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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총
소설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고려대문인회 회장, 문학동우회 회장,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인협회 소설분과 회장,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외 다수
승부사勝負師
불갈비집에서 소주 한 병을 까놓고 서로 마주앉았을 때 구형의 표정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덜그덕거리는 여닫이문이 열릴 때마다 연기 자욱한 그의 어깨 너머 어둠 속에서는 흰 눈발이 희끗거렸다.
“구형, 이거 참 면목 없어요”
잔을 건넸더니 그는 말없이 술을 따라 받고는 단숨에 마셔 버렸다.
“모두 떠났겠지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예, 문은 제가 걸고 나왔습니다”
“이제부턴 구형이라 부르겠어요. 동갑내기니까 호형하는 게 좋겠죠?”
그도 빠안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허하게 웃고는 남은 술잔을 비웠다.
“커어, 술맛이 좋군, 역시 난 운이 없는 놈인가 봐요”
출판사는 그날로 문을 닫았다. 유일한 생명줄이었던 검인정 수학교과서가 대폭 개정된다는 기미가 보였을 때 인간 대백과를 기획한 것까진 좋았으나 나중에 난데없는 덤핑판이 찍혀 나오는 통에 회사는 거덜나 버렸다.
“우리 구형이야 유능한 영업부장이었지요. 문제는 인간적인 덕도 모자라는 내가 사장이랍시고 꺼떡거리니까 회사가 될 턱이 있나요”
갈비 굽는 연기 때문에 눈이 매운지 그는 눈 등을 서너 번 문질렀다. 밀린 봉급도 청산하고 짤막한 폐사 선언을 하고 나자 사원들은 묵묵히 밖으로 몰려 나갔다.
내일부터 다른 일자리를 찾을 것이고, 출판사는 서울에 얼마든지 있을테지만 그동안의 정으로 봐서 약간은 서운해 해 할 것을 바랐는데,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나고 있었다. 나는 꽤나 울적해지는 마음을 달래면서, 맥을 놓고 옆에 앉아 있던 구형에게 넌지시 말해 두었다.
“건너편 골목 불갈비집에 있겠소”
바깥은 추웠다. 오후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즈음에는 눈발이 흩날리기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영업부장 구형만 보내면 내 일은 다 끝나도록 돼있었다. 그런 후엔 마치 다시 갈아 넣을 필요가 없어진 사무실의 연탄난로처럼 써늘한 쇄락감이 덮쳐올 것이 분명한 일이었지만.
“앞으로 어쩌시겠어요. 시장님?”
“어허 구형, 이제 사장 소린 집어칩시다. 회사도 없는 사장 봤소? 우린 앞으로 호형하기로 했잖소. 난 말이지……”
내가 너무 일방적인 것 같아서 문득 말미를 끊었다. 게다가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인연도 일단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호형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미안해요. 결국 구형은 내가 먼저 묻고 싶은 말을 하는군요. 어쨌든 난 내일 새벽차로 낙향할 겁니다. 거지같은 책 만드느라고 파먹을 땅도 몽땅 날려 버렸지만, 어쨌든 우선 할 일이 생각날 때까진 집에 가서 머릴 좀 식혀야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내가 구형에게 그런 말을 꺼낼 때까지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구상의 경황은 전연 없었던 것이다. 정작 무턱대고 그렇게 말하고 보니 또 그럴 수밖에도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구형은 이제 좋은 주인 만나서 실력을 맘껏 발휘하십시오. 꼭 성공할 겁니다”
나는 그가 말하기 전에 나름대로 그런 권고를 해대고 있었다. 그건 진심이었는데, 내가 그토록 비감해 한 것도 구형과는 인간적으로 훨씬 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을 새로 사는 거지요. 뭘”
구형도 자신 없는 위로를 서로에게 하는 것 같았다.
“오늘밤 이별주나 실컷 마셔요”
“가만 계세요. 언제 떠나시겠다고 그랬죠?”
“내일 새벽에요”
“그럼 시간이 없는데”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디 다른 약속이라도?”
