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력과 사연을 알면 재미있는 그림 4
18. 그림으로 사회를 고발하다.
19. 그림 속에 숨긴 상징 페테르 루벤스, 디르크 보우츠, 얀 반 에이크
20. 영혼의 세계를 그린 궁중화가 벨라스케스
21. 이집트의 그림과 로마의 동전에서 보는 인물화의 특징
22. 유럽에 영향을 미친 일본의 목판 풍속화 우키요에
18. 그림으로 사회를 고발하다.
꿈 만큼이나 황당한 것이 신화 이야기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외에는 인간과 거의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신들은 사소한 일로 유치하게 싸우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없는 여러 가지 능력으로 한바탕 세상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신화 속에는 말도 안 되는 억지가 판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거의 꿈과 비슷한 상황들이다 그렇지만 꿈이 현실을 대신해서 이야기할 때가 있듯이 그리스 신화 역시 현실의 삶을 이야기 한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땅의 신인 가이아와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우라노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엄마인 가이아의 뱃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런 우라노스 때문에 가이아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그러던 중 크로노스는 가이아의 도움으로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물리치고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크로노스 역시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기 자식에게 지배권을 빼앗긴다는 신탁 때문에 자식들을 차례로 삼켜 버렸다. 어쩌면 크로노스의 잔인함은 아버지인 우라노스보다 훨씬 더했다. 이런 신화는 꿈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이 신화를 만들고 또 즐겨 이야기한 이유가 있다. 바로 시간의 잔인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달리가 늘어진 시계를 그려 늘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삶을 이야기한 것과 같이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연민이나 동정심도 없는 그 냉정한 시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크로노스라는 신을 만들어 냈다. 시간은 쉼 없이 흐른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시간은 절대 동정심을 갖지 않고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다.
시간은 자기가 낳은 미래에게 죽게 되는 절대적으로 잔인하고 무정한 존재다.
좌 :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 고야 1821~1823년작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크로노스)가 자기 자식을 먹어치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잔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신화는 시간의 엄격함에 대한 풍자를 잔인함으로 표현 했다.
우 :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 고야 1800년작
스페인 왕족 일가의 표정을 전혀 아름답지 않게 그린 집단 초상화로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마치 유령 같은 느낌이다. 고야는 능력이 없는 왕족들의 모습을 이처럼 우스꽝스럽게 과장하여 비꼬듯 그려 놓았다.
-.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 에스파냐의 화가) - 밉살스러운 못난 왕을 그리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혹은 후세에 남기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더 멋지게 더 예쁘게 조작하기가 쉽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전속 화가들은 아무리 봐도 못생기고 어떻게 고쳐도 흠투성이인 왕이나 왕비, 공주의 얼굴을 대놓고 똑같이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르게 그리면 “이게 누구 얼굴이야? 도대체 누굴 그린거야?” 라고 할 것이다.
화가는 걱정이 참 많았을 것 같다. 어떤 화가는 그림을 주문한 귀족이 애꾸눈인 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성한 눈이 있는 옆모습만 그리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1746~1828)는 카를로스 4세의 전속 화가였다.
카를로스 4세는 스페인 역사상 바보 중의 바보로 통한 왕이었다.
스페인은 한때 신대륙을 정복하면서 엄청난 부를 누렸지만, 왕과 귀족들의 타락으로 나라꼴이 점점 엉망이 되어 그 많던 돈은 다 사라지고 빚은 늘어만 갔다. 현명한 왕이라면 어려운 나라 사정에 고심하며 잠을 못이룰텐데, 카를로스 4세는 왕으로서 기본적인 일조차 하기 싫어해서 왕비가 가장 아끼는 재상인 고도라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떠 맡겼다. 그런데 고도는 왕비와 바람이을 피우던 인물이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민주적이며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왕궁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 고야는 그런 왕을 보고 왕에게 아부하는 식으로 그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려 주기 싫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면서 그린 왕실 가족의 집단 초상화인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보면, 얼핏 보면 화려한 옷을 입은 왕가의 사람들이 우아하게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고야가 이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그림의 정중앙을 왕비가 차지하고 있다. 이는 왕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보통의 왕실 초상화와 다른 점이다. 바로 왕이 왕비에게 잔뜩 주눅 들어 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왕비를 예쁘게 그린 것도 아니다. 입에 잘 맞지 않는 틀니 때문에 우스꽝스러워진 입 모양에 왕비의 팔뚝도 무자비하게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살찌고 밉살스러워 보인다.
왕 또한 보기 싫은 메부리코와 불뚝 앞으로 튀어나온 배가 그려져 그가 어지간히 먹는 것을 좋아한 뚱보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왼쪽 귀퉁이에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모두 환한 빛을 받고 있는데 고야 자신만 어둠 속에 서 있다. 그러고는 이 바보 같은 왕가 사람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나는 당신들과 다른 세계 사람이란 말이야.”하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 수를 세어보면 고야를 제외한 왕족의 숫자가 13명이다. 그리지 않아도 되는 아기까지 그려 넣으면서 불길하게 생각하는 저주의 숫자 13을 일부러 맞추어 놓았다.
