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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도 잘 사는 나라들
유럽의 심장부 벨기에(1995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유럽의 북서부 시차 : -7시간차
언어 : 네덜랜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인구 : 10,414,336명 (2010), 전체 순위 79위
면적 : 30,528㎢, 전체 순위 139위 기후 : 해양성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 75%, 개신교 25%
종족 : 플라망족 58%, 왈론족 31%
정체 : 입헌군주제 의회형태 : 양원제
국가원수 : 국왕 정부수반 : 총리
화폐단위 : 유로(euro/?)
벨기에(The Kingdom of Belgium)는 유럽 대륙의 북서부에 자리 잡고 있는 국가다. 남북 길이는 약 193km, 동서최대너비는 약 240km이다. 국경은 네덜란드,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와 접하고 있으며 북서쪽에 66km의 북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1830년 독립 이래로 의회 형태의 정부를 갖춘 세습 입헌군주국이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서부 유럽의 로망스어와 게르만어족 사이에 있는 복합적 문화를 가진 국가이다. 동부 지역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 국민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과 네덜란드어에서 파생한 플라망어를 쓰는 사람들로 나뉜다.
벨기에는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국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벨기에는 네덜란드 및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넬룩스 경제동맹을 결성했으며,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다. 이러한 국제기구들은 모두 수도 브뤼셀이나 그 근교에 본부를 두고 있다.
EU(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브뤼셀(1995년)
영국과 아일랜드를 탐방하고 영국의 도버항을 출발해서 프랑스의 까레항에 도착했다. 스케쥴에 따라 곧바로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향했다. 브뤼셀로 향하는 중에 해가 서산에 걸리면서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벨기에는 베네룩스 동맹 국가로 국토가 넓은 나라는 아니지만 차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국토의 전경은 무척이나 여유롭고 정돈되어 있었다.
서쪽 하늘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길 주변으로 펼쳐지는 한가로운 농촌풍경을 감상하면서 브뤼셀로 향했다. 농촌풍경은 한가로워 보이면서도 풍요로워 보였다. 비록 국토의 면적은 넓지 않지만 국토의 크기에 연연하지 않고 주어진 국토를 알뜰하게 가꾸고 다듬어 가는 나라인 것 같았다.
브뤼셀에 도착하니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빠듯한 일정 때문에 여장을 풀고 밤중의 브뤼셀 거리를 둘러보려 나갔다. 국제적인 도시 브뤼셀의 밤거리는 자정이 넘어도 인파로 북적대는 곳이 많았다.
어느 식당거리를 가니 자정이 넘었는데도 시간의 흐름을 잊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리는 발을 딛을 틈도 없었고, 식당의 안팎에서는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밤 깊은 줄 모르고 식도락을 즐기고 있었다. 미식가들이 찾는 브뤼셀의 식당거리에서 우리는 야식으로 벨기에의 음식문화에 접해보았다.
전통의 가치 존중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있는 브뤼셀은 유럽의 심장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도시의 분위기도 유럽의 고전적인 정취와 현대적인 감각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도시의 풍경은 현대적 양식의 빌딩 사이로 고전적 유럽풍의 건물들이 중간 중간 들어서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시내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오래된 호텔이었다. 내부의 시설은 옛날 것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옛 것을 현대와 조화시켜 사용하고 있었다. 호텔의 엘리베이터 문은 옛날 방식 그대로 수동으로 열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이곳 사람들의 옛 것의 가치를 존중하는 알뜰한 마음가짐을 새삼스럽게 읽어보았다.
▲ 벨기에 전통마을 ▲ 왕궁의 소박한 분위기
도시국가 룩셈부르크(1995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서부 유럽 시차 : -7시간차
수도 : 룩셈부르크 언어 : 독일어, 룩셈부르크어, 프랑스어
인구 : 491,775명 (2010), 전체 순위 166위
면적 : 2,586㎢, 전체 순위 172위 기후 : 온대성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 87%, 개신교 13%
종족 : 이탈리아계, 포르투갈계, 켈트계
정체 : 입헌군주제 의회형태 : 양원제
국가원수 : 대공 정부수반 : 총리
나라꽃 : 장미 Rose (Rosa)
룩셈부르크는 서유럽에 있는 베네룩스 3국 중의 하나인 도시국가이다. 수도는 룩셈부르크시이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철강업체 아르셀로미탈의 본사가 룩셈부르크에 있다.
