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3~4 / 첫 순교자 아벨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신앙의 본이 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좋은 인물들이 많고요, 개인적으로도 ‘아, 이분은 나의 신앙의 본이 된다’ 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분들이 떠오르시면 지금, 이 시간에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한 번 보내주세요.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신앙 덕분에 제가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늘 영육 간에 건강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인사하시고 문자나 전화로도 한 번 전해 주십시오.
저에게도 그런 분들 몇 분 계시는데 그런 분이 있다는 것을 참 좋습니다.
또 성경에 그런 좋은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들을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좋습니다.
우리는 ‘아벨의 신앙’에서 세 가지로 본받을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예배자 아벨의 신앙’ 두 번째, ‘순교자 아벨의 신앙’ 세 번째, ‘전도자 아벨의 신앙’입니다. 이 아벨의 신앙 본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신앙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예배자 아벨의 신앙을 본받으려고 합니다(창4:3~4).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인류 최초의 예배 장면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예배의 장면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귀중한 영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 아벨 같은 예배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아벨의 신앙 첫 번째는 ‘예배자 아벨의 모습’입니다.
예배자로서의 아벨과 그가 드렸던 재물, 즉 양이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피 흘리는 제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그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피도, 믿음도 없이, 그냥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 오늘도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저를 받아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과 받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를 드려서 마음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를 드리면 가인처럼 마음에 분이 넘치고 내 마음과 삶이 망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평안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시고, 이웃과 화목하게 하시고, 내 안에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예배를 잘 드리면 내 안에 평안이 오고 사랑이 넘치고 내 삶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4절과 창세기 4장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절에서 아벨의 믿음에 대해 특별히, 그가 드렸던 예배에 대해서 귀하다고 축복해 줍니다.
그가 드렸던 예배는 믿음의 예배였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예배였습니다.
또 제물, 즉 피를 흘려서 하나님께 올려드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흘리심의 예표가 되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반대로 생각해 볼까요?
어떻게 하면 가인처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또 역으로 아벨의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렸나?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가인과 같은 예배를 드렸던 사람 중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입니다. 여로보암이 드렸던 예배가 바로 가인의 예배 같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인데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왕상 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 말의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에 남북이 갈라집니다.
남 유다는 솔로몬이 아들 르호보암이 통치하고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에게 열 지파를 주셔서 통치했습니다.
여로보암은 갑자기 축복받은 겁니다. 왜 축복을 받았는가?
하나님은 솔로몬이 말씀을 불순종하자 북쪽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생각지도 못한 복을 받은 여로보암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다’ 하며 하나님을 더 잘 예배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보 같은 여로보암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북쪽 백성들이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면 안 되는데, 르호보암에게 백성들 빼앗기는 것 아니야?’ 생각하고 예배를 가지고 장난을 칩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두는 것, 둘째, 레위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제사장 세우는 것, 셋째, 절기 날짜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왕상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왕상 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 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금송아지를 단과 벧엘에 세워놓고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어. 여기서 예배드려’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습니다. 예배를 가지고 장난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불안해서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에 갔다가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제발 불안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할렐루야~ 제발 믿으세요. 두려워하면 여로보암 같이 이상한 짓을 합니다. 잘못한 첫 번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한 겁니다.
어렸을 때 ‘예배 보러 가자’ 했습니다. 나쁜 의미는 아니지만 예배는 ‘드린다’하는 표현이 조금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금송아지 보러 가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찬양 보러 오는 건가요? 기도 보러 오는가요? 아닙니다. 찬양 경배 올려드리고, 대표기도 같이 올려드리고, 말씀도 들으면서 내 마음과 삶을 올려드리는 겁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드리는 것, 또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는 예배로 바꿔버립니다. 잘못된 겁니다. 이상한 겁니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두 번째는 레위 자손이 아닌 아무나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왕상 12:31) 그가 또 산에 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특별히 레위 자손을 택하셔서 제사장 삼으시고 주의 일을 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하면서 살다 보면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만 하기에도 바쁩니다. 두 가지를 다 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또 하나, 세상 속에서 살다 보면 아무래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헌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를 인도해야 할 사람을 레위 사람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는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거룩하게 할 수 있도록, 말씀을 더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업을 주시지 않고 ‘너희는 제사장 일을 하면서 먹고살아!’ 하고 구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레위 자손이 아닌 아무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예배가 타락되면 말씀과 기도 같은 영적인 것에 헌신 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들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코미디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증거되고 그 말씀을 통하여서 내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이 선포되어 내 영혼이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그것을 가지고 장난쳤습니다.
세 번째, 날짜를 마음대로 바꿨습니다(왕상 12:32~33).
(왕상 12:32) 여덟째 달 곧 그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 12:33)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여로보암이 예배를 가지고 장난친 세 번째는 절기 날짜를 8월 15일로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바꾼 것입니다. 원래 유다의 절기는 솔로몬 때까지 레위기에 있는 말씀에 의해 7월 15일에 지켜졌는데 비슷한 8월 15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바꾼 의도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것이 더 편한 겁니다. 자기의 편의대로 예배하는 겁니다.
우리도 예배드릴 때, 때로 불편해합니다. 조금 불편해도 말씀대로 드려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로 집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많아졌어요. 헌금도 온라인으로 합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예배는 주일 날 교회 와서, 같이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서로 사랑과 교제하고, 복음도 전하고, 연약한 자를 위로 하기도 하는 것이 성경적 예배입니다.
또 꼭 주일성수를 해야 합니다. 주일성수 하는 것은 율법주의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서 주일을 지키는 것이니 너무나 감사하고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몸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따라야 합니다.
“성육신 적 예배” 항상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하셨습니다. 우리도 몸이 참여해야 전인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겁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전인격적으로 드려지면 반드시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런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를 드리니까 얼굴이 변하고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 말씀이 임하기 때문에 반드시 분별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게 이것이구나!’ 갑자기 알게 됩니다. 깨달아지게 됩니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가려고 했던 것이 돌이켜지게 되고, ‘이것 가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흐릿했는데 말씀 듣고 ‘아, 가야 하는구나’ 합니다.
여러분 사업이나 직장에서 무언가를 할 때도 말씀을 듣다가 보면 딱 감동이 옵니다.
그때 적어놓는 겁니다. 하나님 주신 말씀 붙들고 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벨의 예배입니다.
여로보암의 예배는 가인의 예배와 닮았습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입장에서 자기 편한 대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잘못된 예배이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예배는 철저하게 불편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드려야 주님께서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 피의 예배, 아벨의 예배입니다.
그런 아벨과 그 제물의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