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역사를 바로 인식하기 위한 군사평론가들의 대담
1.국군의 과거와 오늘을 말한다
지난 9월 21일 월간 군사저널 광화문 사무실에서 한국군사평론가협회 임원들이 모여 『국군의 날 특집』으로 국군의 역사를 바로 인식하기 위한 군사평론가들의 대담이 박경석 장군(한국군사평론가협회 회장. 작가. <예>장군)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참석자로는 양창식 장군(한국군사평론가협회 고문. <예>장군. 국회의원 <3선> 역임), 신재성 장군(한국군사평론가협회 이사장. <예>장군), 정영휘 장군(한국군사평론가협회 이사. 작가. <예>장군), 박정아 본지 발행인(한국군사평론가협회 자문위원)이 대담에 참석하였다.
박경석 장군 : 다음 달, 건군 59주년 『국군의 날』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군사평론가로서 『국군의 날』에 즈음하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장을 마련하여 국군의 융성을 위해 우리가 노력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 오늘의 모임을 소집 하였습니다. 특히, 한국군사평론가협회의 어른 되시는 양창식 장군께서 이 자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정규 육사생도로 들어가서 생도시절부터 처절한 전투에 참가했던 신재성 장군을 환영합니다. 또 육사 13기로 우리가 베트남전에 전투부대를 파병하기 전에 월남 땅에 제일 먼저 가서 태권도를 설파한 장본인인 정영휘 장군을 모셨습니다. 오늘 좌담회를 시작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한국군사평론가협회 고문이신 양창식 장군께서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맞이하는 감회와 국군 장병에게 바라시는 좋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창식 장군 : 군복을 벗은 지 오래되어요. 그래서 군에 오래 동안 떨어져 있어 잘 모릅니다만, 다행히 작년 가을에 전방 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현역 시절 사단 작전참모로 복무했던 부대의 대우산 펀치볼 일대 GP를 돌아보았는데, 후방에서 우리가 듣고 나눈 것을 참고하고 갔었는데 생각보다는 장병들의 사기가 아주 높고, 훈련 정도도 아주 잘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국토방위에 대한 강력한 책임을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믿음직스러웠습니다. 바람직한 인식을 하고 돌아왔지요. 우리가 염려했던 군이 아니라 우리의 국토방위를 국민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굉장히 성숙한 모습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또, 손자 두 명이 현재 현역병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가끔 휴가 나오면 군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물어 보는데, 우리가 염려했던 그런 것은 염려할 필요 없지 않겠느냐. 그리고 전방 사단장을 만났는데 "언제라도 임무가 떨어지면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으니 조금도 근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힘찬 말을 듣고 군의 건전함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건군 59주년을 맞이한 우리군의 성숙한 모습이 일반 국민에게 투영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경석 장군 : 군을 사랑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군요. 다음은 신재성 장군과 저는 육사정규생도로 들어가서 사관생도로 전투 경험이 있습니다. 신재성 장군께서 기여하신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B-29는 전략폭격기이기 때문에 한국전쟁 초기에 나타났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B-29가 한국전쟁 중반에 대량 표적에 폭격에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재성 장군께서 동기생 모임에서 육사생도로 참가한 전투 중에 B-29를 보았다고 하기에 동기생들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신 장군은 주한 미군을 통해 당시의 자료 확보를 해서 사실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 자료로 재작년부터 새롭게 쓰는 『6.25 전쟁사』 제1권에 최초로 수록된 역사적 과업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부분의 자세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신재성 장군 : 여기에 평소 존경하는 선배이신 양창식 장군께서는 당시 생도 1기생으로 우리나라 장교 중에 1년에 가까운 가장 많은 훈련과정을 받은 분입니다. 또 저와 동기생인 생도 2기 박경석 장군께서도 함께 하고 있는데…….
