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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와 좁은 문
마태 7:13-21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14.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15.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16.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장마철입니다. 절기로 따지면 하지 때부터 대략 소서 대서까지 약 한 달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많은 비를 뿌리는 기간입니다. 양력으로는 6월 하순부터 7월 하순까지죠. 장마는 태평양 고기압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나타나는 정체전선인데 한반도 일대를 오르내리며 비를 뿌립니다.
최근에는 장마다운 장마가 별로 없어 기후변화가 심하게 진행된다고 느꼈는데 올해는 제대로 된 장마를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또 소형이지만 지금 태풍도 올라오고 있다니 피해 없도록 주의할 일입니다.
장마로 인해 오늘 제2회 걷기 예배를 계획했으나 연기하게 되어 실망이 큰 분들도 계시지만 하늘에 순응하는 삶을 배우라는 뜻으로 받아드리기 바랍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들을 모아놓은 아함경 중 전유경(箭喩經)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독화살의 비유’로 유명한 책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이 덧없는 세상에서 나고 죽는 고통스러운 생을 반복하는 까닭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 만동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명상을 하다가 이 세상 만물의 영원성, 목숨의 영원성, 그리고 죽음의 유무 등 소위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해 부처님이 설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냅니다. 만동자는 세상이 영원한 것이라고 하면 계속 수행을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면 포기하겠다는 생각에서 부처님을 찾아가 앞에서 말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요구합니다.
부처님은 만동자에게 대답 대신 ‘독화살의 비유’를 말해줍니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고 쓰러젔다, 그 사람의 친지들은 빨리 독화살을 뽑고 치료하라고 권하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독화살을 누가 쏘았으며 무슨 독이며 왜! 쏘았는지를 알기 전에는 독화살을 뽑을 수가 없다고 하여 버티었다, 친지들은 그런 문제는 차후에 알아보아도 늦지를 않으나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진다며 그를 만류하였다”
부처님은 독화살 맞은 사람이 독화살을 뽑기 전에 풀고 싶어 하는 질문을 십여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추려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 나는 독화살을 제거하지 않고 반드시 활을 쏜 그 사람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지, 키는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피부는 검은지 흰지, 찰리 출신인지 바라문 출신인지 거사 출신인지 장인 출신인지, 동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누가 화살로써 나를 맞추었는지 알아야겠다.
▲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않고 반드시 그 활은 살라(薩羅)나무로 만들었는지, 다라(多羅)나무로 만들었는지, 시라앙굴리(翅羅鴦掘梨)나무로 만들었는지 알아야겠다.
▲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힘줄은 소의 힘줄 염소의 힘줄 검은 소의 힘줄 중 무엇으로 그 활을 감았는지 알아야겠다.
만동자의 물음에 부처님은 만동자의 어리석음이 마치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화살을 뽑을 생각은 하지 않고, 활을 쏜 사람이 누구고 그 활의 재료는 무엇이며 등등을 알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그런 사실들을 다 알기 전에 반드시 죽게 되듯이 만동자 역시 그런 생각만을 하다가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지난 23일 김종필(JP)씨가 이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김종필의 죽음으로 소위 3김시대로 일컬어지던 한국사의 영욕의 역사가 끝이 났습니다.
김종필은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중앙정보부(현 국정원)를 창설하여 군사 독재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입니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영원한 2인자로 군림합니다. 9선 국회의원, 박정희, 김대중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민주공화당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총재를 거쳐 자유민주연합 총재로 정치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김종필 사후 정부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보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찬반 여론이 팽팽하지만 지나온 70년 적폐로 가득한 우리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훈장 추서는 분명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훈장은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그 공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수여하는 표장(標章)입니다. 때문에 훈장을 받는 사람은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공로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김종필은 5.16 쿠데타의 주역입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아 군부독재의 공작정치를 주도한 사람입니다. 중정부장 시절 증권파동, 새나라 자동차 수입 등 소위 부정부패 4대 의혹 사건을 일으켜 잠시 해외로 쫓겨난 적도 있었습니다.
