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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프로파일
일반개요
1. 위치와 지형
전주지역의 동쪽 끝은 우아동 용계리의 북방산(520.5m)으로 북위 35。 49′04″, 동경 127°14′20″이며 서쪽 끝은 도도동 쌍강리로 북위 35°52′54″, 동경 126°59′57″ 남쪽 끝은 모악산이며 북위 35°43′20″, 동경 127°05′12″이며 북쪽 끝은 화전동 신정리로 북위 35°53′47″ 동경 127°03′54″로서 총 면적은 206.33㎢이다. 이러한 곳에 위치한 전주는 남서로 뻗어있는 노령산맥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쪽으로는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완산칠봉에 둘러 쌓여 있으며, 남쪽으로는 아늑한 분지를 형성하고 북쪽으로 전주천을 따라 부채를 편듯한 모양으로 시가지를 전개하고 있다.
전주와 같은 위치에 있는 도시로는 우리 나라에서는, 대구, 경주지역과 세계에서는 일본의 동경, 미국의 오클라호마, 중국의 청도 난주, 이란의 테헤란 등이 있다.
2. 지역구분
전주는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로서 동쪽으로는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과, 서쪽으로는 김제시, 부안군과 서북쪽으로는 옥구군, 군산시와, 북쪽으로는 익산시, 완주군과 서남쪽으로는 정주시, 정읍시, 부안군, 고창군과, 남쪽으로는 임실군, 남원시, 순창군과 이어져있다.
전주시의 행정구역 편제는 2구 40개동(1,148통, 5,713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산구는 중앙동, 풍남동, 교동, 태평동, 중노송1 2동, 남노송동, 동완산동, 서완산동, 동서학동, 서서학동, 중화산1 2동, 평화1 2동, 서신동, 삼천1 2 3동, 효자1 2 3동 4동으로 총 23개의 동이 있다.
덕진구는 서노송동, 진북1 2동, 인후1 2 3동, 덕진동, 금암1 2동, 팔복동, 우아1 2동, 호성동, 송천1 2동, 조총동, 동산동 총 1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3. 기후
기후란 기온, 강수량, 바람 따위가 어우러져서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난 것의 평균 상태를 말한다. 전주시의 한해 평균 기온은 섭씨 12.4도인데 이는 서울의 한해 평균 기온인 섭씨 11.1도보다 높기는 하나 우리 나라 중부 지방의 평균치와는 큰 차이가 없다.
전주시의 한해 평균 강수량은 1,240.5밀리미터로서 서울과 비슷하나 인근 지역인 김제시, 고창군, 부안군의 한해 평균 강수량은 1,100 밀리미터쯤이다. 강수량의 계절 분포를 보면 대체로 월, 7월, 8월의 석 달 동안에 내린 비가 전체 강수량의 반이 넘는다.
4. 인구
1999년 통계에 따르면 182,919세대에 총 611,921명이 전주에 사는 것으로 집계됐다. 남자인구는 302,510명이며, 여자는 309,411명이다.
"99년 총인구를 5세 연령계층으로 분류했을 때 가장 많은 계층은 25∼29세로 58,345 명(총인구의 9.6%)이며 그 다음으로 많은 계층은 15∼19세로 57,076명으로 9.3%를 차지하고, 70세 이상도 총인구의 3.7%인 22,432명으로 나타났다.
연령별인구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30세 미만 인구가 310,000명으로 51.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99년의 노령인구(65세 이상)는 36, 371명으로 전체인구의 6.0% 점유하고 있는데 이는 75년 2.9%, 85년 3.5%, 95년에는 5.0%로 계속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노령화 지수(연소 층 0∼14세 인구에 대한 노령층 인구의 비율)는 "75년 7.9%, "85년 11.4%, "95년 19.9%, 99년 26.1%로 사회가 점차 노령화 사회로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5. 교육
도내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식 교육기관은 전북공립소학교(현 전주 초등학교)로 1897년 설립되었으며, 사설 교육기관은 전주시흥학교로 1900년에 설립되었다. "98년 4월 통계에 의하면 총 학생 수는 177,54명으로 전체시민의 29.6%로서 시민 3.4명 중 1명이 학생인 셈이다.
전주에 유치원은 99개, 초등학교는 52개, 중학교는 28개, 고등학교는 27개, 전문학교 3개, 대학교 3개가 있다.
6. 전주기행
1) 전주가 자랑하는 음식
① 비빔밥
일찍이 평양 냉면, 개성 탕반과 함께 조선의 3대 음식으로 널리 알려진 전주 비빔밥의 경우 격식에 맞게끔 제대로 만들자면 자그마치 30여 가지의 많은 재료가 들어간다.
얼핏보기에 매우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엔간히 복잡한 조리 과정과 지극한 정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전주비빔밥이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밥만 하더라도 그냥 보통 밥이 아니다. 닭 삶은 물과 암소 등심 삶은 물이 혼합된 국물로 지은 고두밥이기 때문에 그만큼 맛이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요즘들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름난 비빔밥 전문 업소로는 중앙동에 소재한 "가족회관", "한국관"(금암동), "고궁"(덕진동)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돌솥밥 전문점으로는 "반야돌솥밥"(중앙동), "오곡돌솥밥"(중앙동), "큰집돌솥설렁탕"(경원동)등이 유명하다.
② 콩나물 국밥
전주의 음식문화에서 주연 배우는 단연 콩나물이다. 콩나물이 빠진 전주 음식이란 이를테면 앙꼬 없는 진빵과 다름이 없다. 콩나물이 들어가야만 비로소 전주 음식다운 맛을 낼 수가 있다. 이렇게 전주 음식에 핵심이 되는 콩나물의 진가를 느끼기 위해서 전주의 맛 봐야 될 대표적이고 유명한 음식이 바로 콩나물 국밥이다.
콩나물 국밥은 미리 간수로 얼추 삶아 놓은 콩나물을 질박한 뚝배기에 밥과 함께 나눠 담아 간수를 부어 숯불 위에서 1인분씩 따로 끓여낸다. 김치나 깍두기와 함께 파, 깨소금, 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이 들어가고 쇠고기 자장, 생달걀 등이 웃기로 얹어진다. 조리된 국밥에다 각자의 식성에 따라 새우젓으로 적당히 간을 맞춘 다음 다시 숭숭 썬 팡과 깨소금 등 양념을 재량 것 넣어 먹는다.
전주에서 유명한 콩나물 국밥집으로는 대개 일반에 원조라고 알려져 있는 남문시장 안에 자리잡고 있는 "평화옥"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한일관", "삼백집", "삼일관"등이 있다. 또 요즘 들어 부쩍 각광을 받고 있는 "왱이집"을 들 수 있다.
③ 전주 팔미
전주에는 맛 문화의 원천을 이루는 중요한 식료들이 많다. 참고로 전주를 알리는 각종 길라잡이 책에 소개된 온고을 전래의 대표적인 맛감 여덟가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ⅰ) 파라시: 음력 팔월 무렵 서낭골, 산성골, 남고진, 안터골, 대성골 등지에서 생산되는 감을 가리킨다.
ⅱ) 열무: 기린봉 일대와 효간치(구이동) 등지에서 출하된 열무를 가리킨다.
ⅲ) 녹두묵: 전주부성의 자랑거리였던 교동 녹두포샘의 묵을 가리킨다.
ⅳ) 서초(西草): 부성의 변두리였던 소양 대흥골, 상관 바치골에서 생사된 담배를 가리킨다. 서양에서 건너왔다 해서 담배를 서초라 불렀다.
ⅴ) 애호박: 토양이 좋은 신풍리(송천동) 산동에서 생산된 애호박을 가리킨다.
ⅵ) 모자: 한내(대천)와 남천, 서천의 맑은 물에서 자란 모래무지를 가리킨다. 잉어과에 속하는 모래무지는 냇바닥 깨끗한 모래 속에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민물고기로서 특히 모자조림이나 모자부침개(지짐이), 모자매운탕 등은 맛이 좋기로 일찍부터 소문나 있다.
ⅶ) 게: 한내를 비롯하여 남천, 서천, 남고천, 반석천, 다가천, 가련천, 삼천천 등 전주천 지류에서 잡힌 민물게를 가리킨다. 여염집에서 아낙네들이 갖은 양념을 하여 내놓는 게찜이나 게장조림은 맛이 하도 기가 막혀 흔히 밥도둑이라 불렀다고 한다.
ⅷ) 무: 전주 인근 삼례의 황토밭과 신풍리 산동에서 생산된 무를 가리킨다.
④ 전주십미
이에 든 여덟 가지 외에 두 가지를 추가하여 전주십미라 부르기도 했다.
ⅸ) 콩나물: 삼시 세 끼를 거의 상식하다시피 하는 주민들의 식습관에 따라 부성 일원에 걸쳐 콩나물 재배가 성행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수질이 좋은 교동 녹두포 샘물과 상정골 노내기 샘물로 기른 콩나물을 가리킨다.
ⅹ) 미나리: 서원고개(화산 서원치) 일대의 미나리꽝에서 생산된 미나리를 가리킨다.
2) 전주에서 열리는 주요 축제 및 행사
① 풍남제
: 전주의 풍남제는 어느 한 종목만을 위주로 하는 단일 축제가 아니라 다양한 종목들을 한데 모아 한꺼번에 큰 마당으로 벌이는 종합 민속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풍남제의 시작은 1959년이며, 그 해부터 열린 "전주시민의 날 축제"가 풍남제의 전신이다.
시민의날 축제는 1968년 풍남문 중건 20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전주풍남제"란 이름으로 시청에서 주관하여 실시하다가 1995년 문화부장관의 허가로 사단법인 "전주풍남제전우원회"(이사장 송기태)가 결성되면서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곤 주도의 "시민의 날 축제"에서 민간 주도의 "풍남제"로 축제 명칭과 주관처가 바뀌었다.
옛날부터 유명했던 전주의 단오난장이 오늘날 풍남제의 모체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전주 풍남제는 해마다 단오절에 맞추어 8개 분야 30여 종목에 걸친 대규모 행사를 시내 요소 요소에서 장장8일 동안 펼친다. 풍남제의 주요 행사 내용을 종목별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ⅰ) 단오난장
난장의 사전적 의미는 정해진 장날 외에 특별히 며칠간 터놓은 장을 뜻한다. 시장이 지닌 상업적 기능과 백성들이 바라는 오락적 기능이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룬 축제의 큰 마당이다.
오랫동안 역사의 뒤란에 묻혀 있다가 풍남제의 시작과 함께 다시 햇빛을 보게 된 전주의 단오난장은, 그래서 풍남제의 개막을 알리는 전야제 행사의 일환으로 열리기 시작하여 풍남제 폐막 때까지 계속된다. 난장에서는 전주가 자랑하는 각종 향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먹을거리장터(요즘 많이 쓰이는 먹거리는 잘못된 말임)를 비롯하여 풍남장사씨름대회, 궁술 솜씨를 겨루는 무과급제 재현, 태껸 시범, 민속장기대회 등 전통무예 및 오락과 길쌈, 짚신삼기, 전통혼례와 장례, 대장간, 지공예 등 민속생활 시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짐으로써 서민들 생활의 애환을 푸짐하게 담아낸다.
ⅱ) 성황제
본래 성격이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례의식이기 때문에 성황제는 풍남제의 개막을 알리는 전야제 행사의 일환으로 풍남문 앞에서 거행된다.
ⅲ) 기접놀이
한반도 제일의 광활한 경작지를 바탕으로 특히 농업이 발달했던 전북 지방에서는 정월 대보름 명절을 맞아 마을과 마을간에 농기를 가지고 집단으로 놀이하는 풍습이 예부터 생행해 왔다. 기를 도구로 사용하는 전통 놀이로는 전주의 기접놀이말고도 익산의 기세배 놀이를 비롯하여 농기뺏기, 농기맞이 등 여러 형태가 있다.
② 대사습 놀이
사습은 스승을 두지 않고 저 혼자 스스로 배워 익히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거기에 큰대자가 붙는 것은 스승의 도움 없이 제 실력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신인 등용문이란 뜻쯤 되지 않을까.
판소리를 중심으로 해서 1975년부터 해마다 단오절에 개최되는 현행의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는 판소리 명창부, 판소리 일반부, 가야금 병창부, 농악부, 무용부, 기악부, 시조부, 민요부, 궁도부 등 9개 종목에 걸쳐 민속문화예술 분야의 출중한 재목들을 배출해 오고 있다.
③ 종이축제
1999년 전주에서 새롭게 탄생했다. 이름하여 "전주종이축제"이다. 대표적인 민족문화 유산인 전통 한지의 우수성과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사라져 가는 한지를 부흥시켜 우리 제지 산업의 세계화를 이루기 위한 초석으로 삼을 목적으로 9월 10일부터 14일까지 닷새 동안 덕진체련공원에서 열렸다.
이 행사로는 "한지의상 패션쇼", "한지팩 미용강좌", "한지공예교실","한지 제작과정 실연", "닥종이 인형전", "한지공예대전 수상작 전시회", "전통부채 재현 전시회" 등과 "가족 창호지 문바르기", "종이로 본 인간의 세계"등이 열렸다.
우리 전통 한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두말 하면 잔소리가 된다.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란 말이 뜻하는 바는 비단의 수명이 기껏 500년인데 비해 종이의 수명은 자그마치 1,000년이나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한지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내구성과 통기성, 유연성, 단열성, 방음효과, 습도 조절 능력, 자외선 차단 기능 등의 특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창호지나 장판지로 실생활에 유효하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책종이나 화구로 쓰임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높은 학덕과 예술혼을 담는 그릇의 구실을 훌륭히 수행해 나왔다. 그밖에 생활용품과 공예품 등을 만들어 종이문화를 꽃피워 왔다.
④ 전주 국제영화제
전주에서 개최되는 다른 축제들이 다분히 전통 및 민속과 연관된 과거 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에 영화제는 첨단 문화를 통한 새로운 전통의 창출을 꿈꾸는 미래 지향적 성격을 지닌 축제라고 말할 수 있다.
3) 전주의 절경
① 전주팔경
ⅰ) 기린토월(麒麟吐月): 동으로 비껴 솟은 "기린의 상"인 수호봉 정상에 비가 갠 후의 달로 솟아오르는 여의주 같은 달의 모습
ⅱ) 한벽청연(寒碧晴烟): 옥류동 아래 산한수벽부일루인 한벽당에서 조망하는 청아한 풍경.
