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공정사회
기획Ⅰ-1
실업교육의 르네상스시대가 온다
글_ 노주석 서울신문 편집부국장‘
고졸’… 나에게 고졸이란 낮지 않은 학력이다. 부모님이 고졸이셨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상급 학년,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적어내는 부모님 학력란에‘고졸’이라고 쓰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때만 해도 고졸은 귀했다. 학급에 몇 명 없었다.
무학, 초졸, 중졸이 대부분이었다. 풀죽은 아이들은 손바닥으로 가리려 애썼다. 대졸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부모님의 학력은 나를 우쭐하게 했다. 그러나 두 학교의 교명은 남아있지 않다. 이름뿐 아니라 정체성마저 인문계로 바뀌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숭문주의’가 낳은 씁쓸한 풍경이다. 현실이다.
역대 대통령 3명을 배출한 ‘뼈대 있는’ 실업교육
우리나라는 역대 10명의 대통령 중 상고 출신 대통령이 3명에 이를 정도로 실업교육 전통이 강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목포상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상고, 이명박 대통령은 동지상고를 각각 졸업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3명은 육사 출신이다.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김영삼전 대통령을 빼면 육사 3명, 상고 3명으로 팽팽하다. 선출됐다는 면에서 실업고 출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다. 노 전 대통령을 배출한 112년 전통의부산상고는 2004년 개성고로, 김 전 대통령이 졸업한 87년 전통의 목포상고는 2001년 전남제일고로 학교 간판을 각각 바꿔 달았다.
덕수상고는 덕수고, 강릉상고는 강릉제일고, 대구상고는 상원고, 대전상고는 우송고로 이름을 바꾸면서 인문계로 변신했다. 선린상고는 선린인터넷고로 교명을 바꿨다.숱한 명문 실업고가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졌다.좋게 말하면 경제개발시대 산업기술 인력의 배출대 역할을 했던 실업고가정보화시대를 맞아 활로를 찾게 된 셈이다. 나쁘게 말하면 먹고 살만해지니까 문(文)을 떠받들고 무(武)는 깎아내리는 공맹사상이 고개를 든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일등공신인 실업고의 전통이 무너졌다는 장탄식이 쏟아졌다. 실사구시(實事求是) 기풍의 쇠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문제는 학벌 지상주의이다. 어느 자리에서 들은 원로 교수의 독백은 한국사회에서 학벌의 독성이 얼마나 지독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분은 모교인서울시내 유수대학 교수로 정년퇴직한 뒤 그 대학의 명예교수와 다른 대학의석좌교수를 지냈다. 학회 회장도 지냈고 정부 유관 기관과 기업에서 활동했다.후배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분의 입에서“국립 S대학을 나오지 못한 게 한스럽다.”라는 말을 들었다. 귀가 의심스러웠지만, 그 분은 “S대학을 나온 교수, S대학에 재직한 동료 교수와의 차별을 견디기 어려웠다.”라고 털어놓았다.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 ‘학벌’에 막히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인가. 마치 핏속에 학벌이라는 DNA가 흐르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이 정치적 지배질서를 형성하는 가치관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특정대학이나 특정고교출신자들이 형성한 ‘지배집단의 카르텔’이라고 정의하는 학자도있다.
공개적인 경쟁과 평가의 기회를 박탈하고, 능력에의한 등용을 사전 차단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 공감대가 형성됐다.학벌(學閥)은 ‘문벌(門閥)’, ‘군벌(軍閥)’, ‘재벌(財閥)’,‘파벌(派閥)’과 함께 우리 사회를 좀먹는 끼리끼리 문화의 추축(樞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이 센 이들집단에 공통으로 쓰이는 한자인 ‘공훈(功勳) 벌(閥)’ 자를 파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문(門)안에 사람(人)이 무기(戈)를 들고 서 있는’ 칠 벌(伐)자 때문이다. 타인을 무기로 억압해 얻은 전리품을 안에 넣어두고 문을 걸어 잠근 모양이다.
학벌은 고려의 문벌(門閥)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문벌은 조선의 양반 관료사회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 전통적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학벌사회로 외연을 넓혔다. 고려사회의 특징은 지배세력이 대를 잇는 ‘문벌귀족사회’였다. 문벌의 핵심은 음서(蔭敍)였다.
