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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쯔네는 서둘러 부산성 안으로 들어갔다.
닷새가 지난 시점이었지만 당시 이곳 부산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불타버린 잔해들이 그대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성 안은 거의 대부분이 불에 탔거나 허물어져 있었다. 불길이나 연기는 사라졌지만 매캐한 냄새는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사방으로 피가 흘러 고여 있다가 말라붙은 흔적들이 고랑처럼 즐비했으며, 또한 성문 주위로는 아직 채 묻거나 태우지 못한 시체들도 수북이 쌓여있었다.
하긴 나가쯔네가 전해들은 바에 의거하여도 그것은 전투라 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미처 전투에 대한 방비를 전혀 하지 못한 부산성 주민들을 향한 무차별 도륙이었다 해도 무방할 듯싶었다. 그냥 조총을 쏘고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벤 인간사냥터였다. 살려달라고 다리를 부여잡고 애원하는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끌어다가 목을 베었다. 항복한 병사들까지도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창으로 찌르고 칼로 목을 베었다. 그러나 자국군(일본군)에 대한 피해는 겨우 수십 명의 사망과 부상이 전부였던 것이다.
나가쯔네는 어쩌면 이 전쟁이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 부산성 뿐이었는가. 바로 다음날 한나절 만에 동래성도 함락되었고, 고니시가 북상하고 있는 전선에서도 변변한 저항 없이 빠르게 북상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전쟁이 끝나고 관백 앞에서 전공을 다투려면 앞서 진격중인 고니시에 비해 주군인 가토가 한참을 서둘러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도착하는 지금에 이미 이제까지 이룬 고니시의 전과에 버금가려면 한동안 무척이나 고생을 좀 하게 생겼다고 까지 생각되었다.
나가쯔네는 포로들을 시켜 선박을 통해 날라 온 식량을 야적하고 있는 병사에게 고스께를 찾는 중이라고 물었다. 병사는 화마 속에서도 그런대로 온전한 모양으로 남아있는 전각을 손으로 가리켰다. 전각의 대청마루 위에는 전시임에도 갑옷도 걸치지 않았고 칼도 휴대하지 않은 맨몸 차림의 나이가 제법 들었음직한 병사 하나가 무슨 서책 같은 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저 흔한 하급병사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고스께를 찾고 있네. 어디 있는지 아는가?”
서책을 보고 있던 병사는 고개를 들어 대충 흩고 지나는 듯 힐끗 나가쯔네를 살폈다.
“고스께를 찾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벙어리인가?‘
나가쯔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군기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병사의 태도에 짜증이 났던 것이다.
“무슨 일로 고스께를 찾으십니까? 장군.”
“뭣이라고? 네 놈 눈엔 장군은 보이면서도 뱃속의 복종심은 잠을 자는 중이란 말이냐?”
“장군의 모습은 분명 보이오나 제가 모시는 장군이 아니시기에 말씀입니다.”
“이 놈 봐라. 이 나가쓰네를 시정잡배 취급을.........”
“핫. 그러시면 사가라 나가쯔네 장군이시군요. 가토 장군님의 부장이신........”
“나를 아느냐?”
“대장군께서 여러 차례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고스께라 합니다. 앞으로 장군을 받들어 모시며 대장군께서 지시하신 일들을 처리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뭣이라? 앞으로 너를 내 휘하에 두라고 장군께서 이미 지시가 있으셨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뭐야? 이런 젠장........ 아무튼 너와 사루미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사루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대장군께서 사루미를 찾으십니까? 몇 번을 찾으시고 계십니까?”
“사루미를 당장 데리고 오면 될 일이지 몇 번이라니? 지금 사루미가 열 명쯤이라도 된단 말인가?”
“만나보시겠습니까?”
고스께가 전각의 안을 가리켰다.
나가쯔네는 군화를 신은 채로 터벅터벅 대청마루 위를 지나서 전각의 안을 들여다보다 말고 그야말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그는 허리춤에 찼던 칼을 뽑아들었다. 도무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정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조선 놈들이 아니냐? 전투가 이미 끝났고 성을 함락을 시킨 게 아니었단 말이냐?”
“장군. 고정하십시오.”
“이 놈. 고스께. 네 놈도 조선의 첩자였구나. 내가 함정에 빠지고 말다니.......”
