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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학과 철학
노벨문학상으로 인정받은 감수성이 이끄는 여자의 글쓰기
단단丹旦 이동용 (철학아카데미)
머리말 —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용기
세상 사람들은 왜 한강의 작품을 읽는 것일까? 사실 나는 그녀가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그동안 얼마나 홀로 참고 견디고 버텼어야 했을까. 무관심 속에서 보낸 그녀의 시간들이 나의 가책을 향해 끊임없이 몰락하는 눈송이처럼 퍼부어 댄다. 그래도 늦지 않아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어서.
안다, 알지 못한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용서한다, 용서할 수 없다. 생각한다, 생각할 수 없다. 잊었다, 잊을 수 없다. 살아간다, 살 수 없다. 시간이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숨을 쉰다, 숨을 쉴 수 없다. 아프다, 아프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이 되어 모이고, 그것들이 모여 작품 속 시간이 되고 꽃이 되고 별이 되는 이야기로 승화된다.
이번에는 시대의 숙제를 푼다는 마음으로 작가 한강의 책들을 손에 들고 시간을 보내보려 한다. 시간이 있다. 이야기가 있다. 소설이 있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흰》, 《작별하지 않는다》를 차례로 읽고자 한다. 처음 두 권은 각각 세 개의 장으로, 나머지 두 권은 각각 두 개의 장으로 나눠서 살펴볼 것이다. 모두 열 개의 장이 독서의 길을 만들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까? 어떤 사람은 그렇게 잔인할 수 있다. 철학적 용어로는 ‘다양성’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말을 하지만, 그 개념이 떠안아야 할 시간과 공간의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철학은 문학을 감당해야 하고, 문학은 철학을 허용해야 한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야기다. 비상계엄이 내려진 때의 사건을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것을 ‘비가 온다’, ‘새벽이 온다’, ‘시간이 온다’로 나눠서 살펴본다. 이 모든 시간들, 모두 싫지만, 싫어도 감당해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이렇게 세 권으로 나눠져 있고, 독서도 작가가 만들어놓은 길대로 걸어갈 것이다. 남편에서 형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언니가 시선을 맡는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에 대한 고민은 심연을 이룬다.
《흰》은 흰색과 관련한 한강의 기억과 생각들 모음이다. 이야기를 엮어내는 소재들이 돋보인다. 하양이 눈에 들어온다. 공과 무를 연상케 한다. 하얀 바탕에 글을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삶이 시작하고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것도 외면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 이야기다. 큰 강물을 이룬 시간은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 번 선택한 것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잊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외면하다가 의미가 작아진 것에 불과하다. 양심이 앞장서서 어둠 속에 묻어버리는 행위가 일상 속의 소행들이다.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 작가이다.
사람의 삶, 인간의 인생, 존재자의 존재, 이것을 노벨문학상으로 영예를 얻은 한강의 글들을 읽어보며 인식을 구해보고자 한다. 아직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있을 수 있어도, 생각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지만, 불가능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뭐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가 불가능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지옥부터 데려가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르는 단테처럼, 그런 따름이 오히려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의 행위가 될 것임을 인정하고 독서에 임해 주면 된다. 한강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잉태했고 또 어떻게 엮고 풀어냈던 것일까? 심연 위로 윤슬이 반짝인다. 박명 같은 불길이 쏟아놓을 이야기가 궁금할 뿐이다. 궁금하면 됐다. 이제 그만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2025년 4월 수유리에서
이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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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머리말 —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용기
1부 — 《소년이 온다》
I. 비가 온다 — 나쁜 소식이 온다
II. 새벽이 온다 — 계엄군이 온다
III. 시간이 온다 — 견딤의 기억이 온다
2부 — 《채식주의자》
IV. 〈채식주의자〉 — 남편의 시선 — 낯선 만남
V. 〈몽고반점〉 — 형부의 시선 — 꽃과 몸
VI. 〈나무 불꽃〉 — 언니의 시선 — 하얀색 꿈
3부 — 《흰》
VII.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날의 깨달음
VIII. 눈 내리는 겨울 이야기가 남긴 하얀 입김처럼
4부 — 《작별하지 않는다》
IX. 늘 불분명한 경계로 남는 꿈과 생시 사이
X. 끝까지 타야 하는 생명의 불꽃
맺는말 — 살아서 높은 별이 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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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기독교의 성경에는 가톨릭에서 쓰는 것(73권)과 개신교에서 쓰는 것(66권)이 따로 있다. 이 책에서 인용이 필요할 때는 개신교의 성경을 사용하도록 한다.
•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는 성경의 문체를 가급적 살리기 위해 쉼표나 마침점 등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고, 인용의 마지막 부분에만 마침이라는 기호의 의미로 마침표를 남겨놓도록 한다.
• 가톨릭교의 개념들, 예를 들어 하느님이니 그리스도교니 하는 것을 지양하고, 하나님이니 기독교니 하는 식으로, 즉 개신교의 개념을 선택하여 옮겨놓았음을 밝혀둔다.
