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박경석 시비
생도송
생 도 송
生徒頌
박경석
여기 화랑대 평화로운 생도의 요람
이 들과 언덕에 여름꽃 필 무렵
부푼 꿈 유월의 소망 가슴에 묻고
조국의 부름에 구국전선으로 달려간 생도
오 영롱한 젊음의 충정이여
그것은 정녕 타오르는 나라 사랑
정의와 자유 화랑도의 부활이어라
생도의 충절 온 누리에 떨쳐
선열의 얼 빛낸 숭엄한 발자취
그 거룩한 장거 어찌 잊으랴
이제 그날의 위훈 멀어져가고
역사의 저편에 시라진 영웅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 흐르는가
새벽이면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처럼
영겁으로 이어갈 새 생도들이여
누만 년 국운 짊어질 아기별들이여
참고 - 설명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태릉 육군사관학교 후보생과정을 없애고 4년제 정규과정을 신설했습니다.
그 준비를 위해 생도1기생은 2년제로 모집하고 이공학사 과정으로 4년제 생도2기생을 모집했습니다.
1950년 6월 1일 28대 1이라는 놀라운 경쟁을 뚫고 330명이 합격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교육을 중단시키고 생도들을 포천전투에 투입시켰습니다.
청소년인 이들 생도2기생은 초전에 86명이라는 전사자를 내어 세계 전사상 유례없는 비극을 남겼습니다.
나 박경석 생도는 17세의 최연소 나이로 참전, 첫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습니다.
이 비극을 기리기 위해 육사에 헌정된 시가 '생도송'입니다.
정규 4년제로 입교한 생도2기생은 6.25한국전쟁으로 5개월만에 소위로 임관하여 창설 9사단 소대장으로 배치됩니다.
당시 육군소위는 消耗品이라는 별칭이 있었습니다.생도2기 소대장은 9사단에서 다시 40여 명이 전사합니다.이래서
생도2기생을 육사에서는 '죽음의 기'로 불립니다.
나는 평창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서 겨우 죽음을 면합니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은 학위임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자비로 야간대학에서 대부분 학위를 취득했고 도미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미국의 군사학교를 졸업 미군 장교와 동등한 자격을 얻습니다. 1960년 중반 육사 기수를 새로 조종할 때 하나회 세력에 밀려 육사 생도 2기 기수가 사라집니다.
계급도 군번도 없이 생도로 전사한 86명 생도2기생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군복을 벗고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동기생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정부와 육군 당국자들과 단판, 1992년,즉 42년만에 비로소 고 육군소위로 추서됩니다.이때 전임 회장인 정우봉장군이 나와 함께 매듭을 지었습니다.
다시 나는 육사 기수를 찾기 위해 동기생 회장 자격으로 육군과 육사를 상대로 명예 회복에 나섰습니다.매우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차기 동기생 회장 장정열 회장과 함께 명예졸업장 쟁취에 성공, 1996년에 성대한 명예 졸업식이 육사 화랑연병장에서 거행됩니다.나는 동기생 가운데 막내입니다.결국 막내의 역할을 다했습니다.(참고 - 생도2기 입교자가 일부 333명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장정열 동기생이 임의로 3명을 추가한 것으로 입교자 명단 가운데 뒤 3명은 조작 추가된 것임을 밝힘.)
그후,2010년 6월 4일 생존 생도2기생 64명 전원에게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이 주어집니다.
이 기구한 운명의 '생도2기생'이야기는 내가 실록소설 '생도2기생'단행본으로 출간(홍익출판사 발행)했습니다.
한국디지털도서관 [박경석의 서재] '전자논저'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생도 2기 생의 참전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으며 오늘 생도송의 시비는 처음 읽어습니다.
6.25의 남침으로 피지도 못한 생도 2기 생의 조국을 위한 희생,
삼가 명복을 빕니다
존경합니다. 라는 말 외엔...
두 분 시인께 감사의 정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