“장군. 저들은 모두 가토 대장군님의 수하들입니다. 저들이 바로 사루미들입니다.
고정하십시오.”
“모두가 조선 놈들 아니냐?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점령한 성 안에서 죄 다 무장을 하고 버젓이 들어앉아있더란 말이냐? 토굴이라도 파고 들어왔느냐?”
“순왜(順倭)입니다. 일본국에 동화되어 스스로 찾아들어 온 자들이란 말씀입니다. 일부 노예로 끌려 온자도 있으나, 조선의 당쟁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생명을 구하려고 도망 온 양반도 있고, 장사를 하다 도적에게 모두 털려 돌아갈 곳이 없어 온 자도 있고, 죄를 짓고 도망을 다니다 쫓겨 온 자도 있습니다. 승려와 부녀자도 있습니다. 대부분이 저들 스스로 살겠다고 조선에서 도망쳐 온 자들입니다. 조선이라는 곳이 이미 오랫동안 당파싸움에 여기저기 집안이 통째로 몰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양반들의 재물탐닉에 대부분의 백성들이 하루하루 연명하기가 차라리 죽기보다 힘들다하니 저렇게 죽기 살기로 도망쳐 온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은 실정입니다. 하여 그들 중 극히 일부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차출하고 훈련을 시켜서 우리 군대에 필요한 무리들로 양성하였습니다. 안에 있는 자들처럼 평범한 조선인으로 정체를 숨기고 이미 조선의 각지에 침투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그럼 저들이 조선인이 아닌 우리 일본을 위해 일하는 간자(間者)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간인(間人) 이라고도 하고 세작(細作) 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영주 휘하에 있는 저들과 같은 무리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제 고향에서 간자를 빗대어 부르는 사투리인 사루미란 말로 저들 무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여 다른 곳에선 저희가 사루미라 부르는 뜻의 속내를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저들에겐 이름도 없습니다. 그저 사루미 하나. 사루미 둘. 사루미 셋........ 이렇게 숫자로 대신합니다.”
“네 말대로라면, 저들 사루미 같은 부류들이 이미 다른 영주의 군대에도 있단 말이냐?”
“이번 조선침공에 있어서 세작을 가장 먼저 창안하고 활성화한 영주는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 영주입니다. 고니시 장군 휘하에 부장으로 있는 소 요시토시(종의지)가 자신의 영지인 쓰시마(대마도)에서 노략을 일삼으며 납치해 온 조선인 중에서 자질이 있는 자를 뽑아 특별히 훈련시켜 조선해안 약탈에 투입시켜 커다란 성과를 얻으면서 본격 시작된 것입니다. 쓰시마에는 이미 전 왕조에서부터 귀화한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어서 모든 면에 매우 유리했습니다. 하여 우리는 정예로 오십여 명을 활용하고 있으나, 고니시 영주의 휘하에는 이백에 가까운 세작들이 이미 조선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습니다.”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
“제 놈들이 살았던 지역이기에 우리 군대가 나아갈 때 길 안내를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싸움터에 먼저 들어가 첩보를 입수하고 적의 주민들을 선동하고, 때로는 몰래 잠입해 요소요소에 불을 지르거나 필요한 식량과 무기를 약탈해 오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렇기로 제 놈들이 태어난 나라요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인데........ 저들을 끝까지 믿을 수 있겠느냐?”
“어떤 이유로든 살려고 조선에서 도망쳐 온 자들입니다. 저들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면 처참하게 죽는 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저들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대장군께서 이미 저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셨고, 보살펴야 하거나 소중한 사람들을 그곳에 머물게 하였으니 배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우리 군대에게 협조하고 희생한 대가로 후방의 가족들이 넉넉하게 살 수 있을뿐더러, 싸움에서 승리하면 조선의 관아 창고에 들은 물건들 일부는 보상차원에서 저들이 어느 정도 약탈해 재산을 축척하는 방편으로 은밀하게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들이 우리 군대보다도 더 집요하게 싸움판에 뛰어들고 더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고 방화와 약탈에 항상 선봉에 서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 군대가 오히려 저들 사루미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이란 말이구나.”
“어떤 면으로는 말씀입니다.”
“그럼. 지금 장군께서 찾으시는 사루미는 저들 중 누구냐?”