“아뇨. 특별히 내가 사장님을 모실 데가 있어서요. 술은 이제 그만합시다. 괜찮겠어요?”
그는 먼저 자리를 털고 일이섰다. 긴장된 몸짓이었다. 한길로 나서자 그는 재빨리 택시를 잡았다. 그는 안으로 나를 먼저 밀어 넣었다.
“미아리 쪽으로 바툰 길로 달립시다”
운전사에게 말하고는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그때까지 멍청한 채로 끌려가고 있는 셈이었다.
“차암 사장님도, 회사가 문 닫는 판에 사원들 봉급을 주다뇨”
나무라는 투였다.
“당연히 줘야 할 것 아뇨. 석 달 밀린 것도 미안했는데, 이거 어디로 가는 거요?”
“사실 운수 없는 사람은 접니다. 내가 몸담는 회사는 꼭 망하거든요. 죽일 놈이죠. 난 이때까지 회사를 그만둘 때마다 오늘처럼 봉급 받고 떠나보긴 처음인 걸요”
그처럼 말하는 데는 되레 내가 위로해야 할 입장이 돼 버렸다. 어떤 심정으로 그런 얘길 꺼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어떤 대꾸라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는 꼿꼿이 앉아 앞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라이터를 켜서 그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자 담뱃불이나 붙이시오. 그런데 날 어디로 납치하는 거죠?”
그는 연기를 빨고 나서 말했다.
“근사한 뎁니다. 그러나 미리 부탁해 둘 게 있군요.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침착하게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선 사장님 호칭도 빼게 되겠습니다만”
“점점 미로로만 빨려드는군”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긴 걸요”
그는 모처럼 농담을 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실컷 술이나 마셨으면 좋겠다는 것이었고, 구형의 태도로 봐서도 계집애들이 있는 이상한 술자리로 이끄는 것 같아 나는 더 이상 캐묻질 않았다.
차는 벌써 미아리 고개를 넘고 있었다.
내가 구형을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이었다. 영업부장감을 물색하고 있을 때 그의 이력서가 누구의 부탁을 받는 따위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 내 손에 배달되었다. 마침 다른 마땅한 사람도 없었고 그를 만나보니 그런대로 인상이 마음에 들어 전격적으로 영업부 일을 맡겨버린 터였다.
어쩌면 우리가 인연 지어진 일은 그렇게 희한하기도 하고, 보편적이기도 하고 우연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사정이었다. 다만 그때 내가 약간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건 사람의 속마음을 전연 꿰뚫어 볼 수 없는 그의 인상 때문이 아니라 그의 호적 서류에 나타난 조금은 야릇한 가족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성姓이 세 번 바뀌어 있었다. 처음에는 박朴씨였다
가 두 번째는 조趙씨였고 지금은 구具씨로 돼 있었다. 아버지가 세 번 바뀌었다는 얘긴데 나로선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런 모호성은 내가 말하는 그 야릇하다는 점과, 심정을 도저히 뚫어볼 수 없다는 것에 상관관계라도 있을 법한 얘기지만 아뭏든 그가 전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류를 보냈기 때문에 되레 내가 의혹을 깔아뭉개어야 될 처지였다.
그가 나타났을 때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이건 어찌된 거죠?”
“그렇게 됐어요”
구형은 멋 적게 웃다가 너무 짧게 대꾸했으므로 나는 더 캐묻지 못하고 지나쳐야 했었다. 다만 내 나름대로 석연찮을 것 같은 그의 지난 이십 구년 성상에 대한 호기심이 물씬 일었긴 했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에는 비밀인 채일 수밖에 없었다.
구형에겐 또 다른 하나의 이상한 사건이 있었다. 그가 입사 한 달쯤 됐을 때, 내가 같은 출판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앉아 섯다판을 벌이다가 거금을 날린 적이 있었다. 심심풀이로 시작한 것치고는 50만원이나 깨진건 그 결과가 너무 엄청났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내일 중으로 그 돈이 복구되지 않으면 부도를 낼 판국이었다.
얼마 동안 멍청히 앉아 가슴 아파하다가 결국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구형은 즈음에 회사에 붙은 방에 임시로 기식하고 있었다.