ⅲ) 남고모종(南固暮鐘): 해질녘에 남고진의 저녁놀을 가르며 울리는 남고사의 범종 소리.
ⅳ) 다가사후(多佳射帿): 다가천변 물이랑을 끼고 한 무리의 백설 같은 입하화(立夏花)는 호접(胡蝶)인 양 날리는데 삼현 육각 선율에 기녀들의 연연(涓涓)한 춤가락은 옥색바람에 버들가지 쏠리듯 반공중에 묻힌다. 무관, 한량들이 호연지기를 기르는 오시관중의 초점인 과녁판을 겨누고 쏘아대는 일대장관의 풍정을 집약하여 부각시킨 경관.
ⅴ) 비비낙안(飛飛落雁):
달빛은 천만 쪽으로 탄저(灘渚)에 부서지고 어화에 꿈 실은 고깃배가 오르내리는 한내(大川) 백사장 갈대 숲에 사뿐히 내려앉는 기러기 떼를 비비정(飛飛亭)에 올라 바라보는, 한 폭의 수묵화를 닮은 정경.
ⅵ) 덕진채련(德津採蓮): 풍월정에 앉아 저녁노을과 달빛을 끼고 뜸부기 우는 호면(湖面)의피리 소리 실은 어화에 젖은 채 대안의 승금정(勝金亭)을 내다보는 덕진연못의 연꽃 풍경.
ⅶ) 위봉폭포(威鳳瀑布): 폐허에 홀로 앉아 옥으로 포말져 떨어지는, 혹은 인간이 보면 질투할까 봐 심산유곡을 돌고 돌다가 홀로 부서지는 폭포의 비경.
"위봉폭포"의 현주소는 완주군 소양면 추줄산 산번지이다.
ⅷ) 동포귀범(東浦歸帆):
거울 같은 봉상, 봉실봉을 내다보며 고산천을 돌고 마그네 선창부두, 만가리천을 돌아 닫는 소금배, 젓거리배, 시탄배, 상강배, 곡식배 등의 행렬이 만드는 산수화 같은 풍경. "동포귀범"의 옛 거주지는 완주군 용진면이다.
②전주십경
8경에다 2경을 보탠 것이 전주십경이다.
ⅸ) 곤지망월(坤止望月): 목마른 말을 몰아 남천, 서천에서 목마름을 달래주고 바라보는 달맞이다.
ⅹ) 남천표모(南川漂母): 물버들이 늘어선 옥류동, 한계동 아래 안경다리, 남천교 천변가로 삼삼오오 운치 싣고 앉아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풍정은 함춘원(含春苑)이다.
③ 한옥지구
자그마치 1,3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고도로서의 전주시의 정체성을 집약적으로 드러내 주는 흔적들은 시내 어디서나 쉽사리 만날 수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밀집해 있는 전통 한옥들의 존재는 문화도시로서의 전주를 가장 전주답게 특징지어 주는 구실을 한다. 두 곳의 골목길을 지나다 보면 온고을이라는, 옛냄새 물씬 풍기는 그 아름다운 이름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춘 채 피부에 와 닿음을 느낄 수가 있다.
④ 한솔종이 박물관
"자연과 문화, 인류의 만남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창조" 하려는 이념하에 국내 최대의 종합제지사로 성장한 한솔은 정보와 문화의 그릇인 종이의 생산을 통해 국민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그간의 성과를 국민에게 환원하는 의미에서 한지의 고장 전주에 한솔종이박물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박물관측이 밝힌 건립의 변이다.
박물관의 내부는 인간과 종이와의 오랜 인연을 순서적으로 보여 주는 아홉 가지 테마에 따라 구성해 놓았다.
ⅰ) 만남: 종이의 고향인 자연의 숲과의 만남의 장소.
ⅱ) 혼돈: 종이 시대 이전의 각종 기록 매체를 다양하게 보여 주는 장소.
ⅲ) 탄생: 마침내 발명된 종이의 도움에 힘입어 인류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장소.
ⅳ) 대화: 종이를 이용하여 인류가 누려 온 풍요하고 편리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소.
ⅴ) 동행: 인간의 문화적 동반자로서의 종이에 관한 정보와 지식의 현황을 흥미롭게 제공해 주는 장소.
ⅵ) 약속: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영원한 친구로서 종이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
ⅶ) 희망: 박물관 관람을 사실상 마감하고 정리하기 위한 장소.
ⅷ) 추억: 전통 한지를 소개하고 재현하는 장소.
ⅸ) 출항: 공장 견학을 통해 종이의 실제 제작 과정을 알아보는 단계.
(출처: 윤흥길의 전주 이야기)
역사적 관점.
A. 도시의 역사
1. 도시의 건설
A-1 이 도시는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우리 전주는 한반도 서남부지방에 자리한 전라도의 행정, 군사, 교통, 산업, 문화의 중심지로서 1천년을 내려왔다. 백제시대에는 완산주라 칭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최초로 전주라 불리우게 되었고 조선조 영조4년에는 전라관찰사를 두어 전라감영의 소재지로서 명실공히 전라도의 중심지로 멀리 제주도까지 통괄하였다.
해방후 1949년 8월 15일 전주시로 개칭하고 1989년에는 완산, 덕진구청을 개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삼한시대 : 마한에 속함
- 백제시대 : 완산이라 부름 (위덕왕 원년)
- 통일신라 : 완산주를 전주로 개칭 (757년)
견훤이 도읍「후백제」라 부름(892년)
- 고려시대 : 전주목을 둠 (983년, 성종 2년)
- 조선시대 : 완산유수부를 둠 (1392년, 태조원년)
전주부로 명칭변경 (1403년, 태종3년)
전라북도 소재지(1896년, 고종33년)
- 일제시대 : 전주면 설치 (1914년)
전주읍으로 승격 (1931년)
전주부로 승격 (1935년)
- 대한민국 : 전주시로 개칭 (1949년)
완산구 덕진구를 둠 (1989년)
A-2 이 도시를 건설한 개인적인 이유 혹은 집단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① 지리적인 요인(교통의 요지)
: 전주는 익산, 군산, 삼례, 진안, 김제, 정읍을 연결하는 도시로서, 모든 산과 들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② 정치적인 요인(행정도시)
: 중앙에서 호남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호남지역 전체를 관할할 만한 행정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춤. (호남지역의 최상위 도시로서 중앙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받고 하달하기에 좋은 곳)
③ 산업적인 요인(농업)
: 1900년 이전까지는 우리 나라의 주요산업이 1차산업이었다. 따라서 과거 우리 나라 도시의 산업기반은 주로 넓은 평야와 긴 강이었다. 전주는 낮은 산줄기에 둘러싸인 분지로 동남편은 산악지대를, 서북편은 평야지대를 거느리고 있는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농경사업에 적합한 도시였다.
그들의 철학과 신조는 어떤 것이었는가?
① 완전무결, ② 순수무후,
③ 원만구족, ④ 총체융화
: 전주는 과거 완산이라고도 불리웠다. 전주와 완산의 이 고장 고호(古號)에 대한 전영래(전주박물관장)의 고증에 의하면 전주와 완산은 동일한 어의로서 모두 「온전하다」의 「온」이란 우리말의 뜻을 지닌 글자라고 한다. 따라서 이 고장의 지명을 통해 본 이 도시의 철학과 신조는 다음과 같다.
「온」의 정신은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서 말한 천자용전(天子用全)의 지도이념이요, 이는 바로 이 지방의 조상들이 아득한 고대부터 지녀 내려온 이상이요, 전통정신이며, 향토정신이다. 「온」은 ① 완전무결, ② 순수무후, ③ 원만구족, ④ 총체융화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전주는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첫째 온전하고 흠이 없고(完全無缺), 둘째 뚜렷하게 갖추어져 있으며(圓滿具足), 셋째, 순수하고 티가 없고(純粹無垢), 넷째 모든 것이 어우를(總和融合)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A-3 이 도시의 원래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전주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完山)이다. 완산의 지명 원의(原義)를 볼 때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우리말 뜻을 지닌 글자이다.
그 이름이 바뀌었나?
완산 -> 전주 -> 후백제 -> 전주 -> 승화 -> 순의 -> 안남 -> 전주 -> 완산 ->전주
: 전주는 본시 백제의 완산인데 당나라 현경년간(의자왕 20년)에 백제가 망하고 신라에 속하였는데 경덕왕 때에 처음으로 전주(全州-전국을 9개주로 통괄했는데 9주의 군현의 명칭을 중국풍으로 고치면서 완산이 전주로 개명:757년)라고 불렀다. 신라가 쇠퇴하자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후백제라고 국명을 정했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나 고려 태조 19년에 후백제를 치자 안남도호부를 두었다가 23년에는 다시 전주(940년)로 바꾸었다. 성종 12년에는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按撫使)라 하였다가 15년에는 전주를 순의절도사(順義軍節度使)로 고치고 현종 9년에는 다시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라 하였다가 13년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이라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자 이태조는 조상의 어향 곧 왕가의 발상지라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높혔다. 태종 3년에는 다시 전주로 고쳐서 이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두 온전하다는 의미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째 온전하고 흠이 없다(完全無缺), 둘째 뚜렷하게 갖추어져 있다(圓滿具足),
셋째, 순수하고 티가 없다(純粹無垢), 넷째 모든 것이 어우르다(總和融合)
등의 뜻이 담겨 있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이 도시의 이름은 축복과 번영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B. 도시의 후기 역사
B-1 이 도시는 나라전체의 생활 그리고 특성과 관련하여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가?
① 호남평야를 기반으로 해서 수확되는 양곡을 나라 전역에 공급하는 역할.
: 전주는 제법 규모를 갖춘 산세를 등에 걸머진 채 한반도 제일의 곡창 지대를 양팔로 그득 보듬고 있다. 험한 산맥이 잦아들고 바야흐로 드넓은 평야가 시작되는 그 어름에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다도 그리 멀지 않고 평야부를 관통하는 교통 수송로 또한 매우 편리한 탓에 곡류와 임산물, 해산물 등 각종 물산이 풍성하고 다양하게 집결될 수밖에 없다.
특히 농경업이 국가 산업의 전부이다시피 하고 호구지책이 인생살이의 가장 중대사였던 옛날에는 먹을거리가 풍부한 고장 - 전주야말로 국가경제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도시라 하겠다.
(출처: 윤흥길의 전주 이야기)
② 씨족 문화의 태두
: 전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는 씨족이 23성(性)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짐
- 전주 국씨, 고산 김씨, 전주 김씨, 전주 도씨, 문화 유씨 전주파, 전주 박씨, 전주 애씨, 전주 연씨, 전주 오씨, 전주 운씨, 대흥 이씨, 전주 임씨, 전주 장씨, 완산전씨, 전주 정씨, 전주 주씨, 완산 최씨, 전주 최씨, 전주 추씨, 전주 필씨, 전주 호씨, 우주 황씨가 있다.
(출처: 내고장의 의미 찾기 - 전북편 p.25)
B-2 이 도시에서 특출한 지도자가 나왔을 때 이 도시에 대한 그들의 비젼은 ?
① 한 나라의 왕도
: 견훤으로 인한 37년간의 후백제의 도읍
※ 견훤의 일장 연설
-> "우리 나라는 삼국의 시초에 마한(백제를 말함)이 먼저 일어난 뒤에 혁거세가 나라를 세웠다. 그런 까닭으로 진한(辰韓-신라) 변한(卞韓-가야)은 우리 나라를 뒤따라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 개국한지 6백년이나 내려왔는데 의자왕 때 당 고종은 신라의 청에 의해서 소정방장군으로 하여금 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 김유신은 황산을 거쳐 사비(부여)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더불어 백제를 거꾸러뜨렸다. 지금 나는 전주에 도읍을 세우고 의자왕의 쌓였던 원한을 풀어줄 것을 기약하겠다"
이래서 견훤은 비로소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관서를 설치하고 부서를 임명하였다. 이때가 서기 900년(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이때부터 후백제가 망하기까지 37년간 전주는 왕도가 된 것이다.
(전주시, 우리 고장 전주, 1982, 전주시청, p.42)
② 전라북도지방을 관할하는 지방 중심지
: 신라 신문왕
※ 신라는 처음 하주(下州)를 비사벌(比斯伐- 경남 창녕)에 두었다가 낙동강 서변의 가야국을 아우르자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으로 옮겼으나 642년(선덕왕 11년)에 백제가 이를 점령하고 신라서변 40여성을 휩쓸고 낙동강변까지 진출하자 「압독」(押督- 지금 경산)으로 후퇴하였던 것인데 부여 함락 후에는 다시 「대야주」로 옮겼다가 거렬주(거창)를 거쳐 마지막 전주에 옮긴 것은 25년만인 685년(神文王5년)이었다. 이가 「완산주」(完山州)로서 대략 현재의 전라북도지방을 관할하는 지방 중심지가 된 것이다.
(전주시, 우리 고장 전주, 1982, 전주시청, p.115)
③ 외침이 있을 때 군량 보급지인 호남곡창지대를 보호하는 제 1의 도시.
: 충무공 이순신
※ 충무공 이순신은 "국가의 군량은 모두 호남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 만약 호남을 잃게 된다면 바로 나라를 잃는 것"이라 하였다.
임진왜란의 전황을 살펴보면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왜적들은 정명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수 십만 군대와 배를 동원해서 우리 나라를 침략해 왔다. 태평연월을 꿈꾸고 있던 조선은 아무대비책도 없이 성을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40일 동안에 삼경이 무너졌으며 우리 민족은 그들의 조총과 칼 앞에서 수도 없이 쓰러졌다.
오직 명맥을 유지한 곳은 호남이었고 이곳을 공략하기 위해 일본은 대군을 투입했으니, 이는 호남이 곡창으로 이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곡은 곧 총탄이나 마찬가지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물자이다. 당시 전라도 쌀은 해운을 통해서 선조가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한 의주까지 실려 갔으며 전쟁터에 보급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전라도 관군과 의병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고귀한 선혈로 곰치(완주군 소양면에서 진안으로 넘어 가는 고개)에서 적을 막아냈으며 이치(완주국 운주면 대둔산 입구에서 금산으로 빠져나가는 고개)에서 대첩을 이뤄낸 덕이었다.
