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패기넘치는 사진가들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 차세대 사진가로 자리매김할 수있도록 한 달에 한 명의 작가를 초대하여 갤러리 브레송에서 기획전을 열고 있습니다.
최현주의 감칠맛나는 글과 더불어 <사진 바깥에서 사진읽기>라는 제명으로 월간 사진예술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별 채비- 이수철 <Architectural Photography>
글. 최 현주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15년 동안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 및 제작팀장을 거쳐 현재 Freelance copywriter로 활동 중. 공저 <워딩의 법칙>(2005년) 및 <두 장의 사진>(2008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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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사진작가는 아니고 에세이작가.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나서 현재 런던에 살고 있는 이 작가는 아주 ‘보통’스러운 대상들을 전혀 ‘보통’스럽지 않게 바라보고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매우 철학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그의 문장은 지적이면서도 재기로 가득 차 있으되 결코 호들갑스럽지는 않다. 그의 책들은 발표되는 것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하고 곧장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널리 널리 읽힌다. 그의 책에는 에드워드 호퍼나 보들레르, 플로베르, 러스킨 같은 예술가들과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세네카, 몽테뉴 같은 철학자들이 종종 등장하고 문학과 철학, 미술, 건축 등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일상과 삶의 감정들에 대해, 연애와 여행에 대해 그만의 독특한 사유를 들려준다. 보통스러운 것들을 보통스럽지 않게 철학하는 자, 그의 이름은 알랭 드 보통이다.
이수철 작가의 ‘Architectural photography’를 보면서 문득 연상된 건 『행복의 건축 the Architecture of Happiness』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알랭 드 보통의 최근 에세이다. 그는 말한다.‘어떤 공간과 어떤 희망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집, 혹은 건축물은 기능이나 미학적 관심을 훌쩍 뛰어넘어 심리와 연결되어 있다. ‘집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이자 연애가 시작될 때 관여하고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병원에서 도착하는 것을 지켜본 ‘식견을 갖춘 증인’이라고 말하는 이 특별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건축물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틀림없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유럽의 길거리 어디에서나 부딪힐 수 있는 이제 막 사십 줄에 접어든 평범하기 그지없는 중년남성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우리의 ‘보통 씨’가 건축물과 이토록 긴밀히 소통하게 된 이유는 뭘까? 슬쩍 관심이 당기는 분들을 위해 잠깐 소개해보기로 한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어느 날 점심 약속을 한 친구에게 바람을 맞은 우리의 보통 씨. 비를 피하고 혼자 점심을 때우기 위해 맥도널드 햄버거의 웨스트민스터 지점이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강렬한 조명과 냉동 프라이가 기름통에 가라앉는 소리, 카운터 직원들의 다급한 행동들 속에서 ‘무작위적이고 폭력적인 우주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외로움과 무의미’를 떠올리고 있는 참 예사롭지 않는 보통 씨다. 그때 핀란드에서 여행을 온 서른 명쯤이나 되는 십대 청소년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집과 학교로부터 멀리 떨어진 여행지의 십대 무리답게 산만하고 수다스럽고 요란하고 게걸스러운 식욕을 선보임으로써, 일순간에 일상의 철학자인 보통 씨의 주변을 소란스럽게 했던가 보다. 보통 씨는 재빨리 식당을 빠져나와 옆 광장의 웨스트민스터 성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가 쏟아지고 소음이 난무하는 바깥세계와는 달리 경외와 정적과 성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찬 예배당 안. 그곳에서는 ‘독특한 종류의 친밀감이 거리의 익명성을 삼켜버리고 인간 본성의 진지한 모든 면을 표면으로 불러낸 것 같았다’. 성당에 들어선지 10분이 지나자 (천주교도나 기독교인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 듯한) 보통 씨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고 갈릴리 바다 위를 걸었다는 것 그리고 천사가 당장이라도 황금 나팔을 불며 라틴어로 천상의 사건을 예언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고 했다. '불과 40미터 떨어진 곳에서 핀란드 십대들 무리와 튀김 기름통 사이에서 들었다면 미친 소리로 들렸을 개념들이 지고의 의미와 장엄을 얻게’된 것이라고, 그것이 오직 건축물 하나 때문이라고.