박 장군과 저는 대한민국 최초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로 입교를 했는데, 그때 지원자가 8,000여 명으로 28대 1의 관문을 뚫고 333명이 합격하여 입교했습니다. 입교해서 6.25전쟁이 나기 전까지 불과 25일간 제식훈련, 각개훈련, 사격술 등의 훈련을 하고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생도들은 다행히도 9발 내지 86발씩의 M1 실탄 사격은 체험하였습니다.
육사 생도 1기, 2기 600 여 명이 6.25전쟁 개전 초 포천지구 전투에 투입되어서 인민군 3사단 9연대와 6월 26일 오후에 전투를 치렀는데, 6.25 개전 이래 인민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으며 전무후무하게사관생도로 전투에 참가하여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6.25전쟁 첫 일주일 동안 계급도 군번도 없이 치른 전투에서 우리 동기생인 생도 2기 86명, 생도 1기 선배들은 64명의 고귀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북한군의 전차와 야포에 밀려 태릉지구로 철수하여 27일부터 28일까지 92고지(지금의 태릉골프장 지역) 및 불암산 일대에서 진지를 사수하다가 12시 반 경에 철수명령이 떨어졌으나 동기생 4명은 철수명령을 전달받지 못하고 본대로 합류하려고 학교(육사) 쪽으로 가보니 벌써 상당수의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발견한 인민군 기마대 1개 중대 가량의 병력이 따발총(PPSh-41)을 쏘며 추격해 와 사력을 다해 근처 봉화산으로 은신했습니다. 당시 육사 주변에는 40여 대의 북한 전차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의 선전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트럭 2대에 인공기를 흔들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게양하며, 수만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소형 인공기를 소지시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게 하고, 언제 배웠는지 '적기가' 등을 부르면서 육군사관학교에 운집하여 인민군 진주를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봉화산이란 조그마한 산에서 인민군의 서울 진주를 바라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날 저녁 9시경에 그곳에서 탈출하려는데 달이 너무 밝았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도로를 메운 가운데 우리는 담대하게 군중을 헤치고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하나님의 가호가 있었던지 누구 하나 '저놈 잡아라.' 외치는 사람이 없어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날 봉화산에 잠복해 있는데, 오후 4시경에 B-29 한 대가 육사 상공을 선회하자 수천 발의 북한군 고사포 사격이 가해져서 폭격기가 격추당할까 봐 걱정하였습니다. 미 공군이 인민군의 화기 성능을 알고 비행한 것 같아요. 의정부 쪽으로 50분 정도 폭격하는데 그 소리가 대단하더군요. 이 목격담을 재작년 6월 25일에 우리 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며칠 후 동기생 모임이 있어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신 장군 치매가 걸리지 않았느냐?"며 동기생들이 면박을 주더군요. 6월 28일 새벽에 이미 미아리고개가 적 수중에 들어갔는데 우리 일행은 12시 반까지 불암산 앞을 사수하다가 철수를 했지요. 6월 28일이면 미국 날짜로 6월 27일이고, UN결의가 26일이여 불과 하루 사이입니다. 불과 전쟁 발발 하루 만에 어떻게 전략폭격 임무 띤 B-29가 출동을 했단 말이냐? 또 일부 예비역 공군 장군은 "신 장군이 육군이라 공군 전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B-29란 고공 전략폭격을 하는 폭격기로 전투기 한 대 호위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비행기가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당시 1사단장을 역임한 백선엽 장군과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장지량 장군도 "신 장군이 잘못 보았다고 하더군요."라고 하기에 유엔군 사령부에 이 사실을 확인요청을 하였더니 그날 맥아더 장군의 특별 명령으로 B-29 4대가 서울 상공에 출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당시 저와 함께 행동했던 3명의 동기생 중 한 명은 2개월 후 전사했고, 또 두 명은 전쟁 중 실종되어 이 사실을 밝히는데 애로가 있었습니다.