그림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서 다른 왕족들의 초상화보다 자신들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을 왕에게 고야는 무슨 말을 했을까? 다만, 이 그림을 그린 이후 왕은 고야에게 웬만해선 자신의 모습을 그리라고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제대로 불편했던 것은 분명했던 것 같다.
스페인은 카를로스 4세가 물러나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지만, 결국은 나폴레옹에게 수도를 빼앗기게 되었는데, 그 시절 고야는 프랑스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장면인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총살당하는 스페인 남자는 마치 예수님 처럼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데, 남자의 하얀 옷은 그가 그만큼 순수하고 죄 없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 차마 이 모습을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에 비해 총을 든 프랑스 군인들의 모습은 마치 로봇 병사 같다. 그들에게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동정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 멀리 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늘 우리를 구원하고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던 그 교회는 아무 말도 없다.
아마도 고야는 이 그림을 그리며 “하나님,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신가요?”라고 외친 것 같다.
고야는 왕실의 전속화가로 시키는 대로 그림이나 그리고 살았어도 충분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이 속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검은색으로만 이뤄진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을 어둡게 하는 인간들의 검은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당하고만 사는 것도 죄라고 생각해서 ‘배워야한다’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세상의 폭력과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그림을 많이 발표했다. 그는 평생 귀머거리로 살면서 두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 진실의 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깨어나라’고 외쳤다.
1808년 5월 3일 - 프란시스코 데 고야 1814년 작
나폴레옹 군대가 마드리드의 시민을 학살한 사건을 그린 그림이다. 고야는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공한 프랑스 군인들의 만행을 고발했다.
19.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상징들
-. 페테르 루벤스 (1577~1640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 <현재의 벨기에>의 화가)
그림 속에 서사시를 넣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신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의 하나님 외의 신에 대해서는 감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중세가 지나자 화가들은 신화를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이야기와 달라서 어떤 인물을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다. 특히 신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신화를 그린 그림을 보더라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또한 신화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워낙 많은 신들이 있다 보니 도대체 어느 신을 그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화가들은 신화를 그림으로 그릴 때 대충 누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의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을 보면, 파리스는 트로이 왕자의 이름이다.
그림 속 신화는 어느 날 파리스가 길을 가다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이 사과를 주도록’ 이라고 적힌 사과 하나를 발견한다. 때마침 그리스 신화에서 힘깨나 쓰는 여신 3명이 나타난다.
그녀들은 아테나, 아프로디테(비너스), 그리고 헤라였다. 그림에서 세 여신은 서로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파리스가 보기에는 사실 3명 모두 비슷했을 것이다. 고심하는 파리스에게 비너스는 “날 선택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게 해 줄게.”라고 유혹한다. 청년 파리스는 이 말에 혹해 사과를 그녀에게 넘겨준다.
사과를 들고 고민 하는 이는 파리스가 틀림없을 것이다.
파리스 옆에 서 있는 이는 제우스의 심부름꾼이었던 헤르메스다. 화가들은 헤르메스를 그릴 때 보통 날개 달린 모자와 지팡이를 그려 넣었다. 신화에서 헤르메스는 항상 날개 달린 모자와 날개 달린 장화를 신고, 두 마리 뱀이 꼬여 있는 지팡이를 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먼저 그림 제일 왼쪽 여신의 바로 옆에 무시무시한 얼굴이 그려진 방패가 놓여있다. 이 방패는 페르세우스가 머리에 뱀이 주렁주렁 달린 괴물 메두사를 물리치기 위해 아테나에게 빌려 간 적이 있다. 아테나는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물리친 뒤 메두사의 얼굴을 방패에 붙여 장식했다.
그렇다면 그림 제일 왼쪽 여신은 바로 지혜와 승리의 여신인 아테나다.
파리스의 심판 -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39-1640년 : 파리스의 심판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그림 속 인물들은 각각 아테나, 아프로디테(비너스), 헤라, 그리고 헤르메스와 파리스왕자다. 루벤스의 그림은 밝은 색과 꿈틀대는 선이 특징으로 그림 속 인물들이 금방이라도 몸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진다.
아테나는 파리스에게 자기에게 사과를 주면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하게 해주고 또 그럴 수 있는 지혜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가운데 서 있는 여신은 아프로디테 바로 비너스다.
비너스에게는 큐피트(에로스)라는 아들이 있다. 따라서 작은 천사처럼 생긴 큐피트를 바로 앞에 세워 놓아 그녀가 비너스임을 알게 했다. 물론 아테나 옆에도 아기들이 서 있지만 화가는 방패를 그려 넣음으로써 그녀가 아테나임을 분명히 했다.