그렇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건축물에 힘과 열정과 노력과 모든 두뇌를 동원해오는 것을 멈추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건축물이 다른 수단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더 즉각적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어떤 개념에 지고의 의미와 장엄을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웨스트민스턴 사원을 짓거나 콜로세움을 짓거나 만리장성을 쌓거나 수원 화성을 쌓는 일은 성당이나 극장이나 성곽이라는 기능적인 이름으로는 결코 분류될 수 없는 그 어떤 동기와 아우라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무굴제국의 샤자한이 세계 각국의 진귀한 보석과 건축가들을 불러 모아 아름다움의 총체로 만들어낸 타지마할도, 공연 중인 오페라 그 이상의 예술작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도, 7천여 명의 직원들을 한곳에서 근무시키기 위해 만든 70년대 세계 최고층 빌딩 시어스 타워도, 21세기 감탄과 경이의 대표작으로 너무나 자자하게 소문난 버즈두바이 빌딩도 저마다 그 시대를 대변하는 목청 높은 웅변인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 유명의 건축물과 함께 모든 무명의 건축물들도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는 사실이다. 물론 웅변보다는 한층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 자그마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일 때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르 꼬르뷔제나 장 누벨, 국내의 김수근 선생처럼 유명한 건축가들의 뒤를 잇는 많은 현대 건축가들이 당대를 대표할만한 대단한 건축물들도 아닌 일반인의 집, 동네의 교회, 자그마한 상점건물 등과 소근소근 정겨운 대화를 나눔으로써 건축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주고 일상의 공간을 보다 살만한 곳으로 바꿔주고 있다. 최근에는 더 많은 작가들이 건축물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건축이 아닌 다른 매체를 이용하고 있는 작가들조차 말이다. 그 중 사진가들이 가장 활발히 건축물과 소통하는 작가군이다. 재개발지역의 낡은 아파트, 오래된 골목의 판잣집, 나무 그림자가 늘어선 서민아파트, 폐허가 된 공장이나 학교 등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사진가들이 앞 다투어 찍는 매우 빈번한 소재들이다. 그들은 그 건축물들에서 추억이라든가 시대의식이라든가 하는 공통된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저마다 다른 특별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들었음이 틀림없다.
사진 속의 건축물들에 대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2000년대 이후 건축물들은 배경이 아니라 당당히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포르투갈 마프라 수도원 대성당을 찍은 독일 작가 칸디다 회퍼나 빽빽한 아파트 사진을 평면적으로 이어붙인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처럼 건축물과 건축물이 이르는 공간은 예전 사진가들의 작품 속에서처럼 인물을 동반하거나 다른 요소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 홀로 정면을 마주하고 있다. 소위 유형학적 사진이라고 불리는 이들 사진은 늘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이수철 작가의 사진은 건축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주관적이고 심리적이다. ‘Architectural photography’라는 매우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타이틀과는 대조적으로.
이수철 작가는 이 작업에서 철근이나 철근 콘크리트로 된 건축물들에 천착한다. 물론 이 건축물들은 세인들의 시선을 집중받는 건축 작품이거나 새로 지은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되어 버려졌거나 재개발로 철거될 처지에 놓인 불쌍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철근 콘크리트의 원래 수명에 견주어 보면 심하게 낡거나 비참하게 허물어진 것들도 아니다. 단지 개발이나 경제적 이득이라는 명목 하에 제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쓰러질 운명에 처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수철 작가의 피사체가 된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처연하다. 처연하고 슬프지만 애이불비(愛易不非)이다. 그들이 무언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못해 지금 처지에 대한 하소연이라도 들려주길 기다리며 그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건 웬걸? 억울함에 대한 토로는커녕 가녀린 한숨이나 흐느낌조차 들리지 않는다. 자포자기의 목소리조차 없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묵언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처럼 고요하고 묵묵하다. 어쩌면 이미 넋을 놓아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떠나고 건물로서의 제 기능을 잃은 탓일까. 그들은 아직 쓰러지지 않고 하나의 공간을 차지하며 다른 건물과 건물들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지만 마치 이 세상에 없는 자들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작가가 밝힌 것처럼‘해가 진 뒤 빛의 잔광만으로 촬영을 하고 사진의 구조를 방해하는 디테일은 제거하고 리터칭을 통해 색을 입히는 미화작업’을 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작업을 ‘나는 내 앞에 쓰러진 병사처럼 힘없이 흉물로 서있는 건축에게 사진적 사실과 조작된 이미지로 영정사진의 그것처럼 꾸미고 색칠을 하고 위로하며 사라짐을 기다린다’고 썼다. ‘영정사진처럼’이라니!
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 도심의 거리나 후미진 골목을 지나다보면 불현듯 생각나는 작가가 있게 될 것이다. 에세이작가나 문학작가가 아니라 이번엔 사진작가. 지금은 살아있으되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곧 이 세상을 떠날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찍듯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곧 사라질 때가 임박한 건물들을 영정사진처럼 찍는 작가. 찍은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불러내고 마치 염(殮)을 하듯 조심조심 불필요한 디테일을 제거하고 정성스럽게 옷을 입히는 작가. 그가 행하고 있는 것은 한 시절 당당히 존재하던 건축물, 아니 존재하고 대화를 나누고 서로 소통했던 어떤 자들에 대한 이별 채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별 채비에는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서로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대화이므로.
만난 적은 없지만 왠지 지극히 보통일 것 같은, 혹은 전혀 보통스럽지 않을 것 같은 이 사진작가는 내게 하나의 의문을 던져주었다. 사람들이 단 한 번도 달의 뒷면을 보지 못한 것처럼, 건축이란 행위의 뒷면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건축이라는 단어가 건물을 새로 지어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면, 건축물이란 그 행위의 결과로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건물’을 말하는 것 일텐데, 그렇다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도 없는 그 건물의 존재 상태는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