박경석 장군 : 신재성 장군께서 큰일 하셨습니다. 미국에서 온 확인 자료가 이번 군사저널 10월호에 게재되었으면 좋겠어요. 57년 전의 일인 1950년의 기억을 어렵게 미군 사령부에 확인하여 한국전쟁전사에 새롭게 게재되었습니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맞이한 국군 장병에게 우리 노병들이 관심을 갖고 국민들에게 우리 국군을 사랑해 주십사 하는 자리인 만큼, 과연 10월 1일 『국군의 날』에 우리 국민이나 우리 노병에게 소홀히 하는 점이 없겠는가? 그 문제에 대해 나는 생각합니다. 10월 1일은 대단한 축일이지요.
정영휘 장군은 『국군의 날』 즈음에는 각종 방송국, 일간지, 국방부 관련 언론에 특별한 칼럼을 많이 기고 합니다. 10월 1일이면 정 장군께서는 경사의 날이십니다. 『국군의 날』의 감회, 의의, 그리고 어떻게 소중히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정영휘 장군 : 올해가 건군 59주년입니다. 우리군은 68만의 대군으로 성장했습니다. 현대화된 무기체계와 고도의 전술전기, 높은 교육수준을 자랑하는 장병들, 조국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정의로운 젊은이의 집단,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국군을 보는 총론적 시각입니다. 1948년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이래 지난날을 돌아보면 굽이굽이 형극의 도정이었습니다. 남의 나라 군복을 얻어 입고 굶주린 허리띠를 졸라매며 모진 훈련을 이겨냈습니다. 일본 군대의 잔재와 미군 군사교범의 부조화를 극복하는 데는 많은 시행착오를 넘어야 했습니다. 여순반란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 명예를 해치는 오점을 남겼는가 하면 한때 군사문화가 매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국군은 그런 군대가 아닙니다. 국내적으로는 가장 신뢰받는 국가기관으로 대외적으로는 13개 나라에 1,800명을 파견해 국제평화에 기여하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새 역사의 장에 기록될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박경석 장군 : 양창식 장군께서는 생도로 참전했던 6.25 초기에 같은 참호에서 싸웠어요. 저는 생도 때 입교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였어요. M1 소총에 8발 클립도 넣지 못했어요. 영점 사격은 했지만 조교가 넣어주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직접 넣지를 못했지요. 그래서 생도로 참가한 전투에서 양창식 선배가 옆에서 직접 8발 클립을 넣어 주어 쏘고 또 나면 다시 넣어주고 해서 싸웠어요.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선배입니다. 그리고 3선 국회의원으로 국회에서 농수산 위원장과 교통체신 위원장으로 대단한 활동을 하셨던 분입니다. 또한 국회 국방위 위원으로 6년간 활동하셨습니다. 정치문제나 국방문제에 대해 전문가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긴요한 말씀이 많을 줄 압니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NLL 문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NLL은 우리 국가의 자존심이고 우리군의 생명선입니다. 양보가 전혀 없는 사안입니다. 왜냐하면 휴전 이후 우리가 지켜왔어요. 그것을 한 치라도 내 준다면 우리 국가와 군의 자존심이 훼손되는 일입니다. 선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창식 장군 : 박경석 장군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현재 NLL에 대해 화제가 되고 있고 논란이 되고 있는 까닭은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이번에 남북정상회담의 준비팀장으로 임명되면서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7월 16일 질문에서 답변하는 과정에 지난 서해해전은 적절하지 못한 해전이라고 발언한 후 8월 10일 'NLL은 안보개념이지 국토개념이 아니다'라고 재차 발언함으로써 논란이 되었습니다. 안보라는 것은 국토가 있고 국민이 있어야 필요한 것이지 국토가 없이 안보가 필요하나요? 그분은 무엇인가 착각을 한 것입니다. NLL은 휴전협정체결 다음해 유엔군에 의해 그어졌는데, 그것은 서해 5개 도서를 방어하기 위한 필수 선입니다. 그건 국토 경계선이고 어떤 국가간이라면 국경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진 선입니다. 우리 군이 50여 년을 넘게 사력을 다해 지켜온 선이데 이것을 양보한다고 한다면 서해 5개 도서를 거저 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적행위보다 더 큰 반역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해 5개 도서에 우리 군이 수 천 명이 있고, 또 고등학생은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전쟁이 나면 집총을 하고 군인과 같이 싸우게 되어 있어요. 