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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댐
위치: 거제시 연초면 이목리
찾아가는 길: 연초-하청가는 길-다공 중리 우회전-문암-이목저수지
완공년도: 1977년 착공, 1979년 완공
저수면적: 22만평, 총저수량 470만 톤, 1일공급량 16,000톤
6.26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주변에는 많은 실향민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언젠가는 그리운 고향산천에 가 불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댐으로 인한 수몰지구는 평생 가 볼 수 없는 곳이다. 우리 거제도에도 1970년대 양대조선소가 들어서면서 두 개의 댐이 설치되었다. 즉 구천댐과 이목댐이다. 구천댐은 심산유곡에 만들어 졌기 때문에 집단 이주가 적었으나 이목지구는 80여 가구가 집단 이주하였다.
연초삼거리에서 하청 장목으로 가다 다공 중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이목댐이 나온다. 거제도 섬이라 특성은 있으나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아 식물도 많고 물도 많다. 거제도 인구 추이를 보면 1664년에 13,558명 1880년에 31,281명 1945년 해방이 될 때 10여명이던 것이 1970년대 후반 양대조선소가 들어오면서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233,984명이나 된다. 그 이전까지는 거제도에 물이 풍부하여 거제도에 남는 물은 통영까지 일부 공급을 하였다.
이목댐은 1977년에 착공하여 1979년에 완공되었다. 저수면적은 22만 평으로 저수량은 470만 톤이다. 일일 1만 6천톤씩 용수를 한다. 이목댐은 대우조선과 삼성조선의 공업용수와 배후도시의 식수를 위해 만들어 졌다. 여기에 비해 구천댐은 1987년.11.21에 완공되었다. 이목저수지에 비해 규모가 조금 크며 깨끗한 물을 공급하며 일부 모자라는 물은 남강물로 보충하고 있다.
이목댐의 발원지는 북쪽으로 도천골이고 동쪽으로는 천곡이다. 명동쪽은 대금산 줄기이고 천곡쪽은 대금산과 강망산 줄기이다. 그런데 이 모두 지류에 불과하여 물의 양이 많지 않다. 2009년 본인이 조사한 바로는 명동쪽에는 겨울철에 물이 전무하고 천곡쪽에는 아주 적은 소량의 물이다. 현재 이목저수지는 물의 청청도가 좋지 못하여 식수로 활용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수자원공사에서 보강공사를 하고 있으나 물이 근본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보강공사를 해야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목저수지는 공업용수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 이지만 상수도 보호구역은 재산권행사를 하지 못한다. 만약 공업용수로 전환한다면 이 주변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권리를 행사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목이란 마을은 수월 해명으로 집단이주 했으나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이목동리가 수장되고 몇 해를 지나 이곳을 방문한 이영수(동아대학교 교수)씨가 주변 형들의 권유로 그냥 가기 멋해서 미꾸라지, 붕어, 잉어, 메기, 민물장어를 거금 50만원을 투자하여 방사 하였다고 한다. 그런 저런 연유로 이목저수지에는 많은 민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수달이 구천댐보다 많다나???
나는 이목초등학교를 다녔기에 가끔 감난골을 찾곤 한다. 그런데 며칠 전 이목댐을 찾으니 이목댐 주변으로 순환도로가 생겼다. 즉 천곡에서 감남골을 지나 명하까지의 길이다. 수몰로 인하여 가보지 못한 이곳 이목마을을 이제는 자가용으로 가 볼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 이목댐 주변의 지명 유래>
-거제민속박물관: 명등초등학교 부지에 현재는 민속박물관이 있다.
-두메산골: 천곡리(주령) 즉 충해고원묘지 가는 입구에 있으나 찜질방과 식당을 겸하고 있다.
-문암마을: 이목댐 들어가기 직전의 작은마을. 옛날에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두 개있어 마치 문기둥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청골: 이목댐의 발원지로 都川골이라 하였는데 골이 너무 깊어 고개를 넘는 길손이 山賊에게 피해를 당하거나 소를 몰래 잡아먹으니 盜聽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뽈지골: 명하 서쪽에 박쥐가 사는 굴이 있다.
-감나무골마을: 이목 동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10가구가 살고 있다.
-천곡마을: 본래 새미실이라 불렸으며 상천, 하천, 주령마을 합쳐서 천고리라 한다.
-명동리: 원래 홈대골, 홈골이라 하였는데 뒤에 명동이라 이름을 바뀌었다. (명상과 명하)
-梨木里: 본래 배나무실, 배골이라 하였으며, 이남마을 감나무골마을 포함하였다. 현재는 모두 수몰되고 이남과 감나무골에 몇 집이 있다.
-이목리 문화유적: 가마터, 토기산포지, 고분군,생화유적 대규모 복합유적지로 중요한 곳이다.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고려~조선시대 등)이목리 천곡리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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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었노라, 이목의 저수지 언덕에서!