963년 아르덴 백작 지크프리트가 룩셈부르크의 고성을 거점으로 삼아 이 지역의 지배를 시작했다. 1060년경 지크프리트의 증손인 콘라트가 처음으로 룩셈부르크 백작이 되었다. 1815년 빈 회의에 의해 대공국으로 승격되어 네덜란드 국왕이 대공을 겸했다. 1867년 런던조약으로 프로이센軍이 철수하고 독립과 중립이 보장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 점령당했었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체험(1995년)
벨기에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조그마한 나라 룩셈부르크는 베네룩스 3 국 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이며, 도시 국가 형태의 나라이다. 이 나라의 중심부에 있는 룩셈부르크 시티는 도시 가운데를 푸른 숲의 계곡이 가로지르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계곡의 푸른 숲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꽃밭이 조성되어 있으며, 계곡 위를 연결하는 아치형의 다리들은 아름다운 이 도시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도심의 언덕 위에 있는 독립을 기념한 헌법 광장에는 각국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로 쉴 사이 없이 붐비고 있었으며, 특히 이 광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푸른 숲의 계곡과 아치형 다리의 어울림은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계곡의 다리 위를 기적을 울리면서 지나가는 기차를 보니 마치 중세 유럽의 어느 지역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시내의 중심거리로 가보니 곳곳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어느 한 곳에서는 아마추어 악사들의 모임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서 많은 사라들이 연주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룩셈브르크 성(수도) ▲ 헌법광장 앞 계곡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 룩셈브르크는 과거에 아주 힘 있는 봉건 영주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영주가 자기의 봉토를 독립시킨 것이 바로 이 도시 국가 룩셈부르크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광장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룩셈부르크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면서 영토는 작아도 국민들이 편안하게 잘 살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 룩셈브르크의 정경
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이곳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이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깊이 음미해 보았다.
알프스의 부국 스위스(1995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유럽 중부 시차 : -7시간차 수도 : 베른
언어 :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인구 : 7,604,467명 (2010), 전체 순위 95위
면적 : 41,277㎢, 전체 순위 134위
기후 : 대륙성기후, 서안해양성기후, 지중해성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 42%, 개신교 35%, 이슬람교
종족 : 독일계 65%, 프랑스계 18%, 이탈리아계
정체 : 연방제 의회형태 : 양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대통령
나라꽃 : 에델바이스 Edelweiss (Leontopodium alpinum)
스위스는 중부유럽에 있는 내륙국가로서 공식명칭은 스위스연방(Swiss Confederation)이며 행정수도는 베른이고 사법수도는 로잔이다. 서쪽으로 프랑스, 북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리히텐슈타인 공국, 남쪽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1/4이 높은 알프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력 이외의 다른 천연자원은 거의 없다. 여러 종족·종교·언어를 극복하여 관습의 통일을 이루었고 약 7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를 유지해왔다.
세계 주요금융 중심부 중 하나인 스위스의 경제는 경공업 및 중공업뿐 아니라 국제무역과 은행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산업으로는 시계·정밀기계·기계·화학산업 등이 발달했다. 관광업과 농업 또한 중요 산업에 포함된다. 스위스는 9세기에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았고, 11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스위스는 종교개혁의 중심지역으로, 그로 인해 연방이 분열되어 정치적·종교적 갈등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1815년 빈 회의에서는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하고 중립성을 보장했다. 1848년 베른을 수도로 하는 새로운 연방국가가 구성되었다. 스위스는 제1, 2차 세계대전 중에 중립을 유지했으며, 이후로도 중립성을 계속 고수해왔다. 1960년 유럽자유무역협회에 가입했으나 유럽연합(EU)에 가입하는 것은 거부했다. 2002년 국제연합(UN)에 가입했다.
산과 호수의 나라
룩셈브르크를 떠나 다시 프랑스 영토를 통해서 농장 지대를 한나절 정도 달리니 차창에 비치는 전경이 달라지면서 차가 산간지대로 들어섰다. 눈앞에 전개되는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산들은 험준한데 거기에 비해 산색이 곱고, 모양새는 정돈되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 정상에는 흰 눈이 덮여 있고, 가까이 보이는 산들은 허리까지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었으며, 산자락 중간 중간에는 동화책 속에서나 본 듯한 그림 같은 집들이 하나 둘씩 끼어 있었다.
