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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鏡虛)] 선풍진작,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다 / 이종수 | ||||||||||||||||||||||||||||||||||
[경허 (鏡虛, 1849~19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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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을 시작하며
지금까지 경허 선사에 대한 연구는 근대기를 살았던 어떤 스님보다 많이 축적되었다. 학술대회가 열려 선사에 대해 집중 탐구가 이루어지기도 했고, 박사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야기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선사의 선사상과 불교사적 위상에 관한 문제이다. 선사상과 관련해서 혹자는 선교일치(禪敎一致: 선과 교학은 일치한다), 혹자는 사교입선(捨敎入禪: 교학을 버리고 선을 닦는다), 혹자는 선정쌍수(禪淨雙修: 선과 정토를 함께 수행한다)를 주장했다. 선사가 간화선으로 깨달음을 얻고 후학들을 지도하여 간화선을 부흥시켰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는 없지만, 교학이나 정토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이능화가 1918년에 간행한 《조선불교통사》에서 경허의 선을 ‘마설(魔說)’이라고 평가한 이래, 대부분의 연구자가 이를 비판하며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한국의 달마” “한국 근대 선의 첫 새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선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질곡의 근대 시기에 불어 닥친 외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한국불교의 중심을 잡아 주었고 그로 인해 한국불교 전통을 지금까지 계승할 수 있도록 한 버팀목이었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오늘 여기서 새롭게 이야기해 보려는 내용은 경허 선사의 불교사적 위상과 관련한 부분이다. 그 가운데서도 선사가 주도했던 결사와 관련하여 ‘왜 수선결사를 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해 보려 한다. 불교에서 ‘결사(結社)’라는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개혁운동이라는 용어와 맞닿아 있다. 그 시대의 부정적 현실을 개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선구적인 시대정신의 발로에서 주장한 것이 개혁이고 결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는 당시의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선사의 개혁운동에 함의되어 있는 시대정신을 탐구해 보자.
1) 선사의 생애 경허 선사의 속명은 송동욱(宋東旭)이고,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 씨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사가 탄생한 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고 있다. 1931년에 방한암 스님이 쓴 행장에서는 1857년(철종 8) 4월 24일에 태어났다고 하였고, 1943년에 만해 스님이 간행한 《경허집》의 약보(略譜)에서는 1849년(헌종 15) 8월 24일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 김지견 박사는 경허 선사가 찬술한 〈서암화상행장〉의 글을 토대로 1846년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스님이고 그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태어난 해에 대한 기록이 엇갈리는 것은 생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수행자의 면모 때문이었으리라. 이 글에서는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1849년설을 따르기로 한다. 경허 선사는 아홉 살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사에서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경허 선사가 15세가 되었을 무렵에, 계허 스님이 환속하면서 동학사의 만화(萬花) 화상에게 소개해 주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경전을 배웠다. 선사는 타고난 영특함으로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외우고 이해하였으며, 마침내 23살의 젊은 나이에 동학사의 강사가 되었다. 사방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많은 학인들이 몰려올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을 향해 길을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급히 근처의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염병이 돌고 있던 탓에 가는 곳마다 쫓겨났다. 그 후 동학사로 돌아온 경허 선사는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겠다”며, 강사의 직분을 벗어 버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참선에 들어갔다. 하루는 시중드는 사미의 스승이 사미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여 경허 선사에게 그 뜻을 물었는데, 그 순간 선사는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때는 1879년(고종 16)으로 스님의 속세 나이가 31살이었다. 이후 선사는 서산의 연암산 천장암으로 거처를 옮겨 오도송을 읊었다.
경허 선사는 그 후 1899년에 가야산 해인사로 옮기기까지 20여 년간을 서산의 개심사, 부석사, 천장사 등지를 왕래하며 지냈다. 이 당시의 행적에 대해 한암 스님은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마도 경허 선사는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이룬 이후 다시 천장암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대오(大悟)를 이루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행장에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속인들과 섞여 지내기도 하고 한가로이 정자에 누워 풍월을 읊조리며 지냈다고만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구자는 동학사에서 천장암으로 옮긴 후 20여 년간의 행적에 대해서 은둔의 세월이었다고 서술하거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실망하며 울분의 세월을 보냈으리라고 보기도 한다. 깨달음을 이룬 이후 충남 서산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던 경허 선사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준 것은 1899년 해인사의 초청이었다. 51세에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선사는 이로부터 1904년까지 5년간 본격적인 후진 양성과 교화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다시 1904년에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가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웅이방에서 입적할 때까지 선사의 행적은 불확실하다. 만년에는 환속하여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으로 함경도 지역을 떠돌며 시골 서당 훈장 노릇도 하고 시장 거리에서 술잔도 기울였다고도 한다. 사법제자(嗣法弟子)인 혜월 스님과 만공 스님은 경허 선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함경도로 가서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하고 그 동네 노인으로부터 임종게를 받아왔다.
