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머리끝까지 물속에 집어넣는다. 욕조에 잔물결이 일면서 약간의 물이 쏟아진다. 여자는 급히 머리를 들어 올리고 가쁜 숨을 내쉰다. 증기로 가득한 욕조 안에서 여자는 삼십분 째 버티고 있다. 여자가 스크럽을 시작한다. 불어난 살갗에서 각질과 불순물이 엉켜 뜨거운 수면 위로 떨어진다. 불순물들은 여자의 삶처럼 천천히 욕조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자는 배꼽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배꼽의 청결에 신경 써 본 기억이 없다. 누구에게든 한 때 유일한 숨통이었을 배꼽. 여자는 지난 삼 년 동안 이 작은 배꼽만큼 숨통이 조여 있었다.
1
남자가 처음 여자의 집에 들어왔을 때 거실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실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금장 테두리의 액자 속에서 여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불혹을 넘긴 여자의 몸매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탄력 있는 바디라인과 매혹적인 눈빛이 거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진 속 여자에게 압도당한 채 넋을 잃은 남자에게 문자가 왔다. 샤워 중이야. 왼쪽으로 돌면 내 방이 있어.
남자가 거실 왼쪽으로 돌자 여자의 또 다른 사진들이 벽을 가로지르며 일렬로 서 있었다. 남자의 시선은 내내 그것들과 마주하며 걸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사진 속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방문이 나타났다. 남자가 처음 들어선 여자의 방은 뭐랄까, 낯설고 어둡고 스산했다. 제법 넓은 방에 갓을 쓴 네 개의 스탠드 불빛이 해괴한 분위기를 뿜고 있었다. 음울하고 무거운 진혼곡까지 들리자 남자의 동공은 긴장한 듯 팽창했고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고풍스런 앤티크 와이드 서랍장 위에는 액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대부분 반라 상태의 여자 사진이었다. 청바지만 입고 상의를 탈의한 채 양손으로 젖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사진, 수건 한 장을 길게 늘어뜨려 나체를 절묘하게 가리고 있는 사진, 그리고 만삭의 여자가 알몸으로 비스듬히 서서 배를 감싸고 있는 사진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결혼 전 속옷 모델을 하던 여자에겐 있을 법한 사진들이었다. 남자는 마지막 만삭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여자의 낯선 모습이다.
뭐해애? 낮고 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방안에는 로즈마리 샤워코롱 향으로 가득 찼다. 여자는 말끝을 늘어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혀가 길면 말끝이 늘어지는가,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돌아보자 샤워가운을 걸친 여자는 자연스럽게 화장대로 가 앉았다. 샤워는 왜 한 거야? 어색한 남자가 물었다. 그냥. 더 나쁘기야 하겠어?
남자와는 다르게 여자에게는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여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은, 그러니까 사전 답사 정도로 하는 게 어때? 여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훔쳐내며 천진하게 말했다. 적어도 우리 집 동선쯤은 파악해 두는 게 좋잖아. 리허설이라고 생각해.
죽음과 리허설이란 단어가 어떻게 만날 수가 있단 말인가. 여자는 어쩌면 죽기 전에 리허설이라는 단어를 한번쯤 써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반면 남자는 미간이 살짝 부풀었는데, 그건 짜증나거나 화가 나기 직전에 나타나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남자의 버릇을 잘 아는 여자는 머리를 말리다 말고 손가락으로 남자의 미간을 꾹 눌렀다. 남자 쪽으로 몸을 숙이던 여자의 젖가슴이 흔들리며 탱탱하게 마주쳤다. 여자의 가슴이 이렇게 풍만하고 자극적이었던가.
