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남씨 (宜寧南氏)
1> 시조 : 남군보[南君甫]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1세조 군보[君甫]는 시조 민[敏]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때 의령군에 봉해졌다.
남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의령 계통은 군보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유명했다.
고려조에서 밀직부사를 지냈던 을번은 조선개국 후에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그의아들 재(在)는 초명이 겸(謙)이었으나 공신으로 봉해지는것을 사면하려고 지방으로
피신하자 태조가 그를 찾으려고 애쓴끝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 이름을 재(在)로
사명했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字)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아우 을진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으로
은거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하자 더 깊숙히 감악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며 일생을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불렀다.
을진의 후손에서는 영의정에 추증된 손자 치신(致信)의 아들 포(褒)와 곤(袞)이 유명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감악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던[포]는 항상 떨어진
옷을 입고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창랑거사 또는 소요자라 일컬었고 가는 곳마다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않아 세상에서는 그의 얼굴을 아는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휘(暉)의 손자로 명장의 웅지를 펴보지도 못하고 비명의 죽음에 그친 이(怡)는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27세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류자광의 모함으로 예종원년에 주살되어 역사속에 영원히 지워질수 없는
아까운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조선 세조때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효온(孝溫)은 세조에게 물가에 이장된
소릉(단종 모 현덕왕후의 능)의 복위를상소했으나 도승지 임사홍과 영의정 정창손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이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유랑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선조때 좌의정에 오른 이웅(以雄)과 인조조에서 대사헌과 공조판서를 지낸
이흥(以興)이 뛰어났으며, 숙종조에 대사간에오른 이성(二星)과 예조판서를 지낸 용익(龍翼)은
조선말에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대제학 용익의 증손 유용(有容)은 영조때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공철(公轍)은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당세의 명문장가로 손꼽혔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씨는 남한에 총 53,011 가구, 222,246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