• 본문에 언급된 한강 작가의 인용문들은 책 제목 중 두 글자와 페이지 숫자만 밝히도록 한다.
• 그의 글을 본문에서 인용을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약어나 한 글자의 책 제목으로 표시한다.
소년 = 《소년이 온다》, 창비 초판/2014, 초판 175쇄/2024.
작별 =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 = 《채식주의자》, 창비 초판/2007, 개정판 71쇄/2024.
흰 = 《흰》, 문학동네 2판 25쇄/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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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비가 온다 — 나쁜 소식이 온다
단단丹旦 이동용 (철학아카데미)
1. 비극이 시작되다
하나의 희곡이 연극 속의 그리고 무대 위의 시간과 공간을 연출해 내는 원인이 되듯이, 하나의 소설은 상상이라는 영역 속에서 무한한 이야기의 원인이 되고, 또 거기서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엮어가며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소설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관련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벌써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다. 소설을 읽기도 전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숨을 고르고 책장을 넘긴다.
비가 올 것 같아. /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 (소년, 7쪽)
너는 키가 작아 1학년처럼 보이는 중3 남학생 동호라는 소년이다. 이야기는 이 소년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동호가 실존 인물인가? 그날 그 시점에 정말 비가 왔었나? 그런 역사적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롯이 작가의 글이 이끄는 대로 생각이 펼쳐질 수 있도록 허락해보자. 기압이 낮다. 저기압이다. 모든 것이 바닥으로 향하는 그 상황에서 버텨야 하는 지경을 떠올려보자. 쓰러질 것 같지만 절대로 쓰러져서는 안 되는 그런 한계까지 가보자.
“비가 올 것 같아.” 연극 대사 같다. 소설의 시작을 알려주었던 제목은 ‘소년이 온다’였다. ‘온다’는 이 말은 이미 강이 되어 조용히 흐르고 있다. 소년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내뱉은 말이 예감과 예상과 예측으로 가득하다. 정말 올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인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알 수 있다와 알 수 없다가 치열하게 대치한다.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소리를 내서 말을 해야 했던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생각이 배경 음악처럼 잔잔히 흐른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고, 너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비가 올 것 같아.” 누구에겐 그 비가 먼지를 씻어주어 마침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소년이 느끼는 비에 대한 예감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속수무책이다. 비가 쏟아지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쏟아지는 비는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이다. 정말 비가 올까? 의심이 앞서지만 회의적이다. 정말 비가 올 것이다. 비가 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다. 정말 그럴까? 의심은 포기를 모르고 생각을 점령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은 있지만 대답은 없다.
네 번째 문단에서 ‘너’의 행위는 ‘지켜본다’는 동사로 집중한다. 마치 수루에 홀로 앉아 밤새도록 망을 보는 우리의 영원한 장군 이순신을 닮기도 했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즉시 반응할 요량으로,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오면’ 즉각적으로 대응할 요량으로. 한없는 긴장감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지켜봐야 하는 순간이다.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다. 우리의 장군처럼, 한산해야 할 한산한 섬, 한산도에서도 쉴 수 없었던 우리의 장군처럼, 그렇게 쉬지 않고 버텨야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누군가가 어둠을 뚫고 ‘불쑥’ 나타나면 머뭇거림 없이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고,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다수의 무리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공격해 오면 지체 없이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무심코 내뱉어진 소년의 ‘중얼거림’은 절박하고 애절하며, 간절하고 절실하며, 게다가 불쌍하고 안타깝기까지 하다. ‘비가 온다’의 의미는 함축적이다. 우리 모두는 그날 그때 그 당시의 일들을 너무도 자세하게, 거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에, 시작부터 숨이 막힌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그 소년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어둠 속의 모든 것이 심장에 박힐 예리한 화살처럼, 신경을 끊어놓을 날카로운 칼날처럼 달려들고 있는 느낌이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답이 없다. 어떤 저항도 무의미한 상황이다. 비라는 상대는 너무도 거대하다. 골리앗과 맞섰던 다윗에게는 신의 도움으로 기적이라도 일어나주었지만, 소년에겐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은 믿음의 대상이 되기엔 부족한 게 너무도 많다. 비가 오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2.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중세 천 년 동안 사람들은 영혼의 행방에 대해 정해진 답변으로 스스로 주눅 들어 있었다. 사람은 죽으면 저편으로 넘어간다고. 그런데 그 저편이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눠져 있다고. 지옥과 연옥과 천국으로. 지옥은 죄 지은 자들이 가고, 연옥은 신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 가고, 천국은 신을 믿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지옥과 연옥은 모두 불구덩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지만, 천국에서는 환한 신의 빛 축제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뜨거운 불과 환한 빛으로 갈려버린 이분법이 세상을 지배했다. 이런 이분법이 천 년 동안 위력을 과시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죽을 것임을 명심하라! 죽기 전에 신을 믿고 신의 나라 천국으로 가도록 하라! 이런 소리가 중세의 것이었다. 현대조차 여전히 중세의 그늘에 가려 있다. 이런 소리를 아직도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자들이 세상에 차고도 넘친다. 모두가 자신이 신의 천사가 되리라는 믿음에서 한없는 즐거움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신앙은 신앙일 뿐이다. 믿음의 세계는 믿음으로 머물 뿐이다. 아무도 죽어본 사람이 없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죽을 뻔했던 사람은 있어도 죽음의 세계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없다. 이승과 저승은 선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다. 이승은 이승이고 저승은 저승일 뿐이다. 사람은 삶을 통해서만 증명되고, 삶은 사람을 통해서만 증언될 뿐이다. 이제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한강의 글 속으로 다시 몰두해보자.
