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그램명 : KBS순천R. 삼산이수 투데이(20130910 / 17:40~17:50)
<우리 지역 문화유산 답사기10>
❍ 주제 : 섬진진과 두꺼비 전설
❍ 인터뷰 :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 정의연 소장
Ann :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3개도와 14개 시‧군을 거치면서 남해바다로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젖줄이기도 한 섬진강은 우리나라 5대 강 중 가장 맑아 은어 떼와 재첩, 실뱀장어가 서식하는 곳이죠. 이러한 섬진강은 모래가 많다하여 다사강(多沙江)으로 불리었으나 왜구의 침입을 막은 두꺼비 전설에 의하여 두꺼비 섬(蟾)자를 넣어서 섬진강으로 명명되었다고 하네요. 이곳 섬진강 나루터에는 수월정과 섬진진지 석비좌대, 섬진강 유래비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섬진강 나루터에 대하여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 정의연 소장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Q-1.먼저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 지르는 섬진강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알고 싶은데요. 말씀해 주시죠.
Answer_ 예, 섬진강은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팔공산의 북쪽 1,080고지 서쪽계곡에서 발원했는데요. 길이 225km에 흐르는 강으로 유역면적이 4,489㎢이고, 3개도와 14개 시‧군을 거치면서 흐르죠. 섬진강은 평야를 끼고 흐르는 강이 아니라 깊은 계곡과 산맥 사이로 흐르기 때문에 물이 맑기로 유명한데 원래 이름은 두치강, 모래가람, 모래내, 다사강 등으로 불렀죠. 그런데 섬진강으로 불러진 사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려 우왕 11년(1385)경에 왜구가 바다를 건너와 섬진강으로 배를 타고 들어온다는 소식에 이곳 마을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죠. 그런데 왜적의 병선이 이 섬진강 하구에 도착하자 갑자기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새까맣게 떼로 몰려와 울부짖는 바람에 왜군들은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소름이 끼쳐 감히 상륙조차 못하고 달아나 버렸는데, 왜군들이 후퇴를 하자 두꺼비들도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그 뒤로부터 두치강(豆恥江)이라 부르던 이 강을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하네요.
두 번째 이야기는 옛날 마음착한 처녀가 살고 있었죠. 이 처녀는 늙은 어머니 한분을 모시고 효도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마가 지자 부엌으로 두꺼비 한 마리가 껑충 뛰어 들어왔죠. 처녀는 이 두꺼비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보살펴 주었는데 세월이 흘러 3년이란 세월이 지나니 두꺼비는 솥뚜껑만큼이나 크게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강 상류에 폭우가 쏟아져 처녀가 잠든 사이 갑자기 물이 불어나 온 동네가 물에 잠기고 처녀는 물에 떠내려가는 위험이 닥치게 되었죠.
이때 두꺼비는 쏜살같이 처녀 곁으로 와서 등을 내밀기에 처녀가 거북 등에 타자 두꺼비는 헤엄을 쳐 강변에 닿았죠. 그런 후 두꺼비는 죽고 말았는데 처녀는 자기 목숨을 구해 준 두꺼비를 장사지내고, 매년 제사를 지내며 오래토록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녀가 두꺼비 등을 타고 도착한 곳을 두꺼비나루라 부르고, 두꺼비 ‘섬’자를 써서 섬진(蟾津)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Q-2. 섬진은 두꺼비와 관련되어 지어진 이름이군요. 그런데 섬(蟾)은 두꺼비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진(津)은 나루라는 뜻인데 나루와 관련된 삼도수군통제영 역사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 진이었는지 말씀해 주시죠.
Answer_ 예, 섬진진은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영으로부터 직접적인 관할을 받던 소규모의 수군진(水軍津)이었습니다. 이 진에 대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께서 섬진지역에 군사를 주둔시켜 왜적의 내침에 대비하였고, 전라감사 이정암은 첨절제사를 섬진에 주둔시켜 진관체제하의 거진으로 역할을 부여하였던 곳입니다.
그러나 섬진이 개설되기 이전에는 모군(募軍)과 더불어 도청창(都廳倉)이 선조 36년(1603)에 설치되어 있었다는데, 즉, 조정에서 섬진에다 도청창을 세운 다음, 지키고 관리하는 민간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민간으로 구성된 모군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숙종 31년(1705)에 진으로 승격시켜 진관체제하에 정식으로 편입시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섬진진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근 지역민들을 모군으로 소집하여 수비토록 한 특수한 소모진(召募鎭)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진의 책임자는 종9품 별장(別將)입니다. 모군의 배치를 보면, 3월에서 8월까지 바람이 잦은 시기에는 40명씩, 9월~2월까지 바람이 높아지던 시기에는 20명씩 3개월 동안 입번한 다음 교체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 군영의 건물들이 있었는데 시설물들을 보면, 주민들이 ‘별장’이라고 부르는 아사(衙舍)와 내아(內衙)가 마을의 뒤쪽 높은 곳에 동서남북으로 건물이 서 있던 것으로 추정하고요, 건물로는 무기창고인 군기(軍器), 군이 주둔했던 장청(將廳), 군량터인 작청(作廳)과 진창(鎭倉), 사령청(使令廳), 선화당터로 불리는 성황당(城隍堂) 등 총 8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섬진 강가에는 배를 묶었던 선돌바위가 있습니다.
