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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순천의 연혁에 관하여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의 일부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금의 순천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영토로서 하나의 군이었고, 당시의 지명은 삽평(歃平)이었다. 그리고 부근에는 역시 백제의 분차군(分嵯郡:낙안, 현 보성군 벌교읍 고읍), 둔지현(부유, 주암면 창촌), 마로현(광양, 광양읍 마로산 고성), 원촌현(여수, 여천군 쌍봉면), 노산현(돌산, 여천군 화양면) 등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순천과 그 주변지역이 언제부터 백제의 영토가 되었는지, 그리고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에서 순천의 위치가 어떠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백제는 660년(의자왕 20)에 신라와 당의 협공을 받아 사비성과 웅진성 등 수도지역이 침략군에게 점령되고 663년에는 항전의 중심지이던 주류성(전라북도 변산)과 임존성(충청남도 대흥)이 함락됨으로써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영토는 당과 신라에게 양분되었다. 660년 이후 4년 동안에 백제 영토의 동반부(경남의 낙동강 이서지역, 경북 서남부, 전남・북 동부, 충북 남부・동부)는 이미 신라에게 점령되었고, 그 서반부 평야지대는 당에 직속되었다.
당의 점령지, 곧 웅진도독부의 관할이 도독부와 7주 및 51현으로 개편되었으며, 동시에 그 지명들도 모조리 중국식으로 바뀌었다. 다만, 당군이 다수 주둔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쥐고 있었지만, 웅진도독에는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륭이 임명되고 주자사와 현령에도 백제인들이 많이 기용되었다. 말하자면 백제국은 반쪽 영토에 당의 군사지배를 받으면서나마 어쨌든 형식상 부흥된 셈이었다. 이런 백제국의 부흥은 물론 백제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당의 기만적 계책이며 ‘동이 삼국(東夷 三國)’에 대한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즉,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를 공멸한 당은 이제 백제국을 괴뢰로 내세워 신라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당이 세운 동방정책의 다음 단계 작전이었다. 사실 당의 백제 침략은 고구려와 신라까지도 정복하려는 계획의 제1단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한편 663년 당시에 분차(낙안)는 분명히 당령 백제의 한 주였으나, 삽평(순천)은 이미 신라령으로 편입되었던 것 같다. 당령과 신라령의 경계가 정확히 지금의 어디쯤이었는지, 또한 신라령의 편제는 어떠하였으며, 그 편제에서 삽평의 위치가 어떠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백제를 침략하여 그 영토를 분할 점령한 신라와 당은 668년에 또 동맹하여 고구려를 공멸하였다. 그러나 일단 공동의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틈이 벌어져 670년부터는 서로 적이 되어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 전쟁은 앞서와 달리 거란과 말갈을 동원한 당이 그 속령인 백제와 연합하고 신라가 일부 고구려인과 연결하여 대립한 형국이었으며,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과 지금의 임진강・한강 하류 유역이 주전장이었다. 처음에는 쌍방이 일진 일퇴를 거듭하였으나, 당의 국내외 사정으로 말미암아 갈수록 신라 쪽에 유리하게 전황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676년의 기벌포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쟁은 끝나고 당군은 드디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당군이 패퇴하자 백제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684년까지 그 전토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백제는 건국된 지 700여 년 만에 마침내 소멸되고 만 것이다.
신라는 660년 이후 20여 년 동안의 전쟁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지금의 예성강~원산만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즉, 백제 영토의 전부와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탈취함으로써, 그 영역을 종전의 배 이상으로 늘리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신라는 그 전쟁에서 수백 년 이래의 숙적인 두 나라를 영구히 쳐 없애고, 넓은 새 영토까지 얻는 그야말로 획기적이고도 크나큰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었다.
물론 신라가 주도한 전쟁은 영토 확장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신라의 자구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사실 신라는 660년 이전에 백제와 고구려, 특히 백제의 공격으로 국가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두 적국을 없애고 영토도 넓혔으며, 무엇보다도 위기를 해소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의 싸움에 중국을 끌어들여 그 힘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은 그뒤의 한국사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영향은 너무도 절통한 것이었다.
아무튼 신라에 병합된 옛 백제 영토는 685년(신문왕 5)까지 신라식의 4주(사비・완산・발라・청)와 3소경(금관・남원・서원) 및 다수의 군・현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당이 중국식으로 고쳤던 지명들을 포함해 각 고을의 이름도 상당수가 점차 신라화하였다. 그때 삽평은 여전히 군으로서 변동이 없었던 것 같다.