선사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살다가 64세로 파란만장한 인간세상의 삶을 마감하였다. 수선결사를 통한 본격적인 교화의 시기는 5년에 불과하지만 선사의 선풍은 영남과 호남 지역 사찰에 크게 진작되어 근대 한국불교 선풍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는 1899년에 가야산 해인사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서 수선사(修禪社)를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때 보조지눌이 1200년에 송광사에서 수선결사를 결성하였고, 조선 후기에 백파긍선이 1822년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수선결사를 맺은 후 또 하나의 수선결사가 경허 선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선사와 관련된 것으로 《경허집》에 보이는 것은 수선결사는 해인사, 화엄사, 범어사의 수선결사이다.
우선 해인사 결사문의 제목을 풀이해 보면, ‘함께 정혜를 닦고 함께 도솔천에 나서 함께 성불하는 계사를 결성하는 글[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이다. 여기서 계사(稧社)란 계(契)와 같은 의미로서 ‘뜻을 같이하는 모임’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함께 선(禪)을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서 미륵부처님께 의지하여 성불하자고 하는 염원을 담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경허 선사는 오로지 선(禪)만을 닦자고 하지 않았다. 수선(修禪)만으로 모든 수행이 끝난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토에 태어나기보다 도솔천에 나기가 쉽기 때문에 도솔천에 태어나자고 한 것이지 왕생극락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였다. 또 “잡념 속에서 염불하지 말라”고 하여 염불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롯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선(禪)을 중심에 놓되 다른 불교 신앙도 수용하면서 수선(修禪)할 것을 당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규례를 만들어 엄격하게 수행의 풍토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경허 선사는 당시 주지가 누구냐에 따라 선객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실을 폐지하는 시속(時俗)이 있음을 비판하고 교학보다는 수선(修禪)의 공덕이 더 크다고 하였다. 실제로 선사의 수선결사 운동이 있기 전까지 조선불교계는 교학 중심의 불교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17세기부터 정착한 선, 교학, 염불의 삼문수학(三門修學)이 대부분 지역에서 일반화되었고 점차 선 수행보다는 교학승들이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염불신앙을 통해 신도들을 포교하였던 것이다.
경허 선사는 수선결사에 필요한 재원을 다른 곳에 쓰지 않도록 함으로써 안정적인 결사를 당부하였다. 수선하는 스님들이 선방에 들어와서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정진할 수 있도록 하여 전국의 납자들이 모여 선 수행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시 논 1마지기가 대략 150~300평이므로 82마지기면 12,300~24,600평이다. 그러므로 거의 2만 평에 이르는 논을 선원을 위해서만 부쳤다면 전국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수선 납자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1) 수선결사의 개혁성과 시대적 함의
이능화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불교에 대해 깊이 이해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 불교계의 현실이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인 평가였는지도 모른다. 또 그가 조사한 시점이 1910년대이므로 경허 선사가 살았던 시대와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과 20~30년 만에 불교계가 크게 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의 평가가 전부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당시 대체적인 불교계의 상황이 교학 중심이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경허 선사가 수선결사를 주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새로운 선풍 진작을 위한 하나의 작은 개혁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경허 선사가 수선결사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개혁운동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8세기 불교계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불교계는 19세기와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19세기 후반의 불교가 교학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18세기까지는 선 중심의 불교였다는 점이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불교계는 선, 교학, 염불의 삼문수학(三門修學)이 정착되어 승려들은 선을 중심으로 교학과 염불을 수학하였던 것이다. 삼문수학은 청허휴정 스님에 의해 처음 주장되었고, 그의 제자 편양언기 스님이 그 내용을 구체화시켰다. 언기 스님은 선의 경절문과 화엄교학의 원돈문과 정토의 염불문 공부를 언급하여 삼문수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경절문 공부는 조사의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고, 원돈문 공부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이며, 염불문 공부는 서방을 향해 자성미타를 염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문수학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선 전기의 선교양종이 선종으로 단일화된 상황에서 선종의 경절문이 교학과 염불을 포용한 삼문수학이었다. 