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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맑은 물 흐르는 곳 (나들목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들풀처럼
영성형성의 변형적 이미지를 통해서 본 기독교교육적 변형의 과제 |
양금희 교수 (장신대 기독교교육과)
--------------------------------------------------------------------------------------------- I. 들어가는 말 철학자 가다머(H.J.Gadamer)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를 “변화(Veränderung)”와 “변형(Verwandlung)”으로 구별하여 설명한 바 있다. 변화가 내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고 외적인 조건들의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변형이란 단순한 외형의 변화를 넘어서서 내적 본질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개념에 비추어 보았을 때 기독교교육은 내적 본질을 변화시킴으로서 전체를 변화시키는 “변형”을 추구하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행동주의교육학의 정의 즉 “교육이란 인간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행위”라는 개념 안에는 교육이 인간의 행동, 즉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고 하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은 학습자 내부의 변화에 보다는 외적 기술과 기능의 습득, 행동의 수정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같은 변화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기독교교육은 인간의 중심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바로 세움으로서 그를 통해서 외적인 것을 통전적으로 변화하게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교육은 행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학습자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바로 세우는 교육이고, 지속적인 그와의 관계 안에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엡4:13)을 추구하는 교육으로, 단순히 외적 행위를 변화시키는 교육과는 구별되는 본질을 변형시키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J.Loder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교육적 변형은 초월적 실재인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격을 재중심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기독교교육의 본질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사역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성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고 기록하고 있다. 성서의 창조기사는 하나님이 흙이라는 물질로부터 본질이 다른 인간을 만들었고, 더 나아가 생기를 인간의 코에 불어 넣음으로서 살아 있는 영적 존재로 변형시킨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성서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로 구별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영성의 형성(spiritual formaiton)”이 인간을 “변형(transformation)”시키는 일과 불가분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써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 변형시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시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변형의 방법이 “영성 형성”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영성 형성은 변형을 추구하는 기독교 교육의 핵심적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본고는 영성수련의 역사에 나타난 변형적 이미지들을 고찰해보고, 이것이 기독교교육의 변형 개념형성에 갖는 함의를 살펴보며,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교육의 변형개념형성의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II. 영성사에 나타난 변형적 이미지 많은 영성가들에게서 영성형성 혹은 영성 수련은 ‘변형’과 밀접한 관계 안에서 이해되고 있다. J.M.Dettoni는 영성형성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존재의 핵을 전혀 다른 존재로 변형(transformed)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변형은 단순한 외모적 변화(change)가 아니라 한 존재에서 다른 새로운 존재로 변형(metamorphosis)되게 하는 행위라고 하였다. 그는 영성형성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를(고후3:18, 롬8:29) 이룸으로서 우리 안에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인데, 그와 같은 과정은 단순한 변화로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존재의 변형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유해룡도 영성 수련의 문제는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행위의 문제이기 보다는 어떻게 존재하느냐하는 존재의 문제라고 하였다. 그는 내적인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기술과 기능을 습득하였더라도, 정화되지 않은 자아로 인하여 그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영성수련은 따라서 근본적인 존재의 변형을 통하여 부적합한 애착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바른 행위를 위한 보다 근본적 에너지를 공급받게 함으로 적절한 행위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기능훈련이기보다는 “존재훈련”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영성의 형성이란 존재의 변형과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존재변형의 과제를 영성적 접근은 어떠한 통로 안에서 구체화시키고 있는가? 이 물음을 위해서 우리는 영성수련의 전통 안에 나타나있는 수많은 영성수련의 형태들을 유형화할 필요가 있는데, 유해룡이 제시하는 대표적 세 가지 모델, 즉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모델(imitation of Christ)", '순례자의 모델(pilgrimage or spiritual journey)', 그리고 '상승모델(사다리모델, an ascent to union with God)'을 취하여서, 각각의 모델 안에 예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변형의 이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모델(imitaito Christi) 이 모델은 영성사의 전통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모델 가운데로 하나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 형상의 온전한 표상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실제적 삶과 내면적 자아형성을 추구한 모델이다. 