오른쪽 여신은 당연히 헤라다. 헤라는 제우스의 아내로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서 속병을 앓았을 망정 그녀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신이었다. 보통 헤라는 값진 모피 옷을 입거나 들고 다닌다. 그 시대에도 모피는 최고의 권력층이나 입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발아래는 공작새의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다. 헤라는 공작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녀는 괴물 고르곤의 눈알을 떼어 공작새의 꼬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루벤스는 그 점을 염두에 두었다.
헤라는 파리스에게 자신을 선택하면 최고의 권력을 주겠노라 약속 했다.
결국 비너스를 선택한 파리스의 최후는 비참했다. 비너스는 파리스에게 그리스의 스파르타 왕비인 헬레네를 데려다 주었고 그로 인해 트로이와 스파르타간의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
남의 나라 왕비를 데려갔으니 스파르타가 발끈했다. 게다가 아테나는 자신을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뽑아 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스파르타 편을 들었다. 그 바람에 전쟁은 무려 10년이나 계속되었고 결국 파리스는 독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처럼 우리는 루벤스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을 통해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장치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너스의 상징은 아기 큐피트, 큐피트의 상징은 늘 들고 다니는 사랑과 미움의 화살, 헤르메스의 상징은 장화와 지팡이라는 약속을 정하고 그에 따라 인물을 나타냈다. 루벤스의 그림 속 여신들은 너무 뚱뚱하다고 생각되지만 루벤스가 활동하던 17세기에는 마른 여자들보다 적당히 살이 오른 통통한 여자들을 더 아름답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 디르크 보우츠(Dirk Bouts, 1410~1475 네덜란드 화가)
‘최후의 만찬’ 에 그린 인물의 상징들
르네상스 시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다시 연구하고 신보다 인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독교에 열중하던 중세보다는 덜하기는 했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까지도 유럽에서 기독교의 힘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다.
교황의 힘도 컸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 역시 종교를 자기 삶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좌 : 최후의 만찬 - 다에맄 보우츠 1464-1467년 : 보우츠가 그린 이 그림에는 요한과 베드로가 예수님 가까이에 앉아 있다. 베드로는 특유의 짧은 머리를 하고 있고, 요한은 예쁘장하게 그려져 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는 탁자 오른쪽에 빨간 옷을 입고 돈 주머니를 들고 있다.
우 : 최후의 만찬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1486년 : 이 그림에서 유다는 홀로 예수님 맞은 편에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에는 후광이 그려져 있지만 유다는
후광이 없다. 또 유다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유다와 같은 방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종교화에서
고양이는 사악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몸에 기대고 있는 제자는 요한, 그리고 예수님 오른쪽에 앉아 있는
머리에 띠를 두른 제자는 베드로다.
화가들도 중세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지만 성경 내용이나 성경 속 인물들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 역시 신화를 그리는 것처럼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중세에는 그림 아래에 요한 또는 요셉이라는 각각의 이름을 적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은 그림을 사진과 같이 진짜처럼 보이게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화에서 처럼 특별한 사물인 상징물을 그려 넣어 등장인물을 나타내고자 했다.
디르크 보우츠(1415~1475)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예로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림 속의 그들을 구별하기 위한 상징물을 알아야만 한다.
우선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한 요한은 ‘최후의 만찬’에서 늘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그려 넣었다. 게다가 요한은 대부분 젊고 상냥한 얼굴을 가진 자로 가끔은 예수님 품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 가까운 쪽에 그려 넣었다. 그는 중간에 대머리로 마치 띠를 두른 듯한 머리 모양으로 표현하거나, 아주 짧은 머리를 한 인물로 그렸다. 때로는 베드로를 식탁에서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는 베드로가 만찬 후에 예수님이 로마 병사에게 끌려갈 때 격분하여 칼로 병사의 귀를 잘랐기 때문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이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겼다. 화가들은 이미 그들로부터 돈을 받은 후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 손에 돈주머니를 들렸고, 예수님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후광으로 머리 주변에 둥근 광채를 그려 넣었다. 그림은 그렇게 아는 것 만큼 보인다.
-. 얀 반 에이크(1395~1441)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보이는 상징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 얀 반 에이크 1434년 : 모피상을 하는 부유한 조반나 아르놀파나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실내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림 속 물건 하나하나 마다 의미를 숨겨 두었다.
유화는 르네상스 시절 얀 반 에이크 형제가 발명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유화로 그려진 것이 많다. 하지만 이 형제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다듬어지고 사용되기 시작했다. 유화는 색을 칠한 뒤 그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훨씬 더 세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남쪽 유럽의 르네상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그 대상을 멋지게 표현했다. 하지만 북쪽 유럽화가들은 사실 그대로 그리는 그림을 더욱 좋아했다.
반에이크 형제 가운데 동생인 얀 반 에이크(1395~1441)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란 그림을 보면 촛대에 촛불이 하나 켜져 있는데 이는 결혼을 한 신부가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당시 촛불은 주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게 될 거라는 소식을 듣는 순간에 밝힌 아이를 낳으라는 축복의 뜻을 담았다.
