서 이미 논의하였지만 많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화상제도가 도입되었고, 붓다의 열반 뒤에는 화상을 중심으로 승려들이 모여 각각의 교단을 형성하였다. 통합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분파의 길을 걷게 되었고 부파불교시대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후 불교는 크게 장로들의 교리인 테라바다(Theravada, 장로파, 대승에서는 소승이라고 칭하는)와 공식적인 불교 철학인 마하야나(Mahayana, 대승불교)로 갈라졌다. 오늘날 대승불교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 남아 있고 인도에서는 사라진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붓다는 교단 형성에 주력하기 보다는 당시 수행풍토를 개선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종래『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은 자기의 장자長子 혹은 신뢰할 수 있는 제자에게만 전해졌다. 우파니샤드란 ‘비설秘說’, ‘가까이 앉는다.’는 뜻으로 사제 간에 은밀히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보편성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가였던 붓다는 이런 폐해를 알고 신분에 관계없이 어떠한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폈다. 불교의 교리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전수되거나 선택된 사람에게만 비밀히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진리는 공개된 것이었다.
그 ‘법’은 뭔가 특수하거나 기이한 실천의 수행이 아니었다. ‘여래가 가르치고 보인 법과 율律은 공명하게 빛을 발하며, 비밀로 덮이는 일이 없다.’ 그것은 ‘일륜日輪’, ‘월륜月輪’과 같이 명명백백明明白白한 것이다. ‘여래의 법에는 스승의 주먹이 없다.’ 즉 스승으로서의 인격 완성자가 뭔가의 가르침을 주먹 속에 감추고 숨겨두는 일이 없는 것이다. 고타마는 진리인 법Dharma을 깨치고 그것을 단지 사람들을 위하여 드러내 보이는데 지나지 않는다. (中村元 著 楊貞奎 譯,『佛敎의 本質』 p. 65.)
16) 붓다의 죽음과 마지막 설법
붓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사라나무 숲에 누워있을 때, 곁에 있던 아난다가 장례에 대해 묻는다. 이 물음에 붓다는 너희들 출가 수행승은 장례 같은 일에는 상관하지 말라고 말하는데,『大般涅槃經』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래의 사리(=遺骨)을 어떻게 처리하오리까?”
“아난다여, 너희들은 여래의 사리공양을 위해 근심하지 말지라. 아난아, 너희들은 오로지 최고선으로 노력하여라. 최선을 다하여 수행하라 최고선에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근면 성실하게 살아가라. 아난아, 여래에게 신심을 가진 刹帝利(=ksatriya, 武士族)의 학자와 바라문의 학자와 거사(=대자산가)의 학자가 있어서 그들이 여래의 사리공양을 할 것이니라.”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129.)
붓다는 일관되게 법에 의지하여 정진하기만을 바랐다. ‘너희들은 진리를 위해 게으름이 없이 정진하여야 한다. 아난다여, 여래의 장례에 대해서는 독실한 재가신자들이 치러줄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는 미련이 남아 장례절차에 대해서 이것저것 자세히 묻는데,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다음과 같이 한탄의 말을 내뱉는다.
“세존이시여, 이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장에서 입적하지 마시고 찬파, 라자그라하, 슈라바스티, 사케타, 카우샴비, 바라나시와 같은 큰 도시도 있으니 그런 곳에 가셔서 입적하시기 바랍니다. 훌륭한 신자들이 많이 있으므로 여래의 장례도 제대로 치러 줄 것입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354.)
붓다를 잘 모시고 싶어 하는 아난다의 마음이 절절이 묻어나는, 눈물겨운 호소의 변辯이다. 이 말을 듣고 붓다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현재는 보잘것없지만 쿠시나가라야말로 이상적인 군주이자 전륜성왕이었던 대선견왕大善見王이 묻힌 땅이라고 아난다를 위로한다.
경전은 옛날 이곳은 쿠사바티라고 하던 큰 도시가 있던 곳이요, 왕성王城이 있던 곳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붓다가 입적하는 장소에 연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붓다는 다만 아난다를 쿠시나가라 시내로 보내어, 거기 있는 말라족 사람들에게 오늘 밤중에 자신이 입적한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한다. 모처럼 가까이 있으면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중에 서운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렵 쿠시나가라에 있던 수바드라(Subhadra, 須跋陀羅)라는 늙은 수행자도, 붓다가 입적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붓다가 죽기 전에 평소 품고 있던 의문만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붓다에게 달려가는데, 그때 그의 나이 이미 120세였다고 한다. 붓다의 처소에 이르러 그가 아난다에게 붓다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자, 아난다는 이미 말라족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마친 붓다가 힘들 것이라고 하여 정중히 거절한다.