더는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너는 허리를 편다. 어둑한 실내를 둘러보자,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 /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 더 갈아줘야 할 초들이 없는지 찬찬히 살피며 너는 출입구를 향해 걷는다. /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 강당을 나서기 직전에 너는 뒤돌아본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 침묵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과 지독한 시취뿐이다. (소년, 12쪽부터)
눈과 코를 가진 존재에게는 형상과 냄새가 문제이다. 보이는 것이 현란하고 화려하면 황홀해지고, 냄새가 향기롭고 그윽하면 행복한 감정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반대도 있어서 문제이다. 눈은 귀신도 보고, 코는 악취도 맡게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사람은 보는 법도 배워야 하고, 냄새를 맡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귀신을 물리치고, 악취에도 물러섬이 없이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할 뿐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이 자꾸만 쌓여 간다. ‘서른개의 관들’(소년, 8쪽), ‘스물여덟개의 관들’(같은 곳), ‘여든세개의 관들’(소년, 9쪽), 이렇게 관들을 헤아리며 소년은 쫓아간다. “너는 장부에다 그들의 이름과 관 번호를 덧붙여 쓴 뒤, 긴 괄호로 목록을 묶고 ‘합동추도식 3’이라고 적었다.”(소년, 9쪽) 관들을 정리 정돈하는 것이 소년이 하는 일이다. 관들 속에는 죽은 사람이 들어 있다.
사람들은 관들로 가득 찬 실내에 촛불을 밝힌다. 불이 ‘냄새를 태워준다’(소년, 12쪽)는 상식을 근거로 하여 초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 속에 작은 심장이나 사과 속씨 모양으로 흔들리는, 심지를 둘러싼 파르스름한 불꽃 심을 너는 본다.”(소년, 12쪽) 불꽃을 본다. 한강은 규칙적으로 반복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이런 불꽃을 주시한다. 삶에의 의지라고 할까. 멈출 수 없는 삶의 흐름이라고 할까. 그 삶의 중심을 ‘너는 본다’라는 말 속에 한강의 시선이 스며든다.
그리고 촛불은 죽은 사람들의 눈동자로 연결된다. 나는 너와 촛불 사이에서 거리를 둔 채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너가 촛불을 보는 형식에서, 촛불이 너를 보는 형식으로 상황이 변한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상황을 너가 된 나는 조용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결코 너와 촛불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자의적인 개입을 자처하지 않는다.
소년은 자신을 향해 질문을 하나 던진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너의 생각은 몸과 죽음 그리고 혼으로 이어진다. 혼의 향방은 인간의 문제이다. ‘죽어도 산다’는 이 명제는 오랫동안 우리를 구속했다. 중세 천 년이 이런 명제에 의해 구속당했다. 그래서 ‘메멘토 모리’라는 말 한 마디가 죄의식을 고취시키고 종교에 얽매이게 하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믿어도 죽음은 기어코 찾아들고 만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하는 질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문제이다. 아무리 중세를 암흑기라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중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신을 부정해도 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천국을 허상이라 우겨도 천국을 실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곳을 향한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하지만 한계가 한계로 인식되면 상황이 돌변한다. 반전이 그곳에 있다.
돌변이 되었든 반전이 되었든 인식이 되었든 깨달음이 되었든 상관없다. 돌변, 반전, 인식, 깨달음, 이들은 모두 같은 형식 속에서 의미를 취한다. ‘단말마의 고통’은 불교가 전하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인식의 소리이다. ‘이게 바로 너로구나’라는 말은 힌두교가 전하는 인식의 순간에 인간이 내뱉을 수 있는 마지막 소리에 해당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2)는 기독교가 복 있는 삶, 즉 구원의 길을 터주는 지혜로운 소리이다. 뭐가 됐든 상관없다. 인간은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문제이다.