이영수: 동아대학교 독문과 교수
필자가 태어난 고향 이목, 이곳에 지금은 거대한 저수지가 아닌 어쩌면 천연호수처럼 변해 그 고향 산천이 푸른 물아래 들어가고 표면에는 파도 같은 물결이 격세를 알려준다. 그 호수 언저리에는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겨 줄 몇 개의 산자락과 어렴풋이 나 있는 무너진 남은 산길이 언덕배기 옆으로 그 흔적이 보일 뿐이다. 지난 날 우리는 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철모르고 거칠게 자라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산업화에 몰려 마을이 저수지가 되고 이제는 커다란 천연호수처럼 변해버렸다. 여기에 살던 사람은 모두 떠나가고 아스라이 사라져간 들판너머로 이쁜이 곱뿐이도 떠났다. 필자는 오랜만에 여길 찾아와 내 예쁜 여동생 영희의 무덤이 있는 호수 언덕에서 울었다.
작은 가슴에 씨앗 한알 한알 뿌려
인생의 화려한 무대를
꿈꾸던 어릴 적 내 고향
보리밭 언덕에 아지랑이 봄을 잉태했고
산비둘기 울음소린 계절의 전주곡 이였지
병풍처럼 사계절의 조화를 드리운 야산의 얼굴들
그윽한 매미 소리는 고향의 여름을 무르익게 하였지
별이 흐르는 밤하늘에 내 꿈을 펼쳤고
별들의 선율 속에 찬란한 새벽의 먼동 터 오름도 잊고
여름밤을 식히는 밤이슬에 젖어 논둑을 거닐던 곳
바람처럼 왔다 구름처럼 사라지는 세월 속에
나 이젠 고향의 그리움에 젖어
추억이 가득한 실 꾸러미 하나 마음에 엮어
포근한 어머니 품속 같은 내 고향
내 마음속에 풍요로운 대지로 남는
내 고향 배 나무골 (梨木).
지금은 호수되어 푸른 물결 넘실거린다.
청자 빛 물결에 잉어가 힘차게 튀어 오르고
먼 산 아지랑이
산천은 예전 같은 데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 떠났네.
이제는 내 고향 경남 거제 연초면 梨木마을은 현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물아래 수장이 되고 말았다. 그 옛날 할머니도 살아계실 때 이렇게 넓은 옥토 문전옥답들을 물 밑에 수장시킨다고 들었을 때 이 사실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식량이 모자라는 데다 그곳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 합쳐 1000호 이상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땅과 집을 보상하는 금액이 70년대 중반 약 27억이라니 유신정부는 과감하게 토지를 수용하고 말았다. 지금 한 정치인이 받는 후원금도 안 되는 적은 금액이지만. 어린 시절 개울가에서 고기 잡고 목욕하고 수영하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종규, 원호, 성도, 병철, 경규, 중환, 영용 종명이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은 더러는 벌써 세상을 떠나 가기도하고 더러는 자식들을 시집 장가들을 보냈다고 들린다. 이제 머지않아 혼사 대신 부고장이 날아들겠지.괴테도 60줄에 들어서서 <시와 진실>을 써서 인생을 정리해 갔다고 전한다.
내가 태어나 물을 접하고 사람을 사귀고 농사를 짓고 땔나무 하며 철모르고 뛰놀며 사랑을 배우던 이곳이 내 세계였고 내 삶의 터전이었다. 세상이 온통 이 고을 하나뿐이었다.
만나면 언제나 좋은 것만 주겠다고 덤비는 치원이 형도 이제 갑을 넘긴 나이리라. 계산을 하지 않아 바보로 통하던 그이가 노자의 삶을 실천한 줄도 모르고 그를 욕하던 철없는 친구들이 가련하구나.
이렇게 흘러가는 세월이거늘. 생각할수록 가슴 아파오는 찡한 그때 그 시절이여. 집 앞의 동구 나무는 여름날 시원한 그늘과 가을의 포구, 그리고 겨울날 정화된 혼령이 살고 있던 곳. 척박한 삶의 터전에 수시로 나의 무력감을 씻어 주던 곳, 향수어린 나의 안식처였다.
어스름 달빛이 동구 밖을 비추는 날에는 소녀들과 그곳에서 놀았고, 눈 내리는 겨울날은 무언지 모를 감격이 우리를 하늘로 불러 올려 까닭 없이 흥분했다. 눈 내린 날 아이들은 괜히 바쁘게 서둘러 눈밭위로 걸어간 자국을 따라 나섰다.
몇 발짝 더 나가면 실개천이 흐르는 방축길이 나온다. 방천둑길, 지게를 지고 이 개울을 몇 번이나 건넜던가. 더운 여름날에는 물 깊은 웅덩이에서 헤엄치다말고 물을 들이켰지. 그리고 노을이 넘쳐난 저녁에는 서쪽 하늘을 향해 무지무지 힘차게 뛰어 달렸다.
우리 집 개가 나를 따라 까닭 없이 달린 시골길.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책보자기를 툇마루에 집어던지고 외양간에서 소를 몰고 나서는 일은 하루의 일상이었다. 소고삐를 잡고 소멕이는 일은 내차지였다.
