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권대복식 성령 세미나’의 출현
권대복 아오스딩은 1990년 초반, 동북 삼성의 거점 도시, 하얼빈의 도리 천주당에서 최초로 중국인을 향한 말씀(코린토 전서, 2장 9절) 선포를 감행하였다. 내용과 형식은 일본 나가사끼와 비슷했지만, 주변 환경과 대상은 전혀 다른 차이를 보였다. 우선 일본 나가사끼는 공개적이었고 수많은 관중을 위한 화려한 자리였다만, 중국 하얼빈은 그와 정반대였다. 비밀스럽고 초대된 극소수 하느님 가족을 향한 소박한 말씀 선포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나가사끼는 1회용으로 끝났지만, 하얼빈은 그후 ‘권대복식 성령세미나’란 이름으로 20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jīngshàng zhèyàng jìzǎi shuō:
tiānzhǔ wèi ài tā de rén suǒ zhǔnbèi de,
shì yǎnsuǒ wèijiàn,
ěrsuǒ wèiwén,
rénxīn suǒwèi xiǎngdào de。
(经上这样记载说:『天主为爱他的人所准备的,是眼所未见,耳所未闻,人心所未想到的。』)
만주 벌판을 향하여 선포된 말씀은 겨자씨만한 작은 종자였지만, 그것은 점점 성장하여 천지 창조의 서막처럼 백두산 천지를 뜨겁게 달구더니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지구의 심장까지 뻗어 내려간 천지연, 그곳에서 솟아 오르는 백두산 용암은 만나는 모든 것을 단숨에 한줌의 재로 만들어 갔기 때문이다. 온 천지는 검은 연기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이런 와중에 권대복 아오스딩, 그는 도시 외곽 장터에서 양떼 무리와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느님 말씀을 외면한 붉은 무리들 뿐만아니라 그들로 인해 무쇠처럼 단단하고 차디 찬 주변의 영혼들까지 몽땅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주님 목장을 향해 길을 떠날 차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계속해서 멋진 영상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뿐이랴! 그의 어깨는 저절로 들썩이며, 그의 입술에서는 흥겨운 영가(靈歌)가 터져 나왔다. 주님의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그가 선창을 하자 무리들은 소리 높혀 후렴으로 응답했다.
창 밖에서는 검은 고양이, 흰고양이 논쟁이 점점 심화 되어갔다. 막상 대문이 열리자 세상의 온갖 종류의 고양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마을 광장에서는 오래 전 사라졌던 장터가 부활하였다. 장터 물건은 각종 고양이들이 내 놓은 상품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났다. 시골 장터, 그곳에는 상품 유통의 기본인 현금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쩌나~~~! 고양이들은 무척 당황하기 시작했다. 현금없이 이들은 어떻게 살아 왔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설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생활 필수품 대부분을 국가 정부로부터 배급(전표)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마을의 장터’가 현금과 함께 자동 소멸되었던 것이다.
국가 배급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었다. 배급은 먹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식주 모두가 배급제(전표)였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상권은 국가에 귀속 되어야만 했다. 국가 자체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대기업 형태로 변해 갔었다. 기업 관리는 공산당 당원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권력은 하늘만큼 높았고, 세상을 웅켜 잡는 힘 역시 대단했다. 만일 개인이 국가 기업으로부터 퇴출당하는 경우, 새로운 직업 선택은 거의 불가능하여 단 하루를 살아 가는 것 조차 힘들고 어려웠다. 이런 환경속에서 오랜만에 장마당이 부활한 것이다. 그런데 현금이 없으니 장마당이 어찌 운영될까!
아이들이 집안의 골동품을 몰래 들고나와 외국 들고양이들과 흥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래된 골동품이야. 비싼거야”(是古老的古董。很贵的)
“싸구료 물건 같은데?”(好像是便宜货?)
“카메라와 바꾸자”(用相机换吧)
“1;1은 안되, 하나더 갖고 오면 바꿔줄게”(1;1不行,再拿一个给你换)
“알았어”(知道了.)
부활한 장터에서 시작된 물물 교환은 이 정도에서는 그럭저럭 가능했다. 장터가 점점 커지면서 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골동품만으로 마을 장터가 운영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통 장마당’ 그곳 역시 현금 유통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국민 수입원은 오로지 국가 기업뿐, 심지어 마을 구멍 가계까지 국가 소유였던 시절이 서서히 지나가면서 다양한 수입원이 끝도없이 생겨 났다. 그 중에 가장 큰 충격은 조선족의 한국 노동시장 진출로 국영 기업의 10배 이상 수입원이 생겨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양이들은 다양한 기업을 끌고 들어와 또 다른 수입원을 만들어 냈다. 더 나아가 자국민이라고 할찌라도 포장 마차등을 이용하여 스스로 수입원을 만들어 갔다. 새로 생겨 난 수입원은 모두 국영 기업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다. 포장마차 주인의 수입원이 일류 대학 교수보다 훨씬 많은 기이한 현상까지 일어난 것이다.