혼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넋은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신명 또한 들기도 하고 나기도 한다. 신명이 나면 놀 수 있지만, 신명이 들면 신들린 사람이 되어 정신 줄을 놓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은 차리고 살아야 한다. 또한 사물은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소리를 본다는 관음觀音의 경지가 최고의 경지로 인정받게 된다. 소리는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말귀를 알아들으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 없다는 있다를 전제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없다! 정말 그럴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없는 것일까? 혼의 실존에 대해서 함부로 부정하는 발언이나 행위는 삼가야 한다. 아무리 혼을 부정해도 혼 자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존의 문제다. 혼은 인간의 문제 그 자체이다. ‘혼들이 없다’는 말은 그저 ‘혼들이 있다’는 말을 추궁하기 위한 발언에 불과하다. 한강은 이 말에 의지를 싣고 목숨을 건다.
3. 비가 오면 비에 젖는다
걱정과 불안은 인간의 문제이다. 인간이라면 걱정과 불안 없이 살 수 없다.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인간이 구원을 갈망하는 것도 바로 이 걱정과 불안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결국 이 세상에서, 이 이승에서 살고 싶으면 어쩔 수 없이 걱정과 불안을 책임지고 떠안아야 한다. 걱정과 불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적인 것일 뿐이다. 인간이라 적어놓고 그 속성을 밝히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반대로 인간은 꿈과 희망의 동물이기도 하다. 늘 걱정과 불안이 있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항상 꿈과 희망의 원리가 고개를 든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계속해서 시체가 늘어나 쌓이기 시작한다. 늙으면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내줘야 하는 것처럼, 새롭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먼저 죽은 사람들은 자리를 내줘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처사이다. 그런데 비가 올 것 같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충돌한다.
이튿날 아침 누나들과 너는 악취가 심한 몸들 몇을 민원실 뒤뜰에 내놓았다. 새로 실려오는 죽은 사람들을 눕힐 공간이 더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바쁜 걸음으로 상황실에서 건너온 진수 형은 놀라며 물었다. / 비가 오면 어쩌려고요? / 죽은 사람들로 발 디딜 곳이 없는 통로를 당혹한 표정으로 둘러보는 진수 형에게, 마스크를 벗으며 선주 누나가 말했다. / 여긴 너무 좁아서 방법이 없어요. (소년, 18쪽)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려 할 때 늘 따라다니는 것이 현실인식과 상황판단이다. 현실은 인식되어야 마땅하고, 상황은 파악되어야 이치에 맞는 말과 행동이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현실 감각은 전혀 없고,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고민은 완전히 도외시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사회가 만들어준 유행이나 명령에 자신의 삶 전체를 내맡기고 사는 사람들이 대중을 이룬다.
대중은 양심의 가책 따위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명령을 따랐기에 오히려 너무도 당당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특별한 해택이나 보상까지 바란다. 그렇지만 무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항상 전혀 다른 생각이 출몰한다. “비가 오면 어쩌려고요?” 느닷없다. 비가 비와 맞서는 형국이다. 비가 전혀 다른 의미의 비와 맞서고 대치하면서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사물이 다른 사물과 엮이면서 완전히 다른 시간과 공간을 창출해 낸다.
시작을 알렸던 “비가 올 것 같아”는 혼잣말이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강렬했다. 그런데 지금 읽고 있는 “비가 오면 어쩌려고요?”는 사물을 기준으로 하여 상대를 향한 말, 즉 상대를 향한 대화의 말이며 비에 젖을 시체에 대한 배려의 의미가 더 강하다. 시체는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비에 맞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자리가 부족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가 따로 없다. 버리지도 버릴 수도 없는 지경이 이런 것이다.
시체들을 뒤뜰에 내놓은 것이 부당한 것일까, 아니면 비가 오면 시체가 비에 젖을 것을 걱정하는 생각과 행동이 정당한 것일까. 어느 한 쪽을 편들기 쉽지 않다. 부당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정당하다고 단정짓는 것도 섣부른 판단에 불과할 뿐이다. ‘둘 다 맞다’는 것이 인간적인 존재의 문제가 보여주는 실상이다. 둘 다 납득이 가는 말이고 생각이고 행동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이런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실존의 영역으로 들어설 뿐이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상황은 상황일 뿐이다. 이런 상황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벗어날 생각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문제는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만든 주체가 상대도 못할 괴물 같은 존재라면 문제가 심각해지고 만다. 괴물이 모든 것의 주체라면 미궁이 따로 없다. 답이 없고 길이 없고 출구가 없다. 도망칠 구멍이 없다. 이 좁은 곳에서 공간을 마련하고자 발버둥치는 것이 산 사람의 숙제일 뿐이다.
비가 오면 큰일이다. 비가 오기도 전인 지금도 난리 났다. 발 디딜 틈이 없다. 시체들로 꽉 차버린 공간이 삶을 압박한다. 상황이 이 지경이어도 산 자는 살아야 한다. 그것이 존재자가 처한 존재의 문제 상황이다.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분명하고, 그래서 선명하게 존재하는데, 답이 전혀 안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큰일이다. 궁지에 몰린 생쥐의 신세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죽은 목숨이 이런 경우일까.
