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불교 - 표세현 (발행일: 2006/02/10)
오리엔탈리즘 입장 서구시선 ‘씁쓸’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티벳에서의 7년’은 지난 1월에 타계한 오스트리아 등반가이자 작가인 하인리히 하러(1912~2006)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소설은 하인리히 하러 자신이 티베트에서의 생활을 기초로 쓴 자전적인 소설이다. 하러는 줄곧 티베트에서 보낸 7년 동안 인생이 바뀌어왔다고 얘기해왔다. 티베트에서 서양의 물질주의적인 사고 반대편에 서 있는 불교정신을 만나 깊이 감화를 받았다는게 하러의 회상이다.
하러가 티베트로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나치당국의 명령 때문이다. 나치당원이었던 하러는 나치정부의 명령을 받고 ‘낭가파르밧’을 등정하기 위해 히말라야로 향한다.
사실 그에게 ‘낭가파르밧’은 중요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계기가 그에게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는 나치에서 수많은 등반가를 파견했지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 ‘낭가파르밧’을 등정하면서도 파탄에 이른 결혼생활에 대한 고민과 임신한 아내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다 산사태를 만나 철수하던 중 영국군에게 붙잡혀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5번째 시도한 탈옥을 성공시킨 하러는 동료 한 명과 함께 티베트를 찾아 떠난다.
결국 티베트의 수도이자 달라이라마가 거주하는 ‘성도(聖都) 리사’에 도착한 하러는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 달라이 라마를 가르치며 우정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던 중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을 받게 되고 하러는 티베트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자신의 아들을 만난다.
리사에 들어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서부터 하러는 조금씩 변하게 된다. 그전까지의 하러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낭가파르밧’을 오르는 것보다 힘들었다는 결혼생활도 사실 그가 아내를 배려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내는 결국 그에게 이혼서류와 ‘아내가 슬픔에 가득할 때 어깨에 손을 올려 다독여주는 법을 아는’ 하러의 친구와 결혼할 것이라는 편지를 함께 보낸다.
또 하러는 생사를 같이 한 동료에게 급할 때는 시계도 팔아야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시계를 3개씩이나 감춰놓는다. 하러의 성격은 시계를 발견한 동료의 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하러는 “당신이 왜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는지 이제 알겠다”라고 말하며 떠나는 동료를 간신히 붙잡아 둔다.
자신 밖에 모르는 하러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난 후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남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는 하러는 어린 달라이 라마에게 기꺼이 예의를 갖춰 인사한다.
그런 하러에게 달라이 라마는 그에게 영사기와 필름이 있다면서 다함께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하러는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한다. 하러는 직접 측량을 하며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곧 그는 서양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을 발견한다. 티베트인 인부 한 명이 땅을 파다가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하자마자 티베트인 전체가 공사를 중단해버린 것이다. 하러는 고작 지렁이 한 마리 때문에 공사를 중단하냐고 묻자 인부들은 그 지렁이가 전생에 자신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하러는 달라이 라마를 찾아간다.
달라이 라마는 ‘고작 지렁이 한 마리’라고 말하는 하러에게 티베트인들은 지렁이 한 마리도 전생의 어머니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지혜를 내서 해결해보라며 화두를 던진다. 결국 하러는 승려들에게 부탁해 한쪽에서는 땅을 파고 다른 쪽에서는 승려들이 지렁이를 골라내게 하는 지혜를 발휘해 ‘화두’를 푼다.
영화는 ‘지렁이’를 통해 동·서양의 사물에 관한 인식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서양인’인 하러에게 지렁이는 건축 행위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일 뿐이다. 반면 불교의 교리에 따라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에게 지렁이는 자신의 죽은 어머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있다. 윤회를 믿기 때문에 작은 미물의 생명조차 아끼는 것이다. 하러는 윤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지렁이를 솎아내는 일은 승려들의 몫으로 남는다. 하러는 영화관을 짓는 장면에서 사라진다. 영화관을 완성시키는 사람은 티베트 인과 지렁이를 솎아내는 승려들이다.
어찌됐건 이 일이 있은 후 하러는 변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성탄절 축하파티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참석하고 하러는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해 직접 입구에서 나눠준다.