“몽땅 잃는 한이 있어도 본전 찾기 작전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됐어요”
내가 힘없이 말하자 구형은 혀를 끌끌 찼다.
“원 사장님두 어쩌다 그런 델 걸러들였어요. 거기 사람들 모두 프론가요?”
“아마추언데 한 친구가 수상해요...”
“…… 곧 가죠”
그는 얼마를 잃었느냐고도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에 구형은 금고 안의 나머지 돈 50만원을 털어 가지고 와서 꺼내 놓았다. 밤 열한 시 반이었다.
“내일 은행 것 막을 게 백만입니다. 잘해 보세요. 이젠 딸 겁니다”
흥분한 나에 비해서 구형은 아주 침착했다.
구형은 내 뒤에 앉아 우리들의 노름을 조용히 관전하고 있었다. 그런 구형에게 우리 꾼들의 누구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두어 시간 더 놀았을 즈음에 나는 돈을 사정없이 잃어가서 겨우 5, 6
만 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1백만 원이란 거금이 한 푼도 수중에 남지 않고 바닥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쩜 그렇게도 운이 안 붙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벌써 3백을 긁어모으고 있는 장사장에게 번번이 턱밑에서 밟히곤 했었다. 그가 도박을 잘한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판판이 내 윗자리 땅을 잡아서날 깔아뭉개어대는지 환장할 일이었다. 잠자코 있던 구형이 가만히 내 어깨를 민 것은 그때였다.
“사장님, 제가 대신 한번 앉아 볼까요?”
나는 탈진해 있었으므로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구형이라고 별 수 있으랴마는 잃은 돈 걱정 때문에 제대로 패조차 안 보일 바에야 그래 보는 것도 옳을 듯싶었다.
나는 물러나고 구형이 대신 들어가 앉았다. 나 외의 세 사람은 구형이 샛 군으로 끼어드는 데에 하등의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는데, 장사장은 틀렸다.
“그건 곤란한데?”
“이러지 말어. 잃은 놈 대신이야”
“애초 약속하곤 틀리잖아?”
“글쎄, 마찬가지라니까!”
바싹 약이 올라 있던 내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자 장사장도 구형의 틈입을 마다하지 못했다. 다만 장사장의 태도가 갑자기 신경질이 되고 초조해진 것은 별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벽 네 시쯤 해서는 판돈 5백만 원 거의가 구형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순간들이 꿈이 아니기를 빌고 있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비로소 내가 소생의 눈을 뜨게 되자 이 신비한 사나이를 눈여겨 볼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동안 말 한 마디 꺼내지 않고 흔들림 없이 다만 꼿꼿이 앉아 그가 할 일만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되레 내가 흥분해서 몇 마디를 지껄였지만 구형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제껏 내가 장사장에게 쉬임없이 밟히던 그대로 마지막 남은 장사장을 짓이겨대고 있었다.
“끝난 것 같죠”
얼마 뒤에 구형이 말했다.
“제엔장! 더럽게도 세게 당했어!”
파랗게 질린 장사장이 손을 털고 물러나며 투덜거렸다. 진작 거덜나서 얼굴색이 하얗게 된 채 맥을 놓고 앉아 있던 다른 세 사람은 멍한 눈으로 구형의 행운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구형은 돈을 세고 있었다. 나는 구형이 판 돈 처리에 대해 간섭할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관계하지도 않았다. 그의 태도가 그 점을 용서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으며, 깊은 살기가 깔린 노름판의 마무리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건 개평입니다”
구형은 네 사람의 본래 몫에서 십만원씩만을 빼놓고는 그들에게 거침없이 던져 줘 버렸다. 몹시들 놀라는 눈치였다.