김종필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한일기본조약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불과 3억 달러의 보상금을 받고 과거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시켜줍니다. 이 돈으로 포스코 등 경제개발을 시작하였지만 그중 많은 돈이 개인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한반도 침략에 대한 책임을 다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도 않고, 독도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김종필은 박정희의 지시로 독도 영유권 분쟁을 일으키게 된 독도 밀약, 즉, 독도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합의를 해 준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쿠데타와, 군사독재, 부정부패를 일삼고, 평생을 권력 언저리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김종필씨가 나라를 위해 무슨 공을 세웠다는 것인지 저는 도무지 납득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런 자에게 훈장을 주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인물들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만동자처럼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김종필씨의 정체는 쿠데타 주역이며 유신 본당입니다. 그는 대한민국과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죄값을 받아야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단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훈장을 추서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우리는 아직도 살고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폐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며 새 세상을 꿈꾸는 제자들에게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변장을 하고 있는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의 탈을 쓰고, 교육과 문화의 가면을 쓰고, 종교로 위장한 거짓 지도자들이 우리 사회를 70년 넘게 지배해 왔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그 오랜 시간 거짓 지도자들을 구별하지 못한 채 굴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참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은 그들의 폭압에 희생되어왔고 그 희생이 쌓여 거대한 촛불로 타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할 수있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를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으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선목선실(善木善實)설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라는 것이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끝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너무도 당연한 우주의 이치인데 인간들은 이 이치를 무시하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나쁜 짓을 해서라도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 나쁜 짓에 대해 분노하고 바로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겉으로는 대한항공의 조중훈 일가를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돈벼락 맞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거라 생각됩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은 나쁜 짓을 하는데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착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곁가지에 집착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독화살을 뽑을 생각은 안 하고 그 독화살을 분석하기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의 독화살은 돈입니다. 돈의 악마성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독화살을 뽑을 생각을 하는 대신 그 독화살에 중독되어 갑니다. 전지전능한 돈을 벌어보려는 여러 가지 궁리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돈독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적어도 태양계 안에서 우주의 이치는 인과율을 따르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벌을 받지 않는 것은 아직 악의 열매가 다 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악의 열매가 익으면 필연코 그 열매를 자기가 따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옛사람들의 가르침입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우리는 국민 7~80%가 수구 정당을 지지하지 않고 민주 진영을 지지할 거라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전직 대통령 둘이 감옥에 가고 전두환 또한 감옥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대법원 농단 사건으로 어쩌면 최초로 대법원장이 감옥에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악의 열매가 익으면 그것을 꼭 자신이 따먹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좋은 나무가 아님에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삶의 태도나 목적보다는 드러나는 결과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과정을 무시하면 편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에 의해 우리 민족은 오랜 수난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독립군을 가장한 미군부의 앞잡이들에 의해, 친미주의로 돌아온 친일 세력에 의해, 쿠데타를 해서라도 정권을 잡으면 그만이라는 정치군부에 의해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가르쳐 온 것이 ‘결과주의'입니다. 과정은 아예 무시되고 결과만 따지자는 것입니다. 어쨌든 박정희 때문에 잘먹고 잘살게 되지 않았냐는 신화를 받들며 적폐가 차곡차곡 쌓여져 왔던 것입니다.
‘빨리빨리’도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압축 성장을 경험한 우리는 속도를 중시합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부실이 뒤따릅니다. 온갖 사건 사고들이 이 ‘빨리빨리’에서 시작됩니다. 1968년 총 길이 428㎞,의 왕복 4차선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됩니다. 이 도로는 불과 2년 반 만에 430억의 공사비로 완공되었습니다. 하지만 싼 경비와 빠른 기간에 완성된 고속도로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통 이후 경부고속도로의 개·보수공사에는 건설비의 100배 이상이 들어갔다고 하니 결코 싼 공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적은 경비와 건설 속도로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여기저기 부실공사와 안전 불감증으로 대형 사고가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 아파트가 무너집니다. 항공기가 추락하고 배가 침몰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정은 부실해도 결과만 좋다면 그만"이라는 논리가 결국 우리 사회를 부실 덩어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살더라도 예수 믿고 축복받으면 된다"는 목사들의 가르침이 오늘 무너져가는 한국 교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태극기 집회를 종용하는 교회들이 '양의 탈을 쓴 이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죠. 마치 '포도나무의 모양을 한 가시나무'라고나 할까요? 좋은 나무가 아닌데, 어떻게 그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당연한 이치를 설하시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면하십니다.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도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가야할 이유는 그곳이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논리로 본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길이 험해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그 길로 걸어가는 사람은 좋은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반대로 크고 넓은 문과 평탄한 길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나쁜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맺는 열매는 멸망의 열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30여 년의 세월 동안 나름 좁은 문, 좁은 길을 택해 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넓은 문, 평탄한 길의 유혹이 없진 않았겠지만 첫사랑을 떠 올리며 아직 나름 우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기적과 같은 남북평화의 길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갈 길은 멉니다. 6.13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고 수구 세력이 대참패를 당했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멀었습니다.
새 시대는 분명히 시작되었지만 완성까지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좁은 문, 좁은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 신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이제 막 열린 새 시대의 문이 쉽게 닫힐 수도 있다는 것이죠. 거짓 예언자를 구별해 뽑아내고, 좁은 길로 가라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다짐을 다시 한번 요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희의 행위를 보고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한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새겨 자신의 자리에서 가르침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