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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심우장(尋牛莊)을 찾아서
김종훤(金宗烜)
꽃철 구름이 엷게 드리운 사이로 꽃샘바람이 살랑거리는 3월 하순이었다. 부드러운 햇살이 봄기운을 머금은 대지를 살갑게 어루만지기는 했으나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나는 몸도 마음도 가볍게 길을 나섰다. 오매불망 그리면서도 차일피일 미루었던 ‘옛님’의 자취를 찾아뵌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시인이요 대선사이며 독립지사인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께서 만년 10여 년간을 사시면서 시희선열(詩喜禪悅)의 향기를 남겨놓고 떠나신 심우장(尋牛莊)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잃어버린 조국과 미망에서 헤매는 중생, 그리고 어두운 현실의 슬픔과 고뇌를 희망과 진리로 이끌고자 하는 의지를 ‘님’ 속에 담아 애절하게 노래한 그의 삶의 자취는 어떠했을지 궁금해서이다.
만해 선생은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혁명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세 때 절에 들어갔다. 1919년 3.1운동 때 불교계를 대표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 후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 가담하였으며,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불교의 대중화와 현실참여를 위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 서거하실 때까지 심우장에 기거하면서 우국충절의 열정을 쏟는 한편 시선삼매(詩禪三昧)의 지관(止觀)에 드시기도 하였다.
심우장이 서울 성북동 어디엔가 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찾으면 찾으리라 여겼다. 따라서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의 심우장은 어떤 심오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다.
삼선동 네거리에서 성북동길로 접어들자 양쪽 등성이의 나무들 사이에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소리가 구구구구 정겹게 들려 올 것 같았다. 성북동길 초입에 성북1동 사무소가 눈에 띄어 들어가 심우장 가는 길을 물어보았더니, 마을버스로 가면 잠깐 가지만 걸어가면 반시간 정도의 길이라고 밖에까지 나와 아주 친절히 일러 주었다. 마침 동사무소 건물에는 대형 휘장에 김소월님의 시 <진달래꽃>이 진달래꽃의 이미지 그림과 함께 쓰여 있었다. 그 시 밑에는 동자치센터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봄을 맞아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시심에 젖어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글이 써 있었다. 참으로 멋있는 문화 동민이 사는 동네구나 하는 호감과 함께 몇십년 전 사춘기 때 즐겨 외웠던 시 중 유일하게 아직도 외울 수 있는 시인지라 혼자서 가만히 읊조리며 걸어갔다. 애틋하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임을 새삼 느끼면서 어울리지 않는 시심에 젖어보기도 했다.
성북동길은 골짜기길이어서 양쪽 등성이를 바라보며 굽이굽이 돌아가는 맛이 있다. 양쪽 등성이를 뒤덮은 주택들 대신 원래대로 초목과 바위들이 있다면 영락없는 호젓하고 아늑한 골짜기길이다. 한 굽이 돌아들자 아름드리 고목들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는 간송 미술관 터가 보였다. 만여 평이나 된다는 미술관 입구에는 진달래꽃 봉오리가 분홍빛 볼을 반쯤 내밀고 금방 터질 듯 수줍게 부풀어 있었다. 또 한 굽이 휘돌아들자 그 유명한 제3공화국 시절 요정 정치의 산실인 대원각(大苑閣) 7천여 평과 4십여 건물이 ‘맑고 아름답게’ 사찰로 바뀐 길상사(吉祥寺) 안내판이 나왔고, 얼마쯤 더 가자 서울시 민속자료인 월북작가 이태준가(李泰俊家)와 조선말 평민 부호의 여름별장인 이재준가(李載俊家)의 안내판이 나란히 기재되어 있었다. 이태준가는 성북2동 사무소 바로 옆에 있다. <달밤> <가마귀> 등의 작품을 남긴 상허(尙虛) 이태준의 고택은 당호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전통찻집으로 꾸며졌고 그 골목은 이태준길로 명명되어 긴 골목길을 이루었다. 이재준가는 산비탈 울창한 숲지대 안의 ㄷ교회 경내에 있는데 현재 목사님의 사택으로 쓰인다고 한다. 또 옛 명문가의 별서(別墅)이며 한국전통정원을 자랑하는 성락원(城樂園)의 안내판도 보였다. 성북동 골짜기에는 유서깊은 기념물과 사적, 학교도 많으며 호화주택과 달동네 빈민촌이 뒤섞인 재미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태고사 입구에서 좀더 비탈길을 올라가자 드디어 심우장 안내판이 나왔다. 심우장으로 가는 길은 ‘심우장길’로 명명되어 일련번호를 따라 제법 가파른 길을 오르는 산동네였다. 심우장길은 30여 호의 전형적인 도시 빈민촌의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집들로 이루어진 산길 같은 골목이었다. 구불거린 골목과 자그마한 집들이 빼곡이 들어찼다. 골목 주변의 빈 집터엔 채소가 가꾸어졌고 비탈진 돌각담에는 휘늘어진 개나리 줄기가 한창 노란 꽃망울을 터뜨려 옛 자취의 영고성쇠를 떠오르게 했다. 만해 선생이 사셨던 약 60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한적했을 것이고 제법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시며 사념에 젖었을 이 길을 오르노라니 전에 내가 살았던 동네인 듯 정답기까지 했다. 만해 선생의 사념 중 무엇보다도 심우장의 심우(尋牛)에 대해 많은 사색을 하셨으리라 여겨진다. 여염집 같은 심우장 대문에 ‘尋牛莊’이란 조그마한 한자 명판이 눈에 띌듯 말듯 고즈너기 붙어 있었다.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자 동네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밀고 들어가 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심우장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심우’의 뜻부터 새겨보는 것이 순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심우라는 말은 심우도(尋牛圖)에서 유래한다. 심우도는 12세기 후반 중국 북송 시대 확암(郭庵) 선사와 보명(普明) 스님의 심우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원래 선(禪)의 길을 걷는 수행자를 위한 기초적 입문서로서의 선화(禪畵)이다. 10단계를 통하여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수행과정과 그 의미를 단계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어 십우도(十牛圖) 또는 심우십도(尋牛十圖)라고도 부른다.