몽당치마 자락을 날리며 나만 보면 얼굴을 자주 붉히던 P소녀는 그 시절 내 사랑이었다. 소년의 첫사랑은 경륜이 아니라 같은 학년의 동갑내기였다. 다소곳한 자태를 더러 내어 날 쳐다보면 모두 날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겨 남달리 우쭐했던 나날들, 까닭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세월이었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면 야생초들이 피어나는 고갯길이 있다. 두메산골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고향마을이 먼발치로 보이는 곳. ‘가는골’ 고갯길, 아침밥을 먹고 8-9백 미터 지나와 점심 도시락 까먹고 빈 벤또를 숲속에 숨겨두고 학교로 갔던 일, 찌는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옷섶을 헤지고 들어와 입이 벌어지던 고갯길.
가을걷이 할 때 일 거들기가 싫어 일부러 고갯길에서 잠을 자고 가던 길. 뒤돌아보면 고즈녁 하고도 정겹던 고향길이다.
옷 보퉁이 하나 달랑 들고 시집가던 누나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멈추어 서서 울고 가던 길, 세상살이 마감하고 떠나가던 상여가 다리 아파 쉬어가던 길, 그 어린 시절의 추억의 장소도 세월과 더불어 기억 속에서 뭉개져 간다.
지난날은 가슴속에 시간도 공간도 남기지 않으려는 기세로.
그 옛날 우리가 다닌 학교는 연초 중학이고 보통 뛰어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거리였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한심한 교육을 받았다. 음악 미술은 국어나 영어 선생님이 맡았고 선생님들은 모든 과목을 다 잘하는 사람으로 알았다. 선생님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통학거리도 보통 5-6킬로 떨어진 마을이었고 무슨 버스가 다니는 길도 없었다.
하루에 어쩌다가 한두 번 지나가는 버스가 있기는 했다. 가끔 하늘에 나는 비행기는 보았으나 기차는 본 일이 없었다. 다만 음악책에 나오는 ‘기차길옆 오막살이’라는 노래 말에서 기차를 어렴풋이 상상하는 정도였다.
20원 정도의 차비도 없으니 버스를 타고 다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우산이 어디 있나. 마다리를 엮어 뒤집어쓰고 다녔다. 그 먼 통학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멕이고 풀 베는 일, 그리고 가난한 집안일을 도우는 일이었다. 용하게 머리 좋은 학생이란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를 잘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지금처럼 공부를 專業으로 않았다.
되돌아보면 대단히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런 시절이니 人命이 크게 귀하게 여김 받지도 못했고 폭력이 난무했으니 몸조심을 해야 했다. 아님 몸을 단련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라면 폭력서클에 참여하여 떼거리를 만들어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정말 힘이 말하는 시대였다.
우리의 일생에 가장 낭만적이고 가장 철없던 시절, 지금도 되돌리고 싶은 시절이지만 그 때 그 시절이 아쉽고 그립다. 벌써 과거를 회상하는 나이에 이르렀으니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에 온 듯 하여 때때로 쓸쓸해진다. 대우 조선이 옥포에 들어섰다.
필요한 공업용수 물이 필요한 만큼 대형 저수지가 이곳 우리 고향마을이 수장되면서 만들어지고 어느 해는 가뭄이 들어 물이 완전히 말라버렸다. 격세의 시간이 사람을 이렇게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붙들어 매다니. 우연히 그곳 선산에 들렸다가 그 달라진 풍광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 때 그 시절 그 노래에 우리의 마음이 울컥해 지듯이 이곳 고향의 호수를 저녁노을에 바라보니 저절로 세월의 아픔이 눈시울을 적시었다.
윤치원 형이 한마디 했다. 그래 여기 그냥 왔다만 가지 말고 잉어새끼 몇 마리 이 호수에 사다 넣어라고. 선산 묘지를 돌보고 돌아오는 길에 수중에 있는 용왕에게도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성 옥수골에서 잉어와 이스라엘 붕어, 메기, 민물장어, 그리고 미꾸라지를 사기위해 거금 50만원을 투자했다.
두 번에 걸쳐 살아있는 고기를 수조에 넣고 달려가 이 호수(?)에 방생했다.
서면 이익중 아제와 더불어 숨 가쁜 릴레이 게임을 하며 이목 저수지에 치어를 넣었던 것이다. 91년 약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호수 같은 저수지에는 크고 작은 잉어들이 漁躍于淵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이것은 중요한 행적이라 기록으로 남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호수의 방생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밀렵으로 잡는 싱싱한 잉어를 보면 아무래도 우리가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80여가구가 이주하고 옛고향을 생각하며 세운 비석
이목댐 제방에는 접시꽃 단지를 만들었다.
이목댐 주변으로 새로 만들어진 순환도로 ( 천곡에서 명동까지)
감나무골 저수지
명동에 있는 거제민속박물관
배나무골 이목리의 옛사진, 내가 다닌 이목초등학교가 저 멀리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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