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레베크(Rene Levesque) 퀘벡독립 놓고 트뤼도와 맞 대항
과격무장단체 FLQ등장, '10월 위기' 초래
1968년 하나의 대사건이 퀘벡 정치계를 뒤흔든다. 르네 레베크의 지도 아래 분리주의 운동세력이 결집해 '퀘벡인의
정당(PQ)'을 창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의 목적은 퀘벡의 역사적ㆍ경제적 불만을 독립을 통해 해소시키는 데 있었다. PQ는
퀘벡이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한편, 경제적인 면에서는 캐나다와 협력관계를 지속하는 주권연합(sovereignty
association) 형성을 주장했다. 이때까지 퀘벡은 연방정부와의 협상에서 다른 주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아왔지만
분리주의자들이 제안하는 변화는 캐나다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캐나다 역사상 가장 카리스마적인
두 지도자 트뤼도와 레베크는 각자가 국가 단합 또는 분리라는 서로 상반되는 비전을 추구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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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계에 입문하기 전 레베크는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 활약했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레베크가 종군기자로서 군인들을 인터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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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레베크는 1950년대 이래 캐나다방송(Radio Canada)의 시사프로그램 ‘Point de Mire'의 TV평론가로서
퀘벡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60년 장 르사즈 퀘벡주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르사주는 퀘벡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던 반면, 레베크는 1963년경부터 공공연히 분리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레베크는 "국내에는 두 개의 상반된
문화가 존재하며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두 개의 공용어, 두 개의 문화에 관한 국립위원회(Royal
Commission on Bilingualism and Biculturism)'를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치부했다.
1967년 레베크는 퀘벡독립을 거론하는 퀘벡의
선택방안(Option Quebec)’이라는 정책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퀘벡 자유당은 1967년 10월 전당대회에서 보고서를
파기했고 이에 따라 레베크는 장관직을 사임하고 당에서 탈퇴했다. 11월 레베크는 몬트리얼의 한 수도원에서
주권연합운동(MSA)이라는 단체를 설립, 본격적으로 퀘벡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에 나섰다. 1968년 MSA는 1960년 선거 직후
생겨난 초창기 퀘벡독립운동단체들 중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가독립연합당(RIN)을 흡수, PQ로 거듭나게 됐다.
레베크와 대중적 지지를 업은 분리주의 정당의 출현은
영국계 국민들에게 새로운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퀘벡독립운동은 마침내 민주적 절차를 통한 퀘벡독립을 추구하는 뛰어난 지도자를
두게 된 것이었다. 트뤼도를 포함한 다수의 퀘벡 태생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레베크 역시 언론계 출신이었다. 그는 명확하고
간결하게 자신의 뜻을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나 언론인으로서 이미 인지도가 높았다.
레베크는 심지어 트뤼도조차도 무시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퀘벡에 관한 논쟁은 지적이지만 감정적인 레베크와 열렬한
연방주의자 트뤼도, 이 두 지도자에 의해 장악되게 된다.
사진- 정계에 입문하기 전 레베크는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 활약했왔었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레베크가 종군기자로서 군인들을 인터뷰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퀘벡해방전선(FLQ)와 10월 위기(October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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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0월사태 때 몬트리얼대학체육관에 모인 3,000명의 학생들은 FLQ지지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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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당을 창당한 레베크는 곧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의 민주적인 대안은 캐나다와 영국의 지배로부터 퀘벡을 완전히 해방시켜 독립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일부 젊은이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들렸던 것이다.
1960년대 전세계 곳곳에서는 테러리즘이 사회변혁을
주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납치ㆍ폭탄투척같은 테러행위는 독일ㆍ프랑스ㆍ영국ㆍ미국 등으로 번져나갔고 캐나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소규모 과격분자 그룹인 FLQ는 무력투쟁을 통한 퀘벡독립을 추구했다. 당시 영국왕실 문장이 달린 우체통에는
우편폭탄이 심심치않게 터졌으며 영국의 퀘벡 정복을 이끌었던 울프 장군의 동상이 파괴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명 영국계
비즈니스 또한 테러리즘의 타켓이었다. 프랑스계로서 현실에 대해 좌절감을 느낀 많은 퀘벡 사람들이 FLQ의 폭력적인 수단은
아니더라도 목적만큼은 공감하고 있었다. FLQ의 집회는 퀘벡의 여러 커뮤니티에서 개최됐다.
1970년 10월5일 FLQ가 퀘벡주재 영국외교관 제임스
크로스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는 이후 '10월 위기'라고 알려진 일련의 사태들 중 첫 번째 사건에 불과했다.
크로스의 석방에 대한 댓가로 FLQ는 여러 사항을 요구했는데 이 중 하나는 FLQ의 성명서를 언론에서 방송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다수 퀘벡 사람들은 퀘벡인들의 불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FLQ의 성명서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이 몰랐던
것은 FLQ가 무기ㆍ폭탄 등을 대량으로 축적하고 실제로 몇몇 조직원들은 강도ㆍ살인 등의 범죄를 저질러 수감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FLQ는 수감돼 있던 조직 멤버들을 '정치범'이라고 주장했다.
(번역: 감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