선불교(禪佛敎)는 중국 달마대사를 시조로 하고 6조인 혜능을 분수령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 선종(禪宗)을 따르고 있다. 선불교는 기본적으로 불교의 교리에 중국의 토착신앙인 도교의 원리를 합하여 놓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소는 도가에서는 유유자적을 상징하고 유가에서는 의(義)를,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 자리’ 곧 본성(本性)을 의미한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비유한 심우도가 이 같은 의미를 대표적으로 보여 준다. 그만큼 소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불자와 친숙하다. 큰 사찰의 법당 벽화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고, 불경 곳곳에 소를 비유한 상징들이 기재되어 있다. 선사들도 이러한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 왔다. 고려 때의 보조국사 지눌은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하였는데 ‘소를 기르는 사람“ 곧 참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해 선생이 아호를 목부(牧夫)라 한 것도 비슷한 의미이고, 만년의 서울 자택을 심우장이라 함도 ’본성을 찾아 전념하는 집(산장)‘ 또는 ’불교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심우도는 동자(童子)와 소를 등장시켜 참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때 소는 인간의 진면목인 불성(佛性)을 의미하기도 한다. 처음 선(禪)을 닦게 된 동자가 불성이라는 소를 찾기 위해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내 도(道) 곧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최후에는 선종의 최고 이상향에 이른다는 10단계 수행 그림이다.
그 첫단계 그림이 심우(尋牛)이다. 자기의 잃어버린 본심(本心)인 마음의 소를 찾아 나서는 그림이다.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속을 헤매는 그림으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에 임하는 것을 상징한다. 둘째 단계 그림은 견적(見跡)이다. 아직 소는 보지 못하고 소의 발자국만 발견하는 그림이다.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하면 본성[心牛]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됨을 뜻한다. 셋째 단계 그림은 견우(見牛)이다. 동자가 멀리서 소를 어렴풋이 발견하는 그림이다. 불법(佛法)을 듣고 수학하여 공(空)에 의해 마음의 소를 발견한다. 본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말한다.
넷째 단계는 득우(得牛)이다. 동자가 야생의 소를 막 붙잡아 고삐를 맨다. 수행자가 소를 붙잡았지만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 소에 채찍질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제 본성을 찾았지만 아직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더욱 열심히 수련해야 함을 비유했다. 마치 땅속에서 아직 제련되지 않은 금돌을 막 찾아낸 상태로 견성(見性)의 경지이다. 다섯째 단계는 목우(牧牛)이다. 소를 길들인다. 거친 소에 고삐를 매고 돌아오는 모습을 그렸다. 깨달음 뒤에 오는 방심을 조심하여 삼독(三毒:탐욕.분노.우매)의 때를 씻는 수행 과정이다. 여섯째 단계는 기우귀가(騎牛歸家)이다. 소를 타고 무위(無爲)의 깨달음의 세계인 집으로 돌아온다. 길들여진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을 그렸다.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든다. 소는 잘 길들여져 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동자와 일체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며, 이때의 피리 소리는 본성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내적 소리를 상징한다.
일곱째 단계는 망우존인(忘牛存人)이다. 이제 소는 달아날 염려가 없으므로 소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안심한다. 집에 돌아왔지만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없고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그림이다. 맑고 깨끗한 본성에 돌아왔으나 쉬지 않고 수련해야 함을 비유한다. 결국 소는 종착지인 심원(心源)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고향집에 돌아온 후에는 방편은 잊어야 함을 보여준다. 여덟째 단계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다. 다시 사람도 소도 모두 본래 공(空)임을 깨닫는다. 소를 잊고 또 자기를 잊는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 텅 빈 원만 그려 놓았다. 즉 정(情)을 잊고 세상의 물(物)을 버려 공(空)에 이르렀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객관이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이던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
아홉째 단계는 반본환원(返本還源)이다.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옴이다.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른 그대로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티끌 하나도 없는 수록산청(水綠山靑)의 광경을 그렸다. 그의 본심은 본래 청정하며 아무 번뇌도 없는,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 참된 지혜를 얻었음을 비유한다. 텅 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비치는 그림이다. 즉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
열 번째 단계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중생 제도를 위해 큰 자루를 메고 자비의 손을 내밀어 중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즉 이타행(利他行)의 경지에 들어 중생 제도에 나선 것이다.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한다.