답답한 남자가 일어나서 커튼을 걷으려고 하자 여자가 서둘러 남자를 막아섰다. 의미 없는 시간을 끄는 여자가 한심해서 남자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는 영화 관람 할인권을 받기 위해 헌혈의 집에 들어선 여고생처럼 굴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고 싶은 남자에게 여자의 느긋한 태도는 야살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드라이하기 시작했다. 그런 여자를 보면서도 남자는 한마디 재촉조차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준비와 시작은 여자로부터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오른손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젖은 머리카락을 솎아내면 드라이기를 든 왼손은 머리카락에 입김을 뿜었다. 삶은 시래기처럼 축 늘어졌던 여자의 젖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여자는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붕어처럼 두어 번 입술을 끔뻑거렸다. 여자의 움직임에 반주라도 하듯 헤믈레 클락이 추를 가지고 논다. 여자는 헤믈레 앞으로 다가가는 거울 속의 남자를 응시했다. 헤믈레 앞에 선 남자는 모델 넘버를 살핀다. 남자의 로망이었던 헤믈레 클락 모델 중 천 만원을 호가하는 놈이다. 남자가 뒤를 돌았을 때 여자는 남자 앞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12월 31일이면 좋겠어. 빨간 입술이 숫자를 말하며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그 날이 어떤 의미가 있는데?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라고. 여자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 밑 애교 살을 부풀리며 마치 교태를 부리는 듯 했다. 죽기 전 발악일지도, 혹은 어떤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한 거야? 설마 연희한테 미안해서? 여자 집에서 연희 얘기는 하지 말자, 다짐하며 왔는데 남자의 입이 불쑥 뱉어버렸다. 연희 이름이 나오자 여자는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것이 여자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몇 초 만에 여자의 얼굴은 상실감과 무의미함으로 가득했다.
-사는 게 지루해.
-지루하다고 죽는 사람은 없어.
-난 그래. 그러고 싶어.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그럴 수 없을 거야.
-어째서 확신하는 거지?
-날 죽이고 싶을 테니까.
말문이 막힌 남자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자를 죽이는 상상을 골백번도 넘게 한 건 사실이었다. 차후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면서까지 여자가 죽어가는 걸 보고 싶기도 했다.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남자의 미간이 힘 있게 부풀어 오르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날 끌어들인 의도가 뭐야? 남자는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뺐다. 오른쪽 주먹이 쥐가 난 듯 저렸다. 긴장을 하면 오른 손이 늘 말썽이었다.
-난 단지 내가 죽어가는 걸 당신이 지켜봐주길 바라는 거야. 죽이고 싶던 내가 죽는 걸 보며 당신,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까? 내가 당신한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마치 나를 위해 죽는 것 같이 들리는군.
누군가를 ‘위해’ 죽는 것과 누구 ‘때문에’ 죽는 것은 완벽하게 다른 문제다.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여자라고, 잠깐이지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남자를 멋쩍게 만들었다. 실소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와인 잔을 내밀었다. 단 한 번의 죄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의 피처럼 맑고 붉은 와인이 잔의 곡선을 따라 흔들렸다. 잠시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던 남자가 잔을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침대에 걸터앉은 여자가 와인 잔을 굴리며 남자를 흥미 있게 쳐다보았다. 씨디 플레이어가 재부팅되는 소리가 들리고 치나리 웅의 still life after death가 흐른다.
-젠장. 이 음악 좀 끌 수 없어?
-난 이 곡이 좋아. 누군 야망과 목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누군 아무런 준비 없이 가족과 친구를 잃어. 지금의 나와 잘 어울려서 좋아.
-넌 정말이지 사치스러운 여자야.
스피커에서 비명 소리가 연이어 들리자 남자는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남자를 향해 여자가 와인 잔을 높이 들어 보인다. 당신의 미래를 위해 축배를 들어야지. 화가 난 남자는 거칠게 방문을 닫았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액자에 사진을 넣고 거실 바닥에 반듯하게 세웠다. 여자 집에서 가져온 만삭의 여자사진이다. 남자는 사진을 응시한 채 소주병을 들이켰다. 연희로 족하다고, 더 이상의 아이는 필요 없다던 여자였지만 남자는 여자가 얼마나 아이를 기다렸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여자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자가 처음부터 사치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녀가 자신한테 시집을 온 건 그에 상응할만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남자의 딸은 혈액암을 앓는 네거티브 혈액형이었다. 부모의 작은 혈액 인자만 받아 네거티브로 태어난 딸에게 남자의 피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구하기 힘든 혈액형에 혈액암까지 걸린 딸을 위해 남자는 피가 필요했다. 여자가 연희를 위해 처음으로 채혈을 하던 날, 남자는 여자에게 고급 세단을 선물했다.