“자, 사장님 갑시다. 속이 출출한데 청진동에 가서 해장국이나 들죠”
나오면서, 구형이 몽땅 내게 건네 준 백 40만 원에 대해 처리하는 고민을 겪어야 했다. 결국 궁리한 끝에 40만 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구부장,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건 구부장이 써야죠”
“아뇨 아뇨. 전 한 푼도 거기 손댈 수 없습니다. 용케도 본전을 찾았으니 다행이었지 뭡니까. 제 재수가 아니라 모두 사장님의 운이었지요”
“하지만……”
“걱정 마시래두요. 다만 담부턴 그런 속임수 판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속임수판이라구요?”
“장사장이란 그 사람 보통 아닌 것 같습디다”
“어쩐지! 한데, 그를 눌러 버린 구부장은 더 상수인 모양인데요?”
“아니죠. 전 아까 사장님 뒤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그걸 발견했죠. 그것만 눈치 채고 있으면 돈을 잃을 것 같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의 속임수를 역이용해 본 것뿐이죠”
“그랬던가요”
그 일 이후로 나는 구형에 대해 묘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설사 그로 인해 내가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그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결코 노름꾼이 아니고, 때문에 사장의 운수로써 거둬들인 돈이기에 그로서는 한 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공범의식共犯意識의 회피.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감정이 다져진 것은 한사코 그에 대한 실제의 의혹이 나로 하여금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거금을 쉽사리 돌려 줄 수 있는 용기는 실력에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믿는데도 구형은 그 점을 거부 했었다. 전화를 걸었을 때 잃은 돈의 액수를 묻지 않은 점. 모인 자들의 성분을 먼저 물은 점. 얄미울 정도로 태연자약했던 점. 그 이후로도 그는 그날 밤의 사건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고, 심심풀이 노름조차 하지 않는 것이 나를 혼란에 빠뜨리면서 결국 구형에 대한 의혹의 그림자로 남게 하였다. 쉽게 말해서 그날의 도박이 실력이었던가 우연이었던가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의도적으로 함정을 만들어 그 비밀을 캐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던 것이다.
회사에서도 일이 뜸한 기간의 오후에는 사원들끼리 섯다판을 벌이곤 한다. 어느 날 구형도 한가했던지 그들의 놀이를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피라미 도박꾼들이기에 구형은 끼어들지 않고 있다는 내 판단이었다. 그의 철저한 위장과 대도박사로서의 과묵이건 내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에 비웃음까지 유발시키고 있었다.
“구부장도 어디 한판 끼어 보시지요?”
내가 말했을 때 구형은 희죽이 웃어 보였다.
“밑천은 내가 댄다니까”
“뭘요. 잃을 게 뻔한데요”
“괜찮아요. 봉급에서 제하진 않겠소”
나는 주머니에서 만 원을 꺼내 주었다. 그는 송구스러워 하며 꾼들 사이로 비적비적 끼어들고 있었다.
내가 밖으로 나갔다가 두어 시간 후에 귀사했을 때까지 판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의아한 것은 구형은 밀려나서 아까처럼 어깨 너머로 멀거니 구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정작 그가 그때까지 판돈을 싹 쓸어서 벌써 모두들 이끌고 대폿집에라도 갔기를 바랐었다.
“구부장. 왜 그러고 있소?”
“허어. 깨졌어요. 역시 뭐랍디까”
“일부러 풀어 준 건 아뇨?”
“당할 수가 없는 걸요”
그의 표정은 사실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나는 지난날 거금을 쓸어 넣고 있을 때의 분위기와 연관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하나도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다.
또 어떤 날 오후에는 단도직입적으로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어때요, 구부장? 전에 그치들이 도전해 왔는데 오늘 한탕 안 뛰겠소?”
그랬더니 구형은 아주 언짢은 얼굴이 되어 강하게 대꾸했던 것이다.
“혼자 가시죠. 그런 건 좋지 않아요. 도박해서 부자 된 사람 보셨어요?”
그러는 동안 나는 이미 그와의 끈질긴 싸움에서 패배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내가 노렸던 그의 도박하는 현장 발견은 더욱 무모한 노력임을 알게 했다. 그는 철저하게 담벽을 쌓고 나의 기대를 무시한 채 도박에 관한 한 전연 그와 무관한 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었다.
그의 생활은 기막히게도 겸손했고 정확했으며 회사 일에 충성을 다했을 뿐이었다.