이 모델의 대표적 영성가로 아씨시의 성프란시스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의 모습, 즉 가난과 무력함, 자기를 비움과 같은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실존적 삶 속에서 재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는 영성적 삶을 사는 것에 주력하였다. 실지로 그는 자신의 손에 십자가의 성흔(stigmata)를 체험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절정을 이루었다. 토마스 아켐피스와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그리스도의 명상’을 통하여 예수와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특별히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이라는 그의 조직적 영성수련 지침서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생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단계적으로 명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련자의 내면의 삶을 그리스도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모델 안에 들어있는 핵심적 이미지는 "모방", 혹은 “닮기”이다. ‘imitatio(모방)’라는 라틴어 단어는 명사인 ‘imago(이미지, 형상)'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어원적으로 생각해 보면 imitatio는 imago을 이루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방은 형상 즉 이미지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모델이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재현하고, 명상과 관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는 것은 그러한 모방이 궁극적으로 수련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방의 이미지는 성서에서도 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였고(마4:19, 9:9),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진 것과 같은 십자가를 지고 따라올 것을 명하였다(마16:24, 막8:34, 눅14:27). 그는 또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고 하였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를 따르는 것이고, 그를 따르는 것은 그가 삶으로 보여준 ‘본’을 닮아(모방하며) 사는 길이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새로운 구조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울은 스스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즉 모방하는 삶을 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본이 되어야 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imitator)이지만, 동시에 다른 본받는 자들에게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형상(image)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imitatio(모방)의 삶은 동시에 형상(image)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를 모방하는 모방자로서의 삶이면서 동시에 예수의 형상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imitatio는 단순히 미래에 완성될 imago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imago를 현재에 선취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imitator로서의 삶은 따라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도상의 삶이면서, 동시에 순간순간 ‘형상’이 되는 지속성과 순간성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을 추구하였던 영성수련가들이 지속적인 수련과정에서 끊임없이 imitator로서의 삶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매 순간 예수의 삶을 재현하였던 것은, 그와 같은 지속성과 순간성을 통합되는 삶의 모범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방과 형상의 이미지 안에 나타나는 변형의 이미지는 순간순간 그리스도의 삶의 재현을 통한 그와의 일치와,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향하는 지속적 변화의 개념을 역설적으로 통합하는 변형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범례적으로 제시해 주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2) 순례자 모델(pilgrimage model) "순례자 모델"은 "영적 여정(spiritual journey)“ 모델이라고도 불리우는 모델로 영성형성의 과정을 자아를 향한 내적 여행의 과정, 순례의 과정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모델은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델인데,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최종적 종착지인 ‘신의 도성’에 이르기까지의 나그네의 길로 묘사하였다. 그는 이 나그네 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는 인간의 도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의 도성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자연적으로는 모두 인간의 도성에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영적으로 태어나면 하나님 도성의 시민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신의 도성의 시민들로서 육적이고 유한한 이 세상의 삶과 욕망들을 극복하고 신앙으로 궁극적인 종착지인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영적 순례의 이미지는 영성사에서 중요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 중 17세기 존번연의 ⌜천로역정⌟은 신의 도성에로 향하는 여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온갖 내면적 투쟁을 극복해 가는 투쟁의 과정을 영상화시킨 대표적 경건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순례자 모델 안에 들어 있는 이미지는 “여행(journey)"의 이미지이다. 이 여행의 이미지는 성경 안에서도 수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Crouse에 의하면 낙원에서 내쫒긴 인류 조상 아담의 삶이나,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 아비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떠나는 삶,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삶 뿐 만 아니라, 세례요한의 광야에서의 삶과, 성령에 의하여 광야로 이끌린 예수님의 이야기, 그리고 바울의 전도여행에 이르기까지 성서 전반에 걸쳐 하나님 백성들의 이야기 안에는 여행의 모티브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여행의 개념은 ‘순례자의 모델’을 추구하는 영성가들에게서 실제적인 여행으로서가 아니라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 "내면에로의 여행(interior journey)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실제적 여행이 갖는 일련의 이미지군들이 유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행이란 ‘집(home)’과는 반대의 이미지를 갖는 단어로 익숙한 곳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곳, 미지의 세계에로 떠나는 일이다. 