하러는 리사에 같이 도착한 동료를 위해 특별한 선물도 준비한다. 동료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팔아버린 시계를 다시 구해 선물한 것이다. 동료는 진심으로 감동해 ‘드디어 잃어버린 나를 찾았다. 나를 찾아준 친구에게 정말 감사하다’라고 말한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그는 옛 아내의 집을 찾아간다. 카메라가 잡아낸 아내의 집을 찾아가는 하러의 모습은 과거 아내와의 관계 때문에 고통 받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발걸음은 경쾌하고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하러는 아내에 대한 집착과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꼭 증명하겠다는 마음도 비운 듯하다. 하러는 자신을 피해 옷장으로 숨어버린 아들을 찾지 않고 방 한가운데 선물만 놔두고 나온다. 그 선물은 달라이 라마가 손수 고쳐 하러에게 준 음악상자다.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자 아들은 옷장문을 열고 나와 음악상자를 신기한 듯 살펴본다. 마치 달라이 라마가 그 음악상자를 처음 볼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러는 문틈으로 선물을 보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후에도 하러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강요하지 않는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티벳에서의 7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티베트에서 살아본 서양인의 7년간 수기다. 하지만 영화를 살펴보면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어 보인다. 주인공인 하러는 티베트인과 끝내 융합하지 못하고 영화상 ‘타자’로 티베트인의 생활 습관과 행동을 관찰한다. 그가 타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서구적인 습관을 끝내 버리지 않는 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티베트인 역시 애써 그와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간극은 쉽게 좁혀질 것 같지 않다. 티베트 인들은 하러에게 ‘양모 정장’을 만들어 주고, 거리에서 유일하게 정장을 입은 하러는 마치 독일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산책을 다닌다. 하러와 달라이 라마와의 관계 역시 서양 문물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호기심 때문에 유지된다.
7년 동안 하러는 ‘오리엔탈리즘’을 포기한 것도 그렇다고 서양과 불교를 융합하려고 시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산책하는 사람처럼 티베트의 풍습과 불교를 관찰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아보인다.
물론 불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 아이에 대한집착을 어느 정도 덜어버릴 수 있던 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표세현 기자 aeneid@jubul.co.kr
장 자크 아노 감독은?
인류·자연 근원 좇는 다큐 대가
1943년에 태어난 장 자크 아노 감독은 20세 때 영화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CF감독으로 이름을 날린다. 1977년에 첫 작품 ‘색깔 속의 풍경’을 통해 오스카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다. 그 후 인류의 진화를 형상화한 ‘불을 찾아서’(1981)와 옴베르트 에코의 동명소설 ‘장미의 이름’(1986)을 제작한다.
곰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관심을 모았던 ‘베어’ 등도 연출했다. 최근에는 새끼 호랑이 형제들을 형제애를 그린 ‘투 브라더스’(2004)가 우리나라에도 개봉돼 찬사를 받았다.
‘택시’의 뤽 베송 감독과 함께 헐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이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특징은 소재와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불을 찾아서’는 인간의 역사와 기원을 찾아 떠나는 인류고고학적 탐험에서 시작한 영화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은 ‘불을 찾아서’에서 자신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다. 인간 역사의 기원이 불의 발견에 있다고 보고 영화를 통해 몇 만 년을 거슬러 올라 인간과 문명의 탄생을 추적한다.
‘장미의 이름’ 역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숀 코네리가 주연을 맡아 열연한 ‘장미의 이름’은 방대한 분량과 까다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옴베르트 에코의 동명소설을 가장 충실하게 영상으로 옮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일부에서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상업적 성공만 거뒀을 뿐 작품세계가 깊지 못하다는 비판도 하고 있다. 표세현 기자
■ 대 표 작
2004년 투 브라더스 (Two Brothers)
2001년 에너미 앳 더 게이트 (Enemy at the Gates)
1997년 티벳에서의 7년 (Seven Years in Tibet)
1995년 용기의 날개 (Wings Of Courage)
1991년 베어 (The Bear)
1986년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Rose)
1981년 불을 찾아서 (Quest For Fire)
1979년 뒤통수 까기 (Hothead)
1976년 색깔 속의 흑백 (Black And White In Col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