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에 시골길을 걸어본다. 울퉁불퉁한 흙길이 아닌 시멘트로 깨끗이 포장된 길이다. 곡식은 무르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지만 겨울을 나기 위해 쌓아둔 장작은 보이지 않고 불을 때는 아궁이의 연기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현대화되기 시작하여 보일러로 방을 데우고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 먹고 있으리라. 어느 조용해 보이는 집에 들어가 잠시 거닐다보니 어느새 뒤뜰에 와 있다. 그리고 그 뒤뜰 한구석에서 습한 그늘 아래 쓸쓸히 녹슬어가고 있는 무쇠솥 하나를 만났다.
아버지의 고향이 부뚜막 솥에 밥을 해먹던 시골인 탓에 솥에서 퍼 올린 밥 한 공기와 감자, 고구마, 옥수수가 내는 고향의 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때는 한 가족의 식사를 책임지는 주방의 ‘터줏대감’이었으리라. 그러나 요즘 시골의 부엌에서 부뚜막에 걸려 있는 무쇠솥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일찌감치 부엌에서 밀려나 고물상의 손길이나 기다리며 녹슬고 있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사람이나 솥이나 인생무상(人生無常)은 매한가지였던가. 이런 솥의 쓸쓸함이 안쓰러워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 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 사진1 - 3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천마총 출토 청동정(鼎). ⓒ
솥은 우리나라의 오랜 취사도구 중에 하나이다. 그만큼 종류도 많고 모양도 다양하다. 솥의 종류는 크게 부(釜, 가마 부), 정(鼎, 솥 정), 노구(鑪口) 세 가지로 나눠진다. 부(釜)는 가마라는 뜻으로 다리가 없고 바닥이 밋밋한 솥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부뚜막에 걸린 솥이 바로 부(釜)이다. 반대로 정(鼎)은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다리가 달린 솥을 말한다. 그리고 노구(鑪口)는 놋쇠나 구리쇠로 만든 작은 솥으로 자유로이 걸었다 떼었다 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고 보니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가마솥’이 상당히 어색한 단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서는 가마(釜, 부)와 솥(鼎, 정)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허나 지금은 이 모두를 어울러 그냥 ‘솥’이라고 부르고 ‘가마’는 쇠를 녹이거나 도자기를 굽는 등 열처리공정을 위한 장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일본어인 かま(카마)는 부(釜)를 가리키는 말로 쇠를 녹이거나 도자기를 굽는 가마라는 뜻과 함께 그 자체로 ‘솥’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중의어이다. 따라서 ‘가마솥’을 한글로 정확히 적어보자면 ‘솥솥’이 된다. ‘역전앞’과 마찬가지로 중복된 의미를 가진 잘못된 단어인 것이다.
“정현이 수배하는 조례를 구노의 집으로 보내어 그의 가마(釜)와 솥(鼎)을 모조리 빼앗아 왔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 -
“밥을 짓는 데에는 쇠 솥(鐵鼎)을 사용하는데, 발은 없고 가마(釜)와 비슷하였으며, 이는 유구국에서 무역한 것이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 -
때문에 ‘가마솥’을 부를 때는 앞에 ‘가마’를 떼고 ‘솥’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 솥의 대부분은 무쇠로 만들고 있으므로 ‘무쇠솥’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솥은 부엌의 부뚜막 위에 있지 않은가. 부뚜막은 부엌 아궁이에 솥을 걸어 놓기 위해 흙과 돌을 쌓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를 살려 부엌 아궁이 위에 걸려 있는 솥은 ‘부뚜막 솥’이라 불러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부뚜막 솥! 얼마나 멋진 말인가!
한국인에게 가장 맛있는 것은 ‘밥맛’
▲ 사진2 - 추수를 기다리는 벼. ⓒ
한국인들에게 솥은 단지 향수만이 아닌 ‘밥맛’으로도 기억된다. 압력밥솥과 전기밥솥 등 편리한 조리기구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밥맛에 한해서는 언제나 솥이 일품이다.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솥이 미각으로 강렬히 기억된다는 사실은 그만큼 솥에서 지은 밥맛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인은 밥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뜻일 테지만, 그 말이 ‘한국인에게 가장 맛있는 것은 잘 지은 밥’이라는 뜻으로도 들리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입맛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부뚜막 솥의 밥맛이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객관화된 평가 기준이 필요하다.
이런 경우 사용하는 것이 관능검사(Sensory test)다. 입맛과 같이 과학적 계측이 불가능한 분야에서 객관화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오감을 기준으로 품질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솥의 밥맛도 관능검사를 통해 평가된 결과가 존재한다. 과연 솥의 밥맛에 대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우선 가장 정확하고 민감한 미각을 가진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래서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등 4가지 맛을 내는 용액을 3단계의 농도별로 준비하여 총 16개의 용액을 만들었다. 400명의 사람들에게 이 용액을 맛보게 한 후 가장 정확하게 용액의 맛과 농도를 알아낸 10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보통 사람보다 정확한 미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한 무쇠솥, 돌솥, 냄비, 전기밥솥, 압력밥솥에 각각 쌀 1kg과 물 1500cc로 밥을 지었다. 그리고 그 10명의 사람들에게 어떤 솥에 지어진 밥인지 밝히지 않고 각각의 밥을 맛보게 한 후, 색깔, 냄새, 맛, 찰기 등 4가지의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게 하였다. 그리고 이 4가지 점수를 더해 총점을 내었다.
