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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낙동강문학관에서 발행하는 낙강문학지에 '채종수 추모특집'으로 실을 예정이다.
*. 낙강문학 9호(3월 초 발간 예정)에 제4회 설공찬전 특집과 함께 추모 특집으로 담겠다는 낙동강문학관장님의 회신을 받았슴
(약력)
1936년 4월 25일 상주 출생
1961년 경북대학교 문리과 대학 졸업
1961년 9급 공무원으로 임용
1995년 철도청 부이사관으로 퇴직, 녹조근정훈장 수상
1999년 고향 상주로 낙향
2010년 가톨릭 세례 받음 (세례명: 가비노)
2015년 8월 15일 난재 채수선생기념사업회 창립
2022년 난재 채수문학상 제정
(원고 1)
아버지를 그리며
-채은진(딸)
무과실보상제도의 발상지, 상주
한 500년쯤 전 상주 고장에 어느 가난한 젊은 사람이 조상으로부터 받은 자갈밭 세 마지기를 농사지으며 살다가 결혼하여 아들딸 삼남매를 두게 되었다. 식구가 다섯이 되니 밭 세 마지기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어서 밭을 팔아 그 돈으로 옹기 장사를 시작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어느 이른 봄날 질구지(현, 이안면에 있는 옹기 만드는 곳)에 가서 옹기를 한 짐 사가지고 오다가 골마 골짜기에 있는 무덤 옆에 옹기 지게를 세워놓고 잔디밭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쿵" 하는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세찬 회오리바람에 지게가 넘어져 옹기가 박살이 났다. 앞길이 막막한 옹기장수는 상주 목사를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와달라고 울면서 부탁을 하였다. 사정을 들은 목사가 이방을 불러 명하기를 여기부터 동쪽으로 50리를 가면 낙동강이 흐른다. 강에 가서, 강을 올라가는 배와 내려가는 배 중에 가장 큰 배의 선장 두 분을 모셔 오라고 하였다.
얼마 후 두 선장이 목사님 앞에 대령하였다. 목사님이 올라가는 배의 선장을 보고 "선장님은 무엇을 싣고 어디로 가는 길이요?" 하고 묻자 선장이 "저는 부산 등지에서 건어물과 소금을 싣고 안동으로 팔러 갑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럼 "선장님은 어디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소." 하고 다시 묻자 선장은 “무거운 짐을 싣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니 선원들이 힘이 들어 동남풍이 불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다음엔 목사님이 내려가는 배 선장을 보고 "선장님은 무엇을 싣고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장님이 "저는 영주, 풍기 등에서 생산되는 각종 약초를 싣고 대구로 팔러 가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이 다시 "어디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장님은 "지금 대구 약령 시장에 약재가 없어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하니 서북풍이 불어서 빨리 대구까지 도착하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두 선장의 답을 모두 듣고 난 목사님은 “두 선장이 지역민들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가상하여 하느님이 서북풍과 동남풍을 동시에 불게 하였는데, 두 바람이 마주치는 곳에서 회오리바람이 형성되어 저 옹기장수 지게를 넘어뜨려 큰 손해를 보게 되었으니 두 선장님께서 보상을 좀 해주고 가시오." 라고 하자 두 선장은 선듯 옹기값을 보상해 주었고 옹기장수는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945년 해방 직후 초등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이지만 현대사회에도 ‘무과실보상제도’라는 것이 있다. 어쨌거나 500년 전에 벌써 상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니 상주가 무과실보상제도의 발상지임은 분명할 터, 이 옹기장수의 이야기를 ‘무과실보상제도의 발상지 상주’라는 제목으로 경천대나 은척 등지의 바위에 새겨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 아버지 회고록 ‘희미한 발자욱’ 에서 발췌