섬진진의 폐쇄는 동학혁명 때인 고종 32년(1895)인데요.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영되면서 섬진진도 폐쇄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죠.
Q-3.섬진진은 군사적 요충지로 역할을 하였는데, 더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역할도 상당히 컷다고 하는데 말씀해 주시죠.
Answer_ 예, 섬진진은 처음에 진을 개설할 때 도청창(都廳倉)이 있었다는 사실만 보드라도 경제적인 측면을 암시하고 있는데요. 전라 감영과 삼도수군통제영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환곡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죠. 일반적인 창(倉)의 규모가 보통 6~10칸 정도인데 비해 섬진창은 20칸이나 되는 창고라고 하는데 그 규모와 역할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환곡 외에도 장세(場稅)나 선박세 등이 막대한 세입원이 되었는데요. 세입원을 보면, 이곳에 두치장(豆恥場)을 개설하여 장세를 거두었고, 지리산권의 호남과 영남 일원의 각종 물산이 섬진강을 수운하게 되는데 운행하는 선박들에게 선박세를 받았죠.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배가 운항할 수 있는 최상단지는 구례군 토지면 양문리까지라고 하는데, 거리는 38.7km로서 이곳의 세원 비중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통제영과 섬진진과는 거리가 멀지만 통제영이 전라도 광양에 있는 섬진진을 직접 관할하였던 것이죠. 이러한 세금은 삼도수군통재영의 재정 운영에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재정적인 수익이 창출되는 곳이기에 전라감사나 광양현감이나 통제사는 서로 자기들이 관할하려고 애를 썼던 것인데요. 이처럼 섬진진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두 이득이 있으니까 중요한 위치라고 보아야 되겠죠.
Q-4. 섬진진의 역사적 중요성이 나타나는데요. 현재 섬진진 주변에는 어떤 것들이 정비되어 있는지요.
Answer_ 예,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지역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섬진진에 세워진 수월정 누각에 올라 섬진강을 내려다보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역사를 증명하고 있고, 맑은 물에는 재첩이 자라고 있어 주민들의 생계에 도움을 주고 있죠. 그러나 역사만큼 주변이 정비되지 않은 점이 아쉽군요. 현재 시설물로는 섬진진지 석비좌대와 섬진강 유래비, 수월정 등이 건립되어져 있는데요. 석비 거북좌대 4개는 잇빨이 빠져있어 그 모습이 이채롭고요, 유래비는 섬진강의 원래 이름이 다사강이었는데 두꺼비 전설에 의해 섬진강이 되었다는 것을 비문으로 새겨 놓았습니다.
수월정은 광양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1573년에 세운 정자라고 하는데요. 이러한 섬진강의 멋진 풍경과 정자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송강 정철은 ‘수월정기(水月亭記)’란 가사를 지어 칭송하였는데, 수월정기 중에 ‘달빛이 비추니 금빛이 출렁이며, 그림자는 잠겨서 둥근 옥과 같으니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니 곧 후(侯)의 가슴이 맑고 투명한 것 같다’라는 글귀를 남겼습니다. 현재 지어져 있는 수월정은 1999년에 광양시에서 정비한 것이죠.
Q-5. 그렇군요. 앞으로 이러한 전설과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유적을 보존함과 동시 복원하여 관광 자원화 할 수 있는 제안을 있다면 어떤 것이 있죠.
Answer_ 네, 섬진진나루터는 자연과 역사가 함께 어울리는 곳입니다. 섬진강 건너 하동에 하동포구, 화개장터, 쌍계사, 벚꽃터널이 있다면 광양에는 섬진진, 나루터, 매실길이 있습니다. 하동과 광양을 잇는 섬진교와 구례와 연결한 남도대교는 섬진강의 동서를 연결하고 영호남을 융합하는 중심이 될 수 있는 최고 역사상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섬진진나루터에 옛 아사와 내아를 복원하여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두치 5일장을 재현하여 재래시장을 매실마을과 함께 형성되어진다면, 역사와 삶의 현장이 될 것이라 보아집니다. 광양시와 구례군과 하동군에서는 ‘섬진강의 지상낙원’을 공동으로 조성하는 것이 어떠할지 조심스럽게 제안해 봅니다.
Ann :오늘은 섬진강의 진과 나루터 그리고 전설에 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남해안 역사문화연구소 정의연 소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