놀랍게도 밥맛의 측정 결과는 뚜렷이 무쇠솥 〉돌솥 〉압력밥솥 〉전기밥솥 〉냄비 순으로 나타났다. 단지 미각의 정확도와 민감도에 의해서 사람을 뽑았으니, 개인적인 향수나 입맛이 평가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쇠솥의 밥맛은 막연한 추억과 익숙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다른 조리 기구를 통해 만든 밥들보다 뛰어난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과연 솥의 밥맛을 맛있게 만드는 것은?
옛날 시골집 혹은 TV에서 부뚜막 솥에 밥 짓는 장면을 자세히 보았다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장면 속의 밥 짓는 아낙네들은 솥을 열 때 절대로 솥뚜껑을 번쩍 들었다가 내려놓지 않는다. 단지 뜨거운 손잡이를 행주로 감싸고 ‘스르릉~’하는 소리를 울리면 뚜껑을 살며시 옆으로 밀어 놓을 뿐이다.
▲ 사진3 - 시골 부엌 부뚜막의 무쇠솥. ⓒ
이런 장면이 사극에서는 부엌의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솥뚜껑의 무게가 평범한 아낙네들이 들어올리기에는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솥뚜껑의 재질은 완전히 쇠 덩어리 그 자체다. 손잡이부터 덮개까지 두툼한 무쇠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이 아니라 요즘 냄비는 뚜껑이 입구 안으로 끼워져 들어가는 것에 비해, 솥의 뚜껑은 솥의 입구를 완전히 덮어 버리고도 약간 남을 만큼 널찍하다!
그러나 밥 짓는 아낙네들의 팔 고생이나 시키던 묵직한 솥뚜껑의 무게가 알고 보니 밥맛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비밀 중에 하나였다. 보통 물은 1기압에서 100℃가 되면 끓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는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무거운 솥뚜껑을 올려놓게 되면 뚜껑의 무게 때문에 솥 안의 수증기가 밖으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갇힌 수증기는 솥 안의 기압을 1기압 이상으로 올려주어 물의 온도를 100℃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높은 온도에서 빠르게 익혀진 밥은 그렇지 않은 밥보다 찰기와 향기도 훨씬 뛰어나다.
솥은 바닥면 또한 남다르게 만들어져 있다. 우선 바닥의 표면적이 매우 넓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솥은 위 아래로 길쭉하지 않고 좌우로 널찍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불이 가장 가까이 닿는 솥 바닥의 중앙 부분은 두껍게 만들어져있고, 위로 올라갈수록(불과 멀어질수록) 두께가 점점 얇아져 바닥의 1/2 정도까지 줄어든다. 솥 바닥이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열전도와 관련이 있다. 솥 내부의 모든 부분에 열이 균일하게 전달되어야만 맛있는 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솥 안의 균일한 온도가 맛있는 밥의 핵심이라는 것은 야외에서 보통 냄비에서 밥을 지어보았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야외에서 밥을 짓게 되면 위에서부터 설익은 밥, 잘 익은 밥, 타버린 밥으로 이루어진 바로 그 맛없다고 소문난 ‘전설의 3층 밥’이 흔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묘기(?)는 옴팡한 냄비에 쌀을 가득 넣어 밥을 짓기 때문에 생긴다. 냄비에 가해지는 열이 바닥 중앙에만 집중되는 데다가 가득 찬 쌀 때문에 바닥의 열이 위쪽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진 밥은 운 좋게 ‘3층 만들기’를 피해갔다고 해도 냄비 가운데의 일부만이 제대로 된 맛을 낸다.
하지만 솥은 불과 가장 먼저 닿는 중앙은 두껍게 하여 열이 느리게 전달되는 반면, 불과 멀어지는 부분은 얇게 하여 열의 전달을 빠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솥은 바닥의 모든 부분에 균일하게 열이 전달된다. 또한 널찍한 모양의 솥의 바닥도 균일한 열 분포에 한몫을 한다. 솥의 바닥이 펑퍼짐하게 만들어지면 솥 위쪽과 아래쪽의 온도 차이가 줄어들고 모든 쌀이 균일하게 열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거운 뚜껑 덕분에 입구로 열이 빠져나가지 못하여, 솥 내부의 위 아래 온도차이가 더욱 줄어든다. 이렇게 고른 열 분포로 모든 쌀이 사이좋게 함께 익은 밥이 그렇지 않은 밥보다 맛이 좋음은 당연한 일이다.
노장은 사라졌으나, 솥은 사라지지 않았다.
장작으로 불을 피우기가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습성 때문일까? 훌륭한 밥맛으로 한국인에게 ‘밥심’을 내게 해주던 솥이 전기밥솥에 밀려 쓸쓸히 녹슬어 가고 있다.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밥상을 지켜 주었건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지쳐버린 노장처럼 결국에는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란 말인가?
하지만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이런 걱정은 기우일 뿐이다. ‘금속활자로 찍은 듯 선명한 프린터’라는 광고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무쇠솥처럼 맛있는 밥을 만드는 전기압력밥솥’이라는 광고는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전기밥솥에 밀려났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기밥솥을 꿰차고 다시금 부엌을 탈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라져가는 솥에 대한 걱정이 어느새 흐뭇함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렇듯 솥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현대적인 물건들이 과거의 유산보다 반드시 뛰어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이제는 시골길을 거닐다 솥을 만나더라도 쓸쓸함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으로 말을 건네야 할 것이다. 솥의 새로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라진 부뚜막 솥의 정취를 아쉬워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 수 있는 ‘또 다른 솥’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