왼쪽 창턱의 사과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늘 복종하고 살라는 의미다. 신발 또한 성경 출애굽기의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결혼식은 이 때까지의 경험한 것과 다른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의미다.
강아지는 충성됨을 상징하며 신부 곁에 있는 것은 남편을 그렇게 섬기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를 두고 보면 이 그림은 기독교 정신을 잘 받들어 서로에게 결혼 생활을 잘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랑은 그림을 주문하면서 이렇게 예쁜 신부를 맞이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 신부를 훨씬 아름답게 그려 신랑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빨간색 침대는 돈이 많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신랑이 입고 있는 모피는 신랑의 직업이 모피를 파는 상인이란 걸 뜻한다. 당시 모피상인은 엄청난 부자였다. 결국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은 기독교 정신을 잘 받든 결혼 생활을 할 부부에 대한 축복이고 신랑의 자부심을 나타낸다.
상징을 몰라도 그림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모르고 볼 때는 그냥 “잘 그렸네.”이외에 그림이 품은 뜻을 감상 할 수는 없다.
20. 혼의 세계를 전달하는 궁중화가 벨라스케스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1599~1660년, 에스파냐의 궁중화가)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는 벨라스케스로 하여금 서양 미술사상 최고의 초상화가라는 지위를 얻게 한 작품이다.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는, 두 번째 로마를 방문한 벨라스케스가 교황을 이젤 앞에 세우지도 않고 그가 받은 당시의 인상을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화실에 돌아와서 그린 것이다. 가히 천부적인 화가라고 할만하다. 더욱이 화가의 마음에 비쳐진 이노센트 10세의 성품과 심리적인 움직임까지 붓끝을 통해 나타냈으니, 이는 기술적인 영역을 초월하여 혼의 세계를 읽고 전달하는 벨라스케스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후에 발굴된 그의 습작에 나타난 교황의 모습은 당시로선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 :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 우 :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의 습작
당시에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행자였는데 그 교황의 모습이 벨라스케스의 눈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닌 마귀의 형상으로 느껴진 것이다. 이를 보면 진리를 아는 자 편에선 그의 영적 눈이 밝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벨라스케스는 에스파냐의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기 고전주의 거장들을 숭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회화론’의 저자인 파체코에게 그림을 배웠다. 1623년 궁중화가로 임명되면서 그의 미술은 ‘에스파냐의 자랑’으로 열매를 맺었다.
벨라스케스 미술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미술을 가능케 한 두 가지 요소는 그의 재능과 국왕 펠리페 4세의 전폭적인 후원이라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좌) 마르다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 : 눅 10장의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마르다는 주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자기가 예수를 위하여 일하는 편을 택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들으며 앉아 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는데 일이 많고 마음이 분주하여 마리아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이 내용이 ‘그림 속의 그림’으로 벽에 걸려 있고, 그 앞에 현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세비야의 소녀는 뭔가 좀 못마땅한 표정이다. 벽에 걸린 그림속의 마르다와 같이 천을 머리에 걸친 노부인이 소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탁자 위에는 소녀의 거칠고 투박한 손에 잡혀 있는 유발과 마늘, 생선, 그리고 계란 등이 있다.
이 초기 작품은 비록 후기 벨라스케스의 성숙함을 맛볼 수 있지만, 작품 내용과 구성은 벨라스케스 미술의 구조를 설명해 주기에 충분하다.
벽에 걸린 그림이 너무 선명하여 화면 전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다소 부자연스럽다. 마르다와 노부인이 같은 존재임을 머리 수건을 통해 설명하려는 의도가 낳은 결과로 여겨진다.
화가는 벽 그림 속의 세계와 세비야의 현실을 연결하고 싶어 한다. 성경속의 마르다가 현실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의 노부인이 마르다의 세계에 속한 존재라면, 지금 소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젊은 아가씨의 불만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물고기, 계란은 그리스도인, 부활을 상징하는데, 과연 작가는 이것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가? 답은 감상자의 몫이다.
우) 실 잦는 여인들 : 이 작품은 ‘마르다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에서 보여준 벨라스케스 화면 구조가 더욱 신비하고 환상적으로 연출된 세기의 걸작이다.
전면에 건장한 여인들이 실을 잦고 있고, 중앙의 몇 개의 계단에 연결된 아치형 입구를 통해 다른 세계가 전개되는데, 귀족적인 분위기의 실내와 벽에 걸려있는 태피스트리(tapestry : 다채로운 색실로 무늬를 짜 넣은 직물)의 출현은 화면에 환상적인 공간감을 형성케 하여줄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내경의 세계를 만들어 주고 있다. 태피스트리의 내용은 그리스 신화다.
투구를 쓰고 있는 아테나 여신과 아라크네가 수놓아져 있다.
