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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불보전 무일선원(無一禪院) 개원
-회주 큰스님 법문-
자세를 바르게 하고 집중 훈련부터 하라
“예, 앉았을 때 자세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 혹은 본인이 느끼기에 뒤로 조금 넘어 갈 듯한 자세가 되어야 허리가 90도로 서게 돼요. 자기 딴에는 바로 세운다고 하고 있지만, 보면 모두 앞으로 숙여져있거든요? 그러니까 허리를 완전히 곧추 세우고, 시선은 전방 1미터~4, 5미터 사이에 두는데 그건 각자 자유로이 두면 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두 무릎이 좌복에 붙어야 됩니다. 반가부좌이든 가부좌이든 간에 무릎이 뜨면 안돼요.
곧추 세운 허리가 옆에서 봤을 때 90도가 되어야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입은 가볍게 다물고 혀를 입천장에다 가볍게 갖다대야 돼요, 그러다보면 침이 고이는 수가 있는데 그 땐 잘 삼키면 됩니다. 대신 조심해야 될 것이 어깨는 펴고 허리는 곧추 세우되 목과 어깨에는 힘을 주면 안돼요, 힘없이 쭉 펴고 수직으로 세워야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견비통이 올 수도 있어요.
손을 보면 요즘은 요가 같은데서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손가락을 벌리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거든요? 글쎄,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정통 선방에서는 손가락을 벌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법계정인 또는 선정인을 하면 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놓으면 되지요. 하다보면 팔이 길어서 자연스레 놓여지는 수도 있지만 만약 팔이 짧은 경우는 손이 공중에 떠있게 되는데 그럼 어깨가 아파서 오래 못 견디지요. 그럴 때는 그냥 자연스럽게 팔을 내리면 됩니다. 손이 풀려도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잡기 전에 집중훈련부터 합니다. 이런 자세로 앉으면 단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이를 단전호흡이라 하지요? 단전호흡 하는 사람은 단전호흡 그것이 목적인데 우리처럼 간화선을 하는 사람은 화두를 깨치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앉아있는 이 자체가 사실은 다 수단이라, 앉아있으면서 가능하면 기력을 한데 모으고 그 모아진 기력은 화두를 깨치는 데 쓰여야 합니다.
이렇게 앉으면 단전에 힘이 들어가지요. 그런데 지금 이 자세가 아니면 단전에 힘이 들어갈 수가 없을뿐더러 기력이 모아지질 않아요. 여하튼 단전호흡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단전호흡이 저절로 되는 방법이 현재 하고 있는 좌선의 방법입니다.
손은 자연스레 자기 앞에 모으면 되고, 이렇게 자세를 취하면서 집중훈련을 하는데 그 과정을 오래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거쳐야 합니다.
뭐냐 하면 수식관을 하는 거지요. 호흡을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또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그러니까 자기의 숨을 놓치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지나면 요것이 아주 포착이 잘 되지요.
그렇지만 숫자를 세는데 한 일곱쯤 가다가 까먹게 되고 자꾸 잡생각이 들어와서 숫자를 놓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 대단히 산만한 사람입니다.
간화선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거든요? 그래서 난 위파사나가 화두선의 기초단계에서는 많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나름대로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궁극에는 시심마, 이 무엇인가 하는 간화선으로 가야하는데 그 전 단계로서 수식관을 꼭 거쳐야 합니다. 수식관을 해서 집중하는 훈련이 되면 그 뒤에 화두를 잡으면 되지요.
자주 앉아보라,
그리고 단계적으로 수행하라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보면, 앉아있는 것이 편하고 좋으니까 그냥 앉아있는 수가 있어요. 실지로 앉아있어 보면 세상만사 별로 걱정이 없고 그래요. 선(禪)에 있어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그것인데 바로 무기라,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면 안 됩니다. 관이 되었든 화두가 되었든지 간에 분명히 그것이 보여야 되지요. 화두선(話頭禪)을 하는 사람 같으면 화두를 봐야 되지요, 그게 간화(看話) 아닙니까?
그리고 수식관을 하는 사람이면 숨을 분명히 봐야 합니다. 그것이 관해지지 않으면, 포착되지 않으면, 챙겨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시간에 그냥 앉아있을 뿐입니다. 멍청히 앉아있는 거지요.
