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즈호의 구명정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 <어떤 난파선의 장면>
메디즈호가 영국으로부터 되찾은 식민지 세네갈로 출발한 것은 1816년 6월 17일이었다. 배 위에는 새로 임명된 세네갈 총독을 비롯해, 관리들과 학자 그리고 수병 등 400여명이 타고 있었다. 이 배의 선장은 위그 뒤 르와 드 쇼마레라는 사람이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항해술에 대해선 깜깜했다는 것이다. 이 무자격자가 선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복귀한 부르봉 왕가에서 그의 충성심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 한다. 프랑스를 떠날 당시 이 배는 다른 세 척의 전함과 함대를 이루고 있었으나, 아마도 최신예 전함의 성능을 자랑하고 싶었던지 다른 세 척의 배를 뒤로 젖혀둔 채 사실상 혼자서 항해를 하다시피 했다. 선장의 만용때문이었을 게다.
항해에 대해선 무지하면서 권위의식만 갖고 있었던 이 선장은 같이 탔던 장교들과 종종 충돌을 일으키곤 했고, 이것이 가끔은 카오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7월 2일에 메디즈호는 마침내 암초에 걸려 좌초하고 만다. 그날은 바다도 잔잔하고 시계도 양호한 편이었다. 더구나 이 암초는 어느 해도에나 표시되어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항해상의 오류와 부주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바다에 띄우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혼란에 빠진 선장과 장교들은 사람들에게 성급하게 퇴선을 명했다.
총독, 선장, 그리고 높은 관리들과 고급장교들은 모두 구명보트에 탈 수 있었으나, 비좁은 구명보트에 자리를 찾지 못한 147명의 하급자들은 배에서 뜯어낸 널빤지 조각으로 뗏목을 만들었다. 구명보트에 탄 높으신 분들은 뗏목에 탄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배로 뗏목을 끌어줄 테니 안심하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입에 담기도 더러운 생존경쟁이 시작된다. 난파선을 떠나 두 시간 정도 갔을 때쯤 갑자기 구명보트와 뗏목을 연결했던 끈이 끊어진다. 원인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 뗏목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구명보트에서 일부러 끈을 끊어버렸던 모양이다. 어쨌든 뗏목에서 자유로워진 구명보트들은 뗏목을 버려둔 채 유유히 수평선 밖으로 사라져 갔다.
구명보트가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뗏목 위의 사람들은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이어서 15x8미터 크기의 작은 뗏목 위에서도 드디어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경쟁이 시작된다. 싸움은 먼저 좋은 자리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문제는 뗏목의 가장자리였다. 바다 위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나자, 가장자리에 앉았던 20여명의 사람들이 이미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물론 여기서도 희생자는 하급자들이었다. 뗏목의 가운데는 장교들이 차지하고, 가장자리는 힘없는 사병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교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선상반란의 위험 때문에 사병들은 무장 해제 당한 상태였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튿날 밤, 동료들이 파도에 휩쓸려간 것을 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뗏목의 가운데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물 대신 포도주로 취한 사람들, 공포로 미치광이가 된 사람들이 갑자기 난동을 일으켜 뗏목을 파괴하려고 덤벼들었다. 이들을 막을 수 없었던 장교들은 결국 발포를 하고, 이 와중에 65명이 사살당한다. 정당방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다. 모자라는 물과 식량 때문에 이 기회를 이용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제거하려 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틀 밤을 보냈을 때 뗏목 위에 남은 사람들은 이미 출발 당시의 반도 채 되지 않았다.
더러운 생존경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주일이 지났을 때 뗏목 위에 남은 사람은 28명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많았다. 이중에서 아직 버틸 수 있는 사람은 15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부상 때문에 가망이 없거나 이미 제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대강이라도 몸을 추스를 수 있었던 15명의 생존자들은 '오랜 토론 끝에'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동료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기로 결정했다. 물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랬던 건 아니리라. 저 그림 속에서 우리는 가망 없는 동료를 바다에 던져버린 15명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마스트 바로 오른쪽에는 이 무서운 얘기를 후세에 들려준 선의(船醫) 앙리 사비니가 보인다. 의사의 소견으로 바다에 던져버릴 후보자를 직접 고른 것도 바로 그였다.