아버지나조부가 5품 이상 관직을 했거나 공을 세우면 그 자손은과거를 보지 않아도 관직에 특채되는 제도이다.조선은 음서의 대상자를 2품 이상 관직자로 대폭 줄이고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했지만, 혈통을 중요시하는 신분사회의 틀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과거 문과에 급제한 1만5000명을 분석해 보니 상위30개 씨족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통계가 뒷받침한다.
하위 560개 씨족의 급제자는 10%에 머물렀다.과거제란 빛 좋은 개살구였다.근대로 접어들면서 혈연으로 맺어진 문벌이 약화한 대신 동문수학의 의리로 형성된 학벌이 군벌, 재벌, 파벌등 나머지를 이어주는 핵심 연결고리이자 인재 공급원 역할을 하게 됐다.
좋은 학벌이 곧 성공의 열쇠였다. 이러한학벌사회의 나쁜 점은 학벌 차에 따른 ‘작은’ 불평등에서끝나지 않고 ‘큰’ 학력차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또 이를 모면하려는 편법과 불법이 동원된다. 신정아씨 학력위조사건은 학벌 지상주의에 물든 우리 사회의 추악한 자화상이었다.
01. 굳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고졸채용이 확대되어야 한다.
능력·기술 학벌타파 열쇠… 맞춤형 직업교육 빛나다
최근 모처럼 기술교육의 부활과 학벌타파의 북소리가울려 퍼지고 있다.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의 약진이 눈부시다. 마이스터고의 맞춤형 교육이 빛을 발하면서 기업이 입도선매식 채용에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학비 전액 면제에, 기숙사비와 학업보조금 지원,졸업 후 취업 보장과 대학진학, 군 입대 연기 등 각종 특혜가 주어진다.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전국 23개 마이스터고 졸업생 100% 취업이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정부는 2015년까지 마이스터고를 50개로 늘릴 계획이라고한다.
명문 실업고의 후신인 특성화고의 경우 지난해 취업률이 30%까지 오르면서 경쟁률도 덩달아 올랐다. 전직 대통령 3명의 모교가 실업고라는 사실은 특성화고의강력한 ‘빽’이다. 그러나 무늬만 특성화고는 안 된다. 지난해 전국 특성화고의 대학진학률이 무려 73%를 넘었다.
동일계열 특별전형을 활용해 대학에 쉽게 진학하려는 ‘제2의 인문고’ 역할은 사양해야 한다.이제는 ‘능력’과 ‘기술’로 학벌의 벽을 허물어야 할 때가 왔다.
전문계고만 나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대학졸업자가 맡는 학력 인플레로 국력이 낭비됐다. 학벌이 학력이나 능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입증됐다.
고졸채용 확대 정책 학벌타파 ‘깃발’되길
이명박 정부의 야심에 찬 고졸채용 확대 정책은 성공할 것인가. 특성화고는 학벌타파의 깃발이 될 것인가.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성공과 부활 가능성이 꽤 크다고 본다. 정책의 성공 여부는 정책 입안자의 의지와 시대적 상황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이 대통령의 손때가묻은 고심어린 정책이라는 점과, 시기적으로 2011년은고졸 일자리에 대한 수요와 사회적 요구가 절정에 이른상황이기 때문이다.이 땅의 학벌주의와, 실력보다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학력주의를 일거에 사라지게 할 요술방망이는 없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나와도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기회균등의 신뢰가 우리 사회에 똬리를 튼다면 불가능한일도 아니다. 고졸 4년차 근로자가 대졸 초임과 비슷한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학력 인플레를 막을 수 있다.고졸자의 82%가 대학에 진학, 졸업하고서도 직장을못 구해 노는 마당에 정부와 정치권에서 논쟁을 벌이는‘반값 등록금’은 공허하다.
대한민국 고졸자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환경미화원 모집에 대졸자가 몰리고, 구조조정 대상인 ‘불량 대학’이 판을 치고 있다.반값 등록금 같은 구호보다 굳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고졸채용 확대가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