그후 신라는 757년(경덕왕 16)에 당의 방식을 따라 주・군・현 간의 영속관계를 강화하고 동시에 전국에 걸쳐 모든 지명을 중국식 한자명으로 고쳤다. 그에 따라 무주총관부의 관내에 들게 된 삽평은 ‘승평’으로 개칭되었으며, 군으로서 희양현・해읍현・노산현을 관할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신라 경덕왕대의 순천지역 행정구획
주(총관부) |
주・군 |
주・군・현 |
비고(현 지명) |
무 주 (1주・14군・44현) |
무 주 |
무 주 |
무진주(광주) |
현웅현 (외 2현) |
미동부리(남평) | ||
승평군 |
승평군 |
삽평군(순천) | |
해읍현 |
원촌(여수) | ||
노산현 |
돌산(여천군 화양면) | ||
희양현 |
마로(광양읍 마로산 고성) |
그러나 757년의 ‘개혁’은 무열왕조가 쇠미해가는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추진하였던 중국화 정책이었고, 지방통치의 강화를 꾀한 마지막 안간힘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그 조치는 실효를 거둘 수도 없었지만, 그나마 20년 만인 776년(혜공왕 12)에 정식으로 취소되고 백관의 호가 모두 복구되었다. 각 주・군・현의 이름도 거의 복구되었다.
이처럼 757년의 개혁은 실패하였고 그 실패는 무열왕조의 종말을 재촉하였다. 결국 수년간 내란이 잇달아 일어나던 중에, 혜공왕이 난군에게 살해됨으로써 무열왕조는 8대 127년(무열왕~혜공왕, 654~780) 만에 단절되었다. 그리고 과도기인 선덕왕대를 거쳐 원성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무열왕조시대를 신라의 ‘중대’, 선덕왕 이후를 ‘하대’라고 구분한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원성왕조(원성왕~경순왕, 785~935)도 한번 실추된 왕조의 지배권을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신라 자체는 이미 쇠망기에 들어 해체되고 있었으며, 왕조 교체과정에서 격화된 지배층의 분열은 그것을 더욱 촉진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사회는 지방분권시대인 ‘호족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국사의 대분열기인 호족시대는 좀더 새롭고 바람직한 재통일・재화합・재분배의 사회를 요구하고 또 스스로 준비해가는 격동기였다. 각 지방의 호족들은 독자적인 지배권을 구축하여 마치 ‘열국시대’를 방불케 하였으며, 한편으로 ‘천하통일’을 위해 서로 싸웠다. 그 과정에서 각 세력간에 지배 복속의 관계가 생겨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양국이 40여 년 동안 쟁패하였으나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던 신라왕조가 935년 고려에 투항하고, 다음해에는 후백제가 고려에 패망함으로써 마침내 통일이 성취되었다.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기에 삽평(순천)지역은 백제의 세력권이었다. 한편 견훤을 섬겼으며 죽어서 순천의 성황신이 되었다는 김총, 견훤의 사위로서 견훤이 고려에 투항한 뒤에 고려에 내응하였으며 죽은 뒤에 해룡산신이 되었다는 박영규, 무용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죽은 뒤에 인제산신이 되었다는 박난봉 등은 당시 이곳의 대표적인 호족들이었다.
고려 초기는 비록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나, 실상 호족시대의 후반기로서 아직 왕조의 통치권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왕조는 1018년(현종 9)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지방통치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고려왕조는 건국한 지 100년, 영토를 통합한 지 80년이 넘어서야 겨우 지방통치의 기틀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호족세력의 영향이 그만큼 컸음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1018년 이전에도 고려왕조의 통치권은 나름대로 행사되고 있었다. 우선 940년(태조 23)에는 전국의 모든 주・부・군・현의 이름을 개정했다. 그것이 제대로 준용되지 않자 성종대(981~997)에는 이를 재확인하거나 다시 바꾸고 관・역・강・포의 이름까지도 모두 고쳤다. 그 내용은 바로 757년에 신라에서 개정했던 것을 그대로 채용하거나 새로 정한 것으로서, 좀더 중국식인 한자명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 목적은 지명에서 백제적인 혹은 신라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분위기를 일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삽평(승평)군은 ‘승주’로 개칭・승격되었다. 물론, 지방관이 배치된 것은 아니고 관호만의 승격이었지만, 당시 승주(순천)의 정치적 위치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태조부터 경종대까지(936~981)는 지방에 상당수의 진과 서경(평양), 등주(안변)・안남(전주)・안동(경주)도호부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진이나 도호부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말하자면 군사적인 거점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모든 고을들은 지방세력의 완연한 자치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상주 행정관은 배치되지 못하고 리심사(里審使), 금유(今有), 조장(稠藏), 전운사(轉運使) 등이 각 지방에 수시로 파견되어 조공을 징수하였다. 그무렵 승주 조양포(해룡면 해창리)에는 12조창의 하나인 해룡창이 있었다. 그리고 983년(성종 2)에는 처음으로 승주를 포함하여 12주에 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2경에 유수, 5도호부에 부사, 12군에 절도사 및 관찰사・자사・방어사・도단련사・단련사 등 다수의 수령을 배치하였으며, 그 고을들의 관호를 모두 ‘주’로 통일하였다. 그 수는 잘 알 수 없지만, 처음으로 많은 고을에 수령을 배치하여 적극적인 통치를 꾀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 2경, 5도호부, 12군은 지방통치의 중심 격으로서 후일의 계수관과 같은 것이었다. 특히 관호의 통일은 근대적인 조치라고도 할 만큼 획기적인 것이었다. 다만 10도는, 명칭까지도 대개 당의 10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서, 조선조나 현대의 도와 달리 몇 개의 고을을 한데 묶어 나눈 단순한 구역일 뿐 도지사 같은 행정기구가 있는 상급 지방행정구획은 아니었다. 따라서 모든 주는 행정상 중앙정부와 직결되었던 것이다. 그때 승주는 12군 중 연해군에 해당하며 낙안군, 곡성군, 부유현, 광양현, 여수현, 돌산현 및 다수의 향・소・부곡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낭주(영암:안남도호부), 나주(진해군), 정주(영광:자사), 광주(자사), 패주(보성:자사), 담주(담양:도단련사) 등과 함께 해양도를 구성하였다.