내가 구형에게서 그따위 비밀을 캐내는 데 집념을 기울인 것은 단순한 호기심도 취미도 아니었다. 전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을 것 같은 신비성과 성실한 그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혹은 불행히도 그가 정작 전문적인 도박사가 아니기를 바란 마음도 있었다. 아무려나 나는 구형이 노름꾼이 아니라는 걸로 결론내리고 있었다. 그를 의심할만한 내용도 그의 위장술도 애매모호한 것이었긴 하지만. 택시는 가로등도 없는 골목 앞에서 멈춰 섰다.
“내리시죠”
눈발은 제법 송이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빈 창고 같은 깜깜한 건물 앞에 오자 그는 멈췄다. 손등으로 크게 세번 작게 한 번 연거푸 신호를 보냈다. 도깨비나 살고 있을 법한 건물안으로 부터 기척이 났다.
“누구야?”
걸걸한 저음이었다.
“발바리”
구형의 대답이었다. 잠시 후에 다시 연락이 왔다.
“통수는?”
“다섯 개, 괜찮지?”
“혼잔가?”
“조수가 하나 딸렸어”
벽이 없어지듯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나는 영문을 몰라 구형을 붙잡고 속삭였다.
“뭣하는 곳이요?”
“가만, 아까 약속대로만 해줘요”
공연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흐린 백열등이 켜진 복도를 지나자 넓은 정원이 나왔다. 그 치우친 왼쪽에 외딴 단층 양옥집이 있고, 그 집 현관에 달린 외등에서는 눈발이 부나비처럼 엉키고 있었다. 우리는 주욱 안내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섰을 때 세 사람의 놀이꾼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그들은 화투짝을 놓고 있었다.
그중에 얼굴을 알만한 사내가 가까이 앉으라고 턱으로 지시했다. 구형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김형은 저기서 술이나 드시죠”
나는 엉거주춤 홈바 쪽으로 갔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놀이꾼들을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머리가 벗겨진 영양 좋게 생긴 사내와 왼쪽 볼때기가 깨져서 인상이 험악한 사내, 그리고 알만한 얼굴이란 영화에 조연급으로 곧잘 나오는 배우였다.
그들은 새로이 끼어든 구형에게 번거로운 인사 따위를 나누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사이가 구면인지 어쩐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비록 구형의 이해할 수 없는 꼭두각시놀음에 이용되고 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구형에 관한 수수께끼의 껍질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겠다는 예감 때문에 얼마간 안심은 되었다.
그가 정작 대도박사인가 아닌가를 확인한다는 건 나로선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우리가 헤어지는 마당에 와서 그토록 기피하던 자신의 본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기에 그의 비밀을 이해하게 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나는 조금 전에 못다 채운 알콜 기운을 충족시키고, 아직 정리하지 못한 걱정들을 음미하며 무료를 달랠 계산을 하고 있었다.
구형은 내 앞에서 등을 보인 채 역시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들이 질펀하게 둘러 앉아 놀고 있는 도박의 종류를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의 기계적인 움직임은 잔잔한 동작으로 진행되면서도 거기는 분명히 뜨거운 열기가 있었다. 그들은 다만 거금의 판돈을 건 프로급 도박사로서의 매너는 지켜야 했기 때문에 조용했을 뿐이었다.
미리 말해 둘 것은 내가 구형의 비밀을 얼만큼 들여다본다고 해서 이제 와서 속 시원함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도박사 대부분의 말로처럼 그 비극들이 구형이 느낌으로 보여준 것 같은, 같은 종류의 종말로 결론지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아픔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형에 대한 기껏 나의 바램이란 흔히 얘기 속에서나 나오는 허구 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닌 인물일 것을 원했다. 가령 편집부의 떠벌이 차군이 도박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주워대는 레파토리 중의 하나처럼.