익숙한 것에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경험,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여행이듯, 영성수련은 영적인 세계 안으로 길을 떠나는 행위이다. 여행의 개념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형의 이미지는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현재의 안녕과 일상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에로 자신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행이 기대와 동시에 회피에의 감정을 동시에 갖게 하듯이 변형이란 언제나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회피하고픈 요소이다. 그러나 과감히 그 여행에 자신을 던질 때 새로운 경험과 만남을 통한 변형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행이란 또한 최종적으로 집에 돌아옴으로써만 끝나는 일이다. 영혼의 안식처, 즉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정착할 수 없는 길이다. 여행의 도상에 있는 여행자는 객(alien)의 위치이고, 집이 아니라 낯선 곳에 머무는(dwelling) 신분이다. 도상에서 어떤 곳에 머물게 되더라고 그곳에 정착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다시금 떠날 것을 준비하고 짐을 쌀 것을 준비하는 것이 여행이다. 이것은 변형의 지속성을 말하여 주는 이미지로, 영적 여행을 통한 변형의 길은 종착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never ending) 지속되는 과정이라고 하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 여행은 새로운 경험과의 만남임과 동시에 종착역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목표점을 향해 가는 시도이다. 그 과정은 순례자의 삶과 같이 구체적인 싸움과 갈등이 있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는 과정이다. 따라서 여행에 나타난 변형의 이미지 안에는 자아 안의 갈등과 싸움들, 극복을 위한 노력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형의 이미지는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극적 변화의 이미지이기 보다는 자아와 현실에 대한 적극적 인식과 능동적 해석, 의지적 싸움과 극복을 위한 노력을 통한 변화의 개념들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변형은 현실과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는 안목과 그에 대한 바른 해석을 요청하며, 더 나아가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극복의 노력들이 전제될 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여정을 내면에로의 여행이라고 하였을 때, 이것은 이미 “의식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Th.F.Martin은 어거스틴의 순례개념은 영적이고, 내면적이면서 동시에 "지적(intelligere)" 활동과 관련된다고 하였다. 현실에서 자아가 경험하게 되는 것들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과 관련한 자아와의 관계를 해석하며, 자신의 옛자아와 욕심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싸우는 과정 그것이 내적 여행의 개념이 ‘변형’에 시사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이 갖는 변형의 이미지는 육체적이고 현실적 삶에 안주하지 않고 떠나는 결단과, 현실과 자아를 해석하는 활동, 갈등과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적 노력 등이 모두 포함되는 전인적이고 능동차원의 변형개념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3) 상승모델(an ascent to union withe God) 상승모델은 사실 앞의 두 모델 안에도 기본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모델로, 영성적 삶을‘그리스도와의 일치’, 혹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지향하며 단계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고대교회로부터 영성형성의 과정을 소위 “정화(purgative)”와 “조명(illuminative)” 그리고 “일치(unitive)”의 삼 단계로 이해하는 입장이 넓게 회자되어 왔다.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그와 관련하여 영성적 삶의 단계를 “동물적 상태”, “이성적 상태” 그리고 “영적 상태”의 삼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최종단계인 영적 상태란 인간이 육체의 제약을 뛰어넘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로욜라의 아냐시오는 “정화- 조명- 완덕”이라는 삼중적 과정을, 대그레고리(St.Gregory the Great)는 “초심자”와 “중간단계” 그리고 “완전”이라는 삼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들에게서도 완전의 단계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 모습이 사라지고, 하나님 중심적인 모습으로 변형되면서, 하나님이 자신 안에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일치의 단계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십자가의 성요한도 영성적 삶의 과정을 “정화(purgation)"와 "약혼(betrothal)” 그리고 “영적 결혼(spiritual marriage)"의 “세 가지 길”로 묘사하였다. 최종단계인 영적 결혼의 상태는 그에게서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사는 상태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되고 더 깊은 사랑의 길로 접어드는 단계로 묘사되고 있다. 아빌라 테레사도 성요한과 같이 결혼이미지를 사용하여 영적 여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녀는 특별히 영혼을 하나의 궁성으로, 영적 여정을 그 궁성 안의 7개의 궁방을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녀는 마지막 제 7궁방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요17:22-23),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신비적 결혼, 신비적 변형일치의 단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개혁자 칼빈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고 보면서 “성화”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어 가는 점진적 과정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끊임없는 영적 교통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궁극적으로 완전한 일체가 되신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상태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인간이 그의 본질에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의 실체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롬 7:5). 