‘자신의 자수 솜씨에 교만해진 아라크네는 아테나 여신에게 도전장을 보낸다. 아테나는 할머니로 변신하여 아라크네에게 경고 하지만 그녀는 경고를 무시하고 여신과 시합을 벌인다. 뿐만 아니라 제우스와 여러 신들의 비리를 고발하고 모욕하는 내용을 수놓아 결국 아테나의 저주로 거미가 된다.‘ 화면에 전개된 세계는 현실과 신화의 경계가 없다. 전경에 배치된 여인들 속에 아라크네도 있고 아테나도 있다.
왕의 가족과 시녀들 - 벨라스케스 : 화면의 중앙에는 다섯 살 마르가리타 왕녀가 다소 새침한 자세로 서 있다. 자신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쟁반 위붉은 용기에 담긴 무엇을 권하고 있는 시녀에 대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다. 왕녀의 뒤에 또 다른 시녀가 무릎을 굽히는 자세로 함께하고 있다. 그 뒤로 수녀와 사제로 여겨지는 희미한 형상의 두 사람이 있고, 열린 문 밖의 계단에 서 있는 왕비의 시종 호세 니에토가 있다. 하단 오른편에 졸고 있는 늙은 개가 있고 가까이 두 난쟁이가 서 있는데, 한 사람은 개 등에 발을 대고 있다. 왼편 대형 캔버스 옆으로 화가 벨라스케스가 서 있고, 화면 중심 쪽으로 거울에 비친 국왕 내외가 있다.
궁정에서 경험된 인생의 욕망과 만과 저주의 세계가 한 화가의 거의 마술에 가까운 조형 논리를 통해 화면에 연출된 것이다. ‘지금 화면 속의 캔버스에 무엇이 그려지는가?’라는 질문은 이 그림속의 공간을 확장해 준다. 멀리 거울에 비친 국왕 내외의 모습을 근거로 사실을 추리해 가면, 캔버스에는 국왕 내외의 초상이 그려져 있어야 하고, 왕과 왕비는 지금 감상자의 위치, 바로 모텔의 위치에서 방금 작업실을 방문한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다.
당시 펠리페 4세의 왕권을 이어 받을 수 있는 마르가리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왕의 가족. 왕의 마음에 형성된 가족들의 형상이 한 화가의 붓 끝을 통하여 화면에 연출 되었다.
스냅 사진처럼 처리된 인물 인물들의 자세와 동작의 표현은 벨라스케스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의 화면에서 17세기 회화사상 가장 암시적이고 모범적 사실주의의 표현성을 캐치할 수 있다. 이 화면에는 왕이 있고, 그의 가족이 있고, 에스파냐가 있고, 합스부르크가 있고, 그리고 벨라스케스 자신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작품이라고 평가될 만큼 이 작품은 외경과 내경의 깊이를 지니고 있고, 17세기부터 고야, 드가, 마네 달리 피카소 등 많은 화가들에 의해 재 해석된 ‘벨라스케스와 왕의 가족’이 발표되고 있다.
* 펠리페 4세 왕가의 배경
600년간 전 유럽에 막강한 권력을 나타냈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전쟁하게 하라. 우리는 결혼으로 통치할 것이다” 라는 말을 만들어 전쟁보다도 결혼 정책을 통해 유럽을 지배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적인 근친결혼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몰락의 원인으로 변해 버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왕 펠리페 4세의 장남은 16세 때 병으로 죽고, 둘째와 셋째는 4살, 1살 때 죽었고, 왕비도 잃었다. 조카인 새 왕비를 얻어 낳은 넷째가 대를 이은 카를로스 2세인데, 그는 심한 하악 전돌증(주걱턱)과 각종 유전적 결함을 한 몸에 가지고 후손 없이 사망하여 합스부르크 시대는 끝이 났다. ‘왕의 가족’에 그려진 왕녀가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나기 전 새 왕비 마리아나가 낳은 마르가리타이다.
벨라스케스는 왕의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자기의 예술 세계를 펼쳐 나갔다. 보호도 될 수 있지만 구속(拘束)도 수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자신의 노예 파레하를 자기가 해방시켜 준 것처럼 자신도 왕의 속박에서 해방 받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몸은 구속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의 화면은 그의 사유(思惟)와 리얼리티를 전달하는 데 자유롭다.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심리적 영역의 사실성까지 표현된 화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왕의 가족’에서 보여준 당시의 궁중의 긴장감 도는 상황들은 이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왕의 가족이 오늘 우리에게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채 생생히 보여주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벨라스케스의 화면, 그의 리얼리티다. 벨라스케스는 화가다. 화가는 그림을 남긴다.
21. 이집트의 그림이나 로마 동전에서 왜 앞을 보는 그림은 없는가?