이처럼 19세기 불교계는 선 중심의 17~18세기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삼문이 동등하게 인식되거나 오히려 교학이 더 우위에 놓이는 상황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경허 선사도 처음에는 만화 화상에게서 교학을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경허 선사는 교학의 최고 직위라고 할 수 있는 강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문을 풀지 못하여, 마침내 교학을 벗어던지고 선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어느 날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선사의 경험은 선사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역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19세기 이래 선사의 위상이 하락하고 교학의 강백이 우대받는 상황에서 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니 현실의 시대성을 거슬러 18세기를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허 선사는 만화 강백을 수업사(受業師)로 삼았지만 법통의 사법스승으로는 용암혜언(龍巖慧彦, 1783~1841) 스님을 들었다. 이는 선의 법통이 용암 스님에게서 끊어졌으므로 자신이 그 법통을 이어 새롭게 부흥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엄사 상원암의 수선결사에서 경허 선사는 “참선하는 사람이 비록 졸음과 망상에 빠져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삼승 학인이 훌륭하게 도업을 성취한 이보다 수승하다.”라고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즉 경허 선사는 수선결사를 통해 선 수행 중심의 불교개혁을 추동하려 하였다고 생각된다.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는 불교계에만 한정되는 개혁운동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은 서양 세력과 일제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개항 이후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수백 년간 지켜오던 전통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갔고, 서울의 위정자들은 전통의 고수와 개혁 사이에 갈등하며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립하고 있었으며, 서양의 여러 나라들도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적인 혼란, 신분의 혼란, 경제적인 혼란 등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농민들은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에 불교계는 고달픈 민중에게 아무런 등불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양반들에게 승려들은 천민이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보였고, 백성들도 존경할 만한 승려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력이 증가하면서 일본불교가 서서히 침투해 오더니, 급기야 1895년에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인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에게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건의하여 고종 임금의 승낙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당시는 갑오개혁으로 우리나라를 근대사회로 변혁해 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노 젠레이의 건의가 아니더라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될 시점이었다. 그런데 일본인에 의해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됨으로써 조선의 승려들은 일본불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그만큼 조선의 승려들 대부분은 세상의 변화에 무지했으며 일본의 야욕을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든 승려들이 세상의 변화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허 선사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불교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직시하며 우리나라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고, 그것이 바로 수선결사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우리 민족의 불교 전통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에서 거론한 16인의 선종 승려 가운데 9인이 경허 선사의 사법제자이거나 그 영향을 받았던 승려였다. 당시의 고승 84인 가운데 68인이 교종 승려이고 16인이 선종 승려라고 하였는데, 그 16인 중의 9인이 경허 선사의 제자라면 당시 경허 선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고승으로 인정받고 있던 선종 승려 가운데 경허 선사의 제자가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인공은 경허 선사의 사법제자인 신혜월(申慧月), 송만공(宋滿空), 방한암(方漢巖), 전수월(田水月)을 비롯하여 김제산(金霽山), 김남전(金南泉), 백용성(白龍城), 오성월(吳惺月), 강도봉(康道峯)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1921년에 있었던 선학원 운동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국가가 식민지화되어 가던 상황에서 불교계는 1906년에 ‘불교연구회’를 창립하고 명진학교를 설립하는 등 근대적 교육을 통해 불교를 쇄신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908년 전국의 승려 대표자 52명이 서울 원흥사에 모여 ‘원종(圓宗)’을 창립하고 이회광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실로 조선 전기에 종단이 폐지된 이후 처음으로 불교계 자력으로 세운 종파였다. 그런데 이회광은 일본의 힘을 빌려 불교를 부흥시키려는 의도로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박한영, 한용운 스님 등은 국가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상황에서 불교마저 일본에 넘기려 한다며 강력히 규탄하고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선풍을 지키고자 하였다. 경허 선사에 의해 부흥된 간화선풍에 기반하여 조선시대 이래 전통적인 종파라고 할 수 있는 임제종을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민족의 전통적인 불교가 일본 불교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제정하면서 한국불교를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으로 종명을 정하여 운영하였다. 