한참 동안을 차창 밖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이어지는 경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장엄한 산, 눈 덮인 산봉우리, 곱게 다듬어진 산기슭, 예쁘게 정돈된 집들, 새파란 수면에 산 그림자를 드리운 호수들 .... 설레는 마음으로 스위스 탐방은 계속되었다.
▲ 스위스 주거문화 ▲ 호반 도시 루쩨른
호반의 도시 루체른(Luzern)
눈앞에 전개되는 경치에 매료된 채 한참을 가니 어느 아름다운 호숫가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도시에 도착했다. 호반의 도시 루체른(Luzern)이다. 루체른호는 스위스에 있는 호수 중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호수라고 했다.
루체른은 아름답게 가꾸어진 조용한 호반도시였는데, 골목골목에는 꽃바구니를 매달아서 거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도시 전체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녁시간 숙소에서 내려다본 루체른호는 도시의 불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거리고 있었으며, 호수에 비친 시가지의 불빛, 호반을 지나는 야간열차의 길게 이어진 불 켜진 창들, 밤의 적막을 가르는 기차의 레일 스치는 소리 등은 호반의 도시 루체른을 한층 더 환상의 세계로 몰고 갔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루체른의 야경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음 날에는 루체른 호의 잔잔한 수면을 미끄러지듯 나가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호수를 돌면서 알프스의 정경을 가슴에 안아 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뒷산을 배경으로 호수에 접해 있는 원색의 그림 같은 예쁜 집들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꿈의 세계로 끌어가는 듯 했으며, 그 집들에서는 금방이라도 동화 속의 요정들이 배를 저으며 나올 것만 같았다.
만년설의 티트리스(Titrris) 산
루체른 호의 일주를 끝내고 알프스 산의 등정을 위해 길을 재촉했다. 버스가 조용한 산간 마을들을 지나서 한동안 산길을 따라 들어가니 하얀 눈이 산꼭대기를 덮고 있는 장엄한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산이 높이 3020m의 티트리스산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 맨 먼저 곤도라식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을 향해 출발했다. 케이블카 아래의 젓나무 숲을 보면서 한동안 올라가니 케이블카는 첫 번째 정류장에 도달했다. 여기서 다시 대형 케이블카로 바꾸어 타고 계속해서 위로 향했다.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케이블카 아래를 내려다보니, 상당히 높은 고지대인 것 같은데도 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 덮인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고지대 분지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스위스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생각해 보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한참을 더 올라가니 두 번째 정류장에 도착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다시 회전식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사방을 돌면서 주위의 만년설과 빙하를 구경하면서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서 만년설이 덮인 알프스산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차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확 트이면서 스며드는 감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티트리스산을 오르면서, 이렇게 높은 곳까지 케이블카를 그것도 특징을 살려서 3종류의 케이블카를 번갈아 가면서 정성스럽게 운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스위스가 저절로 세계적인 관광국이 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티트리스산 케이블카에서 ▲ 인터라켄
산간 도시 인터라켄(Inter-Laken)
루체른을 출발하여 산길을 한참 달리다 머문 곳이 인터라켄이라는 조용한 산간 도시였다. 인터라켄은 글자 그대로 호수와 호수 사이에 위치하면서 두 호수를 연결하고 있는 도시였다. 이 도시는 두 호수가 서로 붙어 있는 연결 지점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양쪽이 모두 호수에 접해 있어서 아름다움이 더했는데, 거기에다 또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산간의 정취도 만끽할 수 있었다. 이 도시는 알프스의 유명한 산 융 푸라우산을 오르는 길목이기도 했다.
기적을 울리며 산 속을 헤치듯 들어오는 기차, 뱃고동 울리며 끌려오듯 다가오는 호수의 유람선, 관광객을 기다리며 역 앞에 서 있는 방울 단 마차들, 이 모든 것들이 산간 도시 인터라켄의 정취를 더욱 드높여 주고 있었다.