여자는 아주 가끔 피를 뽑았지만 남자는 자주 지갑을 열어야 했다. 안정된 상류층은 아니었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남자는 여자에게 기꺼이 돈을 썼다. 가난했던 여자는 남자에게 피를 팔아 돈을 벌었고, 남자는 여자를 사서 딸을 살게 했다. 두 사람은 갑을이 아닌 동등한 입장이었다.
여자가 남자의 병원으로 불쑥 찾아들었던 건 이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술 중 과다출혈로 연희가 떠난 뒤였고 남자는 삶에 속수무책인 상태였다. 남자가 여자에게 밤낮없이 연락을 시도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여자의 방문은 증오를 찾아들게 했고 어떤 이들에게 증오란 살아갈 이유가 되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다.
삼 년 만에 마주 앉아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하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일 분쯤 생각했고, 십 분쯤 망설였다. 죽고 싶은데, 근데 당신이 필요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다소 황당했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남자는 잔인해지고 싶었다. 이 여자를 얼마나 죽이고 싶었던가. 제 발로 걸어와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데 거절할 재간이 필요한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볼게.
의외로 남자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병원에 휴가를 요청했고 CPDA-1 항응고제가 포함된 혈액낭과 다량의 주사기, 여분의 채혈백 등을 챙겼다. 이동식 혈액냉장고를 부탁하면서 쉐이커도 함께 할까 했는데 일부러 제외했다. 그건 수작업으로 해도 관계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채혈을 하는 동안 머쓱한 분위기를 벗으려면 그 편이 나을 듯 했다.
여자가 다녀간 지 보름 만에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떨어졌을 때 남자는 첫마디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강단 있는 여자가 고작 보름 만에 후회하거나 마음을 바꿨을 리는 없었다. 고마워. 전화를 받자마자 여자가 내뱉은 첫마디는 ‘고마워’였다. 그 한 마디에 남자의 몸은 전율을 타고 손아귀에서 멈췄다. 남자는 오른손을 허공에 털었다.
통화를 하는 내내 남자는 연희의 사진이 든 액자를 넋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 속 연희는 코스모스 문양이 새겨진 분홍색 털모자를 쓰고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웃고 있다. 남자에게 세상 유일한 피붙이는 연희 하나였다. 잘 키우고 싶었다. 무엇보다 의사인 남자가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은 연희의 건강이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연희에게 필요했던 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혈소판 수치가 너무나 낮았던 연희는 수술하면서 혈액이 부족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혈액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자의 도움만 있었더라면 연희를 위해 조금 더 노력해볼 시간은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모든 게 냉혹한 여자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간 여자를 죽이는 방법을 고민하며 상상하며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남자는 설핏 입 꼬리를 올리며 사진을 내려놓았다.
2
현관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선다. 훤칠한 키에 은테 안경을 쓰고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는 제 집인 양 슬리퍼를 신고 유유히 거실을 횡단한다. 벽에 걸린 여자의 사진 따위는 이제 남자의 시선을 잡아두지 못한다. 남자는 거칠 것 없이 여자의 방으로 향한다.
남자가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 위에서 비스듬히 반만 누워있던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그 포즈와 표정 모든 것이 연출된 것이라 믿는 남자는 여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왔어? 남자는 대답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거리낌 없이 입고 있던 샤워가운을 벗고 알몸으로 반듯하게 몸을 누인다. 알몸인 여자가 거북한 남자는 옷을 다 벗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자의 가식은 언제나 상식 밖이었기에 묵인을 택하고 만다.
직사각형인 여자의 방은 방문과 마주하는 건너편 모서리에 침대가 놓여있다. 화려함을 절제하지 못한 고가의 앤티크 침대를 향해 흰색 캐노피가 가르마를 타며 몸을 늘어뜨리고 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차이나 풍의 음침한 조명과 검붉은 색의 벨벳 암막커튼까지 그것들은 마치 어떤 성스러운 의식을 치러야 하는 중압감을 주기에 알맞은 인테리어다.