참선을 아직 많이 안 해본 사람들은 방에 혼자 앉아 있을 때나 이곳에 와서라도 자리에 자주 앉아봐야 해요. 이것이 몸에 잘 익혀지면 집중력이 생겨서 뭐든지 잘하게 됩니다. 공부를 해도 남보다 능률적으로 잘하게 되고, 모든 일에 적용이 되지요.
그래서 화두를 잡거나 관(觀)하는 참선을 하게 되면 생활에 리듬이 생기고 활력이 생기게 되지요. 사람들이 생활선(生活禪)이라고 하는데 생활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 참선수행을 평상시에 잘 하면 이것이 생활에 곧바로 이득을 주게 되고, 이런 참선수행을 통해서 자연스레 얻어지는 효과가 생활선이란 말을 낳게 된 거지요.
생활선이란 말은 사실 따로 없습니다. 열심히 하다보니까 선(禪)이 생활에 적용이 되어서 그 효과로 다른 사람보다 백배나 더 잘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지요.
그러니까 화두를 깨치기 전이라 할지라도 집중력은 살아있게 되거든요. 그러다가 나중에 화두를 깨치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지요. 화두를 깨치기 전의 집중력만 생각하더라도 엄청나게 큰 힘을 얻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의 현재의 중생심을 버리는 방법의 하나로 사마타 수행이 있는데 그것은 무아지경에 빠져서 다라니를 외우거나 하는 수행법입니다. 글쎄, 양쪽이 다 필요하긴 해요.
간화선으로 가는 데 있어서 그것이 한 다리는 될 수가 있지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루에 21독, 108독 외우는 그 동안에는 잡념이 끼어들면 안 되거든요? 그것도 집중력 아닙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머무르면 고차원적 수행은 힘 든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순수히 나의 체험을 가지고 말한다면,
무아지경에 들어가서 하는 염불있지요? 그게 다라니를 외우는 등의 사마타 수행인데 억지로 나눠서 말한다면 그게 가장 낮은 단계이고, 그 다음에 위로 올라가서 관법의 수행, 우리가 말하는 위파사나, 그 위의 단계가 간화선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 같습니다. 나는 거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만일에 ‘나는 수식관을 하는데 잘 안돼’ 이런 사람은 사마타적 수행을 얼마간 해 보세요. 집중력이 생겨서 일체 잡념이 안 들어오면 그 다음에 호흡을 세는 수식관이라든가 그런 관법의 수행으로 나아가다가 다시 그것이 훈련이 잘 되면, 그때는 시심마, ‘나는 무엇인가’하고 나의 정체를 궁구(窮究)해 들어가는 거지요, 그게 바로 최후의 간화선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다가 생각한 것이 기도수행, 또는 관법의 수행을 화두선으로 완전히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찾아 낸 것이 선관쌍수(禪觀雙修)라는 수행법입니다. 선(禪)은 간화선(看話禪)의 줄인 말이고, 관(觀)은 위파사나의 관(觀)이지요.
이곳에 초청되어 법문하시는 스님들이 수행법을 두고 자기 것만 생각하고 남의 것은 전부 다 나쁜 것이라 말씀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시지요. 그래서 법사를 초청하는 것도 대단히 위험할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신도들이 여기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 기도라는 것은 사마외도가 하는 짓이니 절대 기도하면 안 된다’ 법사가 이렇게 말을 해봐요, 도량 자체를 망치는 일이되며 쑥대밭을 만드는 거지요.
일반신도들이 관세음보살을 부른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한다면, 그 법사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되서 그런 말을 하겠지만 기도가 어디 빌기만 합니까? 위파사나적인 기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을 관하면서 순간순간 자기 마음을 챙기는 그런 수행이 얼마든지 있어요. 기도라는 말 속에는 이름을 붙이자니 기도이지 보통 말하는 기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참선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법사를 청할 때 그런 분을 잘 안 불러요. 공부를 두루두루 하지 않고, 어떤 체계가 없는 사람을 불러 놓으면 골치가 아파요. 괜히 신도들이 흔들려 ‘기도 이거 아무 것도 아니네?’ 이래 봐요, 절이 어떻게 되겠어요?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봐야 해요. 그 순간순간을 지켜야 돼요. 그러면 이것이 잘 익어가게 되지요. 먼저 수식관을 해 보고 그다음 관세음보살님을 관하게 되면 관세음보살님을 관하는 것도 아주 잘 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절대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서 관세음보살님을 관하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관세음보살을 관하는가? 눈이 있어 관하는가, 귀가 있어 관하는가, 내 마음이 있어서 관하는가. 거기에 몰입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두개를 다 잡으려면 보통 일이 아니지요, 그냥 ‘이 뭣고’ 가 아니라 관세음보살님의 상호도 놓치지 않는, 그 마음 가운데 그놈을 보는 놈이 또 하나 생기는 거지요, 그게. 마음의 심층심리로 봤을 때는 아주 최고의 깊은 단계에 까지 들어가는 것이며 관세음보살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관하다 보면 나중에 큰 수확을 얻게 됩니다.