곰치와 이치 싸움에서 적을 물리쳤기에 전주성이 보전되었고 전주성이 보전되었기에 정유재란(1597년)까지 5년 동안 전라도가 안전하게 군량보급과 병력보충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 장정들은 이순신 휘하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독성 싸움을 이겨냈고 행주대첩의 주축이 되었다. 또한 한성에 집결한 적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의병장 이정란은 왜군이 웅치혈전을 마치고 진안쪽에서 소양을 거쳐 공격해 오는 것은 64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300여명의 왜군을 무찌르는 등 혁혁한 공훈으로 전주부성을 지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 (서정욱, 멋과 풍류의 땅- 전북, 1997 p.28)
B-3 이 도시의 정부나 정치적 지도층에 어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적이 있었는가?
정부 고시가 (1970년대)
예로부터 전주는 호남평야를 기반으로 해서 다양하고 많은 농산물을 재배해 왔다. 1차산업이 주요 산업인 우리 나라에서 전주는 늘 재원이 풍부한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950년 6 25전쟁 후에는 먹을 것이 귀한 때라 더 많은 인구가 전주로 유입되어 인구 비율도 호남의 도시 중에서 당연 최고였다. 이렇게 넉넉한 재정을 갖추었던 전주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정부에서 쌀 가격을 시장원리에 맡기지 않고 정부 고시가를 시행해서 묶어 놓았다. 1970년대 이후 계속 인플레이션 되면서 공산품의 가격 상승 비율보다 쌀 가격의 비율이 낮아졌다. 따라서 정부고시가에 의해 상대적으로 쌀 산업은 소득이 감소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주로 쌀 산업이 중심이 된 전주시의 재원은 계속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인구도 많이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B-4 이 도시의 지도자들이 약속을 어긴 것이 있나?
6·25 때 - 인민군 제6사단 특공대는 금강을 건너 군산에서 한국해양대와 경찰 부대의 저항을 물리치고 20일 익산, 전주를 점령하였다. 이미 시민들은 이런 상황을 파악 중요한 살림살이들을 방공호에 묻고 남쪽으로 피난하고 있는데 당시 헌병대 차에서는 시민들을 향하여 "시민들이여, 안심하고 내 집, 내 고장을 지키십시오. 우리 국군은 지금 다시 반격 작전에 나섰으며 곧 개성이 수복되고 평양까지 진격해 갈 것입니다" 라는 방송을 계속하며 시내를 순회하고 있었다. 바로 그 다음날이면 인민군이 전주에 진입할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군 당국은 자신들만 안전하게 도망칠 계획으로 시민들을 속였던 것이다.
출처 - 전주시사 (전주시청) 1997년 - 640쪽
B-5 이 도시가 전쟁의 직접영향이 있었나?
전투가 벌여진 적 있나?
피흘림이 있었는가?
① 농민들의 봉기
- 명종 12년(1182년)3월에 주현군의 보승·정용과 관노·승려들의 합세로 일어났다. 이 봉기는 전주사록 진대유와 상호장 이택민 등이 관선을 건조하는 공사를 가혹하게 감독하여 이를 참을 수 없었던 농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보승·정용군은 전주의 주현군에 소속으로 주로 자영농민으로 구성된 병농 일치의 군인이었다. 이들이 반란의 주도세력이며, 여기에 관노가 가담했고 그밖에 불평을 가지 자들이 참가했던 것이다.
출처 - 전주시사 (전주시청) 1997년 - 253쪽
② 왜구의 3차에 걸친 전주성 침입
왜구는 고려말에 일본의 변민들이 배를 타고 와서 고려 세미(稅米)를 운송하는 조선(漕船)을 약탈하던 해적집단을 말하는 것인데 조선의 뱃길이 막히자 그들은 연안지방에 있는 조창(漕創- 세미를 보관하는 창고)을 습격하다가 드디어는 내륙까지 침입하여 닥치는대로 약탈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왜구에 관한 기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223년(고종10년)부터이다. 그러나 당시는 김해지방등 국부적인 곳에 그쳤으나 점차 전라도 해안지방을 휩쓸고 양광도(경기지방)에까지 화가 미쳤다.
이러한 본격적인 왜구의 약탈은 고려사 충정왕 2년(1350)조에 「왜구의 침입은 이때에 비롯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부터 1392년 공양왕 4년까지 약 40년동안 거의 매년같이 시달림을 받아 그 침략을 면한 지방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전주는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왜구에게 점령을 당한 일이 있다.
1376년(禑王2년)과 1378년(禑王4년), 1388년(禑王14년)에 발생했다.
이 세차례의 침입으로 인한 전주성 함락으로 관아건물이 불타고 김제 만경 인의등 여러고을이 짓밟혔다고 기록에 보이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③ 동학농민혁명의 완산 전투
1894년 4월 27일 동학군이 전주에 무혈입성하였다. 전주성에 입성 후 1894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의 전주성을 둘러싸고 농민군과 정부에서 파견한 경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완산 전투라고 한다.
이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농민군 약 600∼9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경군의 집중 공격으로 완산전투의 막을 내린 5월 3일에는 경군을 이끌었던 홍계훈이 500명의 농민군을 사살하고 총검 500여자루를 빼앗았으며 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고 보고하였다.
출처 - 전주시사 (전주시청) 1997년 - 368∼370쪽
④ 6·25 때 전주 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들
- 헌병대의 트럭에 실려 전주 농고 뒷산에서 수없이 처형되었다.
출처 - 전주시사 (전주시청) 1997년 - 639쪽
B-6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이 이 도시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아왔는가?
지도자들은 탐욕스러운가? 정치, 경제 또는 종교지도자나 기관 중에서 부정이 자행되고 있는가?
① 기두 죽동의 항거를 통해 본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의 대우
1182년 (고려 명종 12년) 전주에서는 기두죽동이 고을백성들에게 잔혹한 짓을 해온 벼슬아치에 대한 항거 사건이 발생하였다.
전주 사록으로 있는 진대유는 자신의 청렴을 내세워 고립됨을 기화로 백성들에 대한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고을사람들은 적잖이 고통을 받아왔다.
나라에서 정용보승군을 파견하여 관선을 건조하는 역사가 벌어지자 진대유는 상호장인 이택민과 더불어 감독하는 일을 맡았는데 너무나도 가혹하게 채찍질을 가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
이를 본 죽동은 참을 수가 없어 관노들과 함께 항거하여 진대유를 붙들어 산사(山寺)에 내쫓고 이택민의 집등 10여가호에 불을 놓아 태워 버리자 아전들은 모두 관아를 비우고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안렴사 박유보가 사건의 전말을 파악해서 수습하고자 당도했다. 따라서 반군들은 박유보에게 진대유의 죄상을 이야기해서 벌해 줄 것을 요청함으로 안렴사도 할 수 없이 진대유를 잡아들여 서울로 압송하고 반군을 타일렀다. 하지만 반군은 장차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듣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안렴사 박유보는 도내의 군사를 모아 이들을 소탕하려 하였으나 반군이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속수무책이었다. 4월이 되자 조정에서는 배공숙, 유 영등을 판견하여 사건의 전말을 밝히도록 하였다. 따라서 배공숙의 계획아래 죽동의 무리에 스며들었던 대정은 승도들과 내통하여 죽동외 10여명을 죽여 항거하던 무리의 대오가 안으로부터 무너뜨렸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안으로 몰려든 임용비 등은 나머지 30여명을 무차별하게 죽이고 성
안을 휩쓸고 물리침으로 죽동을 비롯한 반군을 진압했다.
이래서 죽동은 관리의 횡포에 항거하다가 헛되이 죽고 말았으나 이는 관리의 월권횡포에 대해 커다란 경종이 되었던 것이다.
② 조선조 말엽 이 지방 아전들의 부정과 폐단.
: 이 도시의 지도자들 특히 정부파견을 받지 않은 이 고장 출신의 지방관리들의 탐욕과 병폐는 극심하였다. 이들을 아전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자신들의 폐단을 무마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이조말엽의 전주 아전(衙前)은 민폐가 심하여 돈을 긁어모으고 고약하기로 나라안에서 으뜸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전주의 아전들은 어찌나 횡포가 심했던지 관찰사가 도임하면 성안에 들어서는 공북루 밖에다가 밀 송덕비를 세워놓고 뒷면에는 저희들의 이름을 새겨 아부를 했다.
그래놓고 관찰사가 만약에 저희들 뜻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관청기생으로 하여금 술좌석에서「강류불전석」(江流不轉石)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하여 은근히 협박을 하는 형편이었다.
관찰사는 강물처럼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가 흘러가는 처지지만 우리 아전은 바윗돌처럼 뿌리박고 있으니 우리를 굴려 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안하무인격이 된 아전의 폐단을 기른 것은 오히려 서울에 있는 권문세도가들이었다. 아전은 그들에게 수시로 뇌물을 바치고 아부하여 걸핏하면 상관을 고자질하고 업신여기는 풍토를 기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장안의 대가집 배경을 등대고 교만해져 드디어는 사대부를 욕보이고 상관을 누르며 아랫사람들에게는 잔혹하게 대하였다.
따라서 관노 사령배는 아전 앞에서는 노예처럼 대하여도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면서 내심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유유낙락할 수밖에 없었다.
B-7 이 도시에는 표어나 모토가 있는가? 그 의미는?
※ 민선 2기를 맞아 새롭게 전주를 바꾸자는 의미에서 "이제 전주를 바꿉시다."라는 표어를 만들었음.
『도시의 미래상』
① 중추관리기능 도시
도청소재지로 도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등 복합 기능 수행, 행정 기능을 중심으로 한 도 단위 기관 및 각 급 지방 단위 기관의 소재지로서 도 행정, 지방 행정, 산업경제, 금융기관 등 구조 공간상 전주시의 중추도시로 발전.
② 전통문화 예술기능 도시
후백제 도읍지 및 이조문화권 중심도시, 호남 예술의 중심지.
③ 교육·문화기능 도시
각 계층별 교육시설의 확충으로 전주 지방 도시생활권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교육중심지, 각종 문화시설의 확충에 따라 전주시의 문화성을 향상시킴으로서 권역내 문화중심지로 육성.
④ 관광·휴양가능 도시
역사성 부존 자원 및 주변 관광자원 등 이용한 광역적 관광「루트」설정. 관광 성격을 통과형 → 체재형 전환, 관광 지원시설의 확충 및 시내 관광과 전주권 관광과의 연계성 유지.
『전주시를 대표하는 기, 조, 목, 화』
① 전주시기
색채
바탕의 청록색은 청신하고 발랄하며 진취의 기상을 뜻하는 것으로 밝은 미래를 가진 전주시의 발전을 뜻하며 문장 전체의 색깔은 황금색으로 으뜸과 영광을 뜻한다.
도안
타원형의 중앙부분은 전주의 <전>의 첫소리 "ㅈ"과 <주>의 첫소리 "ㅈ"을 상하로 연결하며 호남의 대표적인 호남 제일 성이라 일컫는 풍남문을 상징한다. 끝없이 뻗어나간 타원형은 성곽으로서 전주시의 행정구역을 뜻하며 이는 관광문화 도시로서 무궁한 발전을 상징함.
② 시조(市鳥) - 까치
사철을 두고 볼 수 있는 텃새로서 생장력이 강하고 옛날부터 아침에 까치가 울면 기쁜 소식이나 손님이 온다는 전설을 가진 길조로서 우아하며 순박함을 표상하고 조선시대 나라 새로 기록된 적이 있어 이조발상지인 전주를 상징한다.
③ 시목(市木) - 은행나무
풍치수 가로수 정자목으로 심으며 수령이 길어 전주의 역사와 같으며 나무가 곧고 수형이 우아할 뿐만 아니라 부채 모양 잎의 단풍이 운치가 있고 공해에도 강해 고도 전주 시민정신을 잘 나타냄.
④ 시화(市花) - 개나리
번식력이 강해 시의 발전을 뜻하며 노란색 꽃 모양이 우아하고 군집형으로 전주 시민의 고상함과 끈기, 협동정신을 나타낸다.
『전주시민 헌장』
① 전주시민은 유서 깊은 이 고장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고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자.
② 전주시민은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여 보다 많은 향토의 복지를 가져오자.
③ 전주시민은 사업을 진흥하여 윤택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하자.
④ 전주시민은 맡은바 일터의 신성한 노동을 완수하고 즐거운 휴식을 갖자.
⑤ 전주시민은 봉건적 보수성을 버리고 항상 젊고 새롭게 살자.
⑥ 전주시민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여 민주발전의 선봉적 역군이 되자.
⑦ 전주시민은 애국애족으로 청사에 빛나는 시민이 되자.
『전주 바꾸기 3대 기본 방향』
① 인간중심의 녹색 환경도시
② 한국적인 문화예술 도시
③ 세계수준의 영상산업도시
B-8 오늘날 이 도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도시의 긍정적인 특징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말은 무엇인가?
① 맛과 멋의 수도
- 전주는 제법 규모를 갖춘 산세를 등에 걸머진 채 한반도 제일의 곡창지대를 양팔로 그득 보듬고 있다. 험한 산맥이 잦아들고 바야흐로 드넓은 평야가 시작되는 그 어름에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다도 그리 멀지 않고, 평야부를 관통하는 교통 수송로 또한 매우 편리한 탓에 곡류와 임산물, 해산물 등 각종 물산이 풍성하고 다양하게 집결될 수 밖에 없다. 특히 농경업이 국가 산업의 전부이다시피 하고 호구지책이 인생살이의 가장 중대사였던 옛날에는 먹을거리가 풍부한 고장이야말로 이상향 대접을 받기에 마땅했을 것이다. 바로 온고을의 유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쌀독에서 인심 나는 법이고, 배가 불러야 풍월도 읊어지는 법이다. 모든 문화예술은 여유의 소산이다. 의식주 생활에서의 여유는 필연적으로 맛과 멋을 낳게 마련이다. 맛의 문화는 끈끈한 인정 세태와 예민한 감각의 식도락을 낳는다. 그리고 멋의 문화는 풍류를 낳는다. 결국 그 풍류는 예술로 이어진다.