레만(Leman)호를 돌아서
인터라켄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바다같은 호수 레만호에 다다랐다. 호수의 건너편에는 레만호반의 국제도시 제네바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의 한쪽 편에는 지난날 어느 영주의 성(城)이었던 시옹캐슬이 호수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성 내부에는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호수를 향한 지하실 벽에는 대 문호 빅톨유고가 다녀간 흔적도 있었다. 레만호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레만 호반의 또 하나의 도시 스위스의 마지막 방문지 로잔으로 향했다..
로잔은 레만호의 서북쪽에 있으며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며, 올림픽 박물관이 있었다. 로잔에 오니 갑자기 달라진 상황은 주민들의 언어가 독일어에서 프랑스어로 바뀐 것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 네 개의 언어 즉 독어, 불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스위스 고유어가 지역마다 각각 사용된다고 한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지역적인 특성과 향토애로 국가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로잔의 거리는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웠다. 상점들은 대부분 6시에서 7시 사이에 문을 닫기 때문에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서둘러 거리로 나갔다. 저녁이 되자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고, 거리는 조용해지면서, 가로등 불빛만이 호반의 도시 로잔의 밤을 지키기 시작했다.
▲ 레만호의 정경 ▲ 시옹캐슬
알프스의 부국 스위스, 그들에게는 인내와 노력 그리고 자존심을 지키는 엄청난 큰 힘이 숨어 있음을 느꼈다.
서정적인 나라‘아일랜드’(1995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북대서양 북동부 시차 : -8시간차
수도 : 더블린 언어 : 게일어, 영어
인구 : 4,203,200명 (2010), 전체 순위 125위
면적 : 70,273㎢, 전체 순위 120위 기후 : 해양성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 88%, 아일랜드교회 3% 종족 : 켈트족, 영국인
정체 : 중앙집권공화제 의회형태 : 다당제&양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총리
아일랜드(영어 Ireland, 아일랜드어 Éire)는 유럽의 북서쪽에 있는 아일랜드섬의 5/6을 차지하는 공화국이다. 프랑스 갈루아족이 기원전 5세기경에 아일랜드로 와서 게일족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다음 붉은 머리 켈트족이 건너왔다. 오랜 기간 바이킹족의 공격에 시달린 후 1172년 영국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켈트족은 끈질긴 저항으로 잉글랜드와 맞섰다.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종교 갈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 북아일랜드의 얼스터에 이주해온 장로교인들은 가톨릭교도들을 밀어내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수백년이나 영국에서 온 개신교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았고, 이들의 불만은 무장투쟁으로 폭발했다.
1916년 부활절 봉기와 영국-아일랜드 전쟁을 거쳐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아일랜드의 32개주 중 남부 26개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했다. 1949년에 아일랜드는 영국 연방에서 탈퇴한 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 독립하였다.
아일랜드(Ireland)의 목가적 풍경(1995년)
런던을 출발해서 한 시간 정도 가니 비행기는 아일랜드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아일랜드는 푸른 들판이 자리 잡고 있는 농촌 풍경 그대로였다.
▲ 아일랜드의 목가적 풍경
수도 더불린 공항에 안착했다. 공항에서 숙소를 정하고, 시내 지도를 사서 시내의 지리를 대강 살펴본 후, 공항 리무진으로 시내로 향했다. 리무진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소매치기에 조심하라는 충고를 해주는 것을 듣고 이곳의 사회 분위기의 일면을 짐작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이곳 사람들의 착한 마음씨도 동시에 느낄 수가 있었다.
공항에서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니 프론트 데스크에 앉아 있는 종업원이 한국 사람은 이곳에 거의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향수를 느끼게 하는 더블린
더블린의 거리는 곱게 늙은 영국 풍의 거리였다. 비록 건물들은 검게 그을려져 있고 낡아 있었지만 말끔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길거리 또한 정성스러운 손길이 계속 되고 있었다. 특히 시내 중심지에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아름다운 공원은 인상적이었다.
공원의 옆 길가에는 어떤 화가들의 그림인지는 몰라도 울타리 옆으로 그림들이 길게 진열되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머물게 했다. 그러나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조용하면서도 발전을 향한 발돋움이 느껴졌다. 더블린의 중심가인 오코너 스트리트에는 길 중앙을 공원으로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꾸며져 있어서, 그곳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어울리는 대화의 광장이 되어 있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한 나라이기 때문에 문화적인 면에서는 영국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잃어버린 문화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는데, 특히 정부 기관의 건물에는 기관 이름을 영어와 아일랜드어로 나란히 병기하면서 아일랜드의 혼을 북돋우고 있다.
