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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시민투]에 시위 강제진압 엄포
헬기 선무방송등 [집행부]와해공작
광주희생자 추모 시민분향 줄이어
목포지역 교회신자들, 역광장서 비상 구국기도회... 계엄 규탄 선언문 발표
61 시위확산 목포 <4>
24일 목포에는 광주 시민들의 죽음을 슬퍼하듯 많은 비가 내린다. 이날 비때문에 시민궐기 대회는 개최되지 않았으나 오후에 목포역 대합실에는 광주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분향소가 차려지고 분향행렬이 줄을 잇는다.
시내에서는 청년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간헐적으로 계속되나 일부 시내버스도 운영되는 등 모처럼 평온한 분위기가 된다. 이는 날씨탓도 있었지만 전날 [시민투]가 목포시장과 경찰서장에게 요구했던 수숩대책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다.
시내 점차 평온 찾아.
[시민투위원장] 안철씨는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첫째 , 현재 시내버스 운행이 중지돼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으니 일부만이라도 운행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
둘째 피신중인 공무원들은 모두 돌아와 언제든지 정상근무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세째. 경찰은 밖으로 나오지 말고 대신 교통 경찰 몇명만 보내달라.
모든 행정과 치안이 마비된 상태에서 유일하게 힘을 발휘할수 있었던 [시민투]가 시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비상대책을 요구한 것이다. 분향소는 영정이 없어 제단만 만들어 놓고 묵념만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이 분향소는 먼저 가신 영령들과 또한 계속 싸우고 있는 광주 시민과 끝까지 함께 투쟁한다는 시민들의 무언의 결의를 모두의 가슴에 심어준다. 이날밤 행복동 안철씨 집으로 이준구 경찰서장과 정보과장이 찾아와 시위중지를 사정한다.
[안철씨도 마찬가지겠지만 경찰서장인 나역시 이번사건이 끝나면 잡혀갈 것입니다. 이제 목포시민으로서 할것은 다한것 같으니 시위를 중지해 주십시요..] 이서장의 이같은 요구에 안씨는 단호히 거절의사를 밝힌다.
더이상의 시위확산을 두려워한 상부의 지시로 목포의 불길을 끄려면 경찰등 기관들의 갖은 시도는 각 시민단체와 정당인 재야인사 학생들의 완강한 결의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하고 투쟁은 더욱 강고해진다.
25일은 5.18후 첫 일요일로 목포 각 교회 교인들은 주일 예배를 마치고 역 광장으로 모여 들기 시작한다. 오전 11시부터 교회별로 예배를 보고 12시에는 역광장에서 전체교인이 모여 [목포시 기독교연합회 비상구국기도회]를 갖기로 한것이다.
연동교회는 [광주사태는 명백히 계획적인 양민학살사건이다.] [피값에는 외상이 없다. 즉각 보상하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가지고 나온다. 이날 신자들은 [광주시민 혁명에 대한 목포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이란 제목으로 8절지를 빽빽이 메운 감동적인 내용의 유인물을 후세에 남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정의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땅에 파종하고 가꾸는 일에 앞장서는 우리 목포지역교회는 최근 광주 목포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의 물결,이사건 이역사속에서 우리보다 먼저가셔서 주의 백성을 탄압하고 살육하는 오늘의 뿔달린 짐승과 투쟁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 목포교회는 교파적인 이해를 떠나 오직 앞서가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단합된 믿음을 갖고 이나라 자유시민들과 전국 형제교우들과 세계자유우방을 향해 다음과 같이 고백선언한다.
1. 최근 광주와 목포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시위항거는 동학혁명, 3.1운동,광주 학생사건,4.19와 명동민주구국선언의 법통을 잇는 역사적인 시민혁명이었다. ....
1. 우리는 시위군중에 의하여 방송국 건물이 불타는 자리에서 우리 하나님이 역사적 현장을 외면하고 있는 이나라 언론인에 대해 분노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신문.통신.방송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언론인들은 먹고살기위해 더러운 노예로 만족했다는 지탄을 받지 않기 위해 광주 .목포의 참상을 바로 보고 정확히 전달해 주기 바란다.
1.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시민들과 세계교회형제들은 소수 군벌독재자의 감언이설에 속지말고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여 지쳐있는 광주.목포시민들의 등을 밀어주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기를 원한다.]
이선언문은 앰네스티목포지부와 기독교장로회인사들이 주축이 된 목포지역 종교인들이 반유신민주화운동의 성과물이면서 광주.목포사태에 대한 원인과 역사적.세계사적 성격,특히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고백을 포괄적으로 드러낸 압권으로 평가되고 있다.
26일에도 오전 10시부터 민주 헌정수립을 위한 제 4차 시민궐기 대회가 열리고 오후 4시에는 시민민주투쟁위원회의가 소집돼 향후 방향을 논의한다. 위원들은 광주에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접하고 동요하기 시작한다. 회의에 앞서 광주시위상황을 자세히 알고 유인물도 교환하면서 연대투쟁을 시도키 위해 사람을 광주로 보냈으나 교통주절로 실패한다.
회의는 광주사태 진압을 예상하고 이에 맞춰 시위를 종결키로 하고 모든 사랑을 위원장인 안철씨에게 위임한다. 그러나 투쟁은 계속돼 저녁 8시부터 3차 횃불시위가 10만인파가 참여해 열린다. 마침내 27일 새벽 6시께 계엄군에 의해 도청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역전상황실에 전해진다.
도청진압으로 1천여명의 광주시민이 학살됐다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역전상황실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도청함락 소식을 전해듣고 다른날보다 일찍 역전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9시 30분께 계엄사는 헬기 2대로 시내일원 상공을 돌며 유인물 살포와 함께 선무방송을 한다. 광주일원을 장악했던 폭도들이 농간에 현혹되지 말고 빨리 귀가하라는 내용이었다. 11시 30분께 상황실 전화에 12시까지 자진해서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 진압하겠다는 통첩이 전달된다.
시민들은 계속 싸울것인가, 물러설것인가로 의견이 분분해지고 집행부도 한쪽을 택해야 하는절박한 순간에 봉착한다. 결국 [시민투]는 마지막 궐기대회를 끝으로 시위를 종결키로 하고 학생집행부에 통보한다.
11시 마지막 궐기대회가 열려 [우리 겨례와 세계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2)]가 채택된다. 2만여군중은 시가행진을 하며 광주진압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오후 3시께 일단해산한다.
경찰,시위대 검거선풍
그러나 젊은 청년들은 계엄군과 싸워 이기는 길은 목포시민의 적극적이 투쟁이라고 결론짓고 시민들의 대거 참여를 유도키 위해 횃불시위까지 준비한다. 오후 6시께 역시 마지막 횃불시위가 수만인파의 참여속에 시작됐으나 시위후 목포역에 남은 사람은 절반으로 줄고 집행부도 속속 흩어진다.
계엄군은 [진압한다]는 전화를 계속 걸어오면서 계속 압박을 계속한다.이때까지 남은 30여명의 집행부는 최후까지 싸우기로 결의하나 역전에 모였던 시민들은 대부분 돌아가고 어린학생들만 남은 상황을 보고 최후 항쟁을 포기한다. 자정이 넘고 0시 40분 최후로 남은 집행부원들은 죽더라도 싸우자는 학생들을 겨우 설득해 30분간 거리청소까지 한다.
이후 중고생들은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면서 해산키로 하고 시내로 향하다 역주변을 포위해온 사복경찰에 차례로 검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