또 비상사태에서 생활하는 국민들은 생활 터전을 잃게 되고, 서해 인천을 비롯한 모든 지역 방어에 큰 허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서부전선 장산곳에 있는 북한에 해군기지 및 황해 반도의 남단에 있는 해안선에 배치된 적의 화력이든가 부대활동을 용이하게 해줌으로써 우리 전방 수호에 큰 지장을 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NLL을 후퇴시켰을 때 거기에 있는 병력을 서울 축선에 집결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서울 축선으로의 중앙 돌파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북한이 만일 남침을 한다면 남침을 도와줄 수 있는 결론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NLL은 우리 국가의 생명선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국토 개념입니다. NLL 양보는 국가 반역이고, 민족 반역입니다. 그래서 NLL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논의될 문제는 아니고, 보다 더 전문가에 의해서 북한과의 평화문제 그 다음에 군사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 통일 단계에서 논의될 문제지 지금 이렇게 시급하게 논의될 문제는 아닙니다.
박경석 장군 : 만약에 NLL을 흥정 대상으로 삼고, 북한에게 양보를 한다면 중대한 2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통일 이전에 인천국제공항이 측면으로부터 위협을 받아서 국제공항이 무용지물화 될 위험성이 있고, 두 번째는 수도권, 특히 개성에서 바라보이는 임진강 건너 보병 제1사단과 9사단 지역의 측방이 노출됨으로써 수도권 방어 전력이 크게 훼손이 됩니다. 대한민국의 국토방위 안위에 직접적인 위협이 NLL 후퇴입니다. 다음에는 조금 부드러운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양창식 장군 : 한 가지만 추가한다면 이재정 장관과 통일부의 고급 관료들은 남북기본합의서 10조, '남과 북은 의견대립과 분쟁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라는 내용을 유독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본합의서는 북한에 의해 사문화 되었습니다. 북한이 이것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통일부는 유독 이 조항을 내세워야 일을 추진하느냐 말입니다. 딴 여러 가지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이 문제에만 거론하는지. 다른 조항도 많아요. 남북교류 협력,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등 여러 가지가 있고, 각론에는 남북공동군사위원회 설치 등을 무시하고 그것 하나만을 끄집어내고 있는데 이것은 북한에 의해 사문화된 내용으로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박경석 장군 : 좋은 말씀입니다. 다음은 조금 부드러운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중요성은 지나치게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죠. 베트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 경제가 일약 발전하여 중진국 대열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고, 다음은 많은 기술자-노동자들이 월남 특수, 중동 특수로 이어지는 국력신장에 기여했죠.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국군의 발전입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는 우리 군은 3류 군이었습니다. M1 소총, 칼빈 소총, 헬기는 군단장 정도만 타고 다닐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군 이였습니다. 제대로 된 비행기, 탱크도 없었고, 제대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현대적 감각과 선진 감각의 전략전술을 익히게 됨으로써 또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모든 국군 장병이 세계가 놀랄만한 위대한 전과를 이룩했기 때문에 3류 군에서 일약 1류 군으로 도약한 계기가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면에 전투부대 못지 않은 더 중요한 역할은 월남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의 강인함 한국군의 정신, 한국군의 태생적 강인성을 인식시키는데 제일 먼저 기여한 분이 계십니다. 정영휘 장군께서는 전투부대, 비둘기 부대를 파견하기 이전에 태권도 교관으로 맨 처음 베트남 땅에 도착하여 우리 군의 우수성을 떨친 분입니다.