▲ 향수를 불러오는 거리 풍경 ▲ 아일랜드의 도시 풍경
정돈되어가는 국토
도시를 벗어나서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차창에 비치는 모습들은 눈에 띠도록 정돈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산에는 조림이 진행되어 푸름을 되찾아 가고 있었고, 들판에는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지 못하지만, 옛것을 소중히 보존하면서 조용히 재기를 다짐하고 있는 이곳이 빨리 발전되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 풍요로운 자연 환경 ▲ 조용한 삶의 현장
작지만 스케일이 큰 나라 대만
* 여행 팁
국기 :
위치 : 동북아시아 시차 : -1시간차
수도 : 타이베이 언어 : 중국어
인구 : 22,974,347명 (2010), 전체 순위 48위
면적 : 35,980㎢, 전체 순위 137위 종족 : 한족 98%, 기타 2%
기후 : 아열대성, 열대성기후 종교 : 불교35%, 도교33%, 기타
정체 : 공화제 의회형태 : 다당제&단원제
국가원수 : 총통 정부수반 : 행정원장
대만은 중국 본토에서 160km 떨어진 곳으로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해 '아름다운 섬'이란 뜻으로 포르모사라고 이름 지었다. 1646년 네덜란드가 스페인 정착촌을 장악하고 이 섬의 지배권을 얻었다.
1683년 청나라가 타이완을 푸젠성에 병합시켰다. 1886년에는 중국의 1개 성이 되었고, 1894년에 타이베이는 성도가 되었다. 타이완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에 할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1945) 후 중국에 되돌려졌다. 1949년 본토에서 국민당을 누르고 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제스[蔣介石] 장군이 이끄는 국민정부와 지지자들은 타이완으로 피해왔다. 1954년 국민정부와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으며, 거의 30년간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1971년 미국은 중국 대표 국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대체고 타이완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타이완은 국제적 위상 축소에도 불구하고 20세기말 환태평양지역의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했다.
대륙을 향한 집념 대만(1980년)
대만은 비록 크지 않은 섬나라이지만, 공항에서부터 대륙적인 기풍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공항의 큰 규모에 눈길이 갔고, 공항청사 안에는 많은 여성근무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거대한 공항 규모와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참여는 이 나라의 발전을 약속해 주는 듯 했다.
대만에서는 타이베이(臺北)와 화련(花蓮)을 돌아보았다. 들리는 곳마다 중국인의 특유한 대륙적 기질과 검소한 생활 태도가 마음에 와서 닿았다. 특히 타이베이에 있는 고궁 박물관은 그 소장품의 규모와 가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소장품을 3개월마다 교대하여 전시를 해도 수십 년이 걸린다고 했다.
▲ 타이페이의 고궁박물관
화련(花蓮)
화련은 대만의 중부 동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다. 타이페이에서 항공기를 이용해서 당일 코스로 화련 관광을 떠났다. 화련에 내려서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리석 공장으로 갔다. 그곳에 진열된 갖가지 작품들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화련의 아름다운 경치와 안온한 농촌 풍경은 대만을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되게 했다.
화련에서 서쪽으로 내륙을 향해 들어가니 타르고(太魯閣)협곡이라는 거대한 계곡이 앞을 가로 막았다. 가로놓인 다리를 건너 계곡을 따라 들어가는 도중, 절벽을 깎아서 만든 관광 도로를 지날 때에는 가슴이 오싹거림을 느꼈다. 보기 드믄 절경이었다. 계곡에서 돌아오는 길에 산간 동네에 들러서 대만 원주민인 아미족의 전통 문화에 접해 보기도 했다.
