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째'공주문화'원고- 공주 옛 시간의 풍경
김 혜 식
문화원 소식지가 젊어졌다. 딱딱한 틀을 벗고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다소 무거웠던 주제들의 내용을 벗어나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면서 읽을거리가 훨씬 풍부해지는 것 같아 좋다. 이참에 나도 내용을 다소 변화를 주고 싶다.
얼마 전 전시회 오프닝에서 내가 찍은 사진이 아니더라도 공주의 옛 사진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 있다. 공주를 옛 풍경을 말하는데 구태여 내가 찍은 사진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누군가가 해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시간에 살지 않았으므로 생생함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찍은 사진을 모아 함께 기록하는 일도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료를 모으는 대로 함께 발표하기로 한다.
사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사진 출처: 포털싸이트 제공>
한 장 사진에서 공주가 보인다는 것은 순전히 내 느낌이다. 느낌이란 것은 오감으로 알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내 잠재의식과의 전달 체계이므로 때때로 내 상상력에서 비롯된 데자뷰 현상처럼 가끔씩 이곳에 와 본 적 있는 것 같은 낯익은 느낌을 받는다. 아니 내가 찍은 사진은 아닐까 생각까지 든다. 종종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피사체인 사람들이 모두 나와 눈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나를 보고 있으므로 가끔씩 정이 든 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적이 놀란다.
170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왔다. 1800년대 초 사진을 발명한 이후 사진이 급속도로 발전했고 선교사들은 사진기를 우리나라에 들여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남겨진 사진의 대부분이 선교사들의 찍었던 사진들이다. 공주에는 황새 바위라는 순교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주의 선교중심지가 아니었을까. 이들을 통해 공주 사진이 남겨졌을 법하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그 시대 공주를 알 수 있는 사진이 있을 터인데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1940년 공주중학교 입학 기념 사진
< 사진출처: 조병진 제공>
1940년, 지금의 공주고등학교 체육관 자리쯤에서 찍은 단체사진으로 지금의 공주 고등학교자리에 함께 공주 중학교가 있었다한다. 사진 오른쪽위의 신사입구가 찍혔다. 가슴이 싸하다. 누구나 그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닐 듯하다. 이 사진은 그 시절 공주중학교를 나온 일본사람을 통해 전해졌다. 지금도 공주에서 학교를 나온, 살아 계신 분들이 지금도 일본에서 ‘공주회’라는 모임을 갖는단다. 올해 ‘무령왕네트워크’ 단체의 교류 사업차 윤여헌 선생님을 모시고 간 조병진씨가 ‘공주회’에 참가 차 갔다가 이 사진을 간직한 분이 계셔서 재 촬영해왔다. 이 분들 중에 2008년에는 아메미아 히로스케라는 분이 공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을 기증해 주었고 역사 박물관에서 유물전시회를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런 후 올해 세상을 뜨셨다. 유물을 가져오는 날 아메미아씨를 뵐 수 있었는데 공주에 대한 기억은 참으로 특별함을 알 수 있었다. 연로하신 몸으로 돌려 주어야할 것 같아 가져왔노라는 말씀에 역사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많은 분들이 공주를 사랑해주고 있어서 고마웠다. 오히려 우리는 공주를 얼마나 간직하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부끄러웠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공주의 옛 모습을 찾고 간직해야함을 절실히 느꼈다.
아루스 사장
<사진출처: 김혜식 촬영>
아루스 (ars)란 라틴어로 예술(art)이란 말이다. 이런 세련된 이름으로 시청 가는 쪽에 간판만 남아있는 사진관 하나가 있었다. 집을 지을 때 아예 이름을 새겨 넣은 건물로 간판의 변천사를 볼 때 연대를 따지자면 족히 50년은 넘었을 몇 군데의 건물 중의 하나였다. 누구였을까, 알고 보니 종군기자 출신이었던 사람이 문을 열었단다. ‘아루스’라는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사진을 찍는 일을 예술로 생각했으리라. 또한 천직이었으리라. 공주사진계의 선구자가 아니었을까. 수소문해보고 싶을 만큼 내내 궁금한 사람이었으나 베레모 빵떡모자를 쓰고 다녔다는 것 밖에 알 수가 없다. 신라 사진관, 중앙 사진관, 연미 사진관,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오기 전까지 한 시대를 증명하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중학교 때 우리 집 옆에 사진관 하나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다준 올림프스 하프 사이즈 카메라로 인연을 맺어 암실을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하는 일은 정착액에서 사진을 흔들어 주는 일이었다. 지금도 인화액에서 사진을 건지며 그때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 사진관 아저씨는 인화액을 절대 나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사진을 시간에 맞춰 약품에서 건지는 일이 사진을 죽이고 살렸으니까. 내가 해보고 싶어 하는 눈치이니까 고작 시간의 관용도가 좋은 정착액에서 사진을 건지도록 허락했을 뿐이다. 다시 사진을 시작한 이후로는 사진에 관련된 기억을 모두 생생하다. 모든 기억이 사진처럼 남았다.
첫댓글 사진을했던 나보다 더 생생하게 표현하시네요. 위에서 말씀하신 신라사진관 중앙사진관 주인들이 일본인에게서 직접배운분들이죠 연미조성래사장님은 중앙사장님께 배웠구요 당시에는 인화약을 산에서 맑은물을 떠다 약을 탓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