따라서 이와 같은 연합은 인간의 잠재력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한 전적인 변형을 통해서 가능한 개념이다. 이와 같은 예들로부터 우리는 상승모델 안에 ‘완전한 일치’라는 최종의 목표를 향한 단계적 상승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면서, 결혼의 이미지, 사다리 이미지, 접붙임의 이미지들과 같은 다양한 이미지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과정을 결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깊고도 은밀한 내적 관계가 발전되어 사귐과 약혼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의 단계까지 이루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결혼의 이미지나,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나라에로 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결국 하나님과의 일치에로 나아간다는 상승사다리 이미지,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인 바 되어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는 이미지는 모두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면서 단계적으로 상승해 가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상승의 이미지는 발달심리학에서 말하는 발달의 이미지와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발달심리학적인 발달의 개념은 계통발생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발달심리학적 명제처럼, 개체의 발달적 과정은 이미 개체가 속하는 계통의 생물학적 발달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발달의 개념은 이미 유전적 형질 안에 개체적이고 계통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잠재적 발달의 형질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성의 상승 모델 안에 나타나는 점진적 상승의 개념은 인간에게 있는 잠재적인 형질의 발현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영성적 접근의 상승의 개념은 인간의 잠재적 성장 질서의 실현 개념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와 반대로 “자기 부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가진 제약과 한계들, 자기중심적 삶의 지향성을 부정하고, 하나님 중심적 삶의 지향성에로 전환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변형의 개념이다. 하나님과의 일치, 즉 하나님이 자신 안에,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일치의 단계란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죽고, 자신 안의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자연적 형질을 넘어서서 일어나는 ‘신비적 연합’이다. 이 모델에 나타나는 변형의 이미지는 따라서 지속적 자기부정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에로 도약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로더(J.Loder)가 말하는 대로 발달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발달은 궁극적으로 인격의 중심을 바꾸지 못하는 반면, 상승모델에 나타나는 변형의 개념은 초월적 실재인 하나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면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격을 재중심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상승모델에 나타나는 ‘변형’의 개념은 따라서 이전의 단계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발달의 개념이라고 하기 보다는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지속적 상승이 일어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와 기독교교육적 변형의 과제 이상에서 우리는 영성사에 나타난 변형의 개념 안에 내포되어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모방의 이미지’, ‘여행의 이미지’, ‘상승의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와 같은 다양한 이미지들 속에서 어떠한 일반화하는 법칙을 찾는 일은 오히려 영성사의 풍성한 변형의 이미지들을 축소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축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가 기독교교육적 변형의 개념에 주는 함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결합하는 변형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들이 기독교교육적 변형의 개념에 주는 첫 번째 함의는 무엇보다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포괄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방의 이미지나 순례자의 이미지 그리고 상승의 이미지들은 모두 최종적 목표점을 지향하며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변형의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룰 때까지 지속되는 모방의 이미지나, 하나님의 도성에 도달할 때까지 목적을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여행의 이미지, 그리스도와의 일치, 혹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지향하여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상승사다리의 이미지는 모두 최종적 목표점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되는 변형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변형은 단속적 변형의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방의 모델이 매순간 모방을 통하여 미래에 완성될 그리스도의 형상을 현재에 선취하는 것은 순간순간을 단절하고 삶을 재중심화하는 단속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영적 여정의 모델이나 상승의 모델도 옛 자아의 연속성을 끊고 새로운 자아로 도약하는 단절성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는 기독교교육적 변형의 개념형성을 위하여 지속성과 단절성을 통합하는 통전적 변형에 대한 조망을 제시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교육학에서 ‘변형’의 이미지는 ‘성장’과 ‘훈련’이라는 연속적 변화의 개념과는 상반되는 제 삼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Bollow는 그의 ⌜실존철학과 교육학⌟에서 교육의 기본적 이미지를 “수공업적 만듦”과 “성장” 그리고 “만남”이라는 세 가지로 정의하였는데, “수공업적 만듦”이 학습자의 외부에서 영향을 미쳐 기술의 습득과 행동의 수정 등을 추구하는 교육의 이미지라면, ‘성장’은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고 장애물을 제거하여 학습자의 생득적 성장 잠재력이 성장하도록 하는 교육의 이미지라고 하였다. 