그뒤 10년 만인 1005년(목종 8)에는 10도가 폐지되고 수령의 수도 대폭 감축되어, 983년(성종 2)의 상태로 후퇴하였다. 관찰사・자사・도단련사・단련사가 모조리 혁파되고, 2경과 양계의 방어진(사)・현・진(장) 외에, 군사적인 성격이 특히 강한 4도호부(안서도호부 폐지)와 12주(군 폐지)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지방세력의 반발 때문이었다. 1012년(현종 3)에는 다시 수령을 대폭 증설하여 12주를 폐지하고 그 대신 5도호부(안서도호부 복설) 외에 75도(안무사)를 설치하였다. 적어도 80여 고을에 수령을 배치하고 도호부 외 고을의 관호와 수령의 명호를 도와 안무사로 각각 단일화함으로써 다시 적극적인 통치태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왕위계승문제 및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으로 빚어진, 왕조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가능하였고, 또 그 때문에 필요했던 조치이기도 하였다. 75도가 어디였는지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알 수 없지만, 승주는 75도의 하나로서 여전히 수령이 없는 그 부근의 고을들을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018년(현종 9)에는 새로운 제도가 실시되어 그것이 고려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1018년에 실시된 제도는 외형상 전국을 경기(개경)와 호경(서경) 및 12계수관도로 제법 정연하게 나눈 것이었으나, 실상은 고려왕조와 지방호족세력 간의 타협의 소산으로 그 구조가 아주 복잡하였다.
첫째, 12계수관은 4도호부(경주안동대도호부・해주안서도호부・안북(안주)대도호부・안변도호부)와 8목(황주・광주・충주・청주・전주・나주・진주・상주)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995년(성종 14)의 5도호부・12군이나 신라의 9주와 비슷한 것으로서 각 구역이 따로 있는 하나의 고을에 불과하였으며, 조선조나 현대의 도와 같은 상급 지방행정구획은 아니었다.
둘째, 한 계수관과 그에 관련되는 약간의 부(지부사), 주(방어사・지주사), 군(지군사), 현, 진 등이 하나의 계수관도를 구성하였다. 그 점에서도 계수관과 부 이하의 수령관들은 동격이었으며, 실제 주요 행정에서 상호 독립적이었고, 각각 중앙정부에 직결되고 있었다. 사실 계수관도는 온전한 행정도가 아니었으며, 그것이 군사도인 점에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 계수관을 포함한 각 수령관은 그 직촌(직할지역)과 함께 수령이 배치되지 않은 고을, 즉 속부・주・군・현・향・소・부곡・처・장 등의 임내(任內)를 관할하였다. 그리고 수령관의 관할구역도 하나의 군사도였다. 즉, 한 수령관과 그에 속한 몇 개의 임내들이 모여 하나의 소군사도인 수령관도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1018년의 체제에서 승주는 나주도에 속한 나주목의 한 ‘영주(領州)’로서 5품 이상의 지사(知事)나 주사(州事)가 배치되는 하나의 수령관이 되었다. 983년(성종 2) 이래 12목 또는 12군의 하나로서 적어도 나주와 동격이던 승주는 한 개 지사관으로 격이 낮아졌다. 1036년(정종 2)에 승주는 또다시 5품 이상의 지군사가 배치되는 승평군으로 개칭・강격되었고, 관할구역도 줄어들었다. 즉, 부유현・광양현・여수현・돌산현과 3향・19소・14부곡은 여전히 승주(승평군)의 임내로 남게 되었지만, 곡성군과 낙안군 및 그 부근의 4소(개녕・초천・품어・가용)와 2부곡(군지・율곡)이 나주목의 임내로 이속되었다. 그처럼 승주의 지위와 관호가 격하되고 또 그 임내마저 축소된 것은 호족시대 이래 승주의 세력이 1018년을 전후하여 크게 위축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까지 승주의 임내이던 낙안군과 곡성군 등이 승주보다 거리가 훨씬 먼 나주목의 임내로 이속된 것은, 백제와 고려의 쟁패기부터 이미 왕건의 세력 근거지로서 고려왕실과 특수한 관계에 있던 나주세력이 그무렵에 더욱 커지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승주를 중심으로 고려 전기의 지방통치체제를 도시하면 다음 표와 같다.