온고을 전주를 가리켜 맛과 멋의 수도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윤흥길의 전주 이야기, 신아 출판사, p.12∼13)
② 조선조 발원의 도시
-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과 조선 왕조를 이루는 전주 이씨 가문의 시조인 이 한 공의 묘소가 있는 조경단을 가지고 있는 도시다.
③ 고풍이 살아있는 도시
- 전통 한옥 보존지구가 있고, 버스 승강장이나 전화 박스 등 눈에 띄는 공공물에 기와를 올려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④ 문화와 예술의 도시
- 시내 어느 다방이나 식당 여관 같은 접객업소뿐만 아니라 작은 영세업소일지라도 예술작품을 즐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곳이든지 들어가 잠깐 내부를 살펴보면 일부 지식인들이나 상류층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에 한국화, 서양화, 문인화, 서예, 시서화 등등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도 무명 작가의 싸구려 작품이 아니라 누구라고 이름을 대면 얼른 알아들을 만한 유명 작가의 작품들이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윤흥길의 전주 이야기, 신아 출판사, p.32∼33)
2. 도시의 종교 역사
A. 비 기독교적인 종교
A-1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에 이 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의 종교적인 관습과 견해들은 어떤 것이었나?
민간신앙으로 사직제(社稷祭), 여단( 壇)의 무사귀(無祀鬼)신앙, 성황신(城隍神) 신앙, 관성신앙(關聖信仰), 당산제(堂山祭) 신앙, 농신숭배(農神崇拜), 세시풍속(歲時風俗), 덕진연못의 수신(水神), 속신(俗神)등 많은 신앙행위를 하면서 살고 있었다.
예) 사직이라는 사(社)는 토신(土神)을 말하며 직(稷)은 곡신(穀神)이다. 그러므로 사직제는 지신과 곡신에 제사하여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출처 - 우리고장 전주 (전주시청) 1982년
- 322쪽
A-2 이 도시에서 무당들, 사단주의자 집단 또는 그런유의 다른 이단들이 활동한 적이 있는가?
동학, 증산교, 민간 신앙, 무속인들의 활동이 있다.
B. 기독교
B-1 기독교가 언제 이 도시로 들어오게 되었는가?
또, 어떤 상황에 들어왔는가?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를 보내다.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이해 본국에 들어갔을 때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선교 상황 보고와 강연을 했는데, 1891년 9월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에서 한국 선교에 관해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때 신학생 테이트(한국명 최의덕)가 감동을 받았다. 또 1891년 10월에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개최된 전국신학교 해외선교연합회 주최의 집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반더빌트 대학교 유학생인 윤치호(尹致昊)를 강사로 초청해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듣고 한국의 현재 정세와 장래에 대해서 문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벅찬 감격으로 강연을 들은 맥코믹 신학교의 데이트와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 학생 존슨·레이널즈 (이눌서)·전킨(전위렴)등 네 사람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데이트는 지체하지 않고 미남장로교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에 한국 선교사 지원서를 냈다. 다른 세 사람도 이어서 지원했다. 그러나 남 장로교 외지선교부는 은자(隱者)의 나라(the Hermit Nation)로 알려진 한국에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재정적인 이유와 그 지역 선교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선교사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적인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결속해 한국 선교에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과 전킨의 신부 레이번 등이 동참 가세했다. 그들은 기도하며 선교본부를 깨우치는 방도를 강구하기로 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미국 남 장로회의 지역인 버지니아 주, 북캐롤나이나 주, 테네시 주 등에 있는 중요 교회들을 순방해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언더우드는 쾌히 승낙하고 각 지역의 교회는 물론 각 신학교, 노회, 교계의 각종 집회 등에 나가서 한국의 형편을 설명하고 한국 선교의 긴급성을 역설했다. 그들
의 열성은 더욱 높아져 교회 잡지에도 한국 선교에 관한 논문을 투고하며 1892년 2월에는 < 선교 (The Missionary)> 라는 잡지에 "왜 우리는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 라는 글을 실어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인가, 아닌가"의 중대한 일을 앞에 놓고 매일 오후 3시를 기도의 시간으로 정하고 기숙사의 방문을 닫고 마음을 같이해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구했다. 그들은 2년 안에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합심기도한지 불과 두 달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언더우드의 형으로서 사업가이고 ,미북장로회 선교위원인 언더우드 장로가 해외 선교자금이 부족해 고민중인 남장로회 선교부에 3천 달러를 보내온 것이었다. 여기에 선교사 언더우드 자신도 5백 달러를 보태어 보냄으로써 남장로회 선교부는 용기를 얻고 때마침 그리스 선교 방침을 중단하게 됨으로써 한국 선교 사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하고 있는 그들에게 "8월에 떠날 준비를 하라" 는 승낙전보를 보내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형제는 북장로회인이었음에도 남장로회의 한국 선교를 위해 교단을 초월해, 자진해서 도왔다. 그래서 초대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언더우드를 "남장로회 한국 선교의 아버지" 라고 불렀다.
미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테이트, 레이널즈, 전킨 등 3명의 남 선교사와 이미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지원을 한 매티, 볼링, 레이번, 데이비스 등 4명의 여 선교사 등, 모두 7명의 선교사를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이들을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일컫게 되었다. 당초에 한국 선교에 관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함께 기도했던 존슨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국 선교사로 오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존슨은 7인의 선발대보다 한 달 먼저 개인적으로 서울에 와서 모든 정세를 살피고 귀국한 후 때때로 동지들의 한국 선교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문서 저술 활동으로 뒤바라지를 했으므로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7인의 선발대중 남자인 테이트·레이널즈·전킨 등은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아 선교사로서의 모든 준비를 마치고 1892년 9월 7일 미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주관하는 한국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리고 한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들의 샌프란시스코 출항은 각자 날짜가 달랐다. 전킨 선교사는 후두염 치료 관계로 덴버에서 약 일주일간 머물게 되었고 레이널즈 선교사 부부는 전킨 부부를 기다리다가 뒤늦게 미국을 떠나게 되었다. 데이비스 양은 테이트 선교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양과 일행이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떠나오는데 마침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이자윤 서기관의 부인인 이씨가 함께 승선해 장기간의 항해를 하게 되었다. 도중에 두 여인은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일본 요코하마에 들른 테이트 남매와는 달리 데이비스 양은 이씨 부인과 함께 곧 바로 한국으로 오게 되어 1892년 10월 17일 제물포에 상륙했다. 그러므로 남장로회 선교사 7인의 선발대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도착한 사람은 여 선교사인 데이비스 양이었다.
한편 테이트 선교사와 매티 양은 일본에서 레이널즈와 전킨 선교사 부부의 일본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미북장로회 선교사로서 일영사전 편찬과 성경번역 사업에 공로가 있는 은퇴선교사인 헵번을 만나 여러 가지 지식을 얻고 그에게서 언더우드가 편찬한 한국에 문법책과 영한사전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그들 일행 6인의 선교사들은 같은 해 11월 3일 제물포에 상륙했고 그 다음날 서울에 도착했는데 이미 한국에 와있던 북장로회 선교사 마펫·그레이엄 리·빈턴 등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로써 7인의 선교사 일행은 모두 무사히 한국에 오게 되었고, 호남 선교의 길을 열게 되었다.
한국인 선교 담당자 - 정해원의 활동.
그후 1892년 말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레이널즈와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인 마펫이 선교 지역 책정 문제를 가지고서 호남의 초입인 충남 공주지방까지 말을 타고 답사한 일이 있었다. 구후 1893년 1월 28일 장로회 미션공의회에서는 예양협정(Comity Agreements)에 의해 선교 지역을 배정했는데, 호남지방인 충청도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선교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므로 남장로회 선교회는 앞으로 자기들이 선교를 할 호남지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준비과정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현지 답사와 선교중심 지역 지정 등에 관해 숙의했다.
이 당시 호남에는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으로 민심이 흉흉했기에 미국공사관에서는 선교사들이 직접 그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했다. 결국 그들은 믿을 수 있는 한국인을 선임해 파송하기로 했다. 자격으로는 의사소통의 원할함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쁨으로 영접한 신앙인이어야 하고 금전을 맡겨도 될 만한 인격자라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몇 명을 고려한 끝에 레이널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며 자신들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정해원을 적임자로 선정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우선 자신의 선교경비 중에서 정씨에게 전주에 가서 집을 구입할 경비와 여비 등을 마련해 주었다.
정씨는 1893년 늦은 봄 5 ∼ 6일 걸려서 도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서문 밖 지척에 있는 냇물을 건너 변두리 마을인 은송리(지금의 서부 완산동 지역) 뒷편의 언덕과 벼랑은 있으나 꽤 넓은 마당이 있고 행랑채가 딸려 있는 초가집 한 채를 52냥(미화 26달러 상당액)을 주고 구입했다. 6월에 집 마련을 마치고 이 사실을 서울에 보고한 후 정씨는 자기의 거처를 이 곳으로 옮긴 후 이웃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다니며 자기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차 온 사람임을 밝히며 부근의 냇가에 있는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시도했다.
출처 - 전주서문교회100년사 (전주서문교회)
1999년 - 74 ∼ 77쪽
B-2 기독교 공동체가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 또, 이것으로 변화는 있었는가?
① 일제 강점기에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켜서 민족운동을 주도
서문 밖 교회의 김인전 목사를 중심으로 동생 김가전, 조사 이수현, 청년 김종곤, 윤건중, 최종삼, 신일용 등 당시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이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여 신흥 학교 교사, 학생, 타 교회 장로, 집사, 교사, 청년, 시민들을 결집시켜 전주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이 독립 만세 운동은 간접적으로 한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으며, 자주 성이 담긴 현세적 실천성과 신앙관을 보여주며 전주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기회가 되었다.
전주 3·1 운동의 지휘자라는 이유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상해로 망명을 해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아 활동을 하다가 1923년 병고로 4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 그동안 외인묘지에 묻혀 있다가 1994년 임시정부요인 유해환국 때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다가공원에는 김인전 목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신사 참배 강경 대응으로 맞선 신흥 학교의 학생들.
출처 - 전주서문교회100년사 (전주서문교회) 1999년 - 281쪽
② 병원사업과 학원 사업을 주도.
기독교가 처음 전주에 들어 올 당시 전주에는 어떠한 의료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질병이 발생하면 무당을 통해 악귀를 쫓아내어 낫게 한다는 무속적인 방법 외에는 제대로 된 의료시술 하나 써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1897년 해리슨 선교사에 의해서 한국은 의교선교가 시작되었고, 그 해 11월 잉골드(Miss Mattie Barbara Ingold) 여의사가 전주에 와서 별도로 은송리에 초가를 한 채 마련하고 진료소를 두는 것으로 본격적인 의료사업이 시작되었다.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을 치료해 오던 중 해리슨 선교사의 노력으로 1902년 약 40평 규모의 진료소를 벽돌로 건축하여 병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진료소가 바로 전주예수병원의 효시가 되었고 1912년에는 병상 30개의 병원을 신축함으로서 전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까지 활발한 의료사업이 진행되었다.
또한 미국 장로회 선교회의 중요한 선교정책 중 하나는 교육선교였다. 처음에는 지방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성경학교를 열고 1899년에 14명의 남자들을 훈련시켰다. 1900년 9월 9일부터는 레이널즈 선교사의 집에서 레이널즈와 그 부인이 한 소년을 대상으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전주에서의 최초의 근대식 교육이었으며 신흥학교의 출발이었다. 1901년 7월 1일에는 교회에서 어린이 주일학교를 주일마다 시도하였던 해리슨 선교사가 그의 어학선생과 더불어 8명의 남학생을 모아놓고 주간학교를 시작하였다. 배움의 터를 은송리에서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로 옮겼고 학생수는 50여명이되었다. 1907년 선교회에서는 교육을 전담할 선교사를 파견해 오면서 교육사업을 본격화하였고 중등교육 과정도 시작하였다. 1908년 전주부중 서문안 당성동 기와집을 해리슨선교사가 차용해서 수업을 게속하였으며 학교 이름을 "예수교 학교"라고 하였다. 그 해 9월에는 희현당 옛터 북쪽기슭에 8칸 기와집을 교사로 건축하고 니스벳 선교사가 설립자 겸 교장으로 취임하고 이름을 "신흥학교"라고 개칭하였다. 1909년에는 조선정부로부터 사립 신흥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으면서 이 지역의 근대식 교육에 길을 열었다.
B-3이 도시에 있는 기독교는 발전하고 있는가?
정체상태인가? 감소상태인가?
정체상태이다.
개 교회 적으로는 성장하고 있는 곳도 있다.
(안디옥, 바울, 백양)
전주시 61만의 인구에 대하여 기독교의 교세는 20% ∼ 30%로 교인 수는 120,000명 ∼ 150,000명으로 추산한다.
출처 - 전주시사 (전주시청) 1997년 - 1284쪽
C. 관계들
C-1 기독교인들 간에 알력이 있었던 경우가 있는가?
있었다.
이로인한 결과로 교회가 분열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C-2 이 도시에서 교회가 분열된 적이 있는가?
① 전북노회의 분열
- 1939년 군산노회로 분리 창립되었다. 교권을 행사하고자하는 욕구에서 비롯됐다.
- 군산노회가 창립되고 행해진 대외적인 첫 행사는 신사 참배 결의와 노회원 일동의 신사참배였다.
②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분열
- 교회가 많아지고 점차 비대해지면서 총회에서 이루어지는 신학 사상과 지연과 인맥 등의 문제로 1952년 이후부터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어져서 활동하게 된다.
③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분열
- 대한 예수교 합동측은 1979년 교권 다툼의 심각한 파쟁으로 분열을 한다. 이 일로 인해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개혁측과 합동보수측 삼분되어졌다.
출처 - 전주서문교회100년사 (전주서문교회) 1999년 - 413쪽
전주시사 (전주시청) 1997년 - 1283쪽
자연적인 관점
1. 중요한 건축물들의 건축양식이나 장소나 위치적인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특히 이 도시의 정치, 경제, 교육, 종교적인 세력들을 나타내주는 건축물들이 있는가?