그 두 이미지가 지속적이고 예측가능한 변화를 추구하는 연속적 교육의 개념이라면, 제 삼의 이미지인 ‘만남’은 교육자나 학습자가 예측하거나 계획할 수 없이 학습자의 실존 가운데에 일어나서 학습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개념으로 불연속적 교육의 개념이라고 하였다. 볼로가 제시하는 만남의 개념은 학습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변형의 개념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써 학습자의 지금까지의 삶을 단절하고 삶을 중심으로부터 새롭게 구성하는 도약적 변형을 의미하 는 것이다. 이와 같은 Bollnow의 개념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영성적 접근이 추구하는 도약적 변형은 계획가능하고 예측가능한 것을 전제로 하는 일상적 교육의 프로세스 안에 포함되기 보다는 불연속적이고 실존적 변화의 모형으로 분류되고, 따라서 이를 지향하는 지속적이고 계획적 교육의 노력은 불가능한 개념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영성적 변형의 개념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단속적 변형의 개념이 지속적 변형의 개념과 역설적으로 함께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성사의 변형개념 안에서는 지나간 삶을 단절하고 삶을 재중심화하는 불연속적 변형의 개념이, 평생 지속되는 연속적 변형의 과정과 통전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예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S.Johnson이 “기독교인됨이란 "formation(형성)"과 “transformation(변형)"이 함께 가는 과정이라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형성"이란 매일 연속되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변형이란 불연속성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둘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평생에 걸친 길을 걷는 것이 기독교인의 길이며, 이것이 곧 “성화”의 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형성과 변형의 상호작용 개념을 통전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 곧 영성형성의 변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는 기독교교육적 변형의 개념형성을 위하여 지속성과 단절성을 통합하는 통전적 변형의 이미지에 대한 조망을 제시하여 주고 이를 교육의 과정 안에서 함께 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초월적 힘에 의한 변형과 그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지속적 훈련의 과정을 함께 보고, 신비의 역사에 자신을 내어 놓는 “소극적” 기다림과,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갈등의 바른 해석과 극복 그리고 싸움 같은 “적극적” 참여가 함께 가는 통전적 변형을 지향하는 기독교교육적 노력이 필요함을 암시하여 준다. 2) 상상(imagination)을 통로로 하는 변형 영성사에 나타나는 변형은 인간의 내면적 활동 안에서 일어나는 변형이다. 순례자의 모델이 육체적 여행이 아니라 내면으로의 여행이라고 하였을 때, 이것은 수도자의 내면적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여행을 지칭하는 것이고, 순례의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유혹과 갈등, 장애물들은 모두 순례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아와 세상 사이에서의 해석이며 해석을 통한 극복과 치유, 해방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본받기”의 모델이 명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한다고 했을 때에도 수도자는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가 성육신할 수 있도록 자아를 비우는 것이고, 이를 방해하는 자아 안의 수많은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와 싸우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 안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는 상상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를 위한 상승의 모델들에서도 수련자는 자아와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과정을 상상의 과정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아빌라 테레사가 영성수련의 단계를 영혼의 일곱 개의 궁방을 들어가며 각각의 방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최종적으로 그와 신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을 때에도, 수련자의 내면세계 안에 일어나는 변형의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내면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단순한 인지적 사고를 넘어서서, 인간의 심적, 감정적, 의지적 측면이 모두 포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내면의 변형 과정은 유한한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무한하고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와의 일치에로 도약하는 신비적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인지적인 측면과 감정적 측면, 의지적 측면이 모두 만나는 통전적 인식과,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적 영역을 뛰어넘어 초월적 사고에로 도약하게 되는 사고의 지점을 우리는 “상상(imagination)”이라는 정신활동으로 칭할 수 있다. Kierkegaard는 인간의 이성과 감정이 상상 안에서 동시성을 찾고 평형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상상 안에서 이성과 감정이 서로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틸리히는 신적 계시는 인간의 상상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상상을 통해서 인간은 “불가능의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인 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하여 상상은 인간의 인지적, 감정적, 의지적 측면이 모두 만날 뿐 만 아니라, 이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인식적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 깨달음에로의 도약이 일어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Casey는 상상(imagination)은 인간이 육체적 영역과 이성적 영역을 넘어서서(beyond) 갈수 있는 인식의 가능성이라고 하였는데, 그러한 속성으로 인하여 상상은 유한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일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D.J.Loomis도 