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름 오르다 / 이 성복(사진에세이)
바라봄의 치열함을 언어라는 이질적 렌즈로
사진 속의 오름을 재분해하고 재구성하여
그 내면 세계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이성복 시인의 사진에세이다
사물, 기억, 존재의 비밀이 담겨진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오름들의 독특한 형상을 담은
스물 네 장의 사진은 오랫동안 제주 오름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는 제주관광대학 사진학과 교수 고남수의 작품들이다.

오름의 선 속에 숨어 있는 맵찬 기운들.
어느 날 매서운 칼바람을 여지없이 보여주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햇살 따스한 알몸뚱이를 온전히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으로, 밝음으로 가파름이 있다가도
어머니의 봉긋한 가슴처럼 아련한 부드러움을 손수 보여준다
.
하늘 가까이 멎어 있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사진에서 오름의 선들은
무심코 바다에 들어가 물이 턱 밑까지 찰랑거릴때의
절박한 느낌으로 까지 육박하기 보다는
화면의 그 아래 공간에서 서서히 융기하다 잠시 멎은 듯한 느낌을 얻는다.
이 때문에 오름 위의 잿빛 하늘은
기세 눌려 다소 답답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고 전한다
.
사진 속 화면 전체에 머무는 잿빛 평화가
다소 탱글탱글한 내부처럼 느껴지는 것도
오름의 둥근 선뿐만이 아니라
그 선의 조용하고 꾸준한 상승과 무관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잘한 풀들로 덮여 있어서 솜털이 많은 피부의 일부를 잘라놓은 듯한 오름이
둥근 선들과 오래된 비닐 코팅처럼 허옇게 ‘기스’난 오름의 검은 표면에서
바람에 불리는 풀들의 자취를 감지하고 있다.
또 오름의 피부에 압축돼 있던 풀들의 아우성과 새들의 외마디 소리들이 풀릴 때
둥근 빵처럼 멎어 있던 오름의 평화는 순간적으로 흔들리나 그 흔들림은
그러나 평화의 깨어짐이라기보다는
평화의 일렁거림, 평화의 찰랑거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스듬히 올라가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선뜻 뚜렷한 각을 이룬 다음 직선으로
쏠려내려가는 화면 속 검은 오름을 보노라면,
신비란 응축과 탈색의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어둠의 외피를 발가벗기는
완전한 빛은 저와 같은 신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빛은 사물의 표면을 편애함으로써 심층을 은폐한다.
하지만 새벽과 저녁의 어스름, 반쯤의 밝음과 반쯤의 어둠은 숨겨진 심층을
표면으로 불러들임으로써 표면과 심층의 분열을 무화시킨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미명의 공간에서
線은 면이고,면은 입체며,입체는 또한 곡선이다."/內在(내재)와 卽物(즉물)의 神秘 中에서
.
"미주알고주알 다 말한다고 바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쫀쫀하게 다 보고 듣는 것이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귀밝음과 눈밝음은 흑백의 화면에서 처럼
사물의 소리와 빛을 단순하게 듣고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알게 되는 것도,
그가 있을 때는 그의 자리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상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가난과 이별을 통해서이며,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상처는 진실과의
맞대면을 위해 바쳐야 하는 희생이다. 우리의 가난과 이별을 통해서 대상은
우리가 제멋대로 덧씌운 고정불변의 관념과 이미지로부터 탈출한다.
마치 저를 닮은 허물을 남겨두고 퍼드덕거리며 날아올라
첫 울음을 터뜨리는 매미처럼, 대상이 제 모습과 소리를 보여주는 것은 그때이다."
"따지고 보면 강이라는 것도 땅 위의 물이 지나가는 길이다.
세상의 모든 강이 강과 지형의 共謀이듯이,
인간의 길 또한 인간과 자연의 대화로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화면에서 한 줄기 강을 연상시키는 흰 길은
또한 푸른 하늘에 제트기가 지나간 자국처럼 선명하다.
둥근 봉분을 가운데 두고 사각으로 검은 돌담을 쌓아올린 제주의 무덤들은
오름의 등때기에 강제로 새긴 투박한 문신이라고 할까.
여러 개 주사위를 흩어놓은 듯한 그 눈알 모양의 무덤들로 인해 트림처럼 낮은 오름은
천조각을 이어붙인 禪師들의 누더기 옷을 연상시킨다.
말이 침묵을 통해 깊어듯이, 길은 보이지 않음을 통해 아늑함과 아득함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길의 중간에 돋아나 느닷없이 길의 진해을 가로막는 나무들의 검은 둥치는
풍경을 난자하고 유린하는 길의 전횡을 제지하는 쐐기와 같다."/외줄기 흰 길의 은유 中
"이 사진들이 흑백이 아니었다면
오름의 생태계가 이토록 자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뭇가지와 갈대 대궁들이
변화무쌍한 색깔의 현혹에 파묻혀 드러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채가 은폐하는 것은 사물들의 윤곽과 뼈대만이 아니다.
흑백의 질서를 통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은 사물들 사이의 멀고 가까움과
그것들 사이의 어울림이며, 그리고 그에 의해 사물들 각자의 의미와 비중이 드러난다.
물론 천연색 사진에도 사물들 사이의 관계와 각자의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드러남은 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그만큼만 진실이다.
과장하자면 흑백의 진실은 색채의 장난에 의해 왜곡되고 위장되는 것이다."
.
막바지에 시인은 사진작가 고남수의 오름사진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과
가볍게 솟아오르는 검은 오름 사이 티눈처럼 박힌 형체에서 인간의 자리를 가늠하고 있다.
(일부 옮긴 글입니다)
_知安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