동전에 주로 사용하는 인물의 옆모습의 그림 방식을 '프로필'이라고 한다. 옆모습은 정면에 비해 좀 더 강한 인상을 준다. 특히 서양인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옆모습을 그리는 그림 형식이 더 발달했는데 이를 프로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집트 벽화는 약간 다르다
이집트 벽화를 자세히 보면 얼굴을 옆모습이지만 눈은 정면, 몸통도 정면, 그러나 다리는 측면이다. 이집트의 매장 풍습을 생각해보면, 죽은 사람이 언젠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생각하고 몸을 보존하기 위해 미라를 만들었다. 즉, 어떤 종류의 영원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그린 그림 특히, 무덤-피라밋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몸을 온통 측면으로 그린다면 순간 포착한 그림처럼 되어 버린다.
어디서 누가 보든지 손, 발, 몸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선 다리는 측면을 그리는 것이 가장 알아보기 쉽겠고, 눈과 몸은 정면에서, 코는 측면에서 포착하는 것이 제일 알아보기 쉽게 느껴진다. (아닌 사람도 있겠으나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또 순간 포착이 아닌 영영 지속될 것을 위해 양쪽 다리는 '편히 쉬어' 자세처럼 살짝 벌린 채 균형을 잡고 있으며,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을 것 처럼 정지해 있는 영원성의 느낌을 준다.
-. 이집트의 그림 정면성의 원리 (Principle of Frontality)
이집트 신왕국의 벽화’는 그리스 예술과는 전혀 딴판이다.
이집트의 벽화나 회화에 그려진 인물은 대개 머리는 옆을 향하고, 상체는 앞을 향하며, 다시 발은 옆을 향한다. 이런 특이한 묘사 방식에 학자들은 ‘정면성의 원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원리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물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측면에서 묘사하여, 되도록 사물의 형태를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인간의 얼굴이 옆에서 볼 때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면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물고기는 누워 있을 때 그 형태가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집트인들의 관심은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보다는, 사물의 본질적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그리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겐 우연적이며 일시적인 인물의 동작이나 자세는 별 의미가 없었고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물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예술은 하나의 시각적 추상인 셈이다.
추상적인 그림에서의 인물은 구체적인 어떤 인간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으로 나타난다.
하쳅수트 여왕의 탄생을 그린 이집트의 벽화는 갓 태어난 여왕을 사내아이로 묘사하고 있다.
성별 따위는 제왕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라는 개념이 우리집 강아지와 이웃집 도사견을 구별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특정한 어떤 개는 죽어도 개의 ‘개념’은 결코 죽지 않듯이 이집트의 인물상은 결코 죽을 것 같지 않고, 삶과 죽음을 넘어선 저 영원한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는 듯이 보인다.
이집트인들은 왜 이런 묘사 방식을 택했을까? 보링거의 설명은 이렇다. 그리스처럼 축복받은 땅에선 인간과 자연 사이에 행복한 범신론적 친화 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때 사람들은 ‘감정 이입 충동’을 갖게 되고, 그 결과 그리스 예술처럼 유기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양식이 발달한다. 하지만 이집트처럼 자연 환경이 척박한 곳에선 광막한 외부 세계가 인간에게 끊임없이 내적 불안감을 일으킨다. 이때 사람들은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 충동’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양식이 발달한다.
이집트인들이 추상적 양식을 발달시킨 이유가 꼭 환경의 소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었고 영혼이 부활하려면 그것이 깃들어 있을 육체가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자의 몸을 미이라로 보존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이라는 파손되기 쉬웠기 때문에 이를 조상(彫像)이나 회화로 대체했다. 이때 조각이나 회화 속에 죽은 자의 신체를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하기 위해 정면성의 묘사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한 팔이 몸통에 가려 안 보이면, 그 사람은 영원히 외팔이로 살아야 할 테니까 말이다.
* 새사냥 : 이집트 테베의 네바문 무덤 벽화부분 B.C 1450년
고대 이집트인들은 대상을 보고 그리기 보다는 생각해서 그렸다. 그림의 주인공인 왕족 남자는 크게 그렸고, 아내인 여자는 조금 더 작게, 그리고 부하나 적군은 훨씬 더 작게 그렸다.
* 사자의 서 :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이 반영된 두루마리 문서다.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을 '바'라고 부르는데, 이 바가 지나가야 할 관문들 중 대표적인 것이 사막과 부정문답과 재판이다.
사막에는 영혼을 삼키는 딱정벌레가 가득하기 때문에 이들을 없애기 위한 주술이 필요하다.
부정문답에서는 이집트의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신들이 등장하는데, 수백 개의 문이 있고 각각의 문 앞에는 신들이 한 명씩 수정전갈을 데리고 서 있다.
신들의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답해야만 문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문답'이라고 불리는데, 이들 내용 대부분은 생전에 지은 죄에 대한 윤리적인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문을 통과하고 나면 저승의 신 오시리스가 직접 영혼을 심판한다. 저승사자 아누비스 신이 천칭을 들고 있고, '바'는 생전에 가졌던 자신의 심장을 저울에 한쪽에 올려놓는데, 이는 그의 양심을 상징한다.