상상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매개하는 인식적 능력으로 인간 실존의 심적, 감정적, 신체적 차원을 통합하며, 유한한 차원의 인간으로서 거룩한 차원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용이하게 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냐시오가 “상상(imagination)"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생애를 재현하는 영성수련을 수행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상상이 우리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상상은 유한한 인간 안에서 무한한 하나님과의 역설적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곳은 성령이 활동하는 장이라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독일어에서 상상력을 의미하는 단어는 "Einbildungskraft"인데, 이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것을 그림처럼 그려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수도자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재현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상의 역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교육학자 제임스 로더도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을 일종의 인식적 과정이라고 보면서, 그 과정에서 상상력을 통한 창조와 도약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로더는 인식적 변형의 과정을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였는데, 첫째 단계가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이고, 둘째 단계가 갈등에 직면하여 일종의 “단절”을 경험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우리가 인식의 사건을 형성하기 위하여 기다리거나,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단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가 상상력을 창조적으로 발휘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우리는 새로운 확신을 갖게 하는 통찰이나 직관을 하게 되고,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준거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합쳐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문제의 해결이 일어나는데,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이란 단순한 공상과는 다르게 갈등의 요소들을 파악하고, 해결되기 어려운 갈등상황에 있는 상이한 요소들을 결합하는 능력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앞의 단계에서 단절된 것이 변형이 되면서, “새로운 지각, 새로운 전망, 또는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넷째와 다섯째의 단계는 에너지의 이완과, 새로운 해결방안의 실제적 행동이라는 해석적 과정이 따르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변형을 가져오는 결정적 순간은 상상적 도약을 통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의 개념들은 비교적 현대의 개념이지만 영성사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그와 같은 상상을 기본적 통로로 하여 변형의 길이 모색되었다. 그리스도를 본받기, 순례자의 모델,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한 상승의 모델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상상(imagination)”을 통로로 이루어지는 영성형성의 모델들이다. 상상의 영역 안에서 논리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고, 극복될 수 없는 것들이 도약적으로 극복되고, 연결되며, 인간의 자연적 힘으로 불가능한 영적 상승과 신비적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변형의 개념은 기독교교육이 인지적 교육의 틀을 벋어나 인지적, 감정적, 의지적 측면을 수렴하고, 인간의 이성과 경험적 한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차원에로의 전환을 가능케하는 상상(imagination)을 위한 공간을 창조하고, 학습자를 상상에로 초대하는 교육에로 열려있어야 할 것을 요청한다. 마리아 해리스가 제시한 바와 같은 칠 단계의 영적 춤은 학습자를 그와 같은 상상에로 초대하고, 상상이 그들 안에서 다시금 춤추게 하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해리스는 여성의 영적 변형을 도모할 수 있는 단계를 그녀의 ‘영적 춤’의 개념에 맞게 '스텝(step)'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였는데, ‘각성(awakening)’, ‘발견(finding)’, ‘창조(creating)’, ‘거주(indwelling)’, ‘전통화(traditioning)’, ‘배양(nourishing)’의 과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변형(transforming)’에 도달하는 스텝들로 제안하고 있다. 그 스텝들 안에서 학습자는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앞으로 가고 뒤로 가면서 영적 춤을 추도록 인도된다. 이 단계들은 인지적, 정서적, 의지적 차원들을 통전적으로 포괄할 뿐 만 아니라,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초월적이고 초이성적 차원에로의 도약에로 학습자를 초대한다. 이와 같이 상상에로 열려있고, 상상에로 초대하는 기독교교육의 모델 속에서 변형을 지향하는 기독교교육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3) 삶을 주도하는(life-orienting) 이미지로서의 변형의 이미지 영성형성이 상상(imagination)을 통로로 하는 변형을 추구하여왔다면, 앞에 살펴본 바와 같은 모방, 순례, 상승의 이미지(image)들은 변형적 상상에 방향을 제시하고 상상이 가는 길을 인도하는(orientation)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결국 수도자에게 참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길 안내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M.Warren은 이미지는 우리에게 현실을 보는 일종의 “렌즈”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였는바, 바로 이러한 이미지들은 수도자에게 현재의 자아와 참된 자아의 이해에 대한 일종의 렌즈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모델은 수도자들에게 자신이 도달해야 할 참 자아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조망과, 자신의 현 자아는 그 목표를 향하여 가는 도상의 존재라고 하는 조망을 형성해 주며, 그리스도를 닮기가 참 자아에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하는 점을 제시하여 준다. 