『정치적인 건축물』
① 풍남문(豊南門)
보물 제 30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풍남문은 일명 전주의 남문으로 불리면서 옛 전라감영이자 오랜 역사 ,문화의 정서가 깃든 전주부성의 상징적 존재로서 역사성을 간직하고있다. 따라서 전주의 남문은 조선 5백년의 역사, 명맥을 이은 수도 한성부의 상징적 존재인 숭례문인 남대문과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북 전주의 관문이자 상징인 풍남문은 고려 공양왕 원년(1389년)에 전주 부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남문으로 창건되었다. 그러나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당시 불타 소실되었던 것을 137년 후인 영조 10년(1734년)에 재건하여 명견루라 불렀다. 그후 영조 43년(1767)에 당시 성내를 휩쓴 정해년 대화재로 불타버려 그해 중건했지만,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 모습으로 수축하여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렀다.
② 전주 객사
전라감영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전주 객사의 원래는 전주부성 안에서 가장 으뜸인 감영현 도청구내의 북쪽에 있는 광대한 대지에 주관(主館)과 그 좌우에 양익헌(兩翼軒)을 가진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1914년 북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관통도로의 확장공사로 좌측의 동익(東翼)이 철거되고 현재는 주관과 서익(西翼)만 남게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는 경찰학교로 서쪽 광장이 쓰였으며 서익 건물 바짝 밑까지는 사유지로 매각되어 고층건물들이 들어서는 촌극을 빚기도 하였다. 북쪽의 넓은 공터도 주관 처마밑까지 개인에게 매각되어 체신청 건물이 세워지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으며 이 통에 추녀끝을 잘라내야 하는 등 보물의 원형훼손이라는 씻기 어려운 큰 무지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객사는 본디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고을마다 거의 관건물로 설치하였으며 그 규모는 대략 중앙에 주건물을 두고 그 좌우 동·서에 양익헌을 달았다. 대개 양익의 지붕은 주관의 높이보다 낮았다. 객관의 용도는 동국여지승람 광산현 객관의 성형 중창기에 표기되어 있다. 즉 "객관은 고을에서 가장 으뜸가는 간물로서 여러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것이며 동익헌은 귀빈의 숙박소이며 관찰사의 재판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적어놓고 있다. 그리고 주관 북벽 중앙(中央壁龕)에는 궐패(闕牌)를 걸었다. 궐패는 궐자를 크게 써붙인 액자로서 광무년 이전에는 "전패(殿牌)"라 하였는데 이는 군왕에 대하여 요배(遙拜)하는 전당으로 삼아 관찰사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하는 삭·망(朔·望)이나 국가의 대사(大事)날에는 분향지례(焚香之禮)를 거행하기도 했다. 또 관찰사 부윤(府尹) 판관(判官) 등 지방 고관들이 도임할 때는 먼저 이곳에 둘러 배례(拜禮)를 올렸으며 이밖에 조명을 띠고 내려오는 칙사(勅使)도 이곳에 머물러 교지(敎旨)를 전하였다.
전주객사의 세워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성종 2년에 서익헌을 개축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국왕에 대한 예를 행하던 곳으로 매월 1일과 15일에 관찰사가 분향의 예를 올리고, 국가경조시에는 관민이 합하여 의식을 거행했으며, 외객접대시 주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곳이다. 주관 앞의 현판에는 크게 「풍패지관」이라 써있는데, 그 이유는 중국사신이 전주를 보고 한 고조의 고향이 전주와 같다고 감탄하면서 전주를 풍패지향이라고 하였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보물 제 583호)
③ 경기전
경기전은 문자 그대로 조선 왕조를 개창한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경하(慶賀)하기 위해서 건립한 전각(殿閣)으로서 여기에 태조(太祖)의 수용( 容), 즉 태조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다. 경기전의 창건과 영정의 봉안(奉安)의 시기에 대하여는 『완산지』에 의하면 영락(永樂) 경인(庚寅) 즉 태종 10년(1410)에 창건되어 태조의 수용을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기전의 최초의 전호(殿號)는 어용전(御容殿)이었으며, 태종 12년 11월에는 이를 진전(眞殿)이라고 하였다. 전주 영전(影殿)을 경기전이라고 호칭한 것은 세종 24년(1442)의 일이었다. 경기전에 봉안하였던 최초의 태조영정은 태종 9년에 경주의 태조영정을 모사(模寫)한 것이었으며, 그후 세종 25년(1443)에 새로 그린 영전을 모셨다. 임진 정유왜란 중에는 정읍→아산→강화→묘향산 등지로 전전하며 보존되다가 광해군 6년(1614)에 경기전을 중수(重修)한 뒤에 경기전에 다시 봉안되었다. 숙종 9년(1683)에 다시 새로운 영정으로 교체되었고, 고종 9년(1872)에 서울 영희전(永禧殿)의 태조영정을 모본(模本)으로 새로 그린 영정을 경기전에 봉안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 새롭게 영정을 모사를 해서 옛 영정을 다른 곳에 보관을 하고 새로운 영정으로 교체를 했다.
경기전은 매년 사향(祀享)이 행해졌다. 세종 27년 의정부가 경기전 제위전(祭位田)을 혁파하고 그 제용을 국고에서 지출할 것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기전 사향은 선초 이래 행해졌던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사료의 부재로 그 시기나 규모를 알 수는 없다. 조선 후기의 경기전 제전 내용을 보면 『전라감영록』에 의하면, 경기전에서는 정조(正祖)제, 한식(寒食)제, 단오(端午)제, 추석(秋夕)제, 동지(冬至)제, 납향(臘享)제 등 매년 6차례 제전이 행해졌으며, 이 때 헌관(獻官)은 전라관찰사였으나, 관찰사가 신병(身病)등으로 유고일 때에는 도내 관인
들 중에서 관찰사의 위임을 받은 자가 헌관이 되었다. 헌관외에 전사관겸대축(典祀官兼大祝), 축사(祝史), 찬자(贊者), 알자(謁者), 재랑령(齋郞令) 또는 재랑참봉(齋郞參奉) 등 많은 제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관찰사가 차정(差定)하였다.
④ 조경단
지방 기념물 제 3호로 지정되었으며, 덕진에서 약 1km 들어간 건지산에 있으며 광무 3년 5월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전주 이씨 시조의 묘소로 정하고 「대한조경단」이라 하였다. 면적은 약 10,229평으로 이루어 졌다.
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대문을 남향의 문에서 20m 떨어져 비석이 있다. 비석을 대리석이며 너비 180cm, 두께 30cm, 높이202cm 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된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고 쓰여진 전제(篆題)가 새겨져 있다.
⑤ 전주사고
경기전 동쪽 담장 안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실록각(實錄閣)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전주에 사고(史庫)를 설치할 것을 결저안 것은 세종 21년(1439)의 일이었다. 그러나 전주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처음 보관한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세종 27년(1445)이었다.
『종교적인 건축물』
① 전동성당
전주는 조선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현이 순교한 카톨릭의 역사적 성지로 유명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지가 지금의 전동선당일 것이라고 추정됨으로서 이 자리에 성당을 짓게 된 연유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사 감독을 맡았던 임모라는 사람이 공사비를 떼어먹고 달아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전주 담임신부로 온 보드네 신부로부터 공사비를 꾸어 금광업에 투자하여 실패 돈을 받지를 못하자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1911년에는 폭풍우가 심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며, 신부의 집에 도둑이 들어 공사비를 훔쳐가 3년 정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의 헌금과 노력과 김창열이라는 독지가가 거액의 돈을 기부를하고 진안 장수의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착공한지 7년만인 1914년 성당이 준공이 되었다.
② 천주교 순교자 묘
지방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고 있는 천주교 순교자 묘는 종교사상 최초의 동정부부 일가의 순교자 묘역으로서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의 1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790년대 나라에서 천주교 박해가 한참 심할 때 전주의 한 동정부부는 끝내 각자의 동정과 정조를 지켜 마침내는 순교함으로서 세계 천주교 사상 처음의 숭고한 신화를 남겼다.
1785년 이지방 최초로 이승훈으로부터 천주교 전교를 받고 그 씨앗을 뿌린 유항검의 아들 유종철이었고 그의 아내였던 서울 장안의 명문세가 출신 이윤하의 딸 이누갈다(李柳惠)였다. 이 두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이들의 나이는 15살로 매우 이지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신랑 신부의 첫날밤을 맞는 신방은 밤이 깊도록 잠을 청하지 않고 천주를 위하는 기도만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신랑신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천주께 맹세를 했다. "우리는 천주의 뜻으로 오늘 혼배사의 성사를 치뤘소. 그러나 거룩한 성체의 뜻에 우리 스스로를 바치기 위해 내 귀한 아내인 당신과 더불어서 깨끗한 동정을 지키고자 하늘에 계신 마리아를 우러러 받들기로 하였고 당신은 나의 존경하는 아내이자 사랑하는 여매(女妹)인 것이오. 그러니 이 생명 다하도록 나의 사랑하는 누이동생인 유혜(柳惠)의 순결을 끝까지 지켜나가겠소."
신랑 유종철(일명 종선으로도 불리움)의 말에 신부 이누갈다는 다음과 같은 화답을 남겼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천주의 뜻으로 결합한 남편을 오라버니로 모시고 이 지상에서 천주의 고마우신 은혜를 받사옵고 이 미숙한 소녀 유혜는 당신종철을 일생을 두고 오라버니로 받들어 천주의 고마우신 은혜에 다시한번 보답하겠나이다."
이들은 이날 밤 동정부부가 되기를 다짐했고 죽을 때까지 그 맹세를 지켰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유혹이
있었다.
이누갈다 친정 어머니에게 보내는 옥중서신에서 "소녀가 시댁에 들어오던 날 평생에 쌓였던 온갖 근심이 완연히 풀린 것은 일찍이 마음에 맺고 결정하였던 원을 어떻게 보존하여 지낼까 염려하던 바 말할 수 없어서 근심, 걱정하였으나 우리 내외 처음 만나던 날에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 오누이 같이 살매, 그사이 혹독한 유감(有感)이 몇 번 있어 대개 열 번이나 거의 무너질뻔 하였사오나 존경하는 성현공로로 마귀의 계교를 물리쳤나이다 ···중략" 적어놓고 있다.
그러나 재래적인 인습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천주교를 봉행하는 이들 동정부부르 관아가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었다. 이미 이들의 아버지인 유항검과 윤지충, 권상연을 참수시켰고 이들에게 탄압의 손을 뻗쳤다. 그로부터 5년 유종철, 이누갈다 두 동정부부는 전라감영에 붙들려 혹독한 고문과 박해를 받았고, 물론 죄명은 천주를 섬긴다는 것이었다. 끝내 유종철은 1802년 전주형옥에서 교살이라는 극형으로 나이 20세에 순교를 하였고, 아내 이누갈다는 나흘만에 벽동의 관비로 가라는 선고를 받았다. 관비라 함은 관가에 찾는 손님들에게 서비스하는 일종의 위안부나 다름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일로인해 이 일은 면했지만 구후 곧바로 숲정이 형장으로 끌려가 끝내 처형되었다.
이들의 묘가 있는 전주 중바위는 지금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 있다. 1937년에 具마르시노 신부는 이들 동정부부와 유항검의 처 신희 ,유관검의 처 이육희, 유항검의 장조카 유중성 그리고 유종철의 동생 문철으 ltltls을 이서(伊西)에서 이곳 승암산(지금 치명자산)으로 옮겨 합장하고 큰 십자가를 세워서 그들의 신앙심을 만인들이 우러러보게 했다.
③ 천주교 순교지
전라북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주교 순교지(일명 숲정이)는 초창기 천주교 입교와 더불어 점철되기 시작한 교난사의 본산으서 1791년의 신해박해, 그리고 1801년의 신유대교난, 1827년의 정해박해, 1839년의 을해 대교난, 마지막으로 전북지방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1866년 병인교난을 통턴 한국 천주교 교난사를 대변하는 역사적 명소의 하나다.
이 고장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던 윤지충, 권상연을 시초로 이후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는데 이 숲정이 형장이 바로 그 순교지가 되었다. 비공식 집계로 2만 여명의 전북신도들 가운데 병인교난 천주교 희생자만도 1만 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지금의 우성아파트 자리인 숲정이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숲정이는 시내 완산동에 위치한 초록바위와 더불어 오래 전부터 내려온 형장이었으며 특히 천주교 교난이 발생한 이후로는 계속하여 천주교인 처형장이 되었다. 이러한 곳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이념으로 성지로 지정하고 지난 68년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현양탑을 세웠다. 마침내 1968년 로마 교황청은 이들 처형 희생자들에게 신도로서 영예인 복자위를 추서했으며, 전국적으로 병인대교난의 24위 복자 가운데 7명이 이고장 출신이었다. 순교자들은 다시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의 내한과 함께 천주교순교의 최대 영광인 103위 성인위에 포함됨으로서 세계 천주교사의 위대한 성인탄생이라는 또 하나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④ 충경사
남고산성을 가는 길목인 전주교대에서 200여 미터 지점 가파른 산자락 아래 충경사가 나온다.넓은 주차장 시설과 관리소가 있는 이 충경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정란의 공적을 기려 세운 사당이다.
이정란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국을 석권하고 호남으로 밀어닥치자, 의병을 모아 전주성을 지킬 것을 다짐하고 진안쪽으로 소양을 거쳐 공격해 오는 왜군을 64세의 나이로 말타고 나아가 300여 명의 왜군을 무찌르는 등 혁혁한 공훈으로 전주부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 뒤 정유재란 때는 공이 전주를 수성한다는 소문을 듣고 재빨리 도망친 일도 있었다. 이러한 공의 용기와 충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순조 때 "충경공"의 시호를 나라에서 내렸다.
오늘날 전주시를 동서로 가로지른 관통로를 "충경로"로 명명한 것은 충경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⑤ 관성묘
위치 :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 613
도로안내 : 전주시내에서 교육대학을 지나 남고사로 가는 오름길을 왼쪽으로 두고,그대로 300m쯤 들어가면 관성묘 문이 나온다.
관성 묘는 남고산성내 만경대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왕묘 또는 관제묘라고도 하며, 중국 후한의 성장인 관우를 무신으로 제사지내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관우 신장을 신봉하는 신당이 널리 전파되기는 임진왜란때로서, 당시 명나라 유격장군이었던 진인이 울산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지금 서울에 있는 남묘자리에 머물러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명나라 군사들은 싸움터에서 자주 관우신장의 령을 통하여 그 가호를 받았다고 믿는데에서 열열한 관우숭배자인 그는 이곳에 묘를 세워 관우의 신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남묘의 전신으로서 관우신앙의 시조가 되었다.