“첫째 사루미를 찾으시는 것 이온데.......... 첫째 사루미는 이곳에 없습니다.”
“장군께서 오늘 이곳에 당도하신다는 것을 사전에 통보하였다는데 어찌 없다는 것이냐? 당연히 기다렸다가 그간의 보고를 드렸어야 하지 않았더냐?”
“고니시 장군의 진격이 매우 빠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니 고니시 군의 세작들은 그보다도 더 빠르게 이미 조선의 도성까지 침투하여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엿들은 정보 중에 한양 도성의 수비방책과 더불어 한강을 건너는 일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또한 여기 부산에서 한양을 가자면 병풍처럼 옆으로 길게 가로막고선 고갯마루가 있는데, 그곳을 반듯이 통과하여야만 한양에 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교통로라 하였는데......... 그 고개가 바로 천혜의 방어요새라 합니다. 고개가 하도 험해서 나는 새도 쉬어서 넘는다 하여 조령(鳥嶺)이라 부른답니다. 들은 바로는 일백의 군사로 능히 오천의 군사를 막을 수 있는 지형적 특수성을 지녔다 합니다. 한양에 들어가 조선국왕을 체포하자면 반듯이 이곳을 통과해야만 하며, 고니시 장군도 이 점에 대단히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여 우리 사루미 서넛이 조령의 상태를 미리 점검하고 고니시 군의 방책을 알아보려고 서둘러 올라갔습니다.”
“그럼 어쩐다? 장군께서 사루미를 데려오라 하셨는데?”
“사루미 넷째를 함께 데리고 가겠습니다. 여기 사루미 집단의 정보를 통합 분석하고 전방과 후방의 연락을 맡은 발걸음이 정말 빠른 사루미입니다. 또한 청초한 모습에 수려하기까지 한 미모를 간직한 계집이라 어떤 검문검색에도 무사히 통과를 한답니다. 대장군께서도 이미 보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녀라면 지금 장군께서 필요로 하시는 모든 궁금증에 답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계집이란 말이냐?”
“첫째 사루미의 동생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안쪽에서 듣고 있었는지 어느새 한 사람이 이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먼지와 때가 그득한 무명바지에 무명저고리를 입고 있었지만 길게 땋아 묶은 머리카락 아래로 수줍게 드러난 여인의 모습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가 쉽지 않을 만큼 매혹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나가쯔네는 저절로 함지박만큼 벌려진 입을 쉬이 닫지 못하고 있었다.
7
“왜구는 물밀듯이 이곳 한양을 향해서 쳐 올라오고 있습니다. 각 지방의 군대가 치열하게 방어전투에 임하고 있다고는 하나, 사전에 준비가 철저하고 오랜 내전으로 싸움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왜구들과 싸움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이번 싸움이 적들의 기습에서 시작된 만큼 이제라도 우리가 전열을 가다듬고 저들의 진격에 철저하게 대비하여 저지함과 더불어 패퇴를 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여 비변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수립하였습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구들이 한양까지 오는 길은 세 곳밖에 없습니다. 바로 추풍령과 조령과 죽령뿐입니다. 하여 이 세 곳에 철저하게 방어진을 구축하여 왜구들을 물리쳐야만 하겠습니다. 하여..............”
영의정 이산해는 여기까지 말을 내려가다가 잠시 멈추고 용상에 앉아있는 임금의 표정을 슬며시 살폈다. 자못 진지한 표정의 임금은 연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칫 아무 때고 불호령이 떨어질까 불안해하던 이산해는 다소 안도감 속에 비변사에서 논의된 내용을 마저 읽어내려 갔다.
“우선 무장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겠습니다. 전하.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시오. 그런데 성응길은 지금 어디 있는가?”
“신 성응길. 여기 대령하고 있사옵니다.”
대신들의 뒷전에서 성응길이 대답하며 한걸음 나섰다.
“지금 즉시 죽령으로 달려가 그곳을 사수하라. 알겠는가?”
“신이 기필코 목숨을 걸고 왜구들이 한걸음도 죽령을 넘지 못하도록 막겠나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 이보시오. 병판. 군사는 얼마나 딸려 보내면 되겠소?”