그러나 ‘1018년의 제도’도 고려 중기 이후 많이 변모하였다. 숙종・예종대(1095~1122)의 중흥정책과 북벌추진 및 좌절, 이자겸의 난(1126)과 묘청의 난(1135~1136), 무인정권의 성립(1170)과 몽고의 침략(1231) 등 어지러운 정치적 격동 속에서 지방통치제도도 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선 3경의 설치 등으로 말미암아 계수관의 수와 그 관내(管內)의 변동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고려 전기의 지방통치체제
계수관 |
수령관 및 임내 |
비고(치소) | |
나주목 (나주도) |
나주목 (목 사)
나주목도 |
나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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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군 |
(곡성군 죽곡면 본토) | ||
낙안군 |
(보성군 벌교읍 고읍) | ||
(현・향・소・부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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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 (지주사) ↓ 승주군 (지군사) ↓ 승주도 (승 평) |
승 주 |
서 면・해룡면 | |
부유현 |
주암면・쌍암면・송광면(주암 창촌) | ||
광양현 |
광양읍・봉강면 | ||
여수현 |
여수시, 여천군 쌍봉면(쌍봉면) | ||
돌산현 |
(여천군 화양면) | ||
(3향・19소・14부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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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내가 감무관, 현령관, 지사관 등으로 독립됨으로써 수령관의 수가 크게 늘었으며, 그와 함께 허다한 임내의 소속이 변동되고 다수의 월경지(越境地:어떤 고을의 경계 밖의 관할지역)와 두입지(斗入地:경계는 연결되지만 다른 고을의 영역 속으로 마치 반도처럼 길게 쑥 내민 지역)가 새로 발생했다. 또한 많은 고을들이 승격・승호되거나, 목・도호부 등 고위 수령관이 남설됨으로써 계수관의 기능이 위축되어 유명무실해졌다. 반면에 2~4개의 계수관도 또는 수령관도를 하나로 묶은 5~8개의 안찰(렴)사도가 새로 성립되었다. 그 예의 하나를 전주도와 나주도가 합쳐져 전라도가 된 데서 볼 수 있다. 대군사도이기도 한 안찰사도는 원래 임시적인 순찰구역에 불과하였으나, 갈수록 안찰사의 기능이 확대되어 점차 행정도화하고, 마침내 1390년(공양왕 2)에는 전임 관찰사가 주재하는 행정관서(경력사)가 설치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상급 지방행정구획이 되었다.
승평(순천)군 지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명종대(1170~1197)에 승평군의 임내였던 광양현이 감무관으로서 수령관이 되고, 그와 함께 그 부근의 1향・12소・5부곡이 광양현의 임내로 이속되었다. 또한 1309년(충선왕 1)에는 승평군이 일약 승주목으로 개칭 승격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순천부로 개칭・강격되었다. 이는 남설된 수많은 목을 도태시킨 국가정책의 일환이었지만 그 결과, 순천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그 관호도 군에서 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350년(충정왕 2)에는 그때까지도 순천부의 임내이던 여수현이 현령관(7품 이상)으로서 모처럼 수령관으로 독립되었다.
조선의 지방통치제도는 태종대(1400~1418)에 확립되어 세조대(1455~1468)에 일부가 수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경국대전�(1484, 성종 15)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방통치체제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그것을 답습・보완한 것이었다. 다만 고려에 비하여 몇 가지 개선된 점이 있었다.
첫째, 한국사 초유의 상급 지방통치조직인 도제가 확립되고, 그에 따라 8도가 확정되었다. 둘째, 계수관제가 진관제로 바뀌었다. 셋째, 모든 주・군・현에 파견되는 감무관이 현감으로 통일되고, 주・군에 파견되는 지사관은 군수로 단일화되었으며, 부・대도호부 외의 모든 단부관, 즉 부의 지부사는 도호부사로 바뀌었다. 넷째, 부・대도호부・목 외에 도호부・군・현의 지명 중 ‘주’가 ‘산, 천’자로 대체되어 혼잡이 줄었다. 다섯째, 관찰사와 수령이 전임 외관으로 되었으며, 그 품질(品秩)이 승격되고 직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가장 크게 기대하고 또 주력했던 임내를 혁파하여 직촌으로 만드는 것과 월경지와 두입지의 정리, 군소 고을의 통폐합 등은 큰 성과 없이 결국 실패하였다. 즉, 그 기간에 일부 임내가 직촌화하거나 수령관이 되기도 하였지만 16세기 말까지도 아직 많은 임내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월경지는 1906년까지도 무려 100여 곳이나 존속하였으며, 또 각 고을간에는 그 면적과 인구수의 차이가 아주 심하였다. 그것은 조선의 지방통치체제가 매우 불합리하고 불완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왕조의 통치권에 많은 한계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은 경도한성부와 구도개성부의 2도와 8도 예하의 4부(평양부・영흥부・전주부・경주부), 4대도호부(영변・안변・강릉・안동), 20목, 44도호부, 82군, 34현령관, 141현감관 등 총 331관으로 구획되었다. 그 체제는 큰 변동 없이 1895년(고종 32)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경국대전� 이후의 변화로는 16~17세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군비강화책으로 여러 곳에 독진이 증설됨에 따라, 상당수의 고을이 승격되고 약간의 고을이 강격되거나 폐합 또는 신설되었을 뿐이었다. �대전회통�(1865, 고종 2)에 따르면 당시의 편제는 5도(경도한성부・구도개성부・강도강화부・남성광주부・화성수원부)와 8도 예하의 5부(의주부・평양부・함흥부・전주부・경주부), 5대도호부(영변・영흥・강릉・안동・창원), 20목, 75도호부, 77군, 26현령관, 122현감관 등 총 335관으로, 왕조 초기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편, 순천부는 조선 초 1413년(태종 13)의 예에 따라 순천도호부로 바뀌었고, 그보다 앞서 1396년(태조 5)에는 여수현이 다시 순천부의 임내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여수현과 함께 순천도호부 임내이던 돌산현・부유현 및 다수의 향・소・부곡 등은 대략 15세기 말경까지는 모두 직촌이
되어 잡다했던 군소 고을들이 비로소 순천도호부에 하나의 고을로 통합됐던 것이다.