중국 국민들의 수입원이 다원화 되면서 절대 권력 기관인 공산당원 중심의 사회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고, 경제력에 의한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당장 완전한 자본주의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혼동과 충돌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되어 간 것이다. 이런 와중에 그들만의 전통적인 대륙 기질이 혼란한 사회를 안정화 시켜가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대륙 기질, 그것은 지극 정성이 담긴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일류 대학 교수의 수입원이 길거리 포장마차 주인만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수들은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본업인 대학으로 당당히 출근한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대륙 기질인 것이다. 온갖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오로지 국가의 처우 개선을 기다리며 천하태평 살아가는 것, 그것은 중국인들의 오래된 생활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현상은 유럽인들이 보기에 국가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맹종과 비슷해 보였다. 이런 현상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이해할 수없는 대륙 기질, 그것은 중국인들의 문화 수준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은 국민의 70%가 문맹이라고 한다. 특별한 사건, 하나를 소개하겠다. 한국의 대기업으로부터 천주교 무명 선교사에게 특별한 제의가 왔던 일이 있었다. 서울 대교구 주보지처럼 중국 천주교 주보지를 만들어 줄터이니 허락 하시겠느냐는 문의였다. 다만 일부 지면을 자신들의 광고지로 활용하겠다는 제의였다. 중국 전지역을 대상으로 한다면 상당한 비용과 인력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교회로서도 상당한 도움이 되는 일이었지만, 중국 천주교는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중요한 이유는 교회의 상업화 우려이겠지만, 좀더 구체적인 이유는 신자 대부분이 문맹자이기 때문에 주보지 역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맹은 이와같이 심각하다. 도시를 떠난 촌락의 경우, 극히 일부만 글을 깨우치고 있었다. 그들이 촌락을 이끌며, 촌락 구성원의 대부분은 그들을 따른다. 이런 일은 자발적이면서도 절대적이었다. 대부분의 촌락의 경우, 그들은 지식과 권력, 그리고 자본 모두를 갖고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경제적인 부분이 전과 달라지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관습은 그런대로 유지되어 갔다.
권대복 아오스딩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만주 벌판의 사회 현상을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공산당 당원 중심의 사회 구조가 현대화 바람속에 점진적으로 민주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권대복 아오스딩은 이미 공산당 정부가 내 놓은 사회적 타협, 즉 개혁개방의 명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적인 영역 역시 틈새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과감히 ‘권대복식 성령세미나’라는 종교 상품을 시장에 출품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공상당은 ‘권대복식 성령세미나’를 흥정하기 시작했다. 다만 지역과 담당자들의 판단에 따라 ‘권대복식 성령세미나’라는 상품 가치는 들쑥날쑥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치밀한 계산을 예상하지 못한 중국과 한국 교회는 중국 공산당보다 더 화들짝 놀라워 하였던 것이다. ‘권대복식 성령세미나’, 그것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절묘하게 세계 시장에 내 놓은 ‘고양이 상품’과 대비되는 귀중한 역사적 사건이 분명하다.
일부 지나친 사회 평론가들은 중국 최고의 수입원, 조선족의 한국 노동시장 진출을 두고 극도의 공한증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태도일 것이다. 상호 협조하면 더 나은 긍정적인 사회를 만들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한중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미묘한 관계는 여러번 있었다. 611년 고구려와 수당 전투 당시 왕박은 다음과 같은 시문(無向遼東浪死歌)을 남겼다. 그 당시 사회환경은 소문 그대로 대단한 공한증이 존재하고 있었다. 1500년이 지난 지금, 그런 공한증이 정말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것인가!
1-
긴창 하늘을 찌르고 둥근 칼 햇빛에 번쩍이며
산에서는 노루와 사슴을
마을에서는 소와 양을 잡으며
관군이 전장에 도착했구나
칼들고 적을 치러 나선다지만
요동 개죽음 깨달아라
머리 잘리고 온몸 상할 것을
2-
요동으로 가지 말라. 莫向遼東去(mòxiàngliáodōngqù)
고구려 병사는 범과 승냥이 같으니라. 夷兵似虎豺(yíbīngshìhǔchái)
긴칼이 내 몸을 부수고 長劒碎我身(zhǎngjiànsuìwǒshēn)
날카로운 화살촉이 내 뺨을 뚫으리라. 利鏃穿我顋(lizúchuānwǒsāi)
목숨 한순간에 져버리면 性命只須臾(xìngmìngzhǐxūyú)
절개있는 협객인들 누가 슬퍼해주리. 節俠誰悲哀(jiéxiáshuíbēiāi)
공을 이루어 대장되고
큰 상을 받는다 해도 成功大將受上賞(chénggōngdàjiāngshòushàngshǎng)
홀로 죽어 왜 잡초 더미에 묻히겠는가.我獨何爲死蒿萊.(wǒdúhéwèisǐhāolái.)
역사는 반복하여 순환된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수당은 고구려 전체 인구만큼 전투 인력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당은 고구려에게 완패를 당했다. 왜 그랬을까? 이미 역사 평론가들이 이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정의는 불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개인이나 국가 모두 의로운 집단이 최후 승리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논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