간절하였던 수바드라는 아난다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거듭 거듭 조르는데, 붓다는 둘이 실랑이하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말라. 수바드라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그는 내 말을 들으면 곧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하며 입실을 허락한다. 이에 아난다는 수바드라를 붓다에게 데리고 가는데, 수바드라는 붓다에게 이렇게 묻는다.
“고타마여, 세상에는 이름 있는 종교가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다들 자신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정말로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아니면 모두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까요? 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일까요?”
“수바드라여, 그런 문제는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오. 그것보다도 당신에게 법을 말하겠소. 그러니 주의해서 잘 들으시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356.)
그때나 지금이나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관심이 크다. 수바드라도 마찬가지여서 ‘종교가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스스로 말하는 데, 그것을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 물음은, 1)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2) 깨달은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라는 두 가지 의문을 내포하고 있다. 수행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으로 120세가 된 노 수행자는 그것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간절한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무엇이 법(진리)인가를 말하겠다고 나선다. 그리고는 붓다의 마지막 설법이 이어진다.
“수바드라여, 만일 어떤 종교에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聖道)이 없다면 거기에는 사문(沙門)도 있을 수 없소. 둘째 사문, 셋째 사문, 넷째 사문도 있을 수 없소.
이 불교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있고 사문도 있으므로 둘째 사문, 셋째 사문, 넷째 사문이 있소. 다른 데서는 사문이라 해도 공허하지만, 여기에 있는 비구들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한 이 세상에 아라한은 끊이지 않을 것이요.”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356.)
임종이 가까워서인지 아주 짧게 초전법륜에서 했던 팔성도八聖道(팔정도)를 말한 다음 네 종류의 사문에 대해서 설하고 있다. 사성제 가운데 도제에 해당되는 팔정도는 다른 종교에는 없고 불교에만 있다고 강조하면서(팔정도를 강조하기 위한 포석이겠지만 실제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을 지는 의문이다.), 팔정도를 닦는 사문들의 경지를 단계별로 차례차례 열거하고 있다. 팔정도는 익숙한데, 첫째에서 넷째까지의 사문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에서 넷째까지의 사문이라 함은 수행의 단계를 나타내며 첫째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에 이른다. 둘째는 생사를 한 번 더 되풀이한 다음 깨닫는다. 셋째는 이 세상에서 죽은 뒤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는다. 넷째는 이 세상에서 이미 아라한이 된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p. 356~357.)
즉, 첫째 사문은 아라한이 되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문이고, 둘째는 이 생에는 이루지 못하더라도 다음 생에 깨닫고 아라한이 되는 사문이고, 셋째는 죽은 뒤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깨달음에 이르러 아라한이 되는 사문이고, 넷째는 이 생에서 바로 아라한이 되는 사문이라는 설명이다.
붓다는 수바드라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팔정도 수행과 수행의 결과 얻어지는 성과를 네 가지 사문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는 깨달음에 대해 논하기 보다는 진리가 바로 팔정도임을 밝히고,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에 집착할 일이 아니라 팔정도 수행에 전념하다보면 끝내 아라한이 된다는 설법이다. 다시 말해 “팔정도를 수행하는 사문이 바로 아라한!”이라는 말이다. 붓다의 이 마지막 설법을 듣고 수바드라는 그 자리에서 출가하여 붓다의 마지막 제자가 된다.
수행자라면 깨달음에 대해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또 잘 알려진 스님이나 유명한 종교가들이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깨달음에 대한 몇 천 년 동안의 토론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최근 인도의 수행자 모습을 보여주는 스와미 라마의 경우도 흥미롭다.
내가 만나 본 온갖 법맥의 요기와 스승들 중에서 극소수만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스승께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스승님, 수많은 사람들이 스와미 또는 성자라고 불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속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직 제자로서 더 배워야 하는데다가 준비도 채 안 된 상태에서 스승으로 나서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스승께서는 웃으면서 대답해 주셨다.
“꽃밭에는 울타리가 처진 것을 볼 수 있을 게다. 울타리는 꽃을 보호하는 작용을 하지. 그 사람들은 신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울타리란다. 너는 보고만 있거라. 때가 되면 그들도 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들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스와미 라마 지음/박광수·박재원 옮김,『히말라야의 성자들 下』 p. 217.)