▲ 화련 타르고 계곡 절벽 길 ▲ 화련 타르고 계곡 절경
대만의 거리를 걸으면서 느꼈던 것은 자유스러움 속의 질서였다. 크게 통제하지 않아도 흐트러짐 없이 흐르는 거리의 교통, 밤이면 활기를 띠는 야시장 등에서 자연스러운 질서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시내의 곳곳에서는 본토수복의 의지를 담은 글귀들이 보였고, 국내선 항공권에까지도 그러한 글귀들이 쓰여 있었다.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청년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또 화련을 여행할 때에 대화를 나누면서 일정을 같이했던 한 미국 여행객도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대만 2차 방문(2005년)
가족의 정을 새기면서
아직도 겨울의 기운이 남아 있는 2월, 둘째딸 윤희의 주선으로 대만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갸륵한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서 그리고 애틋한 가족의 정을 느끼면서 여행길에 올랐다. 3시간여의 비행 후 타이페이에 도착했다. 25년 전 세계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 들렸던 타이페이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공항청사를 나와 윤희의 빈틈없이 계획된 스케쥴에 따라 공항리무진에 몸을 싣고 시내로 향했다.
르 수이트 타이페이(Le Suite Taipei)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좋았다. 휴식을 취한 후에 전철을 타고 첫날의 일정인 시내 탐방에 들어갔다. 최첨단 도시로 변한 타이페이의 시내는 번영의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타이페이 시내탐방
우리는 먼저 대만의 음식문화에 접해보기 위해서 대만의 유명 식당가가 자리 잡고 있는 미쓰비시 쇼핑센타의 식당코너로 가서 대만음식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삼광해물부페 식당을 찾았다. 다양하고 푸짐한 음식 메뉴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시내 탐방을 했다. 즐비한 고층 건물들과 정연한 시가지, 그리고 여유에 찬 시민들의 모습은 이곳이 국제적으로 소외를 당하고 있는 도시라기보다는 당당한 국제적인 도시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시내를 탐방할 때에 가랑비가 간간이 뿌렸지만 이곳 사람들은 가랑비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정부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일제시대의 총독부 건물을 둘러본 후, 중화민국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장개석을 기념하는 ‘중정기념관(장개석기념관)’으로 갔다. 이 기념관은 증축공사가 끝나서 말끔히 단장되어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기념관 1층에 있는 역사관은 중국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 장개석 기념관 ▲장개석 좌상
중정기념관의 관람을 끝내고 다음에는 대만의 종교문화에 접해보기 위해서 시내에 자리 잡고 있는 용산사라는 절을 방문했다. 간간이 내리는 가랑비 속에서도 경내를 가득 메운 참배객들은 그들의 교유한 참배 방식에 따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시내탐방을 하면서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건물 1층의 길에 접한 부분은 비가 올 때 행인들이 비를 맞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건물 안의 부분을 길로 사용하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건물의 공간에는 나무를 심고 화초로 단장하여 공간을 최대한으로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타이페이의 관광거리인 화시지에(華西街)야시장으로 가서 다양한 음식문화에 접해보았다. 발마사지 거리에서 발마사지로 여독을 푼 다음, 저녁식사는 타이페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딩타이펑’ 만두집을 찾아갔다. 가보니 듣던 그대로 많은 사람들이 번호표를 가지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특유의 만두를 맛보면서 저녁식사를 했다.
숙소로 돌아올 때에도 전철을 이용했다. 이곳의 전철은 무인 전철의 노선도 있었으며, 전철역의 규모도 크고 시설도 첨단시설로 갖추어져 있었다. 대만의 발전상이 전철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 타이페이의 ‘팅타이풍’의 원조 식당
고궁박물관과 원산대반점
둘째 날에도 바쁜 일정이 이어졌다. 둘째 날의 첫 행선지는 유명한 ‘고궁박물관’이다. 이곳은 장개석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이곳에 올 때 추종자들이 가족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이곳으로 이동했다는 중국 역사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감탄을 발하면서 중국의 역사가 담겨있는 유물들을 관람하고 나와서 박물관 옆에 있는 전통적인 중국식 정원인 즈산위안(至善園)에 들러서 중국의 전통문화를 음미해 보았다.
▲ 타이페이 원산대반점(호텔) ▲ 호텔 식당
점심식사는 대만에서 유명한 호텔인 원산대반점에 있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산 중턱에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호텔의 모습은 육중함이 있었고, 식당의 분위기에서도 중국문화의 정취가 물씬 풍겨났다. 여행을 세심하게 기획한 윤희에게 고마운 생각이 더해졌다.