1598년(선조 31)에는 광양현이 순천도호부에 임내로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었다. 왜의 침략으로 피해가 너무 커서 현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725년(영조 1)에는 여수도호부가 신설되어 전라도좌도수군절도사가 여수도호부사를 겸임하였다. 옛 여수현이 일약 도호부로 되어 순천도호부에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관할지역의 범위는 잘 알 수 없거니와 겨우 1년 만에 여수도호부는 폐지되고 그 땅은 다시 순천도호부에 병합되었다. 순천도호부는 두 번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 즉, 처음은 효종대(1649~1659)에 현으로 격하되었다가 곧 복구되었고, 두번째는 1786년(정조 10)에 또 현으로 강격되었다가 이듬해에 환원되었다.
면과 리의 제도는 오랜 옛날부터 발달해왔는데 고려시대 이전에는 면이나 리를 둘 다 촌이라고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한 고을(주・군・현)이 대개 3촌(면)으로 나뉘고 그 이름이 상・중・하촌 또는 일・이・삼촌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대개 한 고을에 4촌(면)이 있어 그 이름을 동・서・남・북촌이라고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처음으로 면・리제가 채택되었으나 왕조 말기까지도 면급에는 촌・방・사・리・부 등이, 리급에는 촌・동・방 등의 호칭이 혼용되었다. 다만 16~17세기에는 면과 리가 점차 널리 쓰이기 시작하고 면의 수가 늘어나면서 면이름에도 기본적인 방위명(동・서・남・북면) 외에 고유의 명칭이 더러 나타나게 되었다.면의 수가 처음으로 기록된 1670년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따르면 당시에 순천도호부는 19면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면이름이 처음으로 표기된 1759년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18면(소안・장평・해촌・용두・율촌・소라포・삼일포・여수・상이사・하이사・도리・별량・송광・쌍암・주암・월등・황전・서면),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25면, 640리로 되어 있다. �호구총수�와 기타 자료들을 참고하여 조선 후기의 순천도호부 관내의 면을 도시하면 앞과 같다.
순천시의 지리적 특성
한반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전라남도 동부지역은 마한과 백제의 옛터로, 일찍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왔다. 순천시는 전라남도 동부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 세상에서 소강남이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순천시의 경․위도상 위치를 살펴보면 극동은 해룡면 호두리 당두(當頭)마을로 동경 127°35′이고 , 극서가 송광면 월산리 삭시(朔矢)마을로 동경 127°10′이다. 극남은 별량면 구룡리 용두(龍頭)마을로 북위 34°49′이고, 극북이 황전면 비촌리 칠안(七安)마을로 북위 35°11′이며 동서간 약 38㎞, 남북간 약 39㎞에 걸쳐 있다.
