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혹은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두려움과 설렘으로 이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날, 여명이 새벽의 등 뒤에 숨어 죄송한 듯 다가오는 서울의 심장부, 광화문엔 비장함이 감돌고, 마라토너들은 의병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 꽃이 피기도 망설이는 3월의 새벽에 팬티바람으로 거기에 서있었다. 아테네의 병사가 승전보를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는 거리, 42.195를 나는 진정 달릴 것인가.
장군의 큰칼 아래로 진군하는 병사처럼 스타트라인을 통과한다. 도심을 따라 붉게 번져가는 마라토너들, 꽃 사태가 난 것 같다. 고요하고 적막했던 거리에 발소리 무성하고, 도시가 수혈을 받은 듯 생기가 돈다.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무엇이든 시작하고 싶은 삼월의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준다. 순식간에 서울이 활기에 넘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버하지 말자. 마라톤이란 거리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달리는 것이란다.
마음은 달래고 발걸음은 달린다.
15km지점에서 기록을 본다. 1시간33분, 맘에 안 드는 수치다. 그러나 어절수도 없는 수치다. 질러갈 수도, 대신 갈 수도, 왼발을 두 번 뛸 수도, 오른발이 왼발을 앞서갈 수도, 권모도, 술수도 거부되는…… 그래, 성실하게 달리자. 초라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을 만큼 달리자. 아름답고 기발한 청계천의 건너편에는 아직도 유턴을 하지 못한 후미그룹이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차고 있다.
친절한 종로에 이르자 시민들이 오월의 철쭉처럼 피어있다. 치어리더들 숭어처럼 튀어 오르고, 농악소리 흥겹다. 내가 이 대회를 선택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련되고 유서 깊고……. 그러나 더러는 통행을 제한하는 전경들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미안하다는 생각과 과연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사연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국제적 위상을 갖추고, 56개국에 중개된다고 하니 이런저런 파급효과도 클까, 크긴, 크겠지, 하면서 달린다. 어쨌거나 미안하다, 미안해, 하면서 달린다. 달려서, 하프를 통과한다.
삐~~하는 부저 음이 아름답다.
2시간16분이다. 뭐하고 이제 왔나 모르겠다. 아무튼 절반은 왔다. 벌써 절반을 왔다는 가벼움과, 앞으로도 그만큼을 더 가야한다는 무거움이 교차한다. 이제부터 생전 처음 달려보는 거리다. 왼발이 오른발을 오른발이 왼발을 사랑하듯 희롱하듯 연인처럼 오누이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간다. 초코파이도 먹고 바나나도 먹고……
그나저나, 이놈의 타임이 문제다.
스스로가 설정한 타임, 걸을 때도 먹을 때도 멈춰주지 않는 우직함이 사람을 질리게 하는 타임. 마음은 타임을 앞서가고, 타임은 발걸음을 앞서가고, 타임이 흐를수록 마음이 이분법으로 나뉜다. 안정적 완주냐? 모험적 기록이냐? 다정했던 햇볕마저 따갑고 머리에는 털 대신 열이 난다. 들숨과 날숨이 목구멍에서 혼잡하다. 왜 우리는 늘 능력보다 딱 한 뼘 앞에다 목표를 두고 허덕일까?
포기하기도 달성하기도 모호한.
어깨가 처지고, 별로 든 것도 없는 머리통이 수박 통처럼 무겁다. 배추에 간이 배듯 자연스럽게 마라톤에 대한 회의가 찾아든다. 왜? 무엇 때문에? 대뇌가 있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려한단다. 고로 나도 나에게 묻는다. 내가 이 애물의 길로 왜 들어섰을까? 마라톤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것도, 국가가 시킨 것도, 아파트 값이 안정되는 것도 아닌, 굳이 안 해도 될 이 짓을 하는 데는 반드시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할 그 어떤 동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모르겠다. 그런데도 달린다.
누가 그랬지? 산이 있으니 거기에 오른다고.
어쩐지 농담 같다. 쉰둘에 마라톤이라니 그것도 농담 같고, 이렇게 힘들게 달리면서도 달리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니 그 또한 농담 같다. 산아 너는 왜 거기에 있느냐? 강물아 너는 왜 그쪽으로 흐르느냐? 새야 네가 우는 이유를 설명해 봐. 그냥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달린다. 그러다 보면 무심결에 몇 키로 간다기에…….
“힘내세요. 이봉주가 우승했어요.”
25키로 지점에서였던가?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관이 낭보를 전한다. 그래, 그 덕분에 1km는 수월하게 갔다. 군자교를 지나 어린이 대공원을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신혼 때 시골에서 올라오신 아버지를 모시고 딱 한번 구경 왔던 곳. 그 때 아내는 임신 중 이었고, 소복하게 부은 아내의 다리를 걱정한 아버지가 반도 못한 구경을 다했다며 그만 돌아가자고 했던 곳.
아버지는 영원히 돌아가시고, 아이는 태어나 군대에 갔다.
잠실대교에 이른다. 마의35km지점. 거대한 구조물 아래로 한강은 마라톤과 무관하게 흐르고, 과묵한 대교를 따라 마라톤도 흐른다. 앞으로도 뒤로도 흐르는 마라토너들…… 그 거대한 흐름 속에 하나의 꽃잎으로 존재하는 나, 나는 이렇게 힘든데, 저 멀리 상공에 떠있는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하나의 무리에 지나지 않겠지. 내가 포기하던, 포기하지 않던, 걷든, 뛰든, 이 거대한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어찌 그것이 마라톤뿐이겠는가. 벼랑 끝 바위틈,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 줄도 모르고 홀로 피었다지는 들꽃처럼 외롭다. 침묵하는 강물도 외롭고, 그 위에 떠있는 유람선도 외롭고, 고성처럼 늘어선 고층아파트도 외롭다.