“현지에 있는 군사들의 지휘권을 주고, 죽령 또한 적들이 쉬이 넘보지 못할 지세이오니 이곳에서 군사 삼천을 보낼까 하옵니다. 아울러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이 응길과 함께하도록 하시옵소서.”
“군사 사천을 주도록 하시오. 좌방어사는 지금 밖으로 나가 군사를 배정받는 대로 현지로 떠나도록 하여라. 이미 짐의 명이 내렸으니 별도의 출발인사를 올 것도 없다. 서둘러 현지에 부임하여 적을 막기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신. 성응길. 전하의 명을 받습니다.”
좌방어사로 임명된 성응길이 서둘러 대전을 나갔다.
“추풍령을 막을 우방어사로 조경(趙儆)을 선발하여 내려 보내고자 하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아니 되옵니다. 전하. 조경은 이미 죄를 짓고 모든 관직에서 쫓겨난 자입니다. 어찌 그런 자에게 군대를.........”
영의정 이산해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무섭게 반대를 주장하는 무리가 있었다.
“매우 위중한 전시입니다. 조경은 훌륭한 무장이고요.”
“그러나 법도를 어겨 파직당한 것을 그새 영상께선 잊으신 것입니까?”
“과인이 기억하기로 조경의 죄가 일전에 귀양 보낸 송강을 죄인 취급하지 않고 잘 받들어 모셨다는 것 아니요?”
“그렇사옵니다. 나라에 죄를 지은 자를 감싸는 것은.........”
“관직에 있는 몸으로 죄인을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죄인을 돌보아주었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 여겨 그를 이미 관직에서 파직하지 않았소. 허나 달리 생각해 보면 불손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지난 정리가 있어 그리한 것이라면 그 또한 사내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소? 그가 겪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요. 더욱이 짐은 오전에 분명하게 지시하지 않았소. 윤두수를 비롯한 귀양 가 있는 서인들을 도성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기라고 말이요. 나라가 환란에 빠진 이때, 내 당파를 가리지 않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능력을 쓰고 싶다고 말이요. 그런 차원에서 짐은 기꺼이 조경을 우방어사에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추풍령을 방어하도록 하겠소. 도승지는 짐의 이런 뜻을 조경을 찾아 전하고, 그에게도 군사 사천을 주어 당장 임지로 떠나도록 하라.”
“명을 받들어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도승지 이항복이 대답했다.
“이제 조령이 남았구려. 그만큼 가장 중요한 길목이고.......... 누구를 보내면 좋겠소?”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시어 조령과 그 아래의 삼남까지를 방어하도록 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이일은 어디 있는가?”
“신 또한 이곳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그대를 순변사로 명하니 즉시 채비를 하고 현지로 떠나 조령을 지켜내도록 하라.”
“신. 이일. 목숨을 바쳐 전하의 명을 기필코 달성하겠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순변사 이일에게는 종사관으로 윤섬(尹暹) 박호(朴箎)와 더불어 군사 오천을 주어 보내겠습니다. 지금의 군사정책인 제승방략이 개국초기의 김종서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나, 실로 그 제승방략이 개량되고 새롭게 수립 정착하는 데는 바로 여기 있는 순변사 이일이 바로 그 중심에서 실행시키고 완성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바, 조령의 방어를 위해 출전하는 것이기는 하나, 조령 이남의 삼남지방의 군사력을 총 집결시켜서 제승방략의 정책대로 순변사 이일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 통솔하여 왜구들을 대적하게끔 지휘권 또한 내려 주셔서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제승방략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순변사였지? 즉시 그렇게 시행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부족함이 없이 채워 내려갈 수 있게 하라.”
“소신.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왜구의 북상이 빠르다고는 하나 왜구들 다수가 기마병이 아니기에 북상 속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여 초기 전투의 해안 방어진은 무너졌다고 하나 다수의 지방군은 여전히 존재하나 다만 지휘통솔이 어려워 흩어진 상태라 보여 집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만든 것이 바로 제승방략이옵니다. 소신이 이제 출발하여 내려가면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지방군에 통지를 보내 합류할 거점을 마련하겠으며, 그곳으로 모여든 전 병력을 통솔하여 소신 또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에 뛰어들어 기필코 왜구들을 섬멸해 낼 것입니다. 그 첫 방어선을 신은 상주쯤으로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기필코 상주 이북의 땅을 왜구들에게 한 치도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 내 기뿐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겠다.”