…일본 제일의 도박사 이께다 겐쬬와 중국 대륙의 챔피언 왕츠웅이 조선반도 한양 모처에서 세계 도박 타이틀전을 붙었다. 이 말씀이야, 벅적지근하게 팡파레가 울리고 미녀들이 꽃을 옷깃에 끼워 주고, 아니 이건 공갈인데, 아무튼 조용히 둘만 앉았어, 화투 스무 장을 손에 쥐고 사흘밤 사흘 낮 동안을 겨루는데, 시시하게 돈 놓고 돈 먹기가 아니라 국가적 명예와 개인적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어. 심판 6승 승부였는데 씨이팔,
실력이 막상막하였다 보니 결국 5대 5가 돼 버렸지 뭐야. 마지막 단판 승부, 이건 도박사史에 영원히 기록될 일전이었지 뭐냐. 아, 살벌했어.
마침 청일전쟁이 한창이었을 때가 때이니만큼 감정이 좋을 리 없었어. 따악 단검 하나씩을 꺼내 다다미 위에다 꽂아 놓고 속임수를 쓰는 경우에 무작정 푸욱 찌르도록 약속했었대. 왕이 화투를 갈라놓았어. 그때 이께다의 눈은 빛났다. 왜냐, 분명 다른 화투 한 장이 왕의 손아귀에 슬쩍 날아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야. 이께다는 대놓고 왕의 손등에다 칼을 꽂았어. 앗, 왜 이래? 사기쳤어. 자신있나? 물론, 그럼 승부는 이것으로 다. 조와소다. 칼을 뽑아라. 그러지.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왕의 손바
닥엔 분명 있어야 할 화투짝은 없고 흥건한 핏물 가운데 화투짝 넓이만한 사각형 공간이 있더라 이거야. 어디로 날렸지? 날리긴, 이께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렀어. 왕은 이겼다고 소리치고.
한참 만에 이께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항복을 선언했어. 고오상 고오상. 하오하오. 왕은 기분이 좋아서 먼지 방을 나갔지. 그담에 어떻게된 줄 아나. 겐쬬군은 너무너무 억울해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더라 이거야. 그런데 그때 문득 이께다의 눈에 띈, 아뿔싸! 다시 빛나는 이께다의 눈, 천정에는 아까 왕이 날린 사슴 뒷다리가 보이는 핏물 머금은 화투 한 장이 불이 있더라 그 말씀이야.
“그게 거기 왜 붙었지?”
얘기가 그쯤에 가서는 모두가 차군의 말발에 끌려들었을 때였다.
“손바닥을 뒤집는 순간에 날았어. 내공內功의 힘이지”
“그럴싸한데”
“장풍掌風과 사무라이의 대결이었어”
“웃기네”
“헤헤헤”
나도 그랬지만 그럴 땐 구형 역시 바보 같은 얼굴이 되어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이었다. 차군의 허풍이 끝나고 제각기 정신을 차리며, 한바탕 폭소를 터뜨린 후에도 구형은 혼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결국 그 때문에 내가 구형의 얼굴에서 뭔가 숨겨진 비밀을 찾기 위한 노력의 시작을 했던 바였지만.
한 시간은 족히 흘렀다.
“서!”
문득 소요기 일었다. 번쩍 빛났다고 생각된 순간, 구형의 손목에는 비수가 번개처럼 빠져나와 있었다. 구형은 영양 좋은 사내의 이마빼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 불그스름하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만 봐도 그 사내가 속임수를 쓰다 들킨 범인임을 알 수 있었다.
“넣어 버려”
인상파가 뇌까렸다.
“안 돼, 쇼부 친 담에”
배우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
“새끼손가락 한 개만 잘라라”
인상파가 힘 있게 다그쳤다. 내 등줄기엔 공포의 오한이 뱀처럼 기어 갔다. 구형의 칼끝에서 나를 향한 살기를 느꼈다.
속임수를 썼던 사내나 다른 두 사람이나 조수, 뒤에 안 일이지만 돈줄이나 대는 스폰서인 나까지 오랫동안 구형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를 다 초조하게 기다렸다. 구형의 도박판에서의 위치인지, 속임수를 발견한 자의 권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순간의 구형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 같았다. 제각기 한마디씩 지껄이면서도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에, 구형은 천천히 비수를 거둬들였다. 그런 후 무릎을 세우면서 말했다.