외로움의 꼬리를 잡고 그녀가 떠오른다.
골인시간에 맞춰 운동장으로 와달라고 했을 때 반신반의 하던 그녀는 오고 있을까? 자고 있을까? 그나저나 이놈의 다리는 왜 이리 긴고? 무엇이든지 거대한 것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거기다가 나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은 거대함 뿐만이 아니다. ‘주자불노’ ‘독도는 우리 땅’ ‘우리아들 대학 합격을 기원하며’ ‘튼튼 태권’ ‘나를 추월해가는 모든 것들’이 나를 주눅 들게 한다. 회송차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늙은 암사자처럼 따라오고 있겠지.
절대로 돌아보지 말자.
잠실대교를 건너자 약간의 내리막이 나타난다. 오직 완주가 목표라지만 내심 D그룹이 되고 싶은 욕심, 속도를 올려본다. 그렇게 2km쯤 달렸을까? 장단지가 찌릿찌릿 해진다. 꾹 참고 달리는데 송곳으로 팍팍 찌르는 것 같다. 그리고는, 애고 애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여기가 벽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이 그렇게 왔다.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모양으로 깨끗한 체념의 순간이 그렇게 다가왔다. 도우미들이 달려와 주로 밖으로 겨드랑이를 끼고 나간다. 주로의 반대편에는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앰뷸런스가 긴급하게 오고간다.
아~ 어떻게 준비한 대횐데……
그러니까 3년 전, 학교운동장 두 바퀴를 도는 것으로 마라톤을 시작했다. 마라톤이라는 고급스런 용어를 쓰기도 미안한 무작정 달리기였다. 다섯 바퀴 뛰고 쉬고, 열 바퀴 뛰고 담배한대 피우고, 1년 후 담배 끊고, 10km짜리 첫 대회 참가, 책과 동호회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이론 보강, 자세와 착지를 다듬고, 하중을 줄이기 위해 7kg를 감량했다. 아니, 달리다 보니 7kg이 빠졌다.
혈압이 내려가고 성격이 좋아졌다.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뛰었다. 매주 40km이상을 달렸다. LSD, 템포런, 파트랙 같은 훈련용어에도 익숙해 졌다. 틈틈이 하프를 뛰며 실전감각도 늘렸다. 그러나 말이다. 정작 마라톤의 공식을 알기까지 나는 자주 시행착오를 겪었다. 너무나 힘들게 터득한, 차마 공개하기 아까운, 알고 나면 마라톤이 너무나 쉬워지는, 마라톤의 공식…… 그것은, 1+1=2 그리고 거기에 1을 더하면 3이라는 매우 지루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나는 미련하게도 그것을 마라톤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
당신은 행운입니다.
아무튼 대회 2주전부터는 아내와 각방을 썼다. 글리코겐축척을 위하여 찹쌀도 한 포대 팔아 왔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니며 몸 관리를 했다. 그 모든 노력과 정성지덕인지. 마라톤신의 보살핌인지. 도우미들이 당기고 주무르고 한참을 지나자 일어설 수가 있었다. 서서히 무리 속에 합류해본다.
그런대로 아장아장 달릴만하다.
석촌호수를 지나자 마지막 골인 지점이다. 주머니에다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넣고, 비장한 각오로 달렸던 마라톤도 이제는 끝물이다. 끝물은 과일처럼 달다. 카메라가 터지고 함성소리 드높다. 그런데 이토록 넘치는 군중 속에 어쩌면 그렇게 아는 사람 하나 깔끔하게도 없을까. 세상이 또 외로워진다. 아니, 외로워지려는 순간, 물에 잠긴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외마디.
“수민아빠 화이 팅!”
돌아보니 그녀다. ‘저런, 안 올 것 같더니.’ 뜻밖에 반갑고 목구멍이 뜨겁다. 그랬다. 내가 달려온 이유가 거기 그렇게 손을 흔들며 서있었다. 그렇게 먼 길을 달려온 이유치고는, 한 남자가 존재하는 가치로는,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한없이 누추한. 그러니까, 그 때문인지,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천근만근 해야 할 발걸음이 오히려 깃털처럼 가볍다. 해탈인가. 탈진인가. 무명옷이 된 느낌! 그리고 무한히,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아! 이제 기록을 말할 시간이다.
기록이랄 것도 없지만, 욕심보다 한 뼘 늦었다. 아니, 능력보다 한 뼘 빠른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완주매달을 아내의 목에 걸고 사진을 찍었다. 10km대회에 몇 번 참가한 그녀역시 자칭 마라토너다.
“다음에는 나도 뛸 거야!”
사진을 찍어주던 이가 ‘행복해 보이시네요.’ 하며 웃는다. 그렇다. 행복하다. 42.195를 뛰고도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 축복받은 사람이다. 건강한 육체가 그렇고, 건전한 정신이 그렇고, 달릴 수 있는 여건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상자다.
취직이 되었을 때와, 아내를 얻었을 때와, 내 집 마련했을 때 등 내 인생을 통 털어 몇 차례 안 되는 성공한 밤에 썼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