이 심우도는 결국 불교의 진리를 찾는 수행 과정이다. 그래서 불교의 진면목을 공부해 보는 마음으로 다소 지루함을 무릅쓰고 그 과정을 더듬어 보았다.
조선 정조 때의 문신 이기경(李基慶)이 지은 <심진곡(尋眞曲)>이라는 가사가 있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영혼 불멸설과, 죽은 뒤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교리를 냉소적으로 부정하고 유교(儒敎)의 현실 윤리만이 진리이니 그 곳으로 찾아가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를 통해서만 영생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성경)만이 절대 불멸의 진리임을 주장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곳에 있듯이 진리는 어디에나 있는 법,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며, 진리란 각자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말했다. 각 종교는 배타적 대응보다는 관용의 자세로 상대의 진리를 이해하려는 포용과 아량이 아쉬운 때이다.
심우장의 대문을 밀어보니 소리없이 열렸다. 인적이 없는 마당에 밝은 봄볕이 평화로이 내려앉았는데 뒤뜰에 매인 강아지만이 겁먹은 듯 짖어대 한낮 산동네의 정적을 깨뜨렸다. 생각보다 뜰이 넓고 집터가 안정되어 보였다. 대문 옆에 심우장 안내판이 간결하게 세워졌다. 일제 총독부가 보기 싫어 동북향으로 지었다는 작은 사랑채 같은 기와집 ‘심우장’이 아직도 사람이 거처한 듯 깨끗하고 산뜻하게 토방 위에 자리했다. 심우장 바로 앞에 한국문인협회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세운 ‘한국현대문학 표징’ 석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관리인의 집인 단층 별채가 안쪽으로 나지막이 지어졌다. 뜰 귀퉁이에 만해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향나무가 일직선으로 드높이 자랐고, 두 그루의 소나무도 활기차게 옆가지를 길게 뻗어 번잡한 도심에서 생생한 생명력을 발산하여 속진에 오염된 나그네의 마음에 뜻아닌 선열(禪悅)을 느끼게 했다. 그 외 목련과 화초들도 잘 가꾸어졌다.
서재로 쓰던 방에는 선생의 저서와 원고 및 몇 가지 기념물이 전시되고 심우장의 내력이 써 있었다. ---성북동은 성(城) 밖 북쪽 마을 북장골로서 송림이 우거진 한적한 동네였다. 이 터는 원래 만해 선사를 따르던 안국동 선학원의 벽산 김적음 스님께서 초당을 지으려고 북장골 송림 중에 52평을 마련하여 두었던 터였다. 적음 스님께서는 만해 선사의 만년을 위하여 내어드린 것이 발전하여 심우장을 짓게 된 동기이다. 후학 동지들도 나중에 협찬하여 후일 52평의 땅을 더 보태 지금의 1백여 평의 땅에 심우장을 짓게 되었다.
심우장은 일제 시대에 조국의 강토가 짓밟히는 뼈아픈 역사 속에서도 민족의 혼을 간직한 유일한 조국의 땅이요 민족자존의 역사를 간직한 집이다. 심우장이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한 집이란 뜻으로 선생의 일생이 그러한 것처럼 늘 공부하는 집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만해의 심우장은 송림에 숨은 산방인데 매우 한적하고 조용하여 그의 청빈한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정원에는 많은 화초를 재배하여 즐기셨고 만해가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는 만해의 기상을 닮아 늘 푸르게 오늘날에도 잘 자라고 있다. 심우장에서 만해는 <유마경(維摩經)> 원고를 번역하였고, 소설 <흑풍> 등 신문 잡지에 게재할 글들을 왕성히 집필하였다.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에게 언제나 호의를 갖고 대하였으며, 나라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게는 “조금도 실망하지 말게. 우주 만유에는 무상의 법칙이 있네. 절대 진리는 순환함이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네.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람의 본분을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세상이 올 걸세.” 하면서 자상하게 타이르시던 삶의 체취가 풍기는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서울시 기념물 제7호다.
만해 선생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바로 전해에 갑작스런 중풍으로 서거하시니 향년 66세였다. 선생이 마음의 소, 곧 불교의 진리를 찾아 터득하고 중생들에게 복과 덕을 보다 많이 나누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불시에 가셨음이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그의 덕과 뜻, 빛과 향기가 심우장에 잘 간직되어 있었다.
밝고 따사로운 봄볕이 심우장을 평화롭게 내리비쳐 선생의 인자한 인품과 미소가 훈훈하게 감도는 듯했다.-2003.11.월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