순천시의 4극
구 분 |
지 명 |
극 점 | |
경도(동경) |
위도(북위) | ||
극 동 |
해룡면 호두리 당두 |
127°35′18″ |
34°53′03″ |
극 서 |
송광면 월산리 삭시 |
127°10′37″ |
34°58′32″ |
극 남 |
별량면 구룡리 용두 |
127°25′18″ |
34°49′39″ |
극 북 |
황전면 비촌리 칠안 |
127°24′32″ |
35°11′08″ |
시의 주변에는 동쪽에서 북~서~남쪽으로 돌아가면서 광양시・구례군・곡성군・화순군・보성군・여천군이 접해 있고, 남쪽의 일부는 바다에 면하여 있다. 순천만과 광양만에 있는 해안선의 총연장은 36㎞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에서는 동쪽으로 광양현의 접경까지 15리요, 북쪽은 같은 현 접경까지 25리, 남원부 접경까지 60리, 곡성현 접경까지 36리이고, 남쪽은 바닷가까지 35리, 낙안군 접경까지 31리, 동복현 접경까지 83리이며, 서울까지 834리라고 하였다. �호남순천부읍지(湖南順天府邑誌)�를 보면 부읍(府邑)에서 동쪽 광양현 경계까지 15리, 동현읍까지는 28리이고, 좌수영은 80리이며, 방답진에 이르는 데는 150리(�여지승람�에는 170리)라 하였다. 서쪽 낙안군 경계는 31리에다 군읍(郡邑)까지는 45리, 동복현 경계는 94리(�여지승람�은 83리)이며, 현읍(縣邑)까지는 111리이다. 남쪽바다는 25리(�여지승람�은 35리), 북쪽 구례 경계는 61리(�여지승람�에도 61리)이고, 현읍까지는 70리라 하였다. 곡성현 경계까지는 80리(�여지승람�은 36리)이고, 현읍까지는 151리, 광양현 경계까지는 25리이고, 서울까지는 27식 22리(�여지승람�은 834리)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순천시는 이리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전라선 철도와 송정리에서 삼랑진으로 이어지는 경전선 철
도의 교차점이다. 전주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17번 국도와 목포에서 진주~마산~부산으로 이어지는 2번 국도의 교차점이고, 호남․남해고속도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있어서 지리적으로 결절점(結節點, nodal point)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순천만과 광양만을 통하여 남해와 접하고 있어서 해상교통도 편리하다. 따라서 일찍이 995년(고려 성종 14)부터 연해군절도사가 주둔하는 등 기능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수․여천․광양 3개 시와 여천․구례․곡성․보성․고흥 5개 군의 지역생활권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명실공히 전라남도 동부지역의 중심도시로서 계속 발전해가고 있다.
조계산(曹溪山)
조계산은 영산으로 송광사(松廣寺)와 선암사(仙巖寺)를 동서 양록에 안고, 승주읍․주암면․송광면․외서면․낙안면․상사면을 품고 있다. 산맥이 내장산에서 뻗어내려 무등산, 사자산, 벌교의 금화산, 계족산으로 힘차게 이어오다 광양의 백운산에서 불끈 솟아 그 자락을 남해에 드리운 호남정맥(湖南正脈)의 산이다.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을 끼고 모후산과 마주하고 있다. 옛날에는 서쪽 봉우리를 송광산, 동쪽의 장군봉을 청량산이라고 불렀으나 고려 때부터 조계산으로 통칭되었다.
신라 말에 혜린선사(慧璘禪師)가 길상사(吉祥寺)를 개창하고 산의 이름을 송광산이라 했다. 그리고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하고 수선사(修禪社)를 길상사터에 중창했는데, 1204년에 희종이 조계산 수선사로 바꾸었다.
임금께서 듣고 이를 가상히 여겨 산의 이름을 조계산으로, 사(社)의 이름을 수선사로 바꾸어서 임금께서 제액(題額)을 써서 이를 포장(褒獎)하셨다.
이 기록으로 보아 1204년까지는 송광산 수선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절의 이름이 송광사로 변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말에 문인들의 입에 ‘송광사’로 회자되면서 절이름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른다. 송광면 출생으로 송광사에서 수계하고 일생을 그곳에서 보내다 열반한 지주 인암(仁庵)은 시대에 따라 절이름이 신라 길상사, 고려 수선사, 조선 송광사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송광산은 우리말 이름 ‘솔메’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이두식 표기는 옛 지명에 흔하고 현재 면단위 이하의 마을에서도 흔하다.
예를 들면 우산(牛山)은 ‘소메’, 대곡(大谷)은 ‘한실’, 이읍(梨邑)은 ‘배골’, 대구(大龜)는 ‘한구미’ 등으로 한자의 음과 뜻을 취해 표기한 것이다. 송광면 사람들은 솔을 ‘솔갱이’라고 부른다. 소나무가 무성한 산이란 뜻으로 ‘솔개이메(솔강이메)’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솔’을 송(松)으로 뜻옮김을 하고 ‘갱이(강이)’를 광(廣)으로 소리옮김을 해 송광산이란 이름을 찾아낸 것이다.
구전하는 전설에는 ‘송(松)’을 ‘십팔공(十八公)’으로 파자(破字)하여 송광사에서 18분의 국사가 나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고려와 조선조에 16분의 국사가 배출되었으니, 앞으로 2분의 국사가 더 배출된다는 기대를 가지고 스님들이 용맹정진하고 있다. 임석진(林錫珍)의 �송광사지(松廣寺誌)�에도 “송광(松廣)에 대한 고해(古解)는 본산(本山)이 장차 18공을 배출(輩出)하여 불법(佛法)을 널리 펼 승국(勝局)임에 말미암았다 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풀이는 괴벽한 미신으로, 점성가들의 풀이일 뿐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리는 사람이 더 많다.
포광(包光) 김영수는 “산에 솔갱이(솔의 방언)가 가득 차 당시 지원민(地元民)들이 이 산을 솔매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보조국사의 제자 수우(守愚)가 나복산(蘿葍山, 모후산)에서 나무로 솔개를 만들어 날렸더니 한 마리는 담양의 추월산에, 또 한 마리는 여천의 흥국사 자리에, 나머지 한 마리는 송광사 국사전 뒷등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송광사 국사전 뒷등을 치락대(鴟落臺:원감국사 시집에는 진락대라 함)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솔개’와 ‘솔갱이’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송과 치로 뜻옮김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불력(佛力)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나무 솔개가 날아가 절을 세울 만한 복지에 앉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전설화한 송광사 중창 사실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따라서 제6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1226~1292)가 ‘진락대(眞樂臺)’라고 표현한 데는 또 다른 의미가 내포돼 있으리라 여겨진다.