여자의 방은 처음 왔을 때보다 더 음침해진 분위기다. 모서리의 침대는 헤드 부분을 제외하곤 벽면과 밀착되어 있지 않다. 침대와 벽면을 사이에 둔 빈 공간으로 남자가 들어선다. 남자는 들고 온 가방에서 천천히 물건을 꺼낸다. 혈압계와 주사기, 채혈백 등이 베드테이블로 옮겨진다.
남자는 여자의 왼팔을 들고 압박대를 감은 후 송기구로 열심히 바람을 보낸다. 펌프질을 하는 남자의 오른손이 느려질수록 여자의 왼팔에는 압박이 가해진다. 110에 70.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자의 혈압은 정상이다. 남자는 여자의 상완동맥이 바람 빠진 풍선이나 고압에 의해 스파크가 튀는 전선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은 걱정이라기보다 차라리 실망에 가까웠다.
남자는 혈압계를 정리해 넣은 후 혈액낭에 연결된 주사기 삽입구를 뽑는다. 짐짓 오랫동안 주머니를 바로 잡는 남자를 보며 여자가 피식 웃는다. 남자가 그런 여자를 본다. 동공이 흔들렸을까. 여자가 말한다. 겁나는 거야? 갑자기 남자는 머리가 복잡해 졌다. 겁나는 건가? 이제 와서 겁이 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겁이 나는 건지 후회를 하는 건지 헤아릴 수 없는 무책임한 심경이 남자의 미간을 어지럽힌다.
남자가 여자의 왼팔을 붙잡고 혈관을 고르자 여자는 반사적으로 왼손에 힘을 준다. 하얗고 투명한 여자의 살갗 아래로 연푸른 혈관이 드러난다. 일급수 강가에서 뛰어노는 플라나리아 같다. 고결한 척 맑은 물을 고집하지만 그들로 인해 결코 투명해보일 수 없는 물처럼 화려한 침대에 누워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여자의 태도는 어설프고 가식적이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남자가 혈관에 주사 바늘을 꽂고 혈액낭을 만지작거린다. 천천히. 여자가 말한다. ‘천천히’라고. 연희도 ‘천천히’라는 단어를 곧잘 쓰곤 했다. 아빠, 천천히. 천천히 해. 고통에 느림의 미학 따위는 없다. 남자에게 느림이란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천천히’라는 말을 즐겨 쓰던 연희는 어디에 있는가. 남자의 동공에 푸른빛이 지나간다.
그 날 들었던 치나리 웅의 해괴한 음악이 방 안을 무겁게 에워싸고 있다. 이런 음악을 왜 듣는 것일까. 남자는 여자의 사치를 진저리치게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뼛가루도 도금을 해달라고 할 여자라는 것을. 여자가 제 마지막 날을 숭고하고 고상하게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레퀴엠을 헤매고 다녔을지 남자에겐 뻔한 추측이다. 종교 따위에 관심도 없던 여자는 그저 미사보를 써보고 싶다며 어느 날부턴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아마 레퀴엠에 대해서 알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가식일지언정 단 한 번이라도 연희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을까.
혈액낭을 든 남자의 양손이 시소를 타듯 번갈아 오르내리며 쉐이커 기능을 대신한다. 붉게 물드는 팩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가식적인 여자의 삶을 조명하며 점점 초점을 잃어 가는 듯 보인다. 여자가 그런 남자를 쳐다본다. 침대를 가로지르는 캐노피처럼 눈물이 여자의 얼굴을 가로질러 흘렀다.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여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면서도 눈물을 닦아내진 않았다. 물어볼 게 있어. 여자가 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때 어떤 생각으로 부재중이었던 거야? 어쩌면 그렇게 맥없이 잃어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꼭 한 번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대답이 없고 오랜 시간 불편한 침묵만이 흐른다. 여자의 입장에선 그랬다. 다른 누군가도 그날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고, 그 누군가에게도 여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남자처럼 여자에게도 남자가 필요한 날이었다. 여자가 아닌 단지 그녀의 핸드폰이 부재중이었을 뿐인데 여자는 자신을 탓하는 남자가 야속했다. 눈을 감고 숨을 삼키던 여자가 기억을 들여다본다.