마찬가지로 순례의 이미지도 수도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에 대한 그림, 그리고 도상에 서 있는 존재로서의 현 위치에 대한 안목을 제시하여 주며, 순례자로써 이 세상에서 안주하지 않고, 영혼의 집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적인 싸움과 전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참 자아에로 이르게 되는 길에 대한 길안내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싸움과 투쟁적 이미지에 비하면 ‘일치’와 ‘결혼’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가고 있다. 일치와 결혼의 이미지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일치가 자신의 참 자아이며, 그 참된 자아를 위하여 현 자아 안의 오염 즉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정화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는 자아에의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변형의 이미지가 이처럼 자아이해에 대하여 길 안내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은, 곧 그것이 우리의 삶의 구조에 대한 일종의 의미체계이자 방향제시자(orientation)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의 구조와 우리의 일련의 행동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life-orienting)' 일련의 이미지들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갖고 있는 “여성스러움”이라는 이미지는 그 여성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약육강식”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과 “더불어 살기”라고 하는 이미지를 갖는 사람의 사회적 삶의 구조와 행동의 경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의 이미지를 갖고 사는 기독교인의 삶과, “구제하는 손”이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의 이미지를 갖고 사는 기독교인의 삶의 경향은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한 사람의 삶의 구조와 형태는 그 사람의 '삶을 주도하는 이미지(life-orienting image)'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변형의 이미지들은 단순히 변형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하는 것에서 나아가 참 자아와 참 자아를 이루는 방법들에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과 행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Waren이 말하는 대로 “삶을 주도하는 이미지(life-orienting image)"는 삶이 걸어갈 길이요 진로(track)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우리의 인지와 감정, 의지의 핵에 천착해 들어가 있어서 그를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보며, 또한 우리의 세상을 향한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영성사의 변형개념에 나타나는 상상(imagination)과 이미지(image)의 관계이다. 앞 절에서 우리는 상상(imagination)을 통하여 영성적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절에서 우리는 그와 동시에 영성사의 전통 안에 일정한 변형의 이미지들(image)이 형성되어 있고, 이것을 통로(track)로 하여 변형의 사건 즉 상상(imagination)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영성사의 전통은 상상을 사용하는 변형의 사건 형성과 나란히, 그 사건에 방향과 길을 제시하는 이미지의 형성 모두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이미지(image)와 상상(imagination)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기독교교육적 변형의 과제를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먼저 기독교교육은 학습자의 현재의 삶을 주도해 가는 이미지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를 의식의 차원으로 명료화하고 비판적으로 보게 해 줄 과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을 주도하는 변형적 이미지를 제시할 과제가 있으며, 학습자로 하여금 그 이미지를 수용하는 이미지 '전환(shift)'의 사건이 일어나도록 도움으로서 변형을 가능케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지의 전환’이란 단순히 인지적 차원의 가르침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약적이고 창의적인 ‘상상(imagination)’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 상상은 인간의 인지적, 감정적, 의지적인 측면이 수렴되고, 동시에 인간의 이성과 경험적 한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차원에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초월적 힘과의 만남을 통한 신비적 도약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리이다. 따라서 변형을 지향하는 기독교교육은 인지적인 교육의 틀을 벋어나 그러한 상상의 공간을 창조하고, 학습자를 상상에로 초대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기독교교육은 영성사의 풍성한 이미지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변형을 주도하는 새로운 “이미지 창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시대에 적절한 신선한 변형의 이미지, 개인과 신앙공동체를 통전적으로 포괄하는 변형의 이미지, 개인적 변화와 사회, 문화적 차원의 변화를 포괄하는 변형의 이미지, 지속성과 단절성을 통합하는 변형의 이미지... 등은 기독교교육이 새롭게 창조하거나, 전통 속에서 재해석하여 새롭게 생명을 부여해야할 과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IV. 맺는 말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가 변형을 추구하는 기독교교육에 주는 함의는 무엇보다 변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연결하는 통전적 변형에 대한 조망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연속적 교육과 불연속적 교육, 훈련과 불가항력적 힘에 의한 변화, 능동적 교육과 수동적 기다림들을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고 변형의 개념 안에서 함께 봄으로써 기독교교육학에 통전적 변형의 이미지 형성의 예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는 '상상(imagination)'이 변형적 과정과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변형을 추구하는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상상을 위한 교육적 공간을 창조하는 일의 중요성을 제시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나란히 영성적 변형의 이미지는 상상(imagination)에 길인도자 역할을 하는 이미지(image)의 매개적 기능과 새로운 이미지 창조의 의 필요성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영성적 변형의 개념에 나타난 이미지와 상상의 관계는 기독교교육적 변형이 이미지와 이미지화로서의 상상(imagination)의 개념 모두에 본질적으로 관련되는 교육적 과제가 있음을 시사하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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