지혜의 신 마아트가 깃털을 반대쪽 저울에 올리는데 이는 영혼이 생전에 한 거짓말을 상징하며, 거짓말이 많을수록 깃털은 크고 무거워진다. 저울이 정확히 수평을 이루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만약 조금이라도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저승의 신 오시리스가 악어 머리에 사자의 갈기, 표범의 몸, 하마의 다리를 가진 괴물 아미트를 풀어 '바'를 산 채로 잡아먹게 하고, 잡아먹힌 바는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22. 유럽에 영향을 미친 일본의 목판 풍속화 우키요에
카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 ‘카나가와의 큰 파도’ 19세기
집채만 한 큰 파도가 흰 포말을 일으키며 금방 배를 덮칠 듯한 기세에 사공들은 배 바닥에 몸을 납작 붙인 채 필사적으로 노를 젖고 있지만, 어마어마한 폭풍우의 위력 앞에 인간의 운명은 위태롭다. 저 멀리 보이는 후지산 조차 수그러든 듯 작아 보이는 이 절경은,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채색 목판화 시리즈 ‘후지산 36경’중 카나가와의 큰 파도다.
이는 서구 세계에서는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이자, 마네와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과 반 고흐, 고갱 등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된 미술품이다.
살아생전 호쿠사이는 그가 19세기 유럽 미술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 서양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
호쿠사이는 채색 목판화, 즉 우키요에 전문 화가였다.
‘둥둥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 이라는 뜻의 우키요에는 에도시대(1603~1867) 말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매체였다.
‘떠다니는 세상’이란 원래 인간의 삶이 유한하고 물질은 덧없을 뿐이라는 불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우키요에는 오히려 그처럼 덧없는 세상에서 한 순간 살다가는 가벼운 인생인 바에야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하며 말초적인 향락과 자극을 추구하는 저자거리의 산물이다.
18세기부터 일본에서는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상공인이 증가하며, 고향에 가족을 두고 홀로 상경한 사무라이들이 모여들면서, 그들을 위한 유희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했다. 거리엔 춤과 노래에 능한 게이샤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유곽이 즐비했고, 스모 경기장은 열띤 응원을 하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가부키 극장에서 울고 웃던 청중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밤을 세 워 이야기책을 탐독하는 독자들로 변모했다. 처음에 목판화는 바로 그 유흥업계를 사로잡은 관능적인 미인들과 유곽 여인들의 은밀한 일상을 여과 없이 담은 그림이었고, 가부키 배우와 유명 스모 선수들의 초상화이자, 극장의 포스터였으며, 소설 속의 짜릿한 연애 담을 감각적으로 다룬 삽화였다.
18세기 중반부터 다양한 채색이 가능한 다색 목판화, 니시키에가 발달하면서 우키요에는 회화처럼 독립적인 이미지로 생산되어 대중들의 인기를 누렸다.
- 우키요에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호쿠사이
우키요에의 제작 방식은 대단히 단순하다. 화가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판각공이 각 색깔별로 한 장씩의 목판을 파낸 후, 한 장의 종이에 각각의 목판을 순서대로 찍어내면 된다.
그림에 열 가지 색상이 쓰인다면, 열장의 목판을 파내면 되는 식이다.
밑그림과 판각, 그리고 찍어내는 공정은 분야별로 전문가가 나뉘어져 있었고, 오늘날의 출판사처럼 화가와 전속 계약을 맺고, 일정한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도록 공정을 관리하여 판화를 찍어내고 판매하는 공방들이 성업을 이루었다. 출판이 전문화한데다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우키요에는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게들에서 저렴한 가격에 팔려, 라면 한 그릇 사먹을 수도 있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구입하고 수집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 처럼 일시적이고 값싼 오락물로 소비되고 버려지기 마련이었던 우키요에를 현대인의 눈까지도 단번에 사로잡는 세련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들 중 하나가 바로 ‘호쿠사이’다.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는 도회적인 삶 속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솔직하게 담아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대범하고 호방한 시선으로 일본의 자연 풍광을 그려냈고, 꽃과 동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한편, 기발한 상상력으로 보는 이를 오싹하게 하는 요괴와 유령들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하고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작품이 바로 1826년, 그가 60 중반일 때 착수하여 근 십년에 걸쳐 완성한 판화집 ‘후지산 36경’이다. 그는 계절의 변화와 기상상태에 따라 다채롭게 변모하는 후지산을 여러 방향과 거리에서 바라보고 그 모습을 담았으며, 후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사의 이모저모를 섬세하게 포착하여 이미지로 풀어냈다.
‘후지산 36경’은 큰 인기를 끌어, 차후에 10경을 더해 실제로는 46점의 판화가 묶여 있다.