양명산의 벚꽃과 베이토우의 노천온천
오후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대만에서 아름다운 산으로 알려져 있는 타이페이 교외에 있는 양명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는 길에는 대만벗꽃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산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특히 폭포가 있는 계곡의 절경은 양명산의 진가를 더해주었다.
양명산의 아름다움에 취해있는 동안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시간이 모자라서 애초의 계획에 들어있는 양명산의 노천온천 계획은 아쉬움을 안으면서 시내에 있는 '베이토우(北投)'노천온천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우리는 서둘러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서 다시 전철로 바꾸어 타고 시내의 노천온천 지역인 베이토우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후 셔틀버스를 타고 노천온천이 있는 베이토우로 갔다.
▲ 타이페이 양명산
시린 야시장
저녁시간의 노천온천,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서틀버스의 막차를 타고 다시 시내 중심가로 들어왔다. 바쁜 여정, 하루의 일정이 끝나가니까 시장 끼가 찾아왔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시린(士林)야시장을 찾아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야시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중국의 음식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다. 시장거리에 설치되어있는 식탁에 앉아서 새로 접해보는 메뉴를 선택해서 저녁식사를 했다.
▲ 타이페이 ‘시린’ 야시장 ▲ 타이페이 옥시장
타이페이 옥시장과 야류 해양지질공원
셋째날은 타이페이 북쪽 교외에 있는 해양지질공원‘야류(野柳)’로 가기 위해 좀 일찍 서둘러서 숙소를 나섰다. 야류에 가기 전에 먼저 타이페이의 옥(玉)시장으로 갔다.
이곳의 옥 시장은 평상시에는 도로로 사용되는 고가도로 아래를 일요일에만 옥 시장을 개설하여 관광거리로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국토 활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옥시장의 방문을 끝내고 주변의 공원에서 잠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 야류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야류에 도착해서 해변으로 나가는 길에 어촌의 어느 식당에 들려 중국식 메뉴를 보면서 어렵게 점심 주문을 했다.
지질해양공원을 관람하기 시작할 때 비가 다시 내렸다. 바닷가이기 때문에 바람이 세찼다. 해류와 해풍에 침식되어 만들어진 갖가지 형상을 한 수많은 기암(奇巖)들이 빗속에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우산도 소용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빗줄기가 견딜 수 있을 정도여서 탐방의 일정을 계획대로 마쳤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시간이었다. 타이페이로 돌아와서는 또 다른 식당거리를 찾아가서 대만의 음식문화를 다양하게 접해보았다.
▲ 타이페이 야류 지질해양공원
타이페이의 아침거리
타이페이에서 넷째 날이다. 오늘은 떠나는 날이어서 이곳의 새벽거리를 탐방해보기로 했다. 윤희와 함께 새벽공기를 마시며 숙소부근의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거리의 포장마차 간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아침 풍경과는 달랐다. 그리고 타이페이의 시가지 특징 중의 하나는 도심지에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공원이 많았다. 공원에 들리니 사람들이 아침운동으로 특유한 중국체조를 하면서 건강증진을 하고 있었다.
사림관저(士林官邸)
귀국하는 비행기 시간이 오후이기 때문에 오전에는 장개석 사저(私邸)였던 사림관저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사저의 규모와 내부의 구성이 대단했다. 비록 대륙에서 실패는 했지만 그래도 한동안 대륙을 지배했던 장개석의 거대한 스케일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해 주면서 동시에 대륙을 향한 꿈을 되새기게 하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 속에 공원을 잔뜩 메운 온갖 꽃들은 흘러간 옛 권력자의 영욕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 사림관저 오솔길 ▲ 사림관저 숲
사림관저 탐방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서 짐을 가지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동안 가족의 정을 새삼 느끼면서 가족이 모두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번 여행을 세심하게 준비해준 윤희가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대만에 대한 연민의 정
이번 여행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대만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또 배울 점이 많은 곳임을 느꼈다. 어려움에도 의연하게 살아가는 자신 있는 모습들, 발전을 향한 끝없는 열의, 국토의 효율적 활용, 남을 배려하는 마음 등 지나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대만을 방문하면서 내내 가슴에 와 닿는 안타까운 느낌은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의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곳을 왜 정치적 소외지역으로 만들어가면서 이들을 어렵게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계속적인 발전을 기원하면서 아쉬움을 안은 채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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