이에 따라 총독부의 명령에 의해 원종과 임제종이 폐지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불교 선교양종에 30본사를 정하여 통제하였는데 본사의 주지들은 대부분 일제의 불교정책을 수용하여 ‘본사주지회의’를 최고의 의결 기구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불교 정책에 대해 한용운, 백용성, 송만공 등은 한국 전통불교를 계승하기 위해 1921년에 ‘선학원(禪學院)’을 창립하였다. 선 수행을 민족의 불교 전통을 지켜내고 아울러 선풍을 진작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 선학원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승려들은 경허 선사의 제자이거나 손제자들로 신혜월, 송만공, 방한암, 김남전, 백용성, 오성월, 강도봉, 김석두(金石頭), 황용음(黃龍吟), 김적음(金寂音) 등이었다. 이들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이 늘어나고 육식이 일반화되어 가던 상황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청정승가를 지켜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경허 선사가 해인사에서 수선결사를 시작한 이래 40여 년 만에 전국의 수좌들이 대부분 스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까지 선 수행자가 교학승의 숫자를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대부분의 선 수행자가 경허 선사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았다고 본다면 선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직제자들의 선풍이 전국을 풍미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경허 선사가 주도했던 수선결사의 개혁운동이 선학원 운동에서 결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경허 선사가 남부지역을 유력하며 수선결사 운동을 일으켰던 이유와 그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허 선사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국가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고 불교계는 선 수행보다 교학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전국의 고승들 가운데 8, 9할은 교학승들이었다. 17세기 이래 선을 중심으로 교학과 염불을 수행하는 삼문수학이 전통이 되었는데, 18세기부터 교학과 염불이 중시되어 삼문이 동등한 비중으로 중요시되면서 선 중심의 분위기에서 일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에 접어들어 점차 선의 중요성이 교학보다 낮아지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선 수행을 하는 납자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경허 선사도 처음에는 교학을 배웠으나 교학만으로는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음을 느끼고 선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던 어느 날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더욱 수행하여 대오(大悟) 하였다. 그러나 국가적인 혼란으로 인한 시대적 상황에 실망하여 20여 년간 은둔의 세월을 보냈다. 경허 선사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던 것은 1899년에 해인사로 거처를 옮겨 수선결사를 주도하면서부터였다. 이로부터 남부지방 여러 사찰을 유력하며 5년간 수선결사를 통해 간화선풍을 진작하였는데, 이는 당시 교학 중심이었던 불교계를 선 수행 중심으로 변화시키려는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허 선사의 개혁운동은 5년에 불과했지만 그 씨앗이 자라서 일제강점기에 선학원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21년부터 시작된 선학원 운동은 대부분의 본산 주지들이 일제의 회유에 굴복하여 왜색불교화되어 가던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간화선 수행을 강조하여 한국불교 전통을 수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허 선사의 수선결사를 통한 개혁운동은 한국불교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지금까지 계승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는 한국불교 전통에 관한 것이다. 본고에서 언급한 한국불교 전통이란 조선 후기 불교를 말한다. 왜냐하면 고려시대까지의 불교 전통은 조선 전기의 억불정책을 통해 변형되었고 17~18세기에 간화선 중심의 삼문수학이 불교 전통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경허 선사가 교학을 비판하며 되찾으려고 했던 전통이 바로 17~18세기에 성립된 간화선 중심의 삼문수학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해인사 수선결사문에서 살펴보았듯이, 경허 선사는 염불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음 이후 교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지만 만공 스님이나 한암 스님 등 그 제자들의 박식함에 비추어 본다면 교학도 배척하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경허 선사가 진작했던 선풍은 간화선이었지만 그 전통은 17~18세기의 삼문수학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연 오늘날 조계종이 경허 선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조계종 승려로서 교학을 배척하는 선사가 있다면 경허 선사와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흔히 경허 선사를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자’라고 평가하고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자라는 평가는 그의 제자들이 조계종 성립의 주역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나온 평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가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조계종이 경허 선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두었을 때, 필자가 경허 선사의 정신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경허 선사의 제자를 자처하는 선사가 만약 교학을 배척한다면 그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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