제작기법의 특성상 우키요에는 치밀한 세부 묘사보다 대범하게 형태를 단순화한 검은 윤곽선의 드로잉이 주가 된다.
목판 하나에 한 가지 색을 발라서 찍어내기 때문에 화면은 대부분 명암의 차이가 없는 몇 개의 선명한 색 면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키요에는 서양화에서처럼 입체감과 깊이 감을 추구하기 보다는 장식적이고 평면적이다.
이국적인 소재 뿐 아니라 과감한 색채와 유려한 형태는 유럽의 미술가들에게 신선한 시각적 충격을 주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직접 우키요에를 수집하여 유화로 유명 작품들을 모사했고, 고갱 역시 진한 원색과 평면적인 구도, 검고 구불구불한 윤곽선이 주는 장식적인 효과를 활용하여 전에 없던 새로운 회화의 양식을 수립했다.
그러나 정작 호쿠사이는 유럽에서 전파된 서양화의 원근법을 일본화의 전통에 도입했던 실험적인 화가로 평가된다. ‘카나가와의 큰 파도’에서 화면을 가로질러 수평선을 설정하고, 원경에 위치한 후지산을 근경의 파도보다 훨씬 작게 그려서 거리감을 표현 한 것은 일본에는 없던 방식이다. 폭풍이 이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공기만은 맑고 건조하게 느껴지는 청량한 푸른빛은 프러시안블루다. 이것 또한 일본 미술에서는 낯선 색감이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압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기 전까지, 서구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다만 네덜란드와는 17세기부터 상업적인 교류가 있었고, 네덜란드로 부터의 수입품과 함께 실려 온 판화를 통해 일본 화가들은 서양화의 기법을 배우곤 했다. 결국 우키요에와 유럽회화는 머나먼 거리와 시차를 사이에 두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모했던 것이다.
-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우키요에와 유럽 회화
호쿠사이는 넓은 시야로 가까운 경치로부터 먼 원경까지를 아우르는 서양의 원근법을 전통적인 일본의 매체, 우키요에에 적용하여 개성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의 개성적인 화풍은 어쩌면 그의 유난한 성품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여든 여덟 해를 사는 동안 그는 30여 차례 이름을 바꾸었고, 그 때 마다 그림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러 개의 예명을 쓰는 것은 일본의 미술가들 사이에 예사로 있는 일이지만, 서른 개나 되는 이름을 쓰는 일은 흔하지 않다.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이름 ‘카츠시카’는 그가 태어난 에도의 동네 이름이고 ‘호쿠사이’는 ‘북쪽의 서재’란 뜻이다.
그는 스승이나 동료들과 무난하게 지낸 적이 없고, 쇼군 앞에 치러진 그림 경쟁에서는 길게 펼쳐진 종이에 푸른 붓질을 한 번 한 후, 빨간 물감에 닭의 발을 담가 그 위에 풀어 놓았다. 단풍의 명소인 나라의 타츠타 강에 붉은 단풍잎이 쏟아져 내린 풍경이라는 것이다.
쇼군은 호쿠사이의 손을 들어 주었다.
70대 중반 그는 ‘가쿄로진만시(畵狂老人卍)’ 즉 그림에 미친 늙은이라는 이름으로 ‘후지산 100경’을 완성했다. 그 말미에 호쿠사이는 “나는 여섯 살부터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가 되고나서 쉰 살이 지나면서 명성을 얻었지만, 일흔 전에 한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짓이었다. 일흔 셋에서야 나는 날짐승과 들짐승, 벌레와 물고기의 뼈대를 파악했고, 식물이 자라나는 법을 이해했다.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여든 여섯 즈음에 그들을 더 잘 파악 할 것이고, 아흔이 되면 자연의 핵심을 꿰뚫을 것이다. 백 살이 되면 신묘하게 통찰 할 것이고, 백 서른, 백 마흔이 되면 아마도 내가 그리는 점 하나와 획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하늘이 내게 장수의 삶을 주셔서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길 바랄 뿐‘이라고 썼다.
틀림없이 그는 오래 살고 싶었다. 여든 여덟의 나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뜨는 순간에도 “하늘이 내게 십년만 더, 아니 오년이라도 더 주신다면, 진정한 화가가 될 수 있을 텐데” 라며 아쉬워 했다. 그가 유난히 후지산에 집착했던 것도 전통적으로 후지산이 일본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던 데다, 불로장생의 영산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후지산 36경’과 함께 호쿠사이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가 염원했던 대로, 후지산이 그에게 영생을 준 셈이다.
카나가와의 큰 파도 - 카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 작
빈센트 반 고흐 작 - 탕기영감의 초상 : 이 그림 속에도 배경으로 4개의 우키요에가 있지만 고흐는 우키요에의 매력에 끌려 살아생전에 수백점의 우키요에를 수집했었다고 한다. 당연히 우키요에는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우키요에의 단순하고 굵은 필법이 고흐에게도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림의 모델인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는 몽마르트 클로제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의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