전주의 관성묘는 고종 32년(1895년)에 당시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별장 이신문의 발기로 각처 유지들의 헌납성금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은 매우 짜임새 있고 장엄하다. 묘내에는 관우의 소상이 있고, 그 양쪽 벽에는 삼국지의 벽화가 걸려있다. 신자들은 년초에 이곳에 찾아와 한해의 행운길복을 점친다.
『고찰』
- 전주부사(1943)에 따르면 전주부성 주변에 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 등의 사찰이 있어서 성의 사방을 수호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이들의 사찰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고 지금의 법당은 이들의 터 위에 새롭게 신축을 한 것이다.
① 동고사
기린봉 자락, 부의 동쪽 5리에 있었으며, 승암사라고도 불렀다 한다. 후백제 견훤이 도읍을 정하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나, 조선초의 『동국여지승람』이나 1790년에 작성된 『호남읍지』전주부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으며, 1871년에 편찬된 『호남읍지』 및 이후의 『완산지』등에 등재되어 있다.
현재의 동고사는 신축한 것이다.
② 서고사
부의 서쪽 10리, 현재의 만성동 황방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초의 『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재되어 있다. 『전주부사』(1943)에 의하면 1860년 경에 건립된 소사암과 미륵석불당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에도 스님이 거처하고 있다.
③ 남고사
남고사는 남고산성의 서문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측 전방에 고려의 수절인 정몽주의 시가 새겨진 만경대가 자리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8년(668)에 명덕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명덕화상은 열반종조 보덕대사의 상수제자이다. 조선초의 『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재되어 있다. 남고연국사리 불리다가, 조선 성종 때 이후 현재의 이름과 같은 남고사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현재의 대웅전은 옛 대웅전 자리에 약 15년 전에 확대 신축한 것이며, 사천왕문은 약 20년 전에 신축한 것이라 한다.
④ 북고사
진북동 어은 터널과 서신교 사이의 가파른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진북사라고도 한다. 조선초 『동국여지승람』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으며, 1790년대 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남읍지』의 전주부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그 터를 잡았다는 산신각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며, 다른 법당은 근래에 지어진 건물이다. 여기에 석불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얼마 전까지도 스님이 거처하였으나 현재는 석불도 없고 빈 건물들만 남아 있다.
⑤ 용화사 석불입상 (龍華寺 石佛立像)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자료 제10호
소 유 자 : 김격선(金格善)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지정날짜 : 1984년 4월 1일
규 모 : 1구(軀)
소 재 지 :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1가 146-1(용화사)
이 석불은 1920년 주지 김유희(金裕喜)가 재건한 용화사(龍華寺)에 보존되어 있다. 고려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하신부는 땅속에 묻고 바닥을 시멘트로 발라 버렸다. 현재 높이는 270m, 두장(頭長) 65cm, 신폭(身幅) 97cm, 신후(身厚) 40cm이다. 두부(頭部)는 큰 편이며, 볼과 턱이 중후하고 이마에는 백호(白虎)를 새겼고, 머리에 육계는 없다. 귀는 긴 편이고, 목은 삼도가 새겨졌으나, 절단되어 시멘트로 접합시켰다. 오른손은 굽혀 들어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하고, 왼손은 가슴 높이에서 굽혀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여원시무외인(與願施無畏印)을 짓고 있다. 왼쪽 어깨에서 흐른 옷주름은 왼쪽 팔에서 밑으로 드리우고 있는데, 하반신은 통의(筒衣)의 주름을 새겼을 뿐이다.
오른쪽 귀가 훼손된 것은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칼로 쳤다는 전설이 있다.
⑥ 미륵암 석불입상 (彌勒庵 石佛立像)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자료 제9호
소 유 자 : 김수희(金守姬)
시 대 : 고려시대
지정날짜 : 1984년 4월 1일
규 모 : 1구(軀)
소 재 지 :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345(미륵암)
이 석상은 단판(單瓣) 16엽(葉)의 연화조대(蓮花座臺) 위에 세원진 여래입상(如來立像)이다. 통견의(通肩衣)를 걸치고 옷주름은 양어깨에서 가슴과 양팔에 곡선으로 흘러내려 있으며, 웃소매는 길게 드리워져 있고, 양다리에도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아래도 내리고 왼손은 굽혔는데, 두 손 부분은 후세에 끼운 것이지만 원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낮은 육계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겼다. 좌대는 타원형의 16판복연문(瓣伏蓮紋)을 새겼고, 윗면에 1단의 괴임이 있는데, 그 이하는 땅에 묻혀 알 수 없다. 높이 2.60m, 어깨와 밑너비는 모두 0.90m, 좌대 너비 1.30m이다.
⑦ 천고사 석불입상 (天高寺 石佛立像)
전주시 동산동(용흥마을) 만성초등학교 앞 언덕 남사면의 미륵전에 있다. 광배(光背)와 일석(一石)으로 이루어진 석불로, 광배 상부는 파손되었다. 흉부 이하는 불단에 가리고, 하반신 이하는 땅에 묻혀 있다. 현재 불단 위에 나타난 높이는 130cm, 두부는 93cm, 어깨폭은 97cm이다. 머리는 나발로 되어 있고 육계가 있으며, 귀는 큰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으며, 법의는 우견편단이다. 오른손은 아래로 뻗쳐 있고, 왼손의 수인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⑧ 전주 향교
전주향교는 고려 우왕 6년(1380)에 전주성 남쪽 현재의 경기전 부근에 위치하여 설립하였다. 조선시대 태종 10년(1410)에 경기전을 새로 지을 때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하여 부성 서쪽인 화산동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200년동안 존속되어오다가 선조 36년(1603년) 에 순찰사 장만이 이 향교가 부성과 거리가 멀고, 객사를 기준으로 볼 때 왼쪽에 문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도록 한 옛날의 제도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품신하여 전주시 완산구 교동의 현재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전주 향교는 신문 밖에 따로 만화루가 세워졌고, 명륜당은 1904년에 군수 권직상이 중건하였다.
문묘는 융희 원년(1907년)에 중수하였고 동쪽에 계성사가 있다. 완산지에 의하면 이는 영조 17년(1741년) 에 판관 송달보 주가 창건하고 정랑 이기경이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대설위인 전주향교에는 공자 아래 4성, 10철, 송 6현은 대성전에, 중국 사문 12현 ,한당 22현, 한국 18현은 동서무에 봉안하였다. 전주향교는 남원, 광주, 나주와 함께 전라 4대 향교의 하나였고, 효자, 효부, 열녀의 표창이나 입비의 인정 등에서 이들 4대 향교가 서로 통문하고 합의하는 것을 전통적 관례로 삼아왔다.
⑨ 서원
조선의 서원은 각 지방의 민간을 중심으로 선현, 선사, 선열, 의사에 대한 사묘를 설치하여 제향을 행하고 유학자를 양성하던 사립 교욱기관이다.
국조보감에 의하면 중종 38년(1534년) 경상도 풍기군에 당시 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세운 백운 동 서원이 우리나라 서원사의 시초로 전해지고 있다.
주세붕은 안유(安裕)의 사당을 짓고 좌우에 유생(儒生)들이 수학할 집을 짓고 주자의 백록동 서원 이름을 따서 백운동서원이라 한데서 연유된다.
서원은 선현선사(先賢先師)를 모시는 사당인 동시에 사설교육기관이었다.
전주에 위치한 서원들의 현황
ⓐ 화산서원
시 대 : 조선 선조 13년(1580)
규 모 : 1기(基)
소 재 지 :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산 38-2
화산서원은 조선 선조 13년(1580) 전주사람들이 건립하였으며, 이언적(李彦迪), 송인수(宋麟壽) 등을 봉사(奉祀)하고 있다. 전북지방에서는 최고(最古)의 서원으로 이 자리에 향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교동으로 이전하였으며, 영조·대원군이 많은 서원을 철폐 정비한 까닭에 서원 자리에는 비를 세워, 그 흔적을 후세인에게 전하고 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였다
ⓓ 한계서원 - 한계사
충의정신을 배향하기 위해 숙종 21년(1695년)에 전주시 완산구 교동(향교 뒷편)에 창건되었다. 배향하는 선현은 임진란 공신 신중경, 이정란, 이상진이다.
ⓖ 황강서원 - 황강사
창건연도는 미상이며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3가 295-3)에 위치하고 있다. 황강 이문정 ,이백유, 이경동, 이목, 이덕린, 유인홍, 강행우를 배향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고, 고종 6년(1869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광무 2년(1898년)에 다시 전주 서쪽 황방산 기슭에 있는 황강 선생 유허지에 중건하였다.
ⓗ 반곡서원 - 반곡사
창건연도는 미상이며 전주시 동서학동(2가 210)에 위치하고 있다. 고종 5년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의해훼철되어다가 고종 15년(1878)에 중건되었다. 윤 황, 이영선, 서필원을 배향한다. 현재 사당과 강당이 있다.
ⓙ 희현당
전주 사마재 현 신흥중고등학교에 소재하며, 숙종 26년(1700년)에 관찰사 김시걸이 진사 오명기와 상의하여 세웠다. 그 후 영조 14년(1738년)에 관찰사 이수진이 중수하였으나, 고종때 폐지되고 신흥학교가 개교시에 교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 양사재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세워졌으며, 고종 12년에 판관 김계진이 노후 건물을 개축하여 문사들이 수련의 도장이 되었으나, 후에 양로재(養老齋)로 되었다가 공립소학교로 일시 사용되기도 하였다.
『교육적인 건축물』
① 전주 문학대
전라북도 기념물 제24호인 문학대(文學臺)는 고려 공민왕 때 정당문학을 지낸 황강 이문정이 낙향하여 만년을 지낸 곳이다.
공은 여말(麗末) 대학자이며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숭불억유(崇佛抑儒)하여 학교를 폐하고 윤리와 기강이 문란하게 되자 상소하여 이를 바로 잡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집터만 남아있던 것을 1824년에 이르러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② 한벽당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으며,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머리의 절벽을 깎아세운 누각으로서 옛사람들이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 서쪽 일대는 자만동 또는 옥류동이라 불리어 이씨조선 발생의 역사사지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한벽당이라 불리게 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월당선생유허비에는 이곳을 월당루라 비치고도 있다. 또한, 이 한벽당이라는 이름이 옛날 벽옥한류란 글귀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③ 천양정
전라북도 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 현재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1가 19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4년 4월 1일에 지정됐다. 정면 6칸, 측면 2칸 역시 팔작 지붕으로 되어 있다.
숙종 38년인 1712년에 세워진 것으로 다가천 서쪽 내 기슭에 세웠으나 9년만에 홍수로 정자가 떠내려 갔다.
천양(穿揚)이란 말은 본디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뜻으로서 아마도 이태조의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천양정이라는 이름이 부활된 것은 1830년 8월 2일이다.
한말 전주의 근대 학교.
① 전주 신흥학교
광무 4년(1900년) 9월 9일, 재단법인 미국 야소교 선교회 남장로파 한국파견 선교사 이눌서가 완산의 북쪽에 있는 사택에서 신학문당을 열고 학생 1명을 가르친 데서 시작되었다. 1904년 전주시 중화산동(서원너머)에 있던 선교사 하위렴의 사택으로 옮겼다가 1906년 현재 부지에 있었던 단 한 채의 희현당으로 옮겼다. 그 뒤 1907년 희현당 북쪽에 기와집 8칸을 신축하여 유서백 선교사가 설립자 겸 교장으로 취임하고, 교명을 신흥학교라고 하였다. 1907년 보통과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희현당 부지에 2층 80평의 건물을 신축하고 고등과 학생을 모집했다.
② 전주 기전학교
1902년에 미국 남장로교 여선교사 미스 전킨이 최부인의 집에서 3∼4명의 여학생을 상대로 하여 안방학교로 시작한 것이 기전학교의 모체다. 1904년 사원 고개 너머에 가정집 15평 1동을 사서 「여자청년학교」라는 간판으로 개교하고 미스 전킨이 정식으로 교장에 취임했다. 전킨이 죽은 뒤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기전(紀全 : Junkin Memorial)이라 했다. 1909년에 전주시 화산동 300번지에 붉은 벽돌로 2층 교사를 건축했다. 1912년 고등보통과 4년제의 학교로 되었다.
③ 전라북도 공립소학교
소학교령이 발표되자 유지 임종환은 당신의 관찰사인 윤창섭과 협의하여 관찰부 소속 양사고의 논 32두락을 학교설치의 기본 자산으로 하여 소학교 설립인가를 출원하였다. 1897년 7월 10일 학부에 의해 「전리북도 공립소학교」의 인가를 받아 부남 3리(전주시 완산구 교동 58번지) 양사재 자리에 학교를 세웠다. 그후 몇 차례의 이전을 거듭하고 이름을 바꾸었으며 1914년에 비로서 전주제일 보통학교로 되었으며, 1925년에 전주시 태평동 1가 64번지로 이전했다. 1941년 전주 상생 공립초등학교라 개칭하고 이것이 현재의 전주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910년에 여자부를 설치하여 여학생들을 받았다.
④ 사립 전주 해성 보통학교
이 학교는 1891년 프랑스인 윤신부가 천주교 재단으로 전주시 교동에 여학교를 창설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뒤 1938년에 해성초등학교로 개편되고 해방 후 전주성신여자 초급중학교가 된다.
⑤ 사립 함육학교
이 학교는 1906년 12월 15일에 전주읍 서정192번지(현 고사동, 서학동)에 설립됐다. 4년제 보통과로 학부의 인가를 받았다. 이 자리는 학부형들의 강무사정이었는데 기부를 받은 것이다.
사립 전주양영보통학교가 다가동에, 사립 전주유치학교가 명륜당에 1906년에 세워졌는데, 이들이 합쳐져서 전주 제2보통학교가 되고 후에 완산초등학교로 발전된다.
⑥ 전주농림학교
1910년 3월 5일 설치 인가를 받아 당시 전주군 이동면 교동리(현 전주시 서학동 전주교육대학 부속초등학교의 위치)에 같은 해 5월 16일 개교를 했다. 1910년 11월 전주군 이동면 노송리로 이동, 1911년 6월 1일에 전주농업학교로 개칭하고, 1943년 7월 전주부 금암정 2번지로 이동했다.