한편 선암사 기록을 살펴보면 정문에 ‘조계산 선암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그 뒤편에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 안택희서(安宅熙書)란 현판이 걸려 있다.
「조계산 선암사 제육창건기」에는,
신라 법흥왕 때 사문 아도(阿度)가 일선군(一善郡)에서 왔는데 예관한 김상흠이 성적과 번수하던 곳을 사모하여 기도하다가 꿈에 기별을 받고 비로소 가람을 창건하여 청량으로 이름하고 해천사로 일컬었는데 다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용암혜, 1828년 대웅전 안 현판)
라고 기술돼 있다. 신라의 일선군에서 아도가 백제 땅인 이곳에 찾아와 절을 짓고 청량산 해천사라 이름했으니, 신라 때부터 고려 중엽까지 선암사에선 청량산으로, 송광사에선 송광산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조계산으로 통칭하고 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선암사를 중창하고 선암사라고 명명하면서 산이름을 무엇이라 했을까? 청량산 선암사였을까?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조계산 선암사 제육창건기」에는
경덕왕 때 도선국사가 동방의 비보도를 살펴보고 중창하고 절이름을 선암사라고 바꾸었다.
고 했을 뿐 산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이는 「조계산 선암사 제육창건기」의 기술이므로 조계산 선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볼 수 있지만, 기록자가 산이름을 청량산에서 조계산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절이름만 바꾸었다고 서술했을 가능성도 있고, 청량산 해천사에서 선암사로 절이름만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려 선종(宣宗) 때 중국에 들어가 불경을 가지고 환국한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선암사를 다시 중창했을 때를 기록한 「조계산 선암사 사적비명병서(事蹟碑銘幷序)」는
그뒤 고려 때에 이르러 대각국사가 중창하고 산이름을 조계산이라고 바꾸고 7구역에 선원을 세워서 나라에서 조계종을 존중하게 되었는데, 선종이 가르침을 존경하는 것이다.1)
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의천(義天) 대각국사가 조계산으로 산이름을 바꾸었고, 그 100년 뒤에 보조국사가 서쪽 계곡에 수선사를 중창했을 때는 고려 조정에 조계산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희종이 조계산 수선사란 제액을 친히 써서 내려주었을 가능성이 짙다.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왜 절이름을 바꾸었는가?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비조가 도선국사이므로 그 이유가 자못 크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국사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 이유를 직접 대면해 듣듯이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선암사의 기록과 구전하는 설화를 고찰하면 그 까닭을 추측할 수 있다. 대각암 뒤 장군봉에는 ‘배바구’가 있는데 옛날에 거기에 배를 매고 살았다고 배바위라 부른다. 그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착한 할아버지와 7살 난 손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착하고 순진한 노인이었으나 가난했다. 노상 지게에다 동냥자루를 동여 매고 손자를 지게에 얹어 지고 다니며 동냥을 했다. 그러나 공짜 동냥은 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해주었다. 마당을 쓸어주거나 두엄을 내주어 주인에게 은혜를 갚았다.
어느 따뜻한 봄날 동냥을 해서 막 집에 돌아와 마루에 걸터앉았는데 동냥승이 찾아와 시주를 호소하자, “가진 것이 없소. 오늘 동냥해온 겉보리가 저 마루에 있으니 그거나 시주하리다.” 하고 자루째 부어주었다. 스님은 하늘을 우러러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나서
“세상 사람들이 노인장만 같으면 무슨 재앙이 있으리오!”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지 않는가?
“무슨 말씀이오?” 스님은 또 한숨을 쉬고 나직이 말했다.
“인심이 사나우니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오. 저 골짜기의 돌부처 코에서 피가 흐르는 날 여기는 물바다가 될 것입니다. 노인장은 그날이 오면 배바위까지 올라가 재앙을 면하시오. 나무관세음보살…….” 말을 마치자 스님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노인은 스님 말을 그대로 믿고 어린 손자에게 매일 아침 돌부처 코에 피가 났는가, 안 났는가를 살피게 했다. 3년을 그렇게 했다. 마을사람들은 노인이 노망을 해서 어린 손자만 고생시킨다며 쑥덕거렸다. 그런데 마을의 짖궂은 청년들이 이 노인을 골탕먹일 양으로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오다가 주먹으로 제 코를 쥐어박아 피가 나게 하고 그 피를 돌부처 코에 발라놓았다.
손자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같이 달려가 보니 피가 흐르지 않는가!
“할아버지, 났습니다. 피가……!”