'이뭣고'도 구체성이 없으면 막연해짐,
선관쌍수(禪觀雙修)를 익히라
내가 지금 여러 가지 수행단계를 말해 주었으니까 전부 노트에 적고 돌아가서 하나 하나 밟아서 해 봐야 됩니다. 처음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21독 하는데 진짜 잡념이 들어오지 않는지 살펴보다가 됐다 싶으면 위파사나 수행, 관법(觀法)으로 올라가야지요.
관에는 수식관이 있고 우리가 말하는 관세음보살을 관하는 건 결국은 자비관(慈悲觀) 아닙니까? 부처님을 보는 불관(佛觀)이지요?
자비관(慈悲觀)이 잘 되면 세 번째로 무엇이 관세음보살님을 관하는지를 살피는, 화두선을 가미한 선관쌍수(禪觀雙修)적 수행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냥 ‘이 무엇인가’ 해 가지고는 구체성이 없어요. 구체성이 없으면 막연해지거든요? 막연해지지 않으려고 관세음보살님을 관하라는 거지요.
이 부분에서는 내가 아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제시한 방향대로 가면 됩니다. 그런 용어는 이전에 나와 있지를 않아요. 내가 지은 말로 선관쌍수(禪觀雙修)라고 해서 간화선과 위파사나의 장점을 아울러서 한 단계 더 이끌어 올린 그런 수행방법입니다.
물론 그런 소재는 옛날부터 다 있어왔던 것 같지요? 그런데 모든 연구란 것이 이전보다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옛날에는 간화선을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리고 그 말도 맞아요. 그런데 발전하지 않는 학문이나 영역이 어디 있겠어요? 수행 역시 그 방법은 발전해 가는 것이거든요?
옛날에는 사마타 수행, 힌두교도들이 진언을 외고 염불을 하는 사마타적 수행이 주류였습니다.
부처님 재세시에도 대부분 위파사나적 수행이 주류이던 시절이니 부처님께서 하신 수행도 위파사나 수행이 아니냐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화두를 잡으셨어요. 부처님께서는 6년간 돌아다니시며 많은 수행을 하셨지만 만족하지 못했어요. 나중에는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하시고는 근처의 보리수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기셔서 그 자리에서 단 7일 만에 일대사를 해결하셨거든요?
단 7일이었는데, 물론 앞의 6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 가지 많은 정황들을 봤을 때, 부처님께서 7일 만에 깨치신 그 때가 뭐냐면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본 거지요. 지금까지 6년 동안 많은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수행을 편력했지만 해결을 못 봤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나 자신을 보는 일이 중요하구나, 그토록 헤맸던 나 자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후일에 봤을 때 그게 바로 시심마 화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나는 무엇인가?’하는 시심마 화두를 드신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확신을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 당시에 부처님 버금가는 많은 대각자(大覺者)들이 나왔을 것인데 그러질 못했지요. 부처님께서는 위파사나적 수행에서 방향을 돌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행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대각을 이루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간화선을 하셨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에 자기 문제를 가지고 7일 간 승부를 걸었기에 당시의 다른 많은 수행자들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으신 겁니다.
자비관(慈悲觀)과 시심마를 다시 조합해 한 단계 승화시킨 것이 선관쌍수(禪觀雙修)라는 것을 알아야겠고, 그러한 체계를 가지고 다들 해봐야 돼요.