당신이 날 처음 만난 날 처음 물어본 말이 뭔지 기억해? 혈액형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기막힌 일이지만 그 땐 먼저 혈액형을 묻는 남자, 뭔가 부드럽고 감성적일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혈액형을 얘기했을 때 그 때 당신 표정을 기억해. 뭐랄까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어. 난 연희한테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어. 당신이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다면 말이야. 그런데 당신은 처음부터 아내가 필요했던 게 아니야. 날 보험으로 들어앉힌 대가로 내게 사치를 선물한 거였어. 그게 얼마나 끔찍했었는지 알아?
끔찍하다고 말하면서 정말 끔찍한 표정을 짓는 여자는 지난 모든 시간이 고통이진 않았다는 걸 안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헛헛하고 고된 밤들을 보낸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여자에게 이혼 후 닥친 녹록치 않은 시간들은 남자를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위태로운 병을 가진 자식을 위해 언제든 수혈이 가능한 여자를 아내로 들인 것까지도 지금은 이해한다. 정작 여자를 서글프게 하는 건 그런 남자를 사랑한 자신이다. 여자의 삶에서 가장 진실했던 순간은 남자를 사랑했던 날들이다.
죽은 아내를 보내지 못하던 남자, 죽은 아내와 꼭 닮은 딸을 딸 이상으로 아끼던 남자, 그런 남자에게 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쓸모라도 있고 싶었던 여자다. 여자는 쓸모의 대가로 돈을 받았고 사치를 했다. 그 또한 남자가 미안해하거나 자책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시킨 배려였다. 사실, 여자가 사 놓은 명품 백 대부분은 콧바람 한 번 쐬지 못한 채 장롱 속에 쳐 박혔고 명품 화장품들도 튜브 마게 조차 벗지 못한 채 유통기한을 넘기기 일쑤였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배려 덕분에 보상심리를 두둑이 쌓으며 살 수 있었다.
눈물은 조용히 여자의 볼을 타고 귓불에 와 맺힌다. 눈물은 소리가 없다. 지난 기억이 남긴 통증도 소리가 없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태풍의 눈이 잠잠할수록 그 위력은 대단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리에 예민하다. 큰소리로 웃어야 호탕하다 말하고 소리 내어 울어야 더욱 서글퍼한다.
얼마 전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여자의 방에 암막 커튼을 달면서였다. 커튼에 달린 핀을 레일에 걸때마다 여자는 심장에 핀을 꽂는 듯 했다. 여자가 커튼을 쳐다보는데 남자의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의 눈, 코, 입이 낯설지가 않다. 매일 봐 온 듯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보자 지금 이 상황이 내심 안심이 된다.
-뭐 하는 거야? 기분 나쁘게 그 눈물은 뭐야.
-당신이 왜 기분 나쁜데?
-내가 억지로 뭔가를 하려는 것 같잖아. 뭐야, 무슨 뜻인데.
-누구라도 죽기 전에는 내려놓는 것들에 대해 떠오르는 게 많은 법이야.
-감정은 리허설이 안 되던 모양이지?
남자가 여자를 향해 비아냥댄다. 여자가 말한 보험이라는 단어가 여태 거슬렸던 것이다. 딱히 그렇게 단정 지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걸 부인할 수 없기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거저 희생했던 것도 아니고 응당한 보상을 받으며 살아온 주제에 그런 부당한 단어를 쓰다니. 이혼하기 전에도 여자는 종종 이런 과한 표현으로 남자를 화나게 했다.
-잘 들어. 지금부터는 한계치야. 그만하고 싶거든 지금 얘기해. 쇼크가 올 수도 있어. 그 쯤 되면 손 쓸 수가 없어.
-당신은 늘 그렇게 정직했어. 사람 미치게 말이야.
침대에 등을 기대고 혈액낭을 새 걸로 교체하는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쓴다. 여자가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것도, 머리가 흔들리면서 흐트러진 눈물 입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내려앉는 것도 남자는 보지 못한다. 남자가 팩을 새로 꽂는다. 투명한 팩이 검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남자는 끝까지 여자를 쳐다보지 않고 그대로 등을 지고 앉아있다. 이번에 교체한 팩이 가득차면 여자를 되돌릴 수 없다.
-당신이 병원에서 전화했던 그 날 나도 당신이 필요했어. 아니, 지난 삼 년 내내 그랬어.