깨달음에 대한 토론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대화이다. 이 대화를 두고 수행자라면 우선 자신은 울타리인 꽃인지 생각할 것이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가슴 서늘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대화를 곱씹다 보면 붓다가 말한 첫째에서 넷째까지의 사문이야기와 아주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 단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울타리 역할을 맡은 수행자도 언젠가는 꽃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차는 존재하겠지만 꽃과 울타리가 다르지 않고, 나아가서는 울타리 안[부처의 세계]과 밖[중생의 세계]이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놀랍게도 수행자라면 너도 나도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어쩌면 미미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을 알았다면 수행자가 다른 수행자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법이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통감痛感하게 된다. 자기와 다른 수행을 한다고 그런 것은 수행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하는 간화선 수행을 보고 그것은 간화선 수행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붓다는 그런 문제들은 접어두고 수행에 매진하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인은 읊었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라고. 우리가 겪는 무아의 모습이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17) 붓다의 죽음과 마지막 설법 II, 다투지 않는다
붓다의 죽음과 마지막 설법에서 우리는 비교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일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주장을 하며 다툼을 벌인다. 붓다는 그런 논쟁을 멀리하였다. 그리고 경험에 의해 확증된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형이상학적인 학설들은 모두 그릇된 입장에서 비롯되었다고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진리의 부분 부분만을 보고 입씨름을 하고, 논쟁을 하며 ‘날카로운 혀로 타인들을 찌르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설파한다.
어떤 수행자, 바라문들은 실로 이러한 견해에 집착하고 있다. 단지 일부분만을 보는 사람들이 이것을 논하고 서로 다투는 것이다.
‘같다’든가 ‘훌륭하다’ 혹은 ‘뒤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들은 그 생각으로 인하여 다투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같다든가, 같지 않다는 것이 없어진 사람은 누구와 논쟁을 벌일 것인가?
모든 비구여, 나는 世間과 다투지 않는다. 世間이 나와 다툰다. 모든 비구여, 法語者(眞理를 말하는 자)는 世間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느니라.
진리는 하나이고 제 2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진리를 안 사람은 다투는 일이 없다. (Suttanipata 884. 中村元 著 楊貞奎 譯,『佛敎의 本質』 p. 63.)
부처는 진리 그 자체를 직접 체득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비교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문제로 세간과 직접적으로 다투거나 토론하려 하지는 않았다. 붓다는 오로지 진리가 무엇인가를 천명하는데, 진리를 전파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다.
‘나는 이것을 말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모든 사물에 대한 집착이 집착임을 확실히 알고, 모든 견해에 있어서의 과오를 보고, 고집하는 일 없이 성찰하면서 내심의 평안을 나는 본다. (Suttanipata 837. 中村元 著 楊貞奎 譯,『佛敎의 本質』 p. 64.)
『무문관無門關』제26칙「이승권렴二僧卷簾」에서 법안 선사는 함께 발을 말아 올린 두 사람을 보고 “한 사람은 맞았는데, 한 사람은 틀렸다[一得一失].”라고 말한다. 그럼 법안 선사는 맞고 틀렸다는 분별심을 낸 것인가? 어느 쪽은 맞고 어느 쪽은 틀렸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 분별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법안은 누가 맞았고 누가 틀렸다고 특정하지는 않았다. ‘一得一失’ 한 사람은 맞았는데, 한 사람은 틀렸다고만 말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은 다 일득일실입니다. 반드시 좋다고만 결정되어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나쁘다고만 결정되어 있는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 결점이 실은 장점이 되는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하는 일은 다 일득일실이지요.
(중략)
법안화상도 일득일실이라고만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잘한 사람을 칭찬하지도 않고 잘못한 사람을 나무라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좋고 나쁜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 잘못한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느끼고 좋은 쪽으로 신장해 가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너무 남의 결점만 잡아내지 말고, 사람은 다 일득일실이라고 하는 탈속적(脫俗的) 기분을 가지고 지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무상(無上)의 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山田無文 老死, 한재훈 옮김,『부처님의 자비로운 목소리』 pp. 20~21.)
이 공안을 해결한 사람이 아니면 생각해내기 어려운 엉뚱하지만[Thinking the Unthinkable] 날카롭다. 이 공안을 해결해야 우러나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하지만 이와 같이 불교는 모든 분별을 넘어선다. 그것을 초월하여 무논쟁의 논쟁을 안온한 것으로 보고, 이른바 ‘무 입장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 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말만 한다. 자신의 이기성이 더욱더 그를 자기중심적으로 만들고 비참하게 만든다. 깨달음에로의 지름길은 아집을 완전히 잘라 내는 일이다. (스와미 라마 지음/박광수·박재원 옮김,『히말라야의 성자들 上』 p. 90.)
그대를 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니. (스와미 라마 지음/박광수·박재원 옮김,『히말라야의 성자들 下』 p. 57.)
불교는 자기만이 훌륭하다는 생각과 편견에 빠지는 일을 끊임없이 경계하였다. 되도록 형이상학적 학설을 배제하고, 실천적인 인식과 수행을 강조하였다. 비이기적인 것은 물론이고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만이 진정한 스승이요, 바로 인류의 진정한 봉사자로 본 것이다.
고개를 숙여라. 그러면 비틀거리지 않고 잘 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험난한 인생행로를 가려면 겸손해져야 한다. 삶이라는 여행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아집과 자만심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그러면 성장은 멈추고 만다. (스와미 라마 지음/박광수·박재원 옮김,『히말라야의 성자들 上』 pp. 147~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