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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회개 /용서 설 교 일: 2008年 11月 23日
본 문: 눅 15:17-24 설교구분: 주일예배
회개와 용서
복음성가 312장(1,2,3절)
성경봉독
은혜 받으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5장 17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성가대 찬양
<자막 : 찬양 예루살렘성가대 ‘오 신실하신 주’ 지휘 신동렬>
봄철과 또 여름 가을과 겨울
해와 달 별들도 다 주의 것
만물이 하나로 드러낸 증거
신실한 주 사랑 나타나네
내 죄를 사하여 안위하시고
주 친히 오셔서 인도하네
오늘의 힘되고 내일의 소망
주만이 만복을 내리시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 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아멘
등단 후 멘트
여러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좌우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찬송가 325장(1절, 3절)
1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3 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 소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설교말씀
오늘 저는 ‘회개와 용서.’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실까요? ‘회개와 용서.’
사람의 일생은 만남의 일생입니다. 태어나서 부모님과 만나고, 자라면서 형제와 이웃과 만나고, 장성하여서 배우자를 만나고 또 배우자를 만나서 자녀가 생겨나면 새로운 만남이 시작됩니다. 이 만남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큰 문제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우리가 발견합니다. 또 부모를 잘못 만나서 버림받은 인생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떠한 만남이 되었든지 간에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만남 가운데 가장 귀한 만남이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 전에 어떤 절망의 삶을 살았든, 슬픔과 고통의 삶을 살았든, 이게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 운명이 바뀌어져서 우리는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가슴을 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복 받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이와 같은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시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일생동안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늘 자신을 지키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영적으로 강건하게 하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1. 참 회개의 모습 The scene of true repentance
첫째로 참 회개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15잘 17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일생동안 싸워야 되는 것이 내가 가진 죄의 속성입니다. 죄와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우리의 옛 사람이 우리를 죄로 이끌어갑니다. 사도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서 로마서에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로 20절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가 예수 믿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데 때때로 육에 속한 옛사람이 이끌려서 ‘그러면 안 되는데……’ 고개를 저으면서도 죄에 이끌려서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죄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여러분이 잘 아는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탕자는 늘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와서 자기에게 물려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말을 합니다. 유산이라는 것은 아버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후에야 아버님이 남기신 유언장에 의해서 상속이 나뉘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을 아직 아버지가 정정한데 아들이 와서 내게 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세요, 내게 주세요. 얼마나 떼를 썼는지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재산을 내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미리 떼어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보세요. 누가복음 15장 12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는 그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 품을 떠나서 멀리 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맘대로 살았습니다. 허랑방탕하며 살았습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며 돈을 막 뿌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절망 자체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짓고 타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다음 에덴동산을 예비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거하게 하시면서 다스리고 번성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복을 차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 죄가 그 삶 가운데 들어와서 결국 그들은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인 죄악 세상에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 때 다가온 것은, 영혼의 죽음과 환경의 저주와 육신의 질병과 사망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운명이 되어 버리고 말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죄의 굴레를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죄의 형벌에서 자유함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영혼의 죽음과 환경의 저주와 육신의 질병과 사망, 삼중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에 우리는 주님께 주님 앞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가장 비참한 모습이 된 다음에야 그때야 비로소 깨닫고 회개를 합니다.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나님 품을 떠나면 절망 가운데 굶주려 죽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17절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무엇이냐. 헬라 원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180도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동으로 가던 사람이 서로 가는 것처럼 지옥을 향해 가던 사람이 돌이켜 천국을 향해 가게 되는 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참 회개는 그렇게 하지 말걸 하고 뉘우치면서도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이켜서 그 죄의 자리를 떠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내 중심으로 살던 삶이 그리스도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첫 번째 메시지가 바로 회개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할렐루야. 주님이 오늘날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잘못된 죄의 습성에서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삶의 모습에서 잘못된 성격의 노예에서 우리는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의 짐보다 더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짐이 죄의 짐인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돌이켜 주님께 돌아왔나이다. 주님 내가 새 삶을 살기 원합니다. 내 손을 붙잡고 내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조지 뮬러 목사님의 이와 같은 기도문이 있습니다. 제목은 ‘나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날 죽었다. 나에 대하여 죽었고, 나의 의견에 대하여 죽었고, 나의 선택에 대하여 죽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죽었고, 나의 의지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의 칭찬과 책망에 대하여 죽었고, 심지어 친구와 형제들에 대하여도 죽었다. 나는 오직 하나님께 대하여만 살아있다.”