여자의 말이 듣기 거북했는지 뒷목이 경직된 남자가 오른손으로 목 주위를 주무른다. 남자가 기억하는 여자는 항상 그랬다. 미안해할라치면 도를 넘어 남자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고마워할라치면 돈을 요구하던 여자였다. 가식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여자는 언제나 자기를 봐달라고 징징대기만 했다.
-난 당신이 필요했는데 당신은 내 피가 필요했겠지.
-그만해.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징징대지 말고 엿 먹기 전에 포기하던지, 젠장.
-당신은 내가 아이라도 가질까봐 늘 초조해하던 비겁한 사람이야. 우리한테 아이가 생겼어도 난 연희에게 내 피를 모두 줄 수 있었어.
순간 남자는 여자가 어쩌면 자신을 붙잡기 위해 쇼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이혼을 안 해주니 어느 날 갑자기 손목에 칼을 들이대며 이혼해 달라던 여자였다. 여자는 항상 제멋대로고 막무가내였다. 혹시 이 모든 게 남자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계획이 아닌지, 남자는 징징대는 여자가 의심스럽다.
-당신은 단 한 번도 날 말리거나 붙잡지 않는구나.
-결국 그거였어? 그러니까 넌 내가 말려주길 바라면서 여기까지 진행한 거야? 그래?
-난 단지……. 한 번쯤 내 인생도 바라봐 줄줄 알았어.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잊었어? 나한테 어떤 희망도 갖지 마. 난 널 두고 생각 따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남자의 모진 말에 여자는 약간 오기가 생긴다. 모든 계획은 철저했지만 남자가 여자를 살린다면, 혹은 그런 의도를 내비친다면 여자는 다시 살아갈 준비도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 또한 계획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연희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남자이기에, 히포크라테스선서를 외쳤을 의사이기에 자신이 허무하게 죽어버리도록 내버려 둘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잃어가는 혈액만큼이나 희망을 걷어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이혼할 때, 적어도 미안했다거나 고마웠다는 말은 들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구걸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정도 말은 해줬어야 했다. 그만하자. 그러니까 어차피 이런 선택을 할 거였으면……. 좀 전에 좀 심했다 싶었는지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네지만 여자는 마지막까지 곁을 주지 않는 남자가 원망스럽다. 남자가 생각보다 적극적이라는 것도 마음 아프다. 당신은 끝까지 연희밖에 없구나. 여자의 말에 남자가 한숨을 쉰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연희가 살아있으나 없으나 똑같아. 정말 대단한 남자야. 남자는 연희를 들먹이며 자신을 모욕하는 여자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바투 쳐다본다.
-너만 있었으면 살릴 수도 있었어! 제 자식도 못 살린 주제에!
-제 자식?
여자가 실소와 함께 내뱉은 말은 남자를 자극했고, 남자의 부릅뜬 눈에 여자는 긴장한다. 여자는 온몸을 떨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지만 현기증이 나서 버틸 수가 없다. 이거 멈춰줘. 나 할 말이 있어. 그냥 지금 말해야겠어. 여자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말했지만 약이 오른 남자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결국 너 때문에 죽었어. 넌 자식이 죽어가는 것도 외면한 독한 년이야. 알아?
-말은 바로 해. 연희가 내 딸이야? 그리고 우린 이혼했어. 내가 왜 그래야 되는 건데 왜! 막말로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잖아!
흥분한 여자의 말에 울분에 찬 남자의 동공이 흰자위로 덮인다. 여자가 하얀 거품이 이는 남자의 눈을 본다. 흠칫한 여자가 주사기를 뽑으려 몸을 외로 비틀어보지만 흥분한 남자가 먼저 여자 위로 올라 타 버린다. 남자는 여자의 목을 움켜쥐고 손아귀에 힘을 준다. 죽어! 죽어버려! 원하는 대로 죽여줄게! 쓸모없는 년. 죽어! 죽어!