아버지가 남기신 회고록 속에서 이 글을 마주하니, 언젠가 아이들과 나에게 직접 이 이야기를 해 주셨던 기억 속 순간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마주 앉아 아버지가 해주시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고 있는 것만 같다. 상주의 옹기장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우리 아버지다운 것이라고 여겨진다. 세계 최초로 공공기관(상주 목사)에서 무과실보상제도를 실행한 곳이 상주라고 생각하신 것에서 아버지가 갖고 계신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제천시 철도청에 근무하실 때였다. 추석 직전에 내린 우박으로 과수원의 사과가 멍이 들어 상품 가치가 떨어져 농가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제천시청에서 철도청으로 추석 선물로 멍든 사과의 단체구매를 부탁해왔고 그 취지에 깊게 공감한 아버지는 청 내에 어느 사무실보다 더 많은 사백여 박스의 사과를 구매해 주었으며, 시청과 철도청이 함께 과수원에 대해 ‘무과실피해보상’을 해 준 그 일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하셨다. 이 일에서 나는 아버지한테서 자신도 이러한 ‘무과실보상제도’에 참여하여 피해 농가를 보상해 주었다는 자부심을 볼 수 있었고, 또한 아버지께서 일생을 공무원으로서 일해오신 데에 대한 높은 사명과 긍지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결혼한 지 7년여 만에 첫아들을 얻으셨고 그 이후로 나와 남동생이 태어나 슬하에 삼남매를 두셨는데 아버지의 우리 삼남매를 향한 정은 애틋하고 각별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약 십 년 동안 인천 채씨 집안의 조상 어른인 난재 채수(蔡壽) 선생의 업적, 그 중에서도 ‘설공찬전’ 이라는 한글소설을 널리 알리고자 많은 애를 써오셨다. 난재 할아버지가 손자 무일(蔡無逸)과 주고 받은 대구(對句)형식으로 된 대화가 조선시대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문집에 실려 있는데, 우리 삼남매가 어렸을 때 그리고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많이 들려주신 이야기이라서, 나는 이 글을 볼 때 마다 아버지의 우리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무일(無逸)과의 대구(對句)
조선 성종 때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의 학자인 채수(蔡壽 : 1449-1515) 에게는 무일(無逸) 이라는 손자가 있었다. 어느 날 밤, 채수는 무일을 안고 누워 있다가 한 구절의 시를 읊었다.
“손자 녀석 밤이면 밤마다 책을 읽지 않는구나.” <孫子夜夜讀書不 (손자야야독서불)>
그리고는 무일에게 알맞은 대구를 짓게하니, 무일은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약주를 지나치게 잡수신다네.” <祖父朝朝藥酒猛 (조부조조약주맹)>
또,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채수는 무일을 등에 업고 가다가 시구 한 구절을 지었다.
“개가 달려가니 매화꽃이 떨어지는구나.” <犬走梅花落 (견주매화락)>
말이 끝나자마자, 무일은 다음과 같이 대구를 맞추었다.
“닭이 지나가니 대나무 잎이 만들어 지는구나.” <鷄行竹葉成 (계행죽엽성)>
– 어우야담(於于野談) 수록 글
아버지는 1961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신 후 그 당시 국가적으로 처음 시행된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철도청에 발령을 받으신 후로 1995년 9월 퇴직을 하실 때까지 35년간 철도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 부산을 첫 근무지로 시작으로 영주, 순천, 제천, 서울, 대전 등 공무원 재직 기간 내내 전국의 지방철도청으로 전근을 다니셨다.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는 자식들에게 축하해주고 싶은 특별한 일이 있거나 하면 축하 메세지를 ‘전보’라는 서프라이즈 선물로 보내주시기도 하였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강의 중간 연락을 받아 나가보니 학교 주소로 아버지가 보내온 축하 전보 카드가 도착해 있었고 전보를 받아들고 좋아하던 기억이 아직 그대로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병환이 깊어지셔서 하고싶은 말씀을 제대로 못 하게 되셨을 때, 내가 아버지께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내 손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동작으로 대답을 대신하셨다. 뚜뚜 뚜 뚜뚜 모르스 부호처럼. 쥐었다 폈다 하는 아버지의 손으로 하는 대답만으로도 나는 아버지의 자상한 대답이 다 들리는 것만 같았다. 대학 시절 아버지가 보내온 전보 속 짧은 문구를 통해 아버지의 큰 사랑을 모두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천국에 계실 아버지께 전보를 보내드리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천국의 안식 속에서 편히 쉬시고, 자랑스러워하시는 아버지의 딸 두 아들 사위 그리고 손주들이 앞으로도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 지켜봐 주세요 라고.
(원고 2)
할아버지의 발자국
-김유민(외손녀)
바람결에 내 냄새가 다다르기 무섭게 짖기 시작하는 충견 돌이, 찬 날씨에 바나나를 열지 못하는 바나나 나무줄기들, 상주에서 가장 맛있고 달디단 감이 나는 감나무. 그 익숙한 풍경에 할아버지가 없으니 너무나 허전합니다.