4. 오늘밤에 계엄군이 온다
비에 젖은 사람은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당연한 것을 두고 고민했던 작가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비에 젖을 시체에 대한 걱정이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산 사람의 걱정이나 다 이치에 맞는 말이면서도 비극의 소재가 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비와 시체 사이와 비와 사람 사이는 서로 교차하면서 존재의 존재성을 복잡하게 구축해 낸다. 죽음이 있어서 삶이 있고, 삶이 있어서 죽음이 있다. 이 당연한 현상 앞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지금부턴 내가 있을 테니까 집에 가서 옷 갈아입어. 여기 와볼 사람들은 이제 다 왔다 갔나봐. / 난 비 별로 안 맞았는데. 누나가 옷 갈아입고 와. / 우물우물 카스텔라를 씹으며 네가 대답한다. 목이 막혀 요구르트를 들이킨다. / 너 땀 냄새 많이 나. 도청서 먹고 잔 지 한참 됐잖아. / 네 뺨이 붉어진다. 별관 화장실에서 세수할 때 늘 머리까지 함께 감았다. 시취가 뱄을 것 같아 밤이면 이를 딱딱 부딪히며 찬물로 몸도 씻었는데, 소용없었나보다. / 집회에서 들었는데, 계엄군이 오늘밤에 들어온대. 집에 가면 이제 오지 마. / 은숙 누나가 문득 고개를 움츠린다.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나보다. 젖은 잔머리를 손끝으로 골라 점퍼 깃 위로 빼내는 그녀의 손동작을 너는 잠자코 지켜본다. 처음 봤을 때 귀엽다 싶게 통통하던 그녀의 얼굴은 며칠 사이 야위었다. 검고 우묵해진 그녀의 눈언저리를 유심히 보다 너는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살았을 땐 몸이 어디에 있을까. 찌푸린 저 미간에, 후광처럼 정수리 뒤에, 아니면 심장 어디께에 있을까. (소년, 26쪽부터)
“정말 비가 쏟아지겠어.”(소년, 21쪽)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비가 올 것 같더니, 이제 정말 비가 쏟아질 지경이다. 정말? 그래, 정말! 예상했던 것이 현실이 된다. 정말 비가 오는 것이 현실의 현상이 된 것이다. 모두들 옷이 흠뻑 젖었다. 이것이 현실의 실상이다. 비 때문에 난리가 난 것이다. 모두들 생고생이다. 고생은 고행이 아니다. 고생은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고행은 선택의 몫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고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누나도 여자다. 누나를 대하는 너도 남자다. 그런데 누나가 한 말이 귀에 걸린다. “너, 땀 냄새 많이 나.” 이에 대한 너의 반응은 말없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네 뺨이 붉어진다.” 부끄럽다.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를 부끄럽게 만든다. 이런 산 사람의 냄새는 이미 시취에 대한 앞선 이야기와 절묘하게 겹치면서 참으로 묘한 상황을 연출해 낸다. 인간적인 상황과 비인간적인 상황이 그물을 만드는 실들처럼 겹치며 엮인다. 사물이 사물과 겹치고 엮인다.
집에 가면 옷만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저녁 식사도 할 수 있다. 그런 기회를 누나는 동생에게 주려하고, 동생은 그것을 누나에게 미룬다. 동생 먼저, 누나 먼저, 이것은 보기 좋은 상황이지만, 그것이 보기 좋은 상황을 연출해 주고 있기에 비극의 조건이 갖춰진다. 아무도 집에 가지 않는다. 모두 남는다. 여기라는 공간을 선택하고, 여기에 남은 자는 여기서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하고 또 그 한계에서 운명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누나는 동생에게 경고한다. “집회에서 들었는데, 계엄군이 오늘밤에 들어온대. 집에 가면 이제 여기 오지 마.” 누나의 배려이다. 가면 오지 말라! 그래야 네가 산다! 그것이 누나의 마음이다. 동생은 살아야 한다. 나는 죽더라도 너는 살아야 한다. 동생의 마음에도 이미 결심은 섰는데, 누나의 당부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계엄군’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만다.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자력과 같은 힘을 발휘한다.
군대가 온다. 경찰이 아니라 군대가 온다. ‘비가 온다’는 말에서 ‘계엄군이 온다’는 말로 이어지는 현상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경악을 하게 한다. 모든 것이 심연을 이루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깊고 깊은 심연 속에 갇힌 어둠의 세계라고 할까. 이 하나의 단어가 연결시켜 놓는 시간과 공간은 모든 것을 어둠 속에 가두고 만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순간이 이런 것이다.