할렐루야.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 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월 14일 추운 겨울, 그레함 리 목사님 선교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에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이 대표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보통 한 분이 일어나서 대표로 기도하는데 그 날은 한 삼,사십 명이 일어났어요. “그럼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이 폭포와 같이 바람과 같이 불같이 또 폭포와 같은 은혜로 임함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막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통성기도의 시작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기도의 원형이 통성기도입니다.
누구는 그래요, 왜 순복음 교회에 오면 소리를 지르냐고, 하나님이 귀가 먹었느냐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을 때 응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기적이 임하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소리 질러 기도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저들이 소리 질러 통곡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참 기도하고 난 후에 갑자기 그 교회 대표되는 장로님인 길선주 장로님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앞에 회개합니다. 일 년 전에 내 친구가 죽으면서 재산을 나에게 맡기고 가족을 잘 돌봐 달라고 말했는데 내가 그 중에 돈 일부를 착복해서 내가 편한 대로 썼습니다. 내가 내일 아침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장로님의 충격적인 고백 앞에 모두가 은혜를 받고 한사람 두 사람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닥을 치며 눈물로 통곡하던 기도가 새벽 2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지 않으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밤잠을 설치고, 기록에 찾아보니까 새벽 4시쯤 벌써 다시 교회로 와서 마당에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저들이 또 기도가 시작되어서 이것이 한국의 새벽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새벽기도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통성기도도 새벽기도도 평양의 대 부흥 운동으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우리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이 통성기도의 영성을 가지고 새벽기도의 영성을 가지고 철야기도의 영성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을 참으로 우리는 감사드려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회개하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우리가 새롭게 변화를 받아서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The love and forgiveness of the father
둘째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실까요?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사랑의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 날부터 매일 같이 문밖에 나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찬송가 317장 2절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할렐루야. “밤마다 문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짓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우리들이 돌아오기만을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 사랑의 품에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가장 비참해진 모습으로 얼굴도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게 될 정도로 비참하게 되어 거지꼴을 하고 힘없이 비틀거리며 돌아오고 있는데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겼다, 불쌍히 여겼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자식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는데도 돌아온 것이 너무 귀해서 너무 감사해서 그를 품에 안고 사랑하는 아들을 용서하며 입을 맞췄던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을 다 용서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밉게 본 것이 아니라 불쌍하게 보았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단번에 용서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바디매오가 예수님한테 예수님에게 불쌍히 보임을 받았을 때 그 눈이 뜨게 되었습니다. 외아들 하나만 의지하고 살던 나인 성 과부가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슬피 울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불쌍히 보셨을 때 그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값싼 동정을 구하지 말고 우리 주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는 병들고 지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버림받았습니다. 내 마음에 이 고통과 괴로움, 상처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할렐루야.