우리가 염불하는 것도 다 수행의 한 방법이지만, 조금 조금씩 자신을 발전시키고 승화시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지요.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수행을 해야 완전한 수행자가 됨
우선 5시 10분터 저녁공양이 시작되는 6시까지 매일 이 시간대에 참선을 하기로 하고, 또 봐서 시간을 더 늘리든 하겠지만, 우선은 교(敎)를 하면서 선(禪)을 하고, 선(禪)을 하면서 부처님 말씀을 같이 공부하는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수행을 해야 완전한 수행자가 되는 겁니다
선(禪)을 한다 해서 교(敎)에 지장을 주면 되지않고, 또 교(敎)를 한다고 해서 선(禪)에 지장을 준다면 그건 천만번 다른 생각입니다.
조선시대의 중흥조이신 서산대사 같은 분들을 보면, 늘 선과 교(敎)를 같이 하셨어요. 필요하면 대중 속에 총칼을 들고 나타날 만큼 대단히 현실적인 면이 많았지요.
선(禪)이 현실을 떠나서 있다면 이까짓 선(禪)을 해서 뭐하겠어요? 신선놀음이지. 절대 현실을 떠나지 않는 수행자가 되어야지요, 그래야 그것이 살아있는 선(禪)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이 그렇잖아요. 부처님이 왜 부처님이겠어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부처님이지요. 사람을 어디서 만났나요? 길에서 만난 것 아닙니까? 부처님이 길에서 태어났다는 건 굉장한 상징성이 있습니다. 길에서 나셔서 길에서 사시다가 길을 다니시다가 결국에 절 안에서가 아니라 길에서 돌아가신 거 아닙니까? 길은 뭐하는 곳이지요? 사람 만나는 곳 아닙니까? 사람 사이의 통행로가 길이지요.
그런데 현재 우리 한국불교에서는, 물론 수행 중에는 그리 할 필요도 있지만 아예 사람이 다니는 길을 외면하고 무사안일에 빠져있는 수가 많습니다. 무위도식하고 그런 건 불교가 아닌거지요. 그건 자기 혼자의 생각일 뿐이지요. 불교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미 모델을 제시해 놓으셨습니다.
나중에는 부처님 이상 가든지 말든지, 그 이전에는 부처님을 모델로 삼아야
지금 우리 영남불교대학도 제시해 놓은 모델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료를 원하면 나는 다 줘버립니다. 한 번 해보라 이거지요. 뭐 감출 것도 없어요. 인터넷에 다 올라와 있으니까요.
모델이라고 하는 건 바로 그런 거거든요? 다른 사람들한테 길을 제시할 수도 있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가신 그 길은 우리에게는 그대로 모델이 되는거지요, 그래서 이렇게 절에 들어온 것 아닙니까? 아니면 저 혼자 토굴에서 수행해도 누가 뭐라 할 놈 아무도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자기 혼자 산중에 가서 도 깨달았다 이래 봐요, 물론 알아주는 놈은 알아 주겠지만, 자기가 그 정도로 잘났으면 불교라는 틀 안에 들어올 필요도 없는 거지요.
이 불교라는 틀 속에 들어왔을 때는 말 그대로 불교(佛敎), 부처님을 모델로 해서 부처님이 사셨던 모습을 충분히 내것 화 해 가면서 조금 조금씩 올라가서 나중에는 부처님 이상 가든지 말든지, 그 전에는 부처님을 모델로 삼아야지요.
부처님을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애를 쓰고 아울러 내면을 닦아가는 참선수행을 하면서, 또 필요할 때는 부처님과 그 많은 역대 고승들처럼 칼을 드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을 등질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요? 그게 불교 아닙니까?
불교를 멀리서 자꾸 찾지 말고 부처님 일대기를 자주 읽어봐요,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요.
여하튼 그런 점들을 잘 생각하며 살기 바라고, 여기에서 참선, 특히 선관쌍수(禪觀雙修)적 수행을 단계별로 차차 익혀 나가도록 하지요.
내일도 오후 5시 10분부터 시작해서 6시까지 정진하고 밥을 먹도록 합니다. 내일은 특별히 할 얘기도 없으니 죽비 치면 바로 참선을 시작할 테니까 이 사중(寺中)에 있는 모든 대중들은 예외없이 다 나와야 하고, 여기서 정진한 사람만 저녁을 먹습니다. 여기 나오지 않는 사람은 저녁 먹을 자격이 없는 겁니다. 그리 알고 오늘은 이만 끝냅니다.“
-일체 묵언, 모든 신호는 죽비로-
-참선 이론에 대한 강의-
<자료 - '한국불교대학소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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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에대해서 많은공부가
되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