군대의 속성은 명령에 의해서 밝혀진다. 중세의 불행은 십자군 전쟁에서 절정을 이룬다. 역사가 폭로하는 거의 모든 절정의 순간에서처럼, 거기에도 잔인함이 도사리고 있다. 믿음, 신앙, 신념에 사로잡힌 군인들이 사람들을 죽인다. 종교가 사람을 살인자로 만든다. 믿는 자는 신념을 통해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람을 죽여 댄다. 신념을 통해, 그리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것이 사람을 이토록 잔인한 괴물로 만든다.
계엄군이 오니까, 너는 집에 가면 더 이상 오지 말라. 이것이 누나의 조언이었고 부탁이었다. 하지만 너는 이런 말을 듣고 다른 생각에 빠져든다. 누나가 ‘젖은 잔머리를 손끝으로 골라 점퍼 깃 위로 빼내는 손동작’을 관찰한다. ‘처음 봤을 때 귀엽다 싶게 통통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너의 생각은 침묵 속에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지속해서 ‘어린 새’의 행방에 대해 질문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소년, 23쪽) 그 질문은 이제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살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 하며 지속되고 있다. 너는 누나의 혼을 보고 싶을 뿐이다. 계엄군이 온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너의 관심사에 시선을 던질 뿐이다. 사람이 좋다. 누나가 좋다. 싫은 것을 생각하며 신경 쓰기보다 좋은 것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5. 정말 다 죽을까
“비가 올 것 같아.”(소년, 7쪽)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같은 곳) “정말 비가 쏟아지겠어.”(소년, 21쪽) “투둑, 빗방울이 네 상고머리로 떨어진다. 얼굴을 들자 뺨으로도, 이마로도 마구 떨어진다. 삽시간에 빗발이 되어 쏟아진다.”(소년, 23쪽) 정말 비가 올까? 이제 이런 질문은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비가 오는 것은 실제의 일이 되었다. 이야기는 은숙 누나에서 선주 누나로 바뀌었을 뿐, 그런 인물의 변화는 중요하지 않다. 사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을 뿐이다.
누나도 비 맞았는데 집에 갔다 와요. 은숙 누나는 옷 갈아입는다고 갔는데. / 뭣하러? 저녁에 일하면 또 땀범벅 될 텐데. / 그녀는 빈 알루미늄 포일을 접고 또 접어서 새끼손가락만 하게 만들어 움켜쥐고는 빗발을 바라본다. 그 옆얼굴이 말할 수 없이 침착하고 단단해 보여서, 갑자기 너는 뭐든 묻고 싶어진다. / 오늘 남는 사람들은 정말 다 죽어요? / 묻지 않고 너는 망설인다. 죽을 거 같으면, 도청을 비우고 다 같이 피해버리면 되잖아요. 왜 누군 가고 누군 남아요. / 그녀는 쥐고 있던 포일 조각을 화단에 던져버린다. 빈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피곤한 듯 눈두덩과 뺨, 이마와 귓바퀴까지 세차게 마른 세수를 한다. (소년, 28쪽)
밤이다. 잠을 자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깨어 있다. 잠을 잘 수가 없다. 앞서 은숙 누나로부터 ‘계엄군이 오늘밤에 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그리고 너는 자신의 내면에서 질문이 고개를 들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발을 단단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선주 누나에게 용기를 내서 그 질문을 꺼내놓고 싶었다. “오늘 남는 사람들은 정말 다 죽어요?” 어디선가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나보다. 계엄군이 오면 다 죽는다. 정말 그럴까?
정말 다 죽게 될까? 너무 끔찍한 질문이라 정작 꺼내놓지는 못한다. 정말은 정말로 이어졌고, 또 다시 그 정말은 전혀 다른 정말로 이어지면서 낯선 질문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 정말? 그래, 정말! 정말 그럴까? 그래, 정말 그렇다! 이런 식으로 예상은 빚나가지 않았다. 비가 올 것 같더니 정말 왔다. 계엄군이 올까?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실타래가 되어 비극의 주축을 형성한다. 이 나라, 이 민족이 감당해야 할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아니, 한강이 엮어낸 이 이야기는 이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문제이고, 인류의 문제가 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모든 역사적인 현장에서 벌어진 잔인한 인간의 문제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한강의 문제의식은 이런 데서 불을 밝힌다. 그녀는 어둠 속에 묻힌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무서운 이야기처럼, 그렇게 전설이 된 것을 통해 소설을 써낸다. 실존 인물, 소설은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은 지극히 역사적 의미를 품는 데 성공한다. 어린 소년 소녀들이 총을 들고 싸운 것도 사실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한강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구축했고, 그 형식 속에서 그녀는 인간의 비극을 담아냈다. 비가 온다, 계엄군이 온다, 정말 비가 왔다, 계엄군은? 계엄군이 왔을 때의 이야기는 없지만, 예상하는 대로 직감할 수 있게 해 놓는다. 작가는 이토록 잔인하다.