며칠 전에 우리 교회 성도님 한 분이 교통사고가 나서 여의도 성모 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거기 웬 성도님이 저를 알아보고 ‘아, 목사님, 목사님, 제 딸을 좀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그 분이 인도하는 곳에 가보니까 무균실 있는 쪽으로 가는데 그 따님이 백혈병으로 3년째 고생 하고 있어요. 얼굴이 바짝 막 마르고 뼈에 가죽만 붙었는데 얼마나 불쌍한지 ‘하나님 아버지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 어머니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3년이 어떤 3년이었겠습니까? 하루가 천년같이 긴 나날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어머니는 그 딸의 옆을 지키면서 눈물로 주님께 호소합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섭게 야단만 치시고 용서하지 않으시는 그런 무서운 분이 아니십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그 사람을 품에 안으시고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미국에 유명한 ‘노란 리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1972년도에 ABC TV방송국을 통해서도 이이야기가 소개 된 적이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로 향하는 버스 안에 한 사나이가 몸을 움츠리고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뉴욕 교도소에서 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는데 마음에 불안과 초조함이 있었습니다. 과연 죄짓고 감옥에까지 갔다 왔던 나를 내 아내가 용서해 줄 것인가, 나를 받아줄 것인가.
그래서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 아내에게 편지를 씁니다. ‘사랑하는 아내여! 당신에게 실망만 안겨준 나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 부족한 나를 맞아줄 의향이 있다면 집 앞에 있는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길게 하나 매달아 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노란 리본 하나가 걸려 있으면 나는 정거장에서 내려 당신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나를 받아 주지 못하겠다면 노란리본을 걸지 마시지 바랍니다. 당신이 노란 리본을 걸지 않아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내 맘은 크게 아플 것이지만은 나는 그 정거장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가슴 졸이며 그 버스를 타고 내려갑니다.
긴 버스 여정 속에 옆에 있는 사람이 물어봅니다. ‘당신 어디로 가는 길이요?’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연이 버스에 있던 모든 승객들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점점 그 집이 있는 동네를 향해 버스가 가까이 가고 있었을 때 모든 승객들이 마음을 졸였습니다. 과연 노란 리본이 걸려있을 것인가 안 걸려 있을 것인가. 드디어 버스가 마을 입구에 들어갑니다. 차마 이 분은 눈을 들어 볼 수가 없어서, 앞에 있는 운전하시는 기사 양반에게, 기사 선생님 저를 대신해서 좀 저 앞에 동네 입구의 큰 집에 서있는 앞에 서있는 떡갈나무를 좀 봐주세요, 거기 노란 리본이 없는지 좀 봐주고 저에게 말해주세요.
그래서 버스가 동네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온 승객들이 ‘와!’하고 소리 지르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보니 떡갈나무에 리본이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 수백 개의 리본이 다 가지가지마다 달려있고 그리고 그 집에는 지붕을 온통 노란 천으로 덮어 놨어요. 혹시 못 보고 지나칠까봐!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을 용서하며 가지가지마다 노란 리본을 다 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노래가 그 유명한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다세요’라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 맨 끝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난 믿을 수가 없네요. 내 눈앞에 고향 떡갈나무에 수백 개의 노란 리본이 매여 있다니! 모든 승객들이 기뻐하면서 환호성을 올렸답니다!’
그래서 이후에 미국에서 노란 리본은 집을 떠난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의 상징이 되었고, 흥미롭게도 미국 육군에 갈보리 부대가 있는데 이 갈보리 부대의 공식 칼라가 노란 색이고 노란 리본을 휘장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란에서 1979년 미국 대사관을 점령해서 52명의 인질을 444일 동안 감금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긴긴 세월동안 가족들이 기다리면서 집 앞에 문 앞에 노란 리본을 달기 시작했고 노란 리본을 다는 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을 기억을 합니다.
이 노란 리본은 바로 우리에게선 예수님의 십자가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노란 리본과 같이 우릴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용서와 사랑의 상징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잃고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아이를 찾은 어머니에게 물어보십시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을 때 그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제 자식을 찾았으니 자식에 대한 모든 염려와 고통은 다 지나갔습니다. 나는 가장 행복한 엄마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저 때문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셨습니까?’ 그럼 주님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니다. 사랑하는 너를 결국 찾게 되었으니 나는 가장 기쁘고 행복하단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나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품을 떠나 멀리 멀리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여러 번이나 주님의 마음을 상처 입히고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그 놀라운 사랑에 그 놀라운 은혜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늘 주님 앞에 감사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 이렇게 복 받고 삽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또 주님이 사랑해주셨어요. 죄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길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혼자 열 받아서 화를 내고 소리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다 용서하셨어요. 용서하셨어요. 할렐루야. 용서의 사랑에 우리 감사하십시다.
