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군악대 (내용을 정리하신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1945년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을 하면서 전쟁은 종전이 되고 일제의 압박에서 나라 없는
설움을 겪던 우리민족은 해방의 감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미국이 남한에 주둔하여 미 군정청을
설치하고 군정청령 28조에 의거 1945.11.13 국방 사령부 설치령이 선포되어 군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경향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1946.1.15 경기도 양주군 태릉(현재의 노원구 공릉동)에서
남조선 국방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되었으며 군인들의 훈련과정에서 군악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당시 연대장
채병덕 참령의 지시로 군악대 창설에 착수하였다.
연대에 근무하는 미군 브라운 대위의 주선과 협조로 군악대 창설에 관한 기본 계획을 수립하여 군악대
창설에 본격적으로 임하였다. 초대 군악대장으로는 배재 중학교와 연희 전무학교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며
밴드부장을 지낸 김계원 참위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장교로 임관하여 1946.2.15 보직되었으며, 연대 내에서
기악경험자들을 모집하였다. 부족한 대원은 당시 1930년 해체된 황실 악대 대원들이 각자 학교를 중심으로
후학을 양성하며 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양성된 인재들을 모집하여 약 25명의 대원을 선발하고
1946.3.8 군악대를 창설하였다. (이날은 2000년부터 군악병과의 날로 정하여 병과인의 단합과 무형 전력
창출 및 병과 발전을 모색하는 뜻 깊은 날로 제정하였다.) 악기는 삼공악기사 및 경성 관현악단에서 일부
조달하였으며 심지어는 개인 소장자에게도 협조하여 구매하였다. 창설 초기 수자폰은 국내에서 구입이
불가능하여 미 극동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민족청년단 이범석 장군에게 기증한 것을 수원까지 내려가서
민족청년단 악대에서 어렵게 구입하였다.
1948년 11월에는 명동 시공관에서 한, 미 합동 군악대 연주회를 미8군 40명과 한국군 40명으로 편성하여
개최하며 우호증진에 이바지하는 등 해방이후 음악발전 및 군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50.6.25 사변 시에는 부산영도로 후퇴하였다가 동년 10월 국군의 북진시 평양, 원산, 함흥, 청진 등
수복지구의 입성 시 시민 위안 연주를 실시했으며 특히 평양에서는 90인조 대편성으로 시가행진을 했으며
일주일간 평양 시민 위안 연주를 실시했다. 이 당시 공연에 참가한 사람은 가수로서 백설희, 백일희, 이해연,
심연옥, 신카나리아 등이었다.
전쟁 중에 군악대의 활동은 활발하였으며 불안에 떨던 국민에게 믿음을 주고 장병들에게 사기앙양과 전의를
고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쟁기간 중에 육군의 각 사단에 군악대가 창설되어 많은 활동을 했다.
1949.5.1 군악대원을 양성하고 국가에서 자격을 인정하는 사회 중견음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운영되던 육군 군악학교가 1955.2.20 폐지되어 대규모의 자원 확보 및 체계적인 교육으로 대원을 교육,
양성하는 업무가 중단되었다. 특히 군악학교 교관 및 학생들을 모체로 결성되었던 육군 교향악단은
전쟁중에도 이 나라의 음악인들의 뜻을 같이 하여 전란의 공포와 불안에 빠져있던 국민에게 큰 위안을 주는
활동을 하였다. 육군 교향악단의 객원지휘자인 임원식, 단원인 이재옥, 임춘옥, 전봉초 등은 후에 우리나라
순수음악계에서 훌륭한 공적을 쌓으며 음악계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군악학교출신인 김강섭,김인배등도
후일 가요작곡가로서 연주자로서 국내의 대중음악을 이끌어온 중견인물이 되었다.
또한 1946.3.8 조선 경비대 군악대 창설 이후 53년 6.25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무려 34개 부대의 군악대가
창설 개편되어 운영되었으며 이는 전쟁에서 군악대의 역할과 중요성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장에서의
심리안정과 전의 고취를 위해서는 군악대가 무형전력 창출과 정신전력 극대화에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967. 7.1 주월 한국군 사령부 군악대가 창설되어 사이공에서 대민지원 행사 및 사령부 내에서의 모든 행사를
수행했으며 내외 귀빈의 입국 환영, 환송 행사를 수행했으며 파병된 장병들에게 위안 연주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1973.2.18 주월 한국군 철수계획에 따라 철수하여 귀국 후 3군 사령부 군악대 창설 계획에
의거 창설 요원이 되었으며 주월 한국군 건설지원단(비둘기 부대) 군악대는 73. 3. 15 철군 계획에 의거 수원
공군기지를 통하여 입국 하였으며 육일명 제13호 (73.2.22)에 의거 입국일자로부터 특수전 사령부 군악대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1968. 9.21 당시 육군 참모 총장이며 초대 군악대장을 역임한 김계원 대장의 관심과 배려로 국방부
일반명령 44호에 의거 전통음악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을 위하여 육군 국악대가 창설되었다.
국악대는 외국 귀빈 초청 시 환영 의장 행사 및 사라져가는 전통문화 복원에 앞장섰으며 2003년에는 영국의
Military Tattoo에 출연하였다. 국악대 창설은 일제에 의한 문화말살 정책으로 사라져간 우리의 것을 복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국립 국악원의 단원들이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취타대를 재현하여 시범행진을 실시하는등
각고의 노력 끝에 창설하였으며 당시에는 장교 1명, 사병 64명으로 편성하였으나 현재는 그 규모가 많이 축소
되었다.
국악대의 창설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김덕수와 같은 인물들이 군 생활
중에도 기량을 연마하는 기회로 삼아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사물놀이의 대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국악분야 종사자들이 국악대를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70년대에는 후방작전, 향토방위의 개념으로 후방지역 사단에 잠정적으로 운용되던 군악대가 정식 편제,
인가되어 대거 창설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수도권 지역 5개 동원사단이 향토사단으로 증, 개편 군악대를
창설하여 활동하고 있다.
육군 군악대는 초창기 조선 경비대 1연대 군악대로 첫발을 내디딘 이후 육군본부군악대,육군사관학교군악대,
수도방위사령부군악대등을 비롯하여 전군 50여개의 군악대가 장병들의 사기 앙양과 정서 순화를 위하여 또는
민, 관, 군이 하나 되는 친선의 대사로서 국가의 권위와 위엄의 표상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정부 수립
행사 및 올림픽과 엑스포,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등 국제적인 행사 수행으로 국위 선양에 일익을 담당하며
2000년에는 동적이고 활발한 군악대 운용 및 지원요소 창출을 위하여 Marching을 도입하여 경연대회를 개최
하는 등 다양한 군악지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관악음악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 시가행진하는 육군군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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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군악대중 입대시험을 치르는 군악대는 국방부 군악대, 육본, 육사, 수방사, 특전사, 행정교, 3사관교,
군수사, 52사단, 56사단, 57사단 군악대 등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