“죽을 거 같으면, 도청을 비우고 다 같이 피해버리면 되잖아요. 왜 누군 가고 누군 남아요.” 중요한 질문이다. 너는 이 질문을 꺼내놓고 말았다. 질문이지만 대답을 추궁하는 질문이 아니라 주장이 담긴, 그러니까 대답을 강요하는 일종의 수사학적 질문이다. 힘을 합쳐야 겨우 이길 수 있다. 힘을 합쳐도 모자란 것이 계엄군이라 불리는 군인들과 맞서야 하는 싸움이다.
도망가면 살겠지만, 도망갈 마음이 없다. 동생은 누나를 두고 갈 수 없고, 누나는 동생을 두고 갈 수가 없다. 밤은 지속되고 있지만 잠을 잘 수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잠을 외면하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빈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누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은 비극적인 장면을 연출해 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마음이 마음과 맞닿아 전해지는 사랑의 이념이 이런 데서 빛을 발한다.
빛이 있어서 시선이 가기도 하지만, 시선이 발견되어서 빛이 탄생하기도 한다. 사람이 보는 것에서 빛이 탄생한다. 이런 신비로운 일을 한강은 실현시켰다. 밤이다. 어두운 밤이다. 졸리다. 피곤하다. 자고 싶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잘 수 없다. 욕망에 반하는 의지의 출현이 돋보인다. 무덤조차 갖지 못한 수많은 혼들을 위한 비극 축제가 소설의 형식으로 진행 중이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내야 하는 막중한 숙제를 떠안고 있다.
6. 목격자에게 주어진 책임과 양심의 문제
살고 싶다. 사람은 살고 싶어 한다. 삶은 사람에게 필연이고 운명이다. 사는 동안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어쩔 수 없다.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그냥 살아야 한다. 이유가 없다. 죽으면 단순하게 사람이라 말할 수 없는 지경이 펼쳐지고 만다. 죽은 사람! 즉 사람 앞에 형용사가 덧붙게 된다. 몸을 지칭할 때조차 시신이니 시체니 하는 말로 따로 분리되어 명명된다.
그런데 사람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려 한다. 어떤 생각에 매몰된 사람은 그것만 본다. 하나의 이념에 갇힌 사람은 다른 이념을 적대시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타인을 판단하고 평가하며 혐오한다. 누구에겐 한없이 잘된 일들이 누구에겐 하염없이 못된 일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겐 웃지 못할 일들이 누구에겐 눈알이 빠지도록 눈물을 쏟아놓게 한다.
누구는 살았고, 누구는 죽었다. 동호와 정대, 둘은 친구 사이였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있었기에 주어진 현실과 상황은 동일하다. 그런데 삶과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았다. 누구는 살았고, 누구는 죽었다. 만남이 이별로 맞서고 겹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는 말을 해야 한다.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갔지만, 산 자는 이승에서 의식을 지속시켜야 한다. 말이 의식을 선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존재의 숙제로 주어진 것이다.
사람의 의식은 수면 위의 영상처럼 의식적으로 띄워야 한다. 심연을 뚫고 표면까지 떠오른 영映이 영靈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사람은 지난 일을 인식해야 하고, 과거를 해석해야 한다. 이런 인식과 해석을 통해 역사가 탄생한다. 늘 현상이 역사를 앞서고, 항상 예술이 철학을 앞서며, 언제나 인식은 이야기를 앞선다. 그렇다고 철학이 예술을 넘어섰다고 말하는 실수는 없어야 한다. 인식은 늘 연결과 관계, 연속과 지속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역전에서 총을 맞은 두 남자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 시위대의 맨 앞에서 행진했던 날, 중절모를 쓴 노인부터 열두어살의 아이들, 색색의 양산을 쓴 여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던 저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정대를 본 건 동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옆구리에 총을 맞는 것까지 봤다. 아니, 정대와 너는 처음부터 손을 맞잡고 선두로, 선두의 열기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귀를 찢는 총소리에 모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공포다! 괜찮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 대열로 돌아가려는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의 손을 놓쳤다. 다시 총소리가 귀를 찢었을 때,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 하고 너는 달렸다. (소년, 31쪽)
너는 달아나고 있다. 너는 도망치고 있다. 너는 친구를 남겨놓고 떠나고 있다. 너는 친구에게 등을 보이며 멀어지고 있다. 너는 양심도 없이 현장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살고 싶다!’ ‘삶을 선택한 것도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이다!’ ‘걸음아 나 살려라!’ 등, 이런 말들이 가책을 잠재울 수 있을까. 살고 싶어서 떠난 떠남이 합리적인 해답을 안겨줄까? 늘 남겨진 자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항상 죽어 떠나버린 자의 형상이 눈앞을 가린다.
지나가면 한 순간이 되겠지만, 그 순간이 영원을 떠안게 한다. 늘 순간이 있어서 영원이 있다. 순간이 없는 영원도 없고, 영원이 없는 순간도 없다. 시간은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의 삶은 시간 속에 있고, 그 시간 속에 삶이라는 내용을 채워야 한다. 시간이 형식이고 삶이 내용이 된다는 말에서 인식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영원한 질문이 되는 것이다.
