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사람들은 집을 장만할 때 부모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요." 평범한 신혼부부가 내집 마련을 하는 과정은 그 가정 역사나 마찬가지다 .
단칸방에서 시작해 첫째 아이를 낳고, 좀더 넓은 전셋집으로 이사가고, 둘째를 낳고…. 이 과정에 설움과 눈물이 교차하고 때로는 행복에 웃음 짓기도 한다.
서울 연희동에 사는 김미현 씨(36ㆍ가명)는 결혼 10년차 전업주부다.
94년 결혼 당시 첫 살림을 차린 곳은 서대문구 남가좌동 보증금 2400만원짜리 다세대주택 반지하. 당시 가진 돈은 고작 100만원으로 2300만원을 융자 받아야만 했다.
당시 김씨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첫째를 임신하고 그만뒀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신랑은 지하방에서 아기를 키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임신 9개월 만삭인 몸으로 멀리 강서구 가양동 보증금 4000만원짜리 17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기존 보증금 2400만원에 적금 600만원, 또다시 융자를 1000만원 받았다. 큰애를 낳고 다시 알뜰하게 적금을 부어나갔다.
전세 만료기간이 되자 집주인은 집을 팔았다며 나가기를 권했다. 우연찮게 그 때도 둘째 애를 임신해 만삭이었다.
발품을 팔아 찾은 아파트는 강서구 방화동 22평짜리 아파트. 중개업소에서는 보증금 5000만원을 요구했다. 남편과 고민 끝에 전세 계약을 하기로 결정하고 2주 만에 그 중개업소를 다시 찾았을 때는 전세금이 올랐다며 1000만원을 더 요구했다.
결국 기존 전세금 4000만원에 적금(800만원)과 융자금(1200만원)으로 이사했다. 기존 융자금도 갚지 못한 상태에서 또 이사를 해 융자금이 두 배로 늘어난 상태였다.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곳곳에서 전세금이 폭락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집주인은 떨어진 전세금만큼 1200만원을 돌려줬다. 이 돈으로 융자 금 일부를 갚자 내집 마련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초기 자금이 적게 들어간다는 이유로 경기도 김포 32평짜리 지역조합아파트를 98년 계약금 1500만원에 매입했다. 계약금은 남편 퇴직금 중간 정산 분으로 충당할 수 있었지만 중도금은 다시 융자금에 의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시공사에 문제가 생겨 입주가 3 년이나 지연된 것이다. 외환위기 여파로 남편 직장에서 보너스도 줄어든데다 융자금 대출에 대한 이자를 꼬박꼬박 납부하자니 생활비를 대기도 너무 힘겨웠다.
결국 김씨는 어린 두 딸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도 몸이 아파 2년 만에 그만뒀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주인은 전세계약이 끝나기 무섭게 보증금을 7000만원으로 대폭 올렸다. 무려 2200만원이나 올린 것이다.
남편과 상의한 끝에 결국 서울 연희동 친정집 더부살이로 들어가게 됐다.
보증금 4800만원은 중도금 대출금을 제외한 융자금을 갚았다. 손에 남 은 돈은 2300만원. 조합아파트 중도금 1.5회 납입분밖에 되지 않았다.
더부살이도 2년이 돼 가던 무렵. 남편은 직장을 여의도에서 강남 삼성 동 외국인회사로 옮겼다. 김포에서 삼성동까지 출근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큰 이익을 보지 못하고 김포 아파트 분양권은 팔았다. 팔고 나니 김포 개발계획이 발표되며 아파트 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
그 후 친정 주변으로 아파트 분양권을 찾아 나섰다. 마침 홍은동에 입주 4개월을 앞둔 34평짜리 아파트를 찾았다. 분양가 1억7900만원에 웃돈 600만원을 주고 계약했다. 이 아파트를 계약하고 잔금을 치르기 전까지 3개월 동안은 결혼 후 처음으로 융자금 없이 살던 시절이었다.
2002년 김씨는 친정 더부살이에서 나와 입주하던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가슴은 벅찼다. 그 동안 남편에게 용돈 한 번 넉넉하게 주지 못한 일, 딸들에게 변변한 옷 하나 사 입히지 못한 과거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난 10년을 생각하며 김씨는 "갚을 돈이 남아 있기에 절약하며 아껴 살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