정영휘 장군 : 한국이 태권도 종주국이 된 시발점이 월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배경이고 동시에 태권도의 산역사인 데 1959년 월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고 딘 디엠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 육군 보병 제29사단의 장병들의 태권도 시범을 보고 감명을 받아 돌아가서 주월남 대사관을 통해 태권도 시범단을 요청했습니다. 베트남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시범단을 보냈습니다. 당시 최홍희 소장을 단장으로 15명으로 태권도 시범단이 월남의 3군 사관학교 및 고위층에게 시범을 보여 많은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후 62년 군사원조 일환으로 태권도 시범단 4명의 교관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이 시범단이 한국군 최초 해외지원이면서 태권도가 세계로 전파되는 첫 시발점이었습니다. 이 때 제가 시범단의 일원으로 사이공에 파견되어 교관 요원들을 양성하는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것은 65년 채명신 장군의 주월한국군사령관 부임으로 전국적으로 활성화-확대되어 80개 태권도 교육대에 200명이 넘는 교관들이 지도를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태권도가 해외에 많이 진출하여 대한민국의 브랜드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정아 발행인 : 당시 교관시절의 계급과 태권도는 몇 단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의 실력은 어디까지 도달해 있습니까?
정영휘 장군 : 당시 대위였고, 그때는 공인 4단이었습니다. 지금은 한국협회공인 8단입니다.
박경석 장군 :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마음을 다지고 여러 교훈들을 후배 장병들에게 남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국군의 날』의 의의와 『국군의 날』에 대한 변경 움직임과 논지, 그리고 그 정당성 등에 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정영휘 장군 : 먼저 『국군의 날』을 제정한 이유를 보면 우리 국군의 위상과 참모습을 대내외에 홍보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킴은 물론 유비무한의 총력 안보태세를 확립하는데 있습니다. 또 대군 신뢰를 고취하고 민·군의 유대를 강화해 자주국방과 안보의식을 고양하는데도 그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배경은 6ㆍ25 전쟁시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같은 해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개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지난 1956년도 대통령령으로 제정됐습니다. 이후 1976년도부터는 공휴일로도 지정돼 각종 행사 등을 벌이며 경축했으나, 1990년도에 접어들면서 공휴일에서 제외됐습니다. 『국군의 날』 변경과 관련해서는 헌법에 정해진 국가의 정통성이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있음에 따라 38선을 돌파한 날보다는 광복군이 창설된 날인 9월 17일로 바꾸자는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대한제국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한 날이라든지, 임시정부 수립 후 대일항쟁 등에서 역사적 성과를 거둔 날, 광복군 창설일, 해방 후 대한민국 군을 창설한 날 등 다양한 기념일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의 38선 돌파를 『국군의 날』로 정했느냐가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 10월 1일을 고수하자는 의견은 임시정부 수립 이후 6월 29일 UN군 사령부에서 지시된 사항이 '38선에서의 모든 진격을 멈춰라'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38선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러한 통일의지를 기리는 정신도 중요하다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단정 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통일과 안보문제 등을 고려하면서 전문가와 국민 등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거쳐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시일을 갖고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박경석 장군 :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육군 보병3사단이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통일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지만 동족상잔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의지를 지키기 위해 10월 1일을 고수하는 것이 옳았지만, 앞으로 통일이 된다면 통일국군에 대한 『국군의 날』을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 전까지는 현재의 『국군의 날』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합니다.
양창식 장군 :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광복군이 현 국군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까? 전혀 연관성이 없지 않습니까?
정영휘 장군 : 아마도 당시 미국 측의 입장이라든지 해방군과의 혼란 때문에 초래됐던 문제로 보입니다. 일부 주장은 친일파들의 헤게모니로 연결됐고, 또 광복군의 이범석 장군이 국방부장관을 역임하며 광복군의 일부 인원이 국군에 상징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연관성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헌법의 정신이라든지 대의명분 등을 봤을 때 고려의 대상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석 장군 : 하지만 하나의 요소는 될지언정 결정적인 방편은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광복군이 항일전쟁을 했거나 귀국해서 정상적으로 UN군으로부터 인정받고, 또 교전단체로서 받아들여졌다면 그 전통성을 유지하는 것이 맞지만, 광복군은 UN군으로부터 교전단체로 전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광복군의 창설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단절이라는 핸디캡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보다는 3사단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의미의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유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물론 통일 이후 재론의 충분한 여지는 있습니다.