2. 이 도시의 특징을 이루는 다른 예술품이 있는가?
전주 한지, 기와, 전통 한옥 보존 지구
3. 낙태시술의원, 음란물 극장, 매춘지역, 도박장, 술집 등과 같은 매우 가시적인 죄의 거점은 어디인가?
① 낙태 시술의원
개인 의원은 거의 전부가 다 낙태 시술을 하는 것으로 파악 됨.
② 음란물 극장
전주시 고사동 일대 극장 11개소(명화극장 외 10개소)
③ 매춘지역
2개소 (선미촌 -서노송동, 선화촌- 다가동 일부)
※ 시청 뒷편 농협위주. 기린로 건너편-> 선미촌
다가동 남부시장∼천변쪽 코오롱 상가 -> 선화촌
④ 도박장
시내 성인 오락실(고사동 지역 빠징코 10개)
⑤ 술집
아중리 택지개발지구(아중역∼전주역 가는 사이), 중화산동 전주병원 앞쪽, 전주역 앞, 시내중심가.
4. 가난, 폭력, 교통사고, 살인, 사치와 향락, 청소년 탈선 지역은 어디인가?
① 가난한자들이 모여 사는 곳
: 교동산중턱, 평화동에 영세민 아파트
(평화초등학교 부근에 평화주공 임대 아파트가 9동 있는 것으로 파악)
② 부유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
중화산동 택지개발지구(향락가, 술집도 집중),
우아동
③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곳
전주 - 남원간 4차선 도로: 신리지역,
김제 - 백구간 도로(1차선)
④ 살인, 강도 등 민생치안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곳은 어디인가?
삼천동, 평화동
⑤ 폭력조직이 활동하고 있는가?
코아호텔을 중심으로한 오거리파, 고사동을 중심으로 한 나이트파와 월드컵파. 관광호텔을 중심으로 남쪽지역은 월드컵파가 북쪽으로는 나이트파가 세력을 형성. 전북대를 중심으로 한 북대파가 있음.
⑥ 이 폭력 조직간에 알력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인가?
전주 관광호텔을 중심으로 발생.
⑦ 사치와 향락이 나타나는 곳
중화산동 MBC 부근, 우아동 아중택지 부근
⑧ 청소년 탈선 지역
매춘지역과 MBC. 우아동 근처
5.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학살이나 전투나 살인을 통하여 피를 흘린 장소는 어디인가?
용머리 고개 (동학농민혁명 당시 완산 전투), 전주농고 뒷산(6 25전쟁당시 정치범 처형)
6. 나무, 언덕, 돌 또는 강의 위치가 외관상 의미 있는 모양을 갖추고 있는가?
① 풍남동 은행나무
풍남동 3가 31의 1번지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풍남동 사무소에서 남쪽으로 200m 지점의 도로변에 위치한 주택가에 자라고 있는 노거수이다.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숫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암나무로서 매년 많은 열매를 맺으므로 풍산성이라 하며 아이 못 낳는 여인들이 이나무에다 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이른 새벽에 깨끗한 정수를 떠놓고 득남을 기원하는 아낙네가 많았다.
7. 이 도시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지계표가 있는가?
① 미륵불골(동 서학동, 東 棲鶴洞)
옛날 난전 땅에 이두리라고 하는 노총각이 살고 있었다.
늙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살림인데도 끼니를 끓일 보리쌀 한 톨이 없어 동냥질을 나섰다. 건장한 몸으로 어찌 막일이라도 하지 않고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날마다 비렁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느냐는 부성 사람들의 질책이 무서워 고달산 기슭을 그저 맴돌 듯 서성거리고만 있는데 대여섯발이 넘는 장죽을 짚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 「어찌 너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서성거리는고, 인생이 불쌍하여 소원 한가지만 들어주겠노라. 자자손손 영화를 누리고 싶으냐, 아니면 당대 영화냐, 둘 중에 하나만 말하라」하자 이두리는 서슴없이 「자자손손이 뭡니까. 우선 당장 배때기부터 원없이 채워보고 싶소이다.」라고 하니 이두리를 가엾게 쳐다보던 백발노인은 이두리 손을 꼬옥 잡고 한 곳에 이르더니 죽장으로 땅방아를 찧으며 하는 말인즉 「이곳에 조상의 뼈를 묻으라」한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두리는 신기하고도 하고 놀랍기도 했으나 하여튼 부친의 백골을 당일로 파다가 이장을 했더니, 몇해 안되어 당대에 부럽지 않은 갑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그 노이니이 나타나 고달산 서쪽 기슭 비바람 속에 묻혀 있는 미륵불을 옮겨 세우되 상체는 일월성신(日月星神)을 받게 하고 하체는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노인의 현몽대로 하였다.
오늘 날 석불리(서서학동) 괴목나무 옆 미륵불이 바로 이두리 사연에 얽힌 미륵불이고, 이두리의 무덤도 그 부근에 있다고 하여 미륵불골, 또는 이두리 골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② 서낭댕이(인후동, 麟後洞)
우리 나라는 삼한 시대부터 귀신을 섬긴 기록이 있다.
백제 때도 역대 임금들이 천지신에게 제사하며 시조 묘당을 세웠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성황 신제사가 추가되더니 이조시대부터는 민간신앙의 서낭댕이라고 하여 마을의 터를 지키는 신앙이 내려왔다.
전주의 성황사(城隍祀)는 고려 신종 2년 때 전주 목의 사록겸(司錄兼) 장서기(掌書記)인 이규보가 기린봉 북록에 세우고 성지의 수호를 치제 한데서 비롯되어 이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민간신앙으로 무병장수(無病長壽) 입신영달(立身榮達) 먼 길 떠나는 길손의 무사를 비는 등 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전주에서는 이곳에 처음 성황사가 세워졌고, 성황당으로서는 가장 번창한 곳이라고 해서 서민들의 말로 서낭댕이라고 불리웠다.
13.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리적 지점은 어디인가?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는 축조되었는가?
(권위자들의 진술을 들어라)
영적인 관점
A. 비 기독교적인 조사
A-1 이 도시의 과거나 현재와 관련된 주요 신들이나 지역 귀신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여단의 무사귀(無祀鬼) 신앙: 무속신앙.으로서 무사귀는 미혼남녀의 죽은 귀신이나 사손(嗣孫)이 없어서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는 무주신(無主神), 즉 신이 의탁할 주가 없는 귀신을 말한다.
성황신(城隍神) 신앙: 우리나라의 서낭당은 흡사 몽고사람들의 풍속에 산천신을 숭배하면서 사당을 짓지 않고 산봉우리나 고개마루에 돌을 질서없이 쌓아올리고 이를 오부라고 지칭하면서 여기에 치성하는 것과 같다.
전주부성을 들고 나는 출입노변의 동서남북의 여러곳에 서낭당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전주는 동 남 서쪽이 산맥으로 둘러있기 때문에 전주부성을 들어오는데는 대소의 산고개를 넘어야하며 고개길 노변에는 서낭당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개길이 아닌 북쪽으로 나아가는 덕진 가련산 모퉁이에도 서낭당은 있었다. 이것이 전주의 수문신장과 같은 수호신의 뜻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주시내는 말할것도 없고 시외 부근에도 서낭당은 없다. 따라서 서낭당 신앙은 거의 소멸된 상태에 있다.
성황신은 그 어원으로 보아도 도성(都城)이나 부성(府城) 또는 산성(山城)과 같은 그 성곽 내외의 백성과 군사를 수호하는 신으로서 그 지역의 수호신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 수호신이 그 지역의 토지신으로서 산천신이 되어야 할 것이오 성황신의 근본인 서낭신은 원래가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당산제 신앙: 옛날에는 어느 마을을 막론하고 그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즉 부락수호신을 섬기는 민간신앙이 있었다. 마을 뒷산의 산신이 산 아래의 마을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하여 마을 뒷산에 산신당을 설치하고 여기에 부락사람 전체가 동원하여 제사를 지내는 부락제가 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마을 앞에 마을의 수호신이 의지하고 있게하는 누석단(累石壇)을 쌓고 마을 뒤에는 「당집」이라 하여 부락수호신이 의지하여 있을 작은 막사를 지어두고 정월달이 되면 부락 앞에 있는 누석단으로부터 제사를 지내고 마을 뒤 당산에 제사한다. 옛날 전주중에는 24개 마을이 있었는데 그 때에는 24개 마을마다 당산이 있었고 당산제가 실시되었다. 당산에 대한 부락제는 정월 보름에 행하였다.
부락제는 미리 유사와 제관을 선출하되 정결한 사람으로 선출한다. 이에 선출된 유사, 제관은 적어도 2주일 동안은 궂은 것을 보지 않고 목욕제계를 계속해야 했다. 부락제의 비용은 부락민이 백미나 돈을 추렴하여 제물과 술을 준비한다. 부락제는 당산신에게 그해에 병마와 수화풍재가 없이 시화연풍하게 보호하여 달라는 기원을 한다. 이 당산제도 성황사의 제향과 같이 세사람의 헌관이 술잔을 놓고, 축문을 읽는다. 가정마다 소재초복을 비는 소지(燒紙)도 울린다. 성황사나 여단의 제사는 관의 집행임에 대하여 당산제는 주민들이 집행하는 점이 다른 것이다.
당산에 대한 부락제는 온 마을사람들이 동원된다. 풍물까지 동원하여 제향이 끝나면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즐긴다. 여기에 특기할 것은 각 부락의 농기가 전주천 백사장 넓은 곳에 한테 모여, 기세배(旗歲拜)를 행하면서 즐기는 것이다.
이 기세배의 내용에는 농신숭배를 내용으로 하는 전래적인 민속신앙이 깃들어 있다.
덕진연못의 수신신앙: 덕진못에는 민간신앙의 하나인 수신신앙이 깃들어 있다. 즉 이 덕진못에는 수신중에도 가장 신령스럽고 위력이 있는 「용왕신」이 있다고 본다. 용왕신은 「요왕님」이라고도 부른다. 요왕은 물속에서 사는 동물로서는 가장 거대하고 위력이 있고 신성스럽다고 보는 용(龍)이라고 한다. 용은 수신(水神)이자 지신(地神) 천신(天神)으로도 되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조화신(造化神)으로 본다. 용은 수중의 왕이면서도 하느님의 사자가 되고 인간을 보호하는 수호신(守護神)도 된다.
옛 사람들은 물 속에는 용왕이 거주하는 용궁이 있다고 보고 덕진못에도 저 용궁이 건설되어 있는 것으로 믿었다. 이 못은 때로 한발이 심하면 바닥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여기에는 용궁이 있고 여기에 용이 항상 거주하여 있는 것으로 믿는다. 이 용이 풍운을 짓고 비를 주어 이 지역 주민들의 농경생활을 돕는 것은 물리이오 모든 사람들의 생남생여와 복선화복까지도 이 용신의 영력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밎는다. 이를 믿는 사람은 대개 부녀자층이 많다. 이더한 수신신앙은 산신신앙과 대등되는 것으로서 전주시내의 수신신앙은 이 덕진못의 용신신앙에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이 덕진못의 용신신앙으로 인한 하나의 종교단체가 이루어져 있는데 이 덕진못가에 간판을 건 「창해수교」가 그것이다.
이 창해수교는 덕진못의 북쪽을 감돌고 있는 산기슭 덕암마을(덕암리)에 본부가 있다. 교주는 김덕현이라는 할머니로 용화할머니라고 불리운다. 1892년(고종29년)에 남원에서 출생한 김노파는 그의 할머니때부터 용왕신을 믿은 것이 어머니에게 전해지고 24세때 어머니가 자기에게 전수, 3대를 전승한 용신신앙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일종의 접신무당으로 된 것이다.
한때는 수백명의 신도가 있었으나 몇해전 용화부인의 사망에 따라 신앙단체는 거의 와해된 형편이지만 그러나 이 덕진못의 신비에 수반되는 수신신앙은 이것이 이 고장의 전통적인 민간신
앙의 잔재로서 끊임없이 존속되어 있는 것이다.
B. 기독교적인 조사
B-1 이 도시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어떻게 대접하여 왔는가?
① 전주 지방관리들의 대우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지방 관리들이 비교적 예를 갖추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원래 전주는 유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이었기에 사람들은 기독교가 들어오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더욱이 전주성 안은 신분이 놓은 양반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서양사람들이 들어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배타심이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방전도여행을 떠날 때는 배타적인 사람들로 인한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특별 여권을 중앙정부에서 발행하여 지방장관들에게 몇 가지 협조사항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중앙정부의 도움으로 인한 것인지 전주의 지방관리들은 비교적 예를 갖추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② 지역 주민 대표들의 대우
처음으로 선교사들이 방문했을 때 이 마을 사람들은 정해원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인해 자연스레 서양 선교사들에 대해 소식을 들었으나 막상 양인들이 전주에 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혹시 어떠한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마을의 대표 7∼8명이 두 선교사에게 찾아와 전주에 온 진의를 살피며 평화를 추구하는 뜻을 전달하고 서로의 협조를 바랐다. 또한 마을대표 중 어른되는 한 사람은 선교사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후하게 대접하기도 하였다. 두 선교사는 관아에 찾아가 관찰사를 만나 전주에 온 연유와 묻는 말에 일일이 해답을 하니 관아에서도 안심을 하고 친절하게 대하였으며 닭 두 마리와 계란 한 꾸러미를 선물로 주었다.
B-2 복음전파가 쉬웠는가? 어려웠는가?