-출처 : 진중권 <춤추는 죽음> 2권
이후에도 끔찍한 생존경쟁은 일어나고 심지어 인육을 말려 먹기도 하지만,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잔혹함에 관한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다. 중점은 이상에서 말한 서사적 요소들과 함께 그림의 구도, 그리고 어두우면서도 강렬한 색조에 바쳐져야 한다. 왼쪽 아래에서 턱을 괸 채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노인의 표정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차원의 것을 보여준다. 피라미드 형으로 구성된 구도의 아래에 위치하면서 이미 죽어있는 사람을 끌어안고 저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진중권의 책을 통해 알게 된 이 그림은 그 뒤에도 종종 내 인생에 개입하여, 끊임없이 나를 상기시키며 화두를 던져준다. 그 중심은 역시 저 노인이며, 그럴 때 마다 나는 정말이지 어쩔 줄 몰라서 허둥대고 만다. 슬픔을 넘어서서 무섭기까지 한 이 작품은 그 어두운 색조만큼이나 나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제리코 (Jean Louis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프랑스 화가. 루앙 출생
프랑스 화가. 루앙 출생. C. 베르네와 B.P.N. 게랭의 화실(여기서 F.V.E. 들라크루아도 수학)에서 다비드풍의 고전주의 규범을 배웠다. 또 당시 로마의 보르게세궁에서 받은 소장품 등을 통해 티치아노 베셀리오와 P.P. 루벤스의 묘사법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성과로 1812년 미술전람회에 보낸 데뷔작 《경기병 사관(輕騎兵士官, 루브르미술관)》이 금상을 받았다. 1816∼1817년 로마 피렌체에 유학하여 미켈란젤로와 바로크양식, 그리고 라파엘로를 배웠다. 귀국한 뒤에는 문학적 주제가 아닌, 그 시대의 사건을 주제로 바로크적이고 낭만적인 정열과 격조를 가미하는 기법을 추구했는데, 그 성과인 《메디즈호의 뗏목》을 1819년 미술전람회에 출품함으로써 낭만파 회화의 봉화를 올렸다. 그는 현실의 비극, 대각선 구도, 명암의 대조, 사체(死體)의 소묘로 뒷받침된 현실성 등을 통해 근대회화의 한 시대를 열었다
평온하던 바다가 파도에 일렁이기 시작하고, 잠잠하던 하늘엔 온통 먹구름이 뒤덮인다. 숨쉬기조차 조심스럽던 대양(大洋)의 고요함은 어느새 옆 사람의 외침을 집어삼킨다. 뱃전에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파도에 몸을 의지하던 작은 배는 산산이 부서지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긴 표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그림은 실화(實話)를 주제로 작가의 상상력을 표현한 낭만주의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다. 메디즈호(號)의 난파와,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1819년에 프랑스에 공개되어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제리코(Theodore Gericault, 1791~1824)가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은 ‘메디즈호의 뗏목’이다. 1816년 6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통치할 목적으로 프랑스의 관료들을 태우고 출항한 범선 메디즈호는 암초에 부딪쳐 난파한다. 146명의 생존자는 배의 잔해를 모아 뗏목을 만든 후 표류했으나, 구조되었을 당시의 생존자는 불과 15명뿐이었다. 이들이 바다 위에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도에 밀려 바다에 익사했고, 남은 사람들도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급기야 이들은 생존을 위해 죽은 자들의 사체(死體)를 먹으며 구조를 기다린다. 이 그림은 기나긴 고통의 정점에서 구조선을 발견하고 미칠듯이 기뻐하는 순간을 포착해 그린 것이다.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구가 어느 정도 강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얼마 전에 일어났었던 미국의 무역센터 붕괴사건과 우리나라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등에서 보았듯이 급박한 상황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욕구는 우리의 일반적 상상력을 뛰어 넘는다. 가장 잔혹한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전쟁에서는 어떠한가. 우리가 직접 겪어 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한국전쟁을 겪어본 세대들의 생존을 위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그 참혹성은 결코 메디즈호의 뗏목에 뒤지지 않는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는 ‘안전’, 즉 ‘생존’에 대한 욕구라 할 수 있다. 타인으로부터 혹은 자연 등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은 사고(思考)하고, 활동한다. 이러한 안전성의 범위를 벗어나면서부터 인간은 과격해지고 폭력적이 되며, 이성보다는 감성과 본능에 자신을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들은 무엇인가. 누가 뭐라 해도 그 첫 번째는 음식일 것이다. 요즘 세대들이야 거의 대부분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사람들을 목격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잘 먹어서 죽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먹지 않아도 될 것을 먹고, 그만 먹어도 됨에도 불구하고 먹고, 남보다 더 먹으려고 먹고, 심심해서 먹고, 간식으로 먹고, 그리고 그냥 먹고, 또 먹고…. 이 무슨 추태(醜態)인지…. 추태의 정도를 벗어나서 이제는 크나큰 죄악으로 생각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굳이 성경의 한 대목을 빌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먹는 것, 즉 넘치는 자신의 이기심 충족은 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도시의 빌딩이 높아질수록 그늘은 깊어지는 법이다. 넘치는 재화와 물질의 풍족함 속에서 그 비례하는 만큼의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정성 들여 만든 어머니의 밥상으로 모자라 정크 푸드(junk food)로 입의 유희(遊戱)를 위하는 이들과, 그들의 탐욕스런 모습을 바라보며 주린 배를 움켜쥐는 이들의 풀어진 눈동자를 상상해보자.
초등학교 식단에 올라오는 음식들이 맛이 없다는 이유로 상당부분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선생님들께서 편식하는 버릇을 없애주시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맛이 없어하는 전통적 식단일 경우가 많았다. 한 끼에 많게는 약100명분의 음식이 버려진다고 한다.
얼마 전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도시락 사건을 기억하는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기억하는가. 이 사건에서 특히 내게 기억되는 일은 쓰레기 같은 음식을 아이들에게 준 것도, 배정된 음식 값을 유용한 일도 아니었다. 단 하나, 그런 음식을 받아먹고, 그래도 고마워서 빈 도시락 통에 감사의 편지를 쓴 어느 어린이의 마음이었다.
부분부분 잘라서 감상하기
첫댓글 감명 감명 감명!!!
감명.... 인가요?
제가 일원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