양창식 장군 : 맞습니다. 현재는 국군과 큰 연관성도 없는데 쉽게 결정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박경석 장군 : 한국전쟁에 앞서 양창식 장군께 듣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양 장군께서는 베트남 전쟁시 보병 제9사단 30연대장으로 참전하셔서 백마9호작전을 펼치셨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연대장으로서 당시 발군의 공훈을 세우셨는데, 비록 10월 1일 『국군의 날』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지만 그 정신과 연관된 연장선상에서 베트남 전쟁의 의의를 듣는 것도 후배 장병들을 위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양창식 장군 : 과찬입니다. 당시 30연대장으로 취임한지 이틀 만에 1968년 10월 8일 베트남에 도착해 백마9호작전에 투입됐습니다. 879고지로 한국군 작전지역은 아니었지만, 월남군이 작전능력이 없다고 판단, 우리가 들어가게 됐습니다. 당시 군사령관으로 계시던 채명신 장군과 사단장 유창훈 장군의 풍부한 작전지휘, 전투능력 등에 힘입어 27일간 전개된 작전에서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부대는 미 육군 장관 부대표창, 개인적으로는 을지훈장과 충무훈장을 현장에서 받을 수 있었고 수많은 외국군들의 지휘관들이 이곳에 찾아와 격려해줬습니다. 당시 울진ㆍ삼척지역에 북괴군들이 상륙해 국내에는 우리의 작전이 크게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외국군들에게 한국의 전투능력과 작전수행에 대한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또 주월군 한국사령부가 세계적으로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라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토대가 됐습니다.
박경석 장군 : 신재성 장군께서는 한국전쟁에 사관생도로 참전을 하셨는데,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소총소대장, 소총중대장, 보병대대장, 보병연대장, 보병사단장까지 동기생들 가운데 야전지휘관으로 시작해 야전지휘관으로 끝난 가장 훌륭한 전투경험자로서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야전지휘관으로서 느끼는 소회와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시죠.
신재성 장군 :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6.25 전쟁을 흔히들 나라에 처한 위기만을 거론하지만, 세계 전사상 4년제 사관생도를 개전 초기 무모하게 소총수로 투입한 군 수뇌부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계급도 군번도 없는 상태에서 투입돼 86명이란 아까운 전우를 잃고 나서야 군 수뇌부에서 깨달았는지 대구에 위치해 있던 육군본부의 경계임무와 포항지역의 사령부 경계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후 그 해 9월 2일 창설된 육군종합학교로 편입해 불과 2개월밖에 안된 짧은 기간의 훈련을 받고 임관, 생도 2기생들을 주축으로 9사단을 창설해 백마고지 전투까지 치렀습니다. 당시 본인이 중대장으로 몸담고 있던 28연대 3대대가 1951년 11월 6일 최초로 공격 점령한 이래 무려 주인이 24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전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저는 그 전투를 끝으로 52년 약 6개월간의 도미 유학 과정에 합격해 전선에서 이탈했습니다. 세계전사상 4년제 사관생도를 무모하게 전투에 투입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 군 수뇌부에서 무모한 일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각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첫댓글 17세의 소년병으로 군번도 없이 전투에 참가한것이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지요
당시는 이북도 남한에서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고등학교 학생들은 무조건 일주일 소총 쏘는 법만 가르치고 훈련식여 낙동강 전투로 내몰았거든요 . 이북이나 이남이나 재정신들이 아니였고 동독끼리 상쟁의 비극 또한 세게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