“손님 덕분에 넌 살았다. 난 더러워서 먼저 뜬다”
그들은 구형의 도중하차에 아무 항의를 하지 않았다.
나는 구형의 눈짓을 받고 곧장 뒤따라 나갔다. 어둔 골목에 깔린 눈은 벌써 발목 위를 덮고 있었다.
구형의 권유로 그날 밤 우리가 비밀 요정에 도착한 것은 시간이 꽤 이슥했을 때였다. 모처럼, 그리고 우리들의 이별을 얼만큼은 극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그날 밤만큼은 날을 지새우며 퍼마시기로 했던 것이다. 얼마간 취할 때까지 우리는 서로가 느끼는 아픔 때문에 별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저년들 거의 죽었군”
새벽 네 시까지 같이 노닥거려 주느라고 애쓰던 작부 둘이 지쳐 쓰러진 걸 보고 구형은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토옹 취기가 안 오르는데요?”
내가 말했다.
“그렇네요. 인생이 이렇게 맨숭맨숭해서야 되겠어요”
그렇게 대꾸하는 구형은 사실 벌써 취해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구형에 대한 미진했던 수수께끼를 한사코 풀어 보겠다는 비열한 악마의 속성을 떠올렸다, 라기 보다 그가 여유를 주는 이런 기회를 내가 묵살한다는 건 실례일 것 같았다. 나는 다만 그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 할 수 없는 게 안타까웠고, 날이 샌다는 사실이 그지없이 초조했던 것이다. 결국 무턱대고 돌진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오늘 유달리 구형이 다른 때보다 달라 보이는구려”
“제가요? 그럴 리가, 다만…… 좀 슬프네요”
“구형 말씀처럼 이런 경우엔 인생이란 다 그런 게 아니겠어요”
“사장님은 제 말의 정곡을 못 찌르시는군, 우리 회사가 망한 건 바로 제 덕분이란 말입니다”
“무슨 취한 소리!”
“안 믿으시네. 내가 든 단체는 흩어졌고, 내가 스며든 회사는 하나같이 망했습니다”
얘기가 엉뚱한 데로 흐르는 것 같았다.
“괜한 생각이오. 우연이었겠죠”
“우연? 그것치곤 너무 심한걸. 내가 직장을 다닌 곳이 벌써 열네 번째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징크스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박운은 있는 것 같던데요?”
구형은 술잔을 든 채 나를 빠안히 들여다보았다. 질문의 진의라도 캐는 것처럼.
“궁금하신 모양이죠? 전 열두 살부터 도박했으니까 당연한 도박꾼이죠. 도가 틔어 버렸죠. 상대가 어떤 패를 가져도 난 이미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놈입니다. 만져 보고서야 패를 감지한다는 건 도박사로서는 이미 하질下質이죠. 난 그냥 꿰뚫어 봅니다. 초능력, 그 텔레파시를 가진 놈입니다. 신기할 건 없죠. 일천만 명 중에 하나 정도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집안은 틀려요. 그 더러운 피는…”
구형은 비감해져서 메인 목을 술로 축였다. 그런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할아버진 유명한 도박사였습니다. 제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죠. 모르긴 해도 저 역시 아직 날 이겨내는 승부사를 이 땅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 줄 압니까. 가계家系는 풍비박산이고, 재산도 없고, 삼대 가계는 각각의 성姓씨를 가졌습니다. 난 진짜로 박朴갑니다. 하지만 지금은 구具갑니다. 어떻게 된 줄 아셔요? 세상에 독불장군 없고, 승부사는 언젠가 자기보다 센 도박사를 만납니다. 아니, 자기보다 센 사람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게 도박사의 심리죠. 어느 날 그분은 홀연히 떠났죠. 심심해서지요. 기어코 주인을 만났지요. 만주에서 동경에서 상하이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주인을 이 땅에서 찾고 말았어요. 몽땅 잃고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됐죠.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어떤 충격으로 해서 패를 보는 텔레파시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깜깜해지는 거죠. 문제는 자존심 손상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거죠. 아무튼 제 할머니와 아버지는 재산 속에 덤으로 끼어 넘어갔죠. 조가에게요. 이런 건 도박사회의 불문입니다. 아버지는 조씨 성으로 장가들고 절 낳았습니다.