질문이 있으면 대답은 늘 뒤따르기 마련이다. 힌두교와 불교에는 “줄기 없는 연꽃은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어떤 말로 묵상을 거듭하든 상관없다. 끝까지 가는 자가 깨달을 것이고 신을 만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고 받아들이든 상관없다. 문제는 언제나 시간이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관건이라는 얘기이다. 도망치고 있는가? 남아서 목숨을 거는가?
도망쳤다고 해서 그런 행위에 대해 비겁이라는 허울을 씌우는 것도 섣부른 태도이고, 남아서 목숨을 걸고 또 거기서 죽음을 맞이한 자에 대해서 정치적 논쟁이나 이념적 논쟁으로 그 의미를 폄하하는 것도 실례가 된다. 인식은 언제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갈등은 없을 수 없지만, 인식이 오면 깨달음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펼쳐보일 것이다. 상대를 향한 손가락질보다 사랑이라는 이념으로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지경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이상은 늘 먼 곳에서 유혹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깊은 심연에서 끝까지 버티는 것이 관건이다. 버틸 때는 말을 삼가는 것도 기술이다. 판단은 유보되어야 한다. 유보하는 행위는 또 다시 시간 보내기의 문제와 연결될 뿐이다.
늘 고통은 산 자의 몫이다. 항상 양심은 살아남은 자의 숙제가 된다. 언제나 ‘함께’라는 그 순간이 실존의 문제로 등극하고 만다. 신이 너와 함께 한다는 임마누엘이 기독교의 개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함께라는 순간 자체를 기독교가 독점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래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
7. 용기와 용서 사이
용기勇氣와 용서容恕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영역에서도 서로 비슷한 현상에 연결되어 작동한다. 용기는 안에서 밖으로 향한다. 그래서 용기는 내야 하는 것이고, 용기는 부려야 하는 미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용서는 밖에서 안으로 향한다. 가해자를 향해 있던 공격적인 마음이나 부정적인 정서를 피해자가 스스로 거둬들이는 것이 용서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런데 용서의 전제는 가해자의 반성이라는 것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용서가 가능하지 않다. 이런 가해자의 가해 행위를 직면하고서도 반성에의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가 있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이다.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의 논리는 정해진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잘하는 짓인 것처럼 생각하며 행동으로 옮길 때도 있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인 줄을 알면서도 망설이거나 주저할 때도 있는 것이다.
죽음이 있다. 시체가 있다. 죽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스스로 원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가해자가 있는 피해자의 죽음이다. 살인의 현장이다. 그런 죽음 앞에서 ‘나’는 망설이고 주저한다. 용기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다. 아니 용기도 용기 나름이고, 용서도 용서 나름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사안이 되는 것일까. 죽음 앞에서도 눈을 감지 않는 자의 마음은 어떤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혼은 자기 몸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 눈이 더 나빠져 가까운 것도 흐릿하게 보이면 좋겠다고 너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명천을 걷기 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 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소년, 45쪽)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노인의 말이다. 분노에 벌벌 떠는 노인의 입에 담긴 말이다. 한강은 이런 말을 노인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소년은 그런 말을 입에 담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는 인물로 대응하게 해 놓았다. 세대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는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다.
노인의 언어는 과거의 사실을 품고 있다. 말에는 감정이 실리고, 그 감정을 공감할 수 있을 때 역사는 탄생한다. 공감할 수 없다면 그저 폐허와 같은 현실만 주어질 것이다. 고대의 도시들을 여행할 때, 신들의 세계에 대한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나 가치관 따위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저 단절된 현상을 향한 안타까움은 피할 길이 없다. 그때 발생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단절뿐만 아니라 스스로 역사 속에서 버려짐이라는 지극히 심각한 문제를 낳고 만다.
한강은 말을 만들어 냈다. 작품이 되는 말을 탄생시켰다. 그런 말을 작품 속의 언어로 만들어 낸 것이다. 소년은 생각을 거듭한다. ‘너는 생각한다’에서 너는 나의 의식을 대변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자의식을 대변한다. 나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대답은 쉽게 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판단은 유보되어야 마땅하다. 아직 지금과 여기를 책임질 수도 없는 자가 쉽사리 꺼내놓는 말은 그저 독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시대라는 거울 속을 들여다보게 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한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이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진행시키는 생각이 과연 나의 생각으로서 정당한 것일까? ‘비가 온다’, ‘계엄군이 온다’, 그런데 나는 이런 위중한 순간에 생각을 거듭한다.
‘나’는 여전히 혼의 존재 여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뿐이다. 정의나 불의 따위보다는 인간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사회적인 문제보다는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잘잘못을 따지자는 얘기가 아니다. 단단丹旦 이동용
단단丹旦 이동용 (010-3261-3913; 이메일 sapereaude@hanmail.ne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germanist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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