반쯤 찬 채혈낭을 매단 여자가 온 몸을 버둥거린다. 버둥거리는 여자의 팔에서 주사 바늘이 뽑혀 제 멋대로 나부끼다가 주저앉는다. 붉은 피로 뒤엉킨 왼팔과 백짓장처럼 하얀 오른팔이 허공에서 미쳐 날뛴다. 헤믈레 클락의 추는 여자의 왼팔과 오른팔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남자는 정신없이 부엌으로 향한다. 비틀거리며 싱크대를 휘젓던 남자가 정수기 코크에 컵을 대고 눌러보지만 컵이 제멋대로 이탈을 한다. 남자는 컵을 던져버리고 정수기 코크를 앞으로 재껴 입을 갖다 댄다. 물이 남자의 입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며 넘쳐흐른다.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진다. 남자의 정수리를 향해 정수기 물이 흘러내린다. 하얀 와이셔츠 가슴팍에서 희석된 핏빛의 물이 나선형으로 얼룩진다.
남자가 다시 여자의 방을 향해 움직인다. 방은 여전히 캄캄하다. 여자는 물에 젖은 봉제인형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있다. 남자는 뭘 해야 좋을지 잠시 머뭇하다가 창가로 다가간다. 침묵하던 암막 커튼의 입을 거세게 잡아당긴다. 어둡고 탁한 여자의 방이 처음부터 싫었다. 일이 끝나면 이 커튼부터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커튼이 감추고 있었던 것은 화려한 빛이나 신선한 공기가 아니다. 굳게 닫힌 또 다른 문. 방 속의 방. 여자는 왜 여기에 암막 커튼을 달았을까. 남자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듯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깜깜한 방안에는 침대와 흔들의자가 보인다. 남자가 왼발을 집어넣자 센서로 불이 켜진다. 남자가 멈칫한다. 침대에 누군가 있다. 남자는 홀린 듯 침대로 다가간다. 사내아이가 누워있다. 손과 발이 비정상적으로 꺾이고 한쪽 입 꼬리가 눈과 맞닿을 듯 일그러진 안면이 힘겨워 보인다. 잠을 자는 걸까, 죽은 걸까. 남자가 아이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리자 아이가 눈을 뜬다. 살아있다.
어리둥절한 남자의 눈에 흔들의자에 놓인 서류 봉투가 보인다. 남자는 봉투를 들어 속엣 것을 빼낸다. 그것은 유전자 검사 결과 남자의 이름과 손지훈이라는 두 사람이 서로 부자관계임을 증명한다는 서류다. 이게 무슨……. 남자는 사내아이를 돌아다본다. 지, 지훈이? 남자가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입을 쩍 벌리며 과장되게 웃어 보인다. 남자는 소스라치며 서류 봉투를 떨어뜨린다. 바닥에는 다른 서류가 하나 더 떨어진다.
남자의 손에 손지훈이라는 사내아이에 대한 출생증명서가 들려 있다. 서류대로라면 여자가 이혼을 하고 집을 나간 지 7개월 만에 태어난 아이다. 그리고 RH-B라는 낯익은 알파벳이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그 때 사내아이가 남자를 보며 소리 내어 웃는다. 조용히 해! 남자는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남자를 보다가 천정을 보다가 또 다시 남자를 보며 웃는 걸 멈추지 않는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본다. 천정에는 남자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남자가 뒷걸음을 친다. 오른쪽 주먹이 저려 온다. 남자는 여자의 침대로 돌아와 여자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일어나. 일어나서 설명 좀 해봐. 일어나! 그러나 창백한 여자의 얼굴은 깨날 조짐이 없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꾸민 거야! 일어나! 일어나!
헤믈레가 울린다. 늘어진 여자의 몸을 격렬하게 흔들던 남자가 헤믈레를 쳐다본다.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대던 남자는 의자를 들고 헤믈레 클락을 향해 돌진한다. 시계 앞 유리가 깨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헤믈레는 계속 울린다. 남자가 시계추를 뽑아내려 하다가 가만히 추를 응시한다. 골드컬러의 둥근 추에 남자의 얼굴이 사라졌다가 이내 나타나는데 거기엔 사내아이와 똑같은 남자의 얼굴이 있다. 추는 남자의 얼굴에서 이내 멈춘다. 열두 번쯤 울렸을까. 1월 1일인가. 12월 31일인가. 어쩌면 12월 32일인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원하던 시간,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시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