손자는 헐레벌떡 뛰어와서 아뢰었다. 노인이 달려가 보니, 과연 피가 가슴팍까지 흘렀다. 곧 마을로 내려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돌부처에 피가 났소. 재앙을 피해 산으로 갑시다! 물바다가 됩니다!” 하고 호소했지만 주민들은 노망을 해서 손자를 고생시키더니 이제는 미쳤다고 몰아세울 뿐만 아니라 재수없다고 내쫓아버렸다. 노인은 하는 수 없이 손자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점심 때가 되었을까? 산허리를 돌아 올라가는데 한 소녀가
“아이고 다리야! 인자 괜찮겠지?” 하고 바구니를 끼고 가는 것이 보였다. 노인은 뒤쫓아가 앞질렀다. 그러자 소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노인은 그냥 지나 몇 걸음 걷다가 같이 가자고 하려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어느 새 물이 소녀의 바구니 밑까지 차오른 것이 아닌가! 온 마을은 물에 잠겨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는 것도 보였다.
“아가, 어서 가자, 물이 차 오른다.” 외쳤지만 소녀는 울상이 되어 꼼짝도 안 했다. 소년이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셋이 커다란 바위에 올라 마을을 바라보니 허우적거리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퍼런 물만이 출렁거렸다.
이 바위가 배바위이다. 배를 맸던 쇠고리가 해방 후까지도 박혀 있었는데 지금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송광사 스님들은 말한다.2) 순천시 일원이 바다였을 때 선암사 뒤 바위, 곧 ‘배바구’에서 배를 매고 고기를 잡아 먹었기 때문에 배바위라 했으니, 이 전설대로라면 한자로 뜻옮김 하여 선암(船岩)이 될 것인데, 선암(仙岩)이라 한다. 선(船)과 선(仙)의 음이 같기 때문에 신령스럽게 선(仙)자로 바꾸어 썼음직하다. 이러한 예는 흔하다. 원래 주암(住岩)의 우리말 이름은 ‘배티재’이다. 이를 주암(舟岩)으로 뜻옮김 했다가 배는 짐을 많이 실어야 든든히 항해를 한다고 여겨 사람이 많이 머물러 살라고 주(住)자로 바꾸어 주암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선암사 사적기」를 보면
도선국사가 본국에 돌아와 일일이 가르침과 같이 했다. 이 선암사가 일대 비보소(裨補所)가 된다. 우리나라 남쪽에는 삼암이 있는데, 영암군 월출산의 용암(龍岩), 광양현 백계산의 운암(雲岩), 승평부 조계산의 선암이다. 그 바위에다 탑과 절을 세웠다.3)
이렇게 기술한 것으로 보아 해천사를 선암사로 바꾼 까닭을 알 수 있다. 장군봉에 있는 배바위에 유연성을 두고 선암사라고 개칭한 것이다. 그렇다면 선암(船岩)이라 해야 할 텐데 선암(仙岩)이라 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전남 순천군 조계산 선암사 사적」에
선암사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높이가 10여 길이나 되고 마치 숫돌 같다. 시골 사람들이, 옛날에 선인(仙人)들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암이라고 절의 이름을 하였다.4)
는 기록이 있다. 절이름을 바위이름 그대로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선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선암이라 명명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듯이 대각암의 누각에 대선루(待仙樓)라고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승선교 부근에 강선루(降仙褸)가 있고 순천 시내, 곧 동순천 다리 머리에 환선정(喚仙亭)이 있었다.(지금은 죽도봉에 있다)
또 다른 구전설화를 보면 호암(護岩) 스님이 배바위에서 문수보살의 현신(現身)을 만나보려고 백일기도를 했지만 문수보살을 보지 못하자, 불심(佛心)이 약한 것을 탄식하며 투신자살을 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죽었을 자신이 예쁜 아가씨의 치맛자락에 안겨 있었다.
“스님! 참으시오. 어찌 중생제도를 안 하시려 목숨을 버리십니까? ”
아가씨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하며 땅에 몸을 내려놓았다. 스님이 자초지종을 말하자 아가씨가 방긋 웃으며 “보고도 모르시오?” 하자, 스님은 문수보살의 현신임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보살님!” 하고 절을 올리고 보니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래서 스님이 크게 깨달아 선암사를 중창했고, 승선교와 벌교의 홍교(虹橋)를 놓았다고 전한다.
조계산 연원(演源)은 무엇인가? 조계산은 중국의 영남(嶺南) 소주부(韶州付:현재 광동성의 곡강현)에 있는 산이다. 육조(六粗)대사가 황매(黃梅)의 법인(法印)을 받았을 때 조후촌(曹喉村)에 사는 조숙량(曹叔良)이 그를 흠모해 보림(寶林)의 옛터인 쌍봉(雙峯) 아래 대계(大溪)벌에 절을 지어주니 육조대사가 그 은혜를 못 잊어 조숙량의 성인 ‘조’에 쌍봉 대계의 ‘계’자를 결합하여 조계산이라 이름한 데서 시작되었다.
흥양(고흥)과 영암에도 조계산이 있고 그 절이름을 송광사라고 했다. 현재도 송광사는 전주와 고흥에 있다. 조계산은 원래 송광산과 청량산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고려 때 조계산으로 통칭되었다. 그 연원은 당나라 때 육조대사가 명명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한국불교의 종산(宗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