조금 컸을 때 난 그런 사실을 알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에 못지않은 승부사였어요. 피는 못 속이죠. 어느 날 아버지도 승부에서 패해 어머니와 저를 구씨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구씨 아버진 나중에 칼 맞아 죽고, 어머니는 어디론가 개가해 가고, 난 구씨로 떨어진 거죠. 양자 입적 형식입니다. 어떻게 성씨를 다시 찾을 수 없나요? 내겐 도박사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내가 본래의 성씨를 찾을 수만 있다면 비록 운명적 일지라도 난 도박에서 손을 털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성씨는 찾을 수가
없더군요. 나는 어느새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껴가고 있었어요. 본래의 족보도 찾을 수가 없고, 도박 외의 어떤 일도 실패하는 걸 알자 나는 주어진 내 운명에 순종해야 할 의무를 느꼈어요. 그 순간이 언제인 줄 아십니까. 바로 어제 사장님이 폐사 선언을 했을 때입니다”
나는 구형의 말에 숙연해져서 아무 얘기도 꺼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공포감까지 섬뜩하게 가지면서 그 이상한 사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구형은 한참 만에 나직하게 웃으며 날 위로 하는 것처럼 얘기했다.
“제가 깨우친 철학 하나 얘기할까요. 금전이란 마치 훌륭한 말이 존경하는 주인이 아니면 등에 태우지 않는 것처럼, 위대한 승부사에게가 아니면, 잔인하게 외면합니다. 돈의 생명력 때문입니다. 금전은 물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 그 자체거든요”
“알쏭달쏭한 얘긴데요”
나는 허겁지겁 되물었다.
“언젠가는 깨달으실 겁니다. 아마 사장님이 사업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믿으시는 날에. 아무려나 승운 따위도 믿지 마시고, 금전을 학대하지도 마십시요. 황금은 사장님 같은 분을 향해 서슴없이 달려오고 있으니까요”
나는 더욱 애매해져서 뭐라고 구형에게 거푸 묻고 싶었는데, 그는 이미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것들아, 빨랑 일어나 날 샜어”
구형에게 느닷없이 엉덩이를 얻어맞은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놀라 깨었다. 옆의 계집애도 덩달아 부스스 일어났다.
“이번 눈은 아주 끝장을 낼 모양이죠”
구형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새벽 열차는 텅텅 비어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플랫폼 위로 진눈깨비가 미친 듯이 날아 떨어졌다. 전송객 하나 없는 홈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차는 목쉰 소리로 꽤액꽤액 서너 번 울었다.
누군가 진눈깨비 속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섰다가 급히 이쪽 칸으로 뛰어 올랐다.
“아니, 구형이 웬일이오?”
나는 무턱대고 반가워서 소리쳤다.
“전송 나왔죠”
그는 눈을 털 생각도 않고 속호주머니에서 신문지 꾸러미를 하나 꺼냈다.
“전해드릴 게 있었는데 깜박 잊었더랬습니다”
“뭡니까”
“어제 저녁에 턴 거죠. 대강 6, 7백은 될 겁니다. 더럽다 생각 마시고 받으세요. 몇 푼 안 되지만 제기하시는 덴 도움이 될 겁니다. 이것을, 함께 살아있는 구부장으로 생각해 주세요. 차가 떠나네요. 자 건투를 빕니다”
너무도 급작스런 일이고 구형조사 속사포처럼 혼자 말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고思考의 판단을 내릴 경황이 전연 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뒷모습은 이미 객차 안에서는 볼 수 없었다. 기차는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차창 문을 열었다. 빌어먹을 덧창문은 나의 다급함에 아랑곳없이 고장이 나서 굳게 닫혀 있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진눈깨비는 여전히 억수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사이로 구형은 흰 이빨을 빛내 보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결코 앞으로 그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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