책장에 꼬옥 꽂혀있던 제 대학교 입학장, 삼촌들과 소주를 부어 기울이던 술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연도별 일기장도 모두, 집에 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은 우리 가족이 딱 10년 전, 상주의 한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들 중 하나입니다. 할아버지를 가운데에 둔 단체 사진에는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 사위, 그리고 외손주들이 할아버지를 둘러싸며 다 같이 활짝 웃고 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제일 큰 액자에 담긴 그 사진을 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의 옷과 미소가 그대로 담긴 영정사진은 다시 저를 10년 전 초등학교 3학년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그 시절 저의 취미는 조개 모으기였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께 제가 모은 조개를 몇 개 가져가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다음에 방문했을 땐, 커다란 유리장에 조개가 한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제가 드린 것 말고도 할아버지께서 더 찾아 넣으신거죠. 그 유리장의 맨 아래에는 제가 10년 동안 그린 낙서 종이들이 잔뜩 쌓여있었고요. 이만큼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사진관에 간 것도 이 무렵입니다. 사진을 찍고 난 뒤에는 온 식구가 중국집에 가 해물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그 짜장면을 먹고 한 달 동안 배탈이 나서 2년 넘게 짜장면을 먹지 못했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에마저 할아버지와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다시 10년을 지나 올해가 되었습니다. 3일 내내 보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은 참 신기했습니다. 기분이 좀 나을 때 보니 할아버지도 웃고 있는 것 같고, 다시 우울해졌을 때 보니 할아버지도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10년 전 할아버지를 10년 후의 제가 마주하니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10년 후의 할아버지와 10년 후의 제가 마주할 수 없다는 건 더욱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건 절대 할아버지를 잊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10년 후의 저는 오늘의 저처럼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할아버지와 먹었던 짜장면을, 할아버지와 찍었던 사진을, 할아버지의 차를 타고 갔던 성당을, 기억할 것입니다.
장례식이 끝난 뒤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안고 있을 때, 1월인데도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에 햇살이 비추었고, 등 뒤가 참 따스했습니다. 앞으로도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테니, 더 좋은 사람이 되어 할아버지를 자랑스럽게 해주어라는 것이겠죠?
(원고 3)
따스한 봄볕 같은 외숙 채종수 어른을 기리며
-성석제(소설가)
26년 전 어머니의 칠순을 맞아 서울 어느 연회장을 빌려 고희연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외숙께서 오셔서 식전에 나를 부르시고는 내게 메모 한 장을 건네시며 감개에 어린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50여년 전 장가를 들러 우리 동네에 오셨다. 당시 습속으로 신랑을 괴롭혀 처가에서 동네 청년들에게 푸짐히 음식을 내게 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네 아버지는 어려 보이기도 하고 동족상잔의 난리통을 겪으면서 때 이르게 세상을 알게 된 듯도 하였다. 동네 청년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드센 텃세를 부리지는 않고 노래나 한 곡 하라고 했다. 그때 네 아버지가 부른 노래가 [동무 생각]이라는 노래였으니,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어머니께 노래를 불러드려라”고 하셨다. 내가 외숙의 간곡한 뜻을 전하여 잔치의 말미에 한 부모에서 난 자식과 후손들이 손을 모으고 어머니께 뜻깊고 간절한 그 노래를 불러드리게 되었다.
동무 생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
어떤 장황한 치사와 길고 아름다운 겉치레가 노래 하나만큼의 호소력이 있으랴. 외숙의 마음 씀이 이렇듯 따스하고 세세하였으며 오래도록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어, 나로 하여금 뒤로 돌아서서 소매를 적시게 하였었다.
외숙께서 퇴직을 하시고 고향 땅에 집을 지으시고 뒤뜰에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고 복숭아나무를 심으셨다. 어느날 내가 인사를 하러 가서 뵈었더니 근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셨다.
“복숭아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병해충과 상처를 방지하고 농약 오염을 막는 등의 여러 이유로 낱낱의 열매에 종이봉지를 씌우게 된다. 나무가 성숙하면 한 그루당 복숭아 6, 70개를 다는 게 보통인데, 내가 종이봉지를 만들 수가 없어 열 그루쯤의 나무에 씌울 봉지를 사러 농협 근처의 농자재 파는 곳에 가서 봉지를 사려 했다. 거기 있던 상인이 묻기를 봉지가 얼마나 소용이 되느냐 하여 500장쯤이면 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접고 풀을 칠해 만든 봉지 3000장 한 묶음의 값이 1500원(개당 0.5원)이라고 하며 그 이하로는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필요한 것 이상을 가져가봐야 쓸 데도 보관할 데도 없다고 하니, 봉지를 팔지 않는다고 그만 가보시라고 하더라. 시간 들이고 차를 운전해 봉지를 사러 간 사람이 봉지를 사지 못하면 봉지 값 이상의 비용을 헛되이 쓴 것이고, 팔리지 않은 봉지는 시간이 지나면 버려지게 될 것인데 이것은 만들고 파는 사람에게 봉지 값 이상으로 큰 손해가 아닐 것인가? 이로써 말한 뒤 웃고 돌아섰다.”