순변사 이일이 임금에게 세 번 절하고 나서 서둘러 대전을 나갔다.
비로소 다소간 안도의 마음이 들었던지 임금이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이것으로 일단의 방어진은 갖추어진 것인가?”
“전하. 상주 문경을 지나 조령을 넘어 충주에 이르는 길목은 바로 이 나라의 혈맥과 같은 곳입니다. 적들은 반듯이 그 길을 따라 올라와 조령을 넘을 것입니다. 조령을 넘어 충주에 이르면........ 충주에서 이곳 도성까지는 그야말로 텅 빈 들판처럼 군사들이 마구 내달리기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것이 옵니다. 적을 막을 곳도 막을 방법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단숨에 이곳 도성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목숨을 걸고 이곳만은 반듯이 지켜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조령 이북의 전 군사를 동원하고........ 황해도를 비롯한 북방의 오랑캐를 막는데 투입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조선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조령 이북을 지켜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도성의 근왕병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도 동원해야겠지요. 이번 왜구와의 전쟁은 조령 이남에서 기필코 끝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조령을 지켜내지 못하면......... 앞일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변사 이일을 서둘러 내려 보냈으나............ 수십 년간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전쟁미치광이 십오만이 지금 쳐 올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의 국운을 걸고 조령을 지켜낼 장수와 군사들을 당장 내려 보내야만 합니다.”
“나라의 국운을 걸고 단판 승부라.............. 그렇다면 그 같은 중책을 누구에게 맡기면 되겠소.”
“비변사에 모여 중론을 모았사온데............ 십오 만의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왜군을 막아내자면 육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용맹한 장수가 필요한데......... 여러 대신들이 우선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師)로 부임해 있는 원균(元均)을 천거했습니다. 하온데 지금 왜구가 바로 경상도로 침입을 한 이유로 현재 어디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바로 한성판윤 신립(申立)입니다. 원균이나 신립이나 모두 이탕개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북방 오랑캐와 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에게 있어 저승사지라 불렸을 만큼 많은 공을 세운 당대 최고의 용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온데 신립 또한 현재의 직책이 한성판윤으로 도성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처지인데다가......... 어떻게 소식이 전하여 졌는지 금일 오후부터 항간에 파다하게 왜구의 침입 소식이 전해져서 지금 도성 안팎으로 심각하게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동요가 점점 심해져 가는 가운데 신립을 당장 차출하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오니 전하......... 이미 명을 받은 자들을 금일 중으로 준비시켜 날이 새기 무섭게 내려 보내고, 이들의 뒤를 책임질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임명 문제는 내일 아침까지만 미루어 주시옵소서. 다른 대안을 찾아 새 인물을 천거하던지, 원균을 찾아내던지, 신립을 대처할 방도를 마련하든지 하겠사옵니다. 내일 아침까지만 결정을 미루어주시옵소서.
‘원균이라...........’
‘신립이라...........’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임금은 두 사람의 이름을 거듭 뇌까리고 있었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전쟁이란 당연히 무신들과 병사들에 의해 현장에서 승부가 좌지우지되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무신들을 배격하다시피 한 상태에서 그저 탁상공론처럼 문신들이 전쟁을 이렇다 저렇다 매도하고 있는 현실이 대단히 못마땅했던 것이다.
화살이 날아들고 칼과 창이 부딪치고 목이 잘리고 피분수가 솟고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간 부상자들이 신음과 절규를 해대는 시체가 여기저기 너부러져 있는 전쟁을 입이나 조잘거리는 저들이 알 리가 없기 때문에 더 한심한 작태라고 탄식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분명 한성판윤 신립 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었던 것이다.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 무엇인가가 마구 용솟음쳐 올라왔다. 피가 끓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오랑캐나 왜구의 소탕전이 아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전쟁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싸움이다.
‘나의 뜨거운 심장과 전신을 타고 도는 핏줄과 신경이 전쟁에 대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나의 가슴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전쟁터에서 이제껏 단 한 발짝도 떠난 적이 없었다.’
‘오너라. 내가 기꺼이 나아가 너를 맞으리라.’
신립은 그 전쟁이, 그 전쟁터가 이제 다시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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