① 전란으로 도리어 선교사업이 확장되다
그 동안 동학농민군의 전란과 청일전쟁의 후유증과 정변 등으로 동요되었던 민심도 차츰 안정을 되찾고 있었으나 방향을 잃은 패잔병들이 선교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관헌들의 잔당 체포의 수사망이 압축될 때 궁지에 몰린 이들은 "야소교인"(耶蘇敎人, 예수교인)이라고 사칭하여 모면을 꾀하기도 하고 개중에는 아예 마음을 돌이키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인이 되어 새로운 인생길을 찾기도 하였다. 1896년 9월 24일자 독립신문에는 군산의 선교사 전킨의 송고로 "동학과 비도에게 들어갔다가 살기 위하여 도망한 자들이 거짓으로 예수교한다고 말하며 전주 옥구 임피 함열 만경 등지로 다니며 서양선교사의 심부름이라고 사칭하며 인민들에게 사기를 치며 토색하는 일이 무수하다. 원래 예수교하는 사람이야 이런 일은 도무지 없는 지라. 관찰사와 관원들은 이런 자들을 잡아서 엄히 다스려 달라"고 기재되었다. 그 당시 비정(秕政)에 대한 농민항쟁의 쓰라림과 억울하게 민족이 횡액(橫厄)을 당하는 청일전쟁의 막대한 피해가 국민의 자각 정신 고취와 기독교 복음선교를 위하여 정신적으로 좋은 여건을 형성해 준 셈이다.
이것을 미국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인 스피어가 말하기를 "동학도들은 기독교를 박멸하거나 서양선교사들을 추방까지는 않고 오히려 예수교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고 복음전파에 샛길을 열어준 셈이다. 우선 동학이 봉기하였던 바로 그 불만과 불안의 상황은 기독교메시지 전파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으며 동학봉기가 실패했을 때는 수많은 민중들로 하여금 더 절실하게 기독교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B-3 교파간에 기독교 지도자의 단합정도는 어떠한가?
평균적으로 단합정도가 미비하다.
교파간의 분열이 많았음. - 이는 지도자간의 단합정도가 약했음을 알 수 있음.
: 전북 지방은 전술한 바와 같이 원래 장로교회 일색이었다. 그러한 만큼 장로교회가 절대적으로 많았으며 점차 비대해지면서 총회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사상과 지연과 인맥 등의 문제로 1952년 이후부터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어졌다. 이곳 전북지방의 많은 교역자들은 한국 기독교 장로회설립에 중추적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교단 설립에는 일제말기 치하에 전북기독교계의 실세 지도자였고 해방 직후에도 전북교계의 중심교회인 전주서문외교회의 담임목사였으며 이어서 6 25공산치하에서도 역시 그러했던 김세열 목사의 교정적 힘이 컸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 장로회 초대회장을 역임하게 되었던 만큼 전북지방의 장로교회의 제일차 교파분열은 심각하였다. 그러나 절대적인 다수교회를 포용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다시 1959년 세계기독교 협의회(W.C.C) 가입문제로 또한 신학사상 및 정치사상문제에까지 확대 해석되어 총회적으로 크게 양분하게 되어 서로 인맥과 지연 및 선교사들의 향배에 따라 별칭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각 지방에까지 가슴 아픈 분열의 역사를 갖게 도었다. 그러나 분열당시의 극심했던 감정대립은 세월이 가며 점차 사라지고 모든 교회들이 교류를 도모하고 있다.
교세가 다시 비대하여진 대한예수교합동측은 1979년 교권다툼의 심각한 파쟁으로 분열을 가져와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측가 합동보수측으로 삼분되어졌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려신학측도 사회법정에 제소한 문제로 대립이 심각하여져 고신측과 고려측(반고소파)으로 나뉘어졌다.
C. 계시적인 조사
C-1 이 도시 전체를 또는 이 도시의 삶이나 지역의 어떤 분야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주요 정사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음란의 영: 서노송동, 다가동.
도박의 영: 객사 중심.
사치와 향락의 영: 우아동 , 중화산동 MBC 부근.
폭력의 영: 고사동 객사 부근(전주 관광호텔을 중심으로)
C-2 이 도시의 우상숭배자들과 이단들의 활동을 조사하라.
① 무당집들은 어느 곳에 모여 있는가?
동완산동 서완산동(용머리 고개) 일부 지역에 밀집되어 있음.
② 점술원들은 어느 곳에 모여있는가?
동완산동 서완산동(용머리 고개) 일부 지역에 밀집되어 있음.
③ 증산교 센터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지역 분포도는 어느 정도인가?
④ 여호와의 증인의 센터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지역 분포도는 어느 정도인가?
평화동, 우아동, 금암동에 위치하며 3개소 있음.
⑤ 통일교의 센터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지역 분포도는 어느 정도인가?
금암동 통일교, 팔복동, 효자동 총 3개소 있음.
⑥ 대순진리회는 어디에 있는가?
평화동 효성아파트 앞쪽에 위치함.
C-3 각 종교의 지역 분포도는 어느 정도인가?
① 불교(사찰) : 60개
② 천주교(성당) : 22개
③ 원불교(교당) : 18개
④ 기독교(교회) : 590개
재 전주시내의 장로교회 교회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중 통합 86 합동 142 개혁 55 합동보수 54 고려 7 고신 3 대신 8 장신 2 중앙 6 호헌 2 계약 1 기독교 장로회 61 예장연합 55 대한기독교연합 9 기독교성결교회 27 기독교감리회 11 기독교침례회 3 기독교하나님의 성회 18 예수교하나님의 성회 4 구세군 2 그리스도교회 2 복음교회 성공회 보수 중립 나사렛 농아 루터교회 연합오순절 순복음성회 중립 독립 여목총회 등 기타 교파 총계 49로서 총 교회수는 590여 개가 된다. (1995년)
Ⅱ. 전략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Vision
① 어떠한 것이든 잘 자라게 하여 풍성함을 맺게 하심 (인적 물적 자연적) - 자원이 풍성.
② 성실과 정직, 부지런함이 있는 곳.
③ 믿음으로 회복함과 복음으로 나눠주는 축복이 있는 곳.
④ 영혼을 생산하는 생명센터
⑤ 믿음의 땅
=====> 요약
① 선교전략지역, ② 복음의 물류센터
③ 양육하고 파송하는 곳.
약속의 말씀
① 요한복음 4장 34절 ∼ 38절
② 창세기 13장 14절 ∼ 17절
③ 이사야 61장 4절∼9절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은
1. 교만
: 명칭 "전(全) 완(完)"
옛 이름 완산과 현재 이름 전주 모두 "완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나 완전함을 이상으로 하여 갖가지 교만의 열매를 맺었다.
① 우월주의
스스로 완전케 되려하는 교만함이 우월주의로 열매 맺게 된다. 후백제의 도성, 즉 왕의 도읍이었으며, 조선왕조의 발원의 도시라는 우월주의는 다른 지역의 문화와 좋은 사상을 배우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그것을 배격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② 특권의식
전주에 사는 유지들에게 특권의식을 고취시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권력을 보호함으로서 외부의 세력에 대한 방어를 하게 한다.
③ 배타성
과거 전주 아전들의 횡포와 양반과 상민들간의 철저한 분리를 뜻하는 선너머 고개(선을 경계로 전주 부성 안의 양반과 밖의 상민으로 구분 됨)를 통해서 권력으로 인한 철저한 배타성을 볼 수 있다.
2. 지도자 죽이기
① 분열
지도자들간의 분열을 통해 연합을 깨뜨려 지도력을 키워주는 일보다는 많은 지도자들을 깍아 내리 일을 하게 했다. (기독교 지도자들간의 분열로 인해 전주에서 서로 다른 교파들이 생겨나게 됐다.)
② 변화를 두려워 함.
자신의 권력실추의 두려움으로 인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변화와 변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함. (교회적인 면이나 세상적인 면이나 동일함)
③ 투자하지 않음
차세대 지도자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하게 함. 일정한 기반을 가진 안정적인 세대나 그룹에게만 투자함. 따라서 교회는 타 교회나 선교단체에 대한 관심이 적고 당연히 자신들의 교회에만 국한되는 좁은 시야를 갖게 됨.
===> 바른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올바른 지도자가 없었기에 다음세대 지도자를 키우지 못함)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
약속의 말씀
: 행 1:17∼ 21
: 단 1:8
1. 지도자 재교육 코스
① 대상별로 진행한다.
(목회자, 장로, 집사) 금융계, 언론계, 공무원 등
2. 지도자 세우기
① 교회 모빌팀 사역
② 대상별 DTS - 초등6, 중3, 고3, 대학4
③ 대학 사역 - 유학온 학생들을 위한 훈련필요
④ 청소년 사역
1) 모체사역
① 화요모임
화요모임은 공동체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요소가 된다.
화요모임으로 모이는 모든 회중들로 하여금 우리의 사역들을 나누고 그들이 동참하도록 권유하며 함께 연합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될수 있다. 그러므로 화요모임이 부흥하고 성장하면 모든 사역은 함께 성장하게 된다.
화요모임이라는 원줄기가 있다고하면, 다른 사역은 그 원줄기에서 나오는 부분가지(곁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 곁가지라는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
목표:
㉮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예배를 경험한다.
㉯ 간사, 예배팀, 회중들 모두 안에 성령의 충만
함을 받아 살도록 도전한다.
㉰ 전주지역안에 영적 각성과 부흥의 기수로 앞
장선다.
전략:
㉮ 모임 장소의 최적화를 고려해서 선정한다.
㉯ 팀을 모집 훈련, 강화시킨다.
㉰ 모임을 위한 기도팀 양성과 정기적인 홍보를
한다.
전술:
㉮ 모임 장소 선정은 Research를 통한 효과적인
장소 선정.
㉯ 예배팀을 모집할 때는 신뢰도, 전문성, 영성을 보면서 3개월∼6개월 정도 팀 강화훈련을 한다. (영성, 전문성, 현장 훈련)
㉰ 기도팀을 형성 땅 밟기와 영적 전쟁을 통한
자리매김.
㉱ 홍보의 전문화를 갖춘다.
9월 26(화), 12월 26(화) 두 차례 정도 Big Event를 준비하며, 이것을 화요모임 발판의 계기로 삼는다.
이때 모임의 명칭은 " N세대를 J세대로, 주를 위해 일어나라 " 라는 가칭의 주제로 집회를 실시한다.
2) 동원사역
① 발렌티어 School
목적:
㉮ 예수전도단의 자원을 개발, 훈련시켜 사역에 동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본 School을 한다.
목표:
㉮ YWAM을 알게하고, 전주를 이해하게 한다.
㉯ YWAM의 발렌티어로서의 자긍심을 높혀주고,
효과적으로 사역에 동참할 수 있게 한다.
㉰ 참여자들 스스로 기도 인력, 자원 동원 인력, 홍보와 후원인력에 헌신시킨다.
전략:
㉮ 홍보의 전문화를 사용, 사람을 모집한다.
㉯ YWAM과 함께 사역하기 원할 때는 본 School을 필수로 참가하게 한다.
전술:
㉮ YWAM의 구조, 정신과 전주를 이해함, 발렌티어로서의 삶, 헌신과 위탁을 주제로 진행한다.
㉯ 차별화를 통한 특성화를 시킨다.
㉰ 공동체의식을 강화 시킨다. (발렌티어 수련회를 1년에 1회갖는다.)
㉱ 1년에 두차례 (상반기, 하반기)씩 진행한다.
② 부르심과 비전 School
목적:
㉮ 개인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부르심과 비전에 맞춰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교이다.
목표:
㉮ 헌신된 사람을 일으킨다.
㉯ DTS를 받게한다.
㉰ YWAM과 연합사역을 하게 한다.
전략:
㉮ DTS의 기본 강의에 준한다.
㉯ 정기 모임에서 홍보과 지원자를 모집한다.
㉰ 교회와 연합, 순회하면서 진행한다.
㉱ YWAM 인원동원화에 방향을 둔다.
전술:
㉮ 강의는 DTS의 기본적인 부분을 한다.
㉯ 차별화를 통한 특성화를 시킨다.
㉰ 공동체의식을 강화 시킨다. (발렌티어 수련회를 1년에 1회갖는다.)
㉱ 1년에 두차례 (상반기, 하반기)씩 진행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삶, 묵상, 중보기도, 예배, 영적전쟁, 재정, 부르심과 비전, 헌신과 위탁 등)
③ Generation School
목적:
㉮ 각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개발하며,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교이다.
목표:
㉮ 자신의 전문성을 찾도록 도와주며, 역량을 강화시킨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 세대간의 연합과 일치를 일으키는 핵심 멤버로 일으킨다.
㉰ 선교의 자원들로 헌신케 한다.
전략:
㉮ DTS의 기본 강의에 준한다.
㉯ 정기 모임에서 홍보과 지원자를 모집한다.
㉰ 교회와 연합, 순회하면서 진행한다.
㉱ YWAM 인원동원화에 방향을 둔다.
전술:
㉮ 강의는 DTS의 기본적인 부분을 한다.
㉯ 차별화를 통한 특성화를 시킨다.
㉰ 공동체의식을 강화 시킨다. (수료자 연합 모임을 1년에 1회를 갖는다)
㉱ 1년에 두차례 (상반기, 하반기)씩 진행한다.
10대, 20대, 30대를 구분해서 그들의 문제, 고민, 관심, 놀이문화, 꿈, 비전, 소망, 삶에 대해 나누면서 그들 세대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며 헌신할 수 있게한다.
(참고로, 10대는 10만 6천명, 30대는 10만 5천명을 차지 전체 인구에서 18%를 차지하며,
20대는 11만 3천명을 차지 19%를 차지하고 있다. 98년 통계)
3) Field 사역
① WIW(worship, intersection, warfare)
이 땅의 자존감 회복을 위한 집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이 땅의 목적과 계획이 성취되도록 각각의 장소에서 땅 밟기, 예배, 영적 전쟁, 중보기도하며 하나님의 비전으로 축복하는 일들을 한다.
(기도 싸이클, 영적전쟁 싸이클, 예배 싸이클 팀을 형성해서 순회를하며 Event사역을 한다)
② Culture Ministry
전통문화를 통한 효과적인 복음 전달 사역팀을 개발, 사역한다.
③ 청소년 사역, 대학 사역, 일반인 사역 등이 필요하다.
지부 개척은 1년을 주기로 3년을 생각하고 있다.
제 1 단계:
1년차 -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시간
비전을 표현하며, 자원들을 찾는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반응을 분석하고 수정, 실행한다.
제 2 단계:
2년차 - 1차 계획이 자리매김을 하고 성장하도록
한다.
2차 계획을 추진한다.
제 3 단계:
3년차 - 1, 2차 계획이 각각의 영역에서의 활동과 변화를 살펴보며 민감하게 대처한다.
Ⅲ 영적 전쟁 가이드
Chunju Spiritual Mapping 범례 표
중보기도 여행
예배 여행
영적행진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