3. 용서부재의 삶 A life that has no forgiveness
세 번째로 저는 용서부재의 삶에 대해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탕자의 이야기가 둘째 아들이 돌아오면서 잘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또 다른 탕자가 있어요. 밖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맏아들이 집안이 소란해진 것을 보고 질문을 합니다. 15장 26절, 27절에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는 동생이 돌아와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나 안 들어갈거야!’ 그래서 그 종이 들어가서 주인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아버지가 달려 나왔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8절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들어가자, 왜 그러니?’ 그러니까 이 아들이 큰아들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15장 29절로 30절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는요, 동생을 용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좋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도 늘 아버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그 아버지를 염소새끼 하나 주지 않는 아버지로 생각을 했어요. 인색한 아버지로 생각을 했습니다.
때때로 한국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유교적인 사상의 영향으로 늘 엄하고 야단치고 꾸짖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독생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좋으신 하나님을 이 좋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이 맏아들은 아버지가 엄격하고 인색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분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그가 대들고 항의 한 것입니다.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지 말게 되기를 바랍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올바른 자화상을 다시금 회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도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 동생도 용서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동생을 동생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15장 30절을 보면요,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런데 영어성경에 보면요, ‘당신의 아들이 돌아오니까 이렇게 잡았다’ 그랬어요. 자기 동생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이라 불렀어요. 자기 동생이 회개하고 돌아왔는데 모든 잘못을 아버지와 동생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돌아왔는데 당신이 용서해주었다고. 맏아들처럼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일에 앞장서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됩니다. 사랑으로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맏아들처럼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어요. 늘 남을 판단하고 정죄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서 가족 찬송 경연대회를 합니다. 그런데 한 집사님이 나와서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가지고 얼른 자리에 돌아와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차례로 목사님 가정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가정에서 찬송을 부르는데 부르다가 목사님이 중간에 가사를 또 틀렸어요. 성도들이 와 하고 웃었습니다. 목사님의 사모님과 아이들이 목사님을 쳐다봤습니다. ‘아이 아빠 창피하게 왜 틀려’ 하고 쳐다본 것 같아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지셔서 천국에 가시게 되었어요. 장례를 마치고 목사님 유품을 정리하는데 일기장이 나왔습니다. 거기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7월 14일, 교회 가족찬송 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안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이 일기를 읽으며 모든 장로님들이 통곡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용서를 갖고 살고 있느냐? 요만한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고 그것을 짓밟고 확대시켜서 남을 정죄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남의 수치를 가려주고 품고 용서해줄 수 있는 그리고 자기 수치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마음입니다. 남의 허물을 보고 즐거워하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들춰내는 마음을 우리 주님이 슬퍼하십니다. 그것은 불행한 마음입니다. 남의 허물을 안 보려고 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모습이요 용서의 모습입니다.
용서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와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는 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를 체험해야 되고 우리 이웃을 용서하며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치 못하는 자신을 우리는 용서해야 될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 입힌 이웃을 용서하고 나아가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그 마음속에 있는 상처에서 놓여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 상에서의 용서와 사랑이 온 인류 구원의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남은 인생 살아갈 때 용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들이 용서하지 못한 것, 늘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 것 주님 용서하여 주시고, 오늘 이후로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주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품고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돼야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희들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그러한 모습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것을 지적하고 짓밟고 들춰내고 확대시켰던 저희들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무조건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아무것도 따지신 것도 없고 들춰내신 적이 없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 저희 마음 가운데, 저희들 마음 가운데 용서의 은혜가 강물처럼 흘러서 일생을 다하도록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