외숙의 말씀이 확철하고 논증에 밝은 것이 이와 같아서 그때 나는 밥알을 뿜듯 웃으며 필시 이것이 집안의 오랜 내력인가 하였다.
이 땅에 머무른 90여 성상 동안 혈족과 이웃을 대하는 것이 온화한 봄볕과 같았고 불의와 부정에는 추상같은 과단성이 있으셨으니 다시 어디서 이런 어른의 풍모를 찾을 것인가. 자주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하지 못한 어리석고 미욱한 생질이 눈물지으며 쓴다.
아, 슬프구나.
(원고 4)
새내기 세외인(世外人), 채종수
- 채동선(시조시인)
꼰대 소릴 들어도 시시비비를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줄곧 외길만 걸어온 사람, 대나무 쪼개지는 모진 아픔을 겪으면서도 갈대처럼 흔들리길 끝내 거부한 분이셨다.
필자가 기억하는 인간 채종수의 모습이다.
선생은 1936년 경상도 상주에서 이름 없는 서생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고 철도청에서 청춘을 보냈다. 초기에는 육중한 재건호 기관차의 운전사로 전국의 철로를 종횡무진 누볐고, 이후에는 고위 공직자로서 철도 현대화에 일익을 담당했다.
직장을 은퇴한 뒤 그가 다시 뿌리내린 고향은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 오랜 객지 생활 사이 고향은 낯선 땅이 되어 있었고, 함께 자랐던 또래들은 이미 도시로 흩어진 뒤였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벌판에 홀로 선 기분이었을 것이다. 시샘 섞인 시선 또한 쉽게 가라앉지 않아, 고향에서의 적응은 생각보다 긴 시간을 요구했다. 그 시간 동안 그가 택한 것은 고독과 독서였다.
이 무렵 선생의 곁에 오래 머문 책이 바로 『설공찬전』이었다.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져 있으며, 선생의 조상인 난재 채수(蔡壽, 1449~1515)가 낙향 후 이안에 쾌재정을 짓고 집필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목만 문헌에 남아 있던 이 작품은 오랫동안 패관소설로 지목되어 금서로 묶여있었고 실제 텍스트는 실전된 것으로 여겨졌었으나 1970년대 말, 유명 국문학자가 한 문중 문집의 속지에서 필사본(한문본)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설공찬전』은 귀신 이야기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은 이승과 저승을 가리지 않는 권력과 불의의 구조를 정면으로 묻는 작품이다. 억울한 죽음 뒤에도 정의가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 세계, 권력이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현실을 그려 보이며 “착하게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조선이 이 작품을 금서로 묶어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의지하던 가형(此君齊 蔡光植)이 세상을 떠난 뒤, 선생은 채수와 『설공찬전』을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설공찬의 문제의식에 깊이 공명하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는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백발의 노구로 문중의 갈래를 하나로 모으고 지역 유지들을 설득해 채수기념사업회를 결성했으며, 스스로 사무국장을 맡아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를 챙기는 역할을 도맡아왔다.
지자체의 문화 정책과 맞물리며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여느 세상사가 그렇듯 숱한 난관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선생은 사재를 털어 기울어진 배를 바로잡아야 했고 몇 해 전부터는 개인 자금을 쾌척해 낙동강문학관(관장: 박찬선)과 함께 전국 최대 규모의 ‘채수 문학상’을 제정하고 해마다 시상을 이어오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생은 찰나의 생을 마치고 마침내 세외의 길로 접어들었다.
조객들이 끊긴 밤, 흔들리는 촛불 사이로 떠오른 선생의 모습은 생시와 판박이다. 백발과 흰 눈썹 아래로 세상을 저울질하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으나 마음은 이미 피안을 걷고 있을 것이다.
향 피워 마지막 예를 올리고 시조 한 수 남긴다.
백발에 하얀 눈썹 완강히 다문 입술
가슴이 뜨거워서 설중매라 부르리
바람아 서둘지 마라
꽃매무새 흩어진다
눈가에 맺힌 이슬 붉은 꽃잎 지워가고
기억 속 상흔들은 허공으로 흩어져서
하얗게 덧칠된 자리
그리움만 남습니다
- 雪中梅 전문
*.고 채종수는 필자의 삼촌이다. 그럼에도 호칭을 달리한 것은 사사로운 애도를 넘어 설공찬전과 채수를 오늘로 잇고자 했던 한 개인의 삶을 기록하려는 뜻에서였음을 밝혀 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