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장에 이어 -
나의 에스페란토 나라 여행기
< Mia vojaĝo en Esperanto-Lando >
이 분에 대해서는 전장의 글에서 몇 자 언급한 적이 있다. 필자가 청구대학 대강당에서 에스페란토 초급능력시험을 치루던 때, 답을 쓴 후 검토 단계에 있는 필자의 시험지를 가져가신 바로 그분, 당시 시험감독관이었던 분이다. 연이어 중급강좌를 가르치신 분이기도 하다.
당시 그는 육군 중위로 부관학교 영어 교관으로 복무하던 분이었는데 거의 군복차림으로 대중 앞에 나섰다. 아마도 낮에는 부관학교에 근무하고는 미처 옷을 갈아입을 여유 없이 달려와 일을 보기도, 또한 청구(야간)대학에 학적수강생 처지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필자의 첫 번째 멘토이신 홍형의 교수님과 이종영 중위와는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그 연유를 들어보면 흥미롭다. 그분은 경남 삼천포 출신으로 진주중학교 (6년제 지금의 중고등학교과정)에서 공부했다. 헌책방에서 일본인이 저술 著述한 에스페란토 교본 을 사서 자습으로 익히고는 자신이 한국에 유일한 에스페란토 학습자임을 잘못 알았다가, 청구대학 홍형의 교수가 전임교수임을 알게 된다.
멘토님은 고등학교시절에 이미 영어에 통달하게 되었다. 학생 신분으로 문교부 검정 영어지도자과정에 합격해 영어교사자격을 갖게 되는 등 외국어에는 천재적 자질을 나타낸 분이다.
홍형의 교수님에게 편지를 썼다. 자습으로 에스페란토를 익히고 영어에는 자신이 있으니 교수님에게 – 제가 영어를 - - 교수님에게서는 에스페란토를 교차학습을 하면 어떻겠냐고 – 는 내용인데 그때가 나이 겨우 18세의 청소년 시기였다. 그 인연으로 학교를 끝내고는 홍 교수님 아래채 단칸방에서 지내게 되어 대구 생활이 시작되었고, 나아가 홍 교수님과 더불어 에스페란토 운동에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그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나보다 8년 연상인 그분을 필자는 마음속으로 마치 형 대하듯 따랐다. 희귀한 인생역정을 지닌 분이기도 하다. 6·25 동란 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 2년 가까이 포로신분으로 수감생활을 했는데, 당시 영어능통자로 인정돼 미군을 도와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훗날 세계에스페란토협회(Universala Esperanto-Asocio) 회장까지 역임하여 한국인의 명예를 드높일 뿐 아니라 한국 내 에스페란토 확산에 이바지한 공이 큰 분이다. 동양인으로서는 일본인이 먼저 세계협회장을 역임하였으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는데, 멘토께서는 임기를 다 채우고 혁혁한 공적까지 쌓은 최초의 동양인 회장으로서는 이종영 회장이 처음이기도 하다.
필자가 처음 그분 댁을 방문하게 된 곳은 홍 교수님의 댁이었다. 양옥집 홍 교수님의 아래채 단칸방에 곁방살이하고 있을 때였다. 한번은 저녁때 그분의 댁을 찾아가, 여러 사람이 운집한 중이었는데, 얻기 어려운 미제 美製 제니스 라디오 (Zenith - 뚜껑을 열고서야 라디오를 조작할 수 있는 구조의 고급 라디오)를 열고는 주파수를 맞추기를 AFKN 미군방송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들으면서 현장 합석자들에게 방송을 생중계해 주기까지 했던 것.
필자가 이웃 경북고등학생들과 명덕로타리 허름한 방을 빌려 AFKN 방송 아나운서를 강사로 초빙, 영어회화학습에 몰두하던 때가 새삼 생각히웠다. 당신께서는 벌써 라디오방송까지도 자유자재로 듣고 통역 중개하는 수준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 나의 시험지를 낚아채 갔던 감독관,
- 자기 집에 무상으로 초대했던 분,
- [다음 장에 소개할 테지만] 최초의 국제 펜팔을 맺어 주신 그분, 이종영 님을 필자는 흠모하며 멘토로 모시겠다고 작정하게 된다.
10대 중반에 영어를 통달한 데다, 자학으로 에스페란토까지 통달했으니, 필자는 그분에게 홀려버렸다.
멘토님께서는 엄청난 일벌레로 사셨다. 청구대 야간을 이수 중 육군 장교 영어 교관으로 낮에는 군사영어 강의로, 밤에는 야간대학생활 및 에스페란토 운동에 참여, 훗날 하와이대학, 하버드대학교 등 두 번이나 유학으로 선진지식을 넓힌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0년 가까이 UN의 FAO(세계식량기구) 마케팅전문가로 해외 생활을, 마지막으로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장으로, 세계에스페란토협회장 (UNESCO관련기관- 본부 네덜란드 Rotterdam)으로 기여했으며, 한편 수교 전인 1987년 한국인 최초로 중국에 입국한 이력은 비단 에스페란토인 차원을 넘어 국가적으로도 명성을 쌓은 분이다. [1995년 중국 국무원 “友誼章” 훈장]을 수장受章해 중국과의 관계에 공헌을 한 분] 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에스페란토협회장으로서 많은 일을 해오는 등 지금의 상황으로 발전시키기에 그분의 공로는 많다. 뿐만 아니라 큰 액수의 재정적 희사로 오늘을 일구기에 공적이 크다.
그분의 수없이 쌓아온 이력에 대해 본 난에서 굳이 더 소개는 생략한다. 에스페란토를 말하는 사람 이전에 일반 학자로서도 손색없는 시대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의 교수도 하기 힘든 마케팅학회 회장까지 역임, 경제학계에 이름난 분위기도 해서다. 저서, 역서 할 것 없이 엄청난 양의 필지로 관계 공적과 명성을 떨친 분이라 필자로서는 영광으로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필자의 모상 母喪 때 그 먼데 시골 장지에까지 현장 조문으로 필자를 위무하시기도 해 잊히지 않는 멘토이시다.
2008년 7월 아직도 더 일할 수 있는 연세에 제 곁을 떠나셨다. 경북 군위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안장된 그분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로 그분의 인생이력을 대변하고 있다.
- “열심히 살았다.” -
필자가 멘토님에게서 얻은 바는 바로 이 문구이다.
재래식 제사 - 초헌 아헌 종헌 차례
- 다음에 계속 -
첫댓글 진짜 특이한 삶을 사신 분이네요. 아마도 부귀와 명예 등을 외면하고 오직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신 분 같이 느껴지기도 함다. 참말로 "열심히 살았"던 분 같기도 하고 몸으로 멘토를 하신 분 같슴다. 그 영향을 듬뿍 받았을 낙기 성의 남은 여생을 상상해 봄다. 기대해도 좋겠오? ㅎㅎㅎ 부사넘
좋은분을 멘토로 모셨으나 나 라는 사람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못해 민망하지만
그래도 그분이 내게 심어준 삶의 길을 눈뜨게 해준 바는 결코 잊을수없슴다.
다재다능한 분을 멘토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인연 따라 내 삶의 폭이 달라지니까요.
같은 목표를 가진 동아리들이 젊음을 불태우며 활동할 때가 생의 보람이었을 것입니다.
오래 오래 동행했으면 더 좋았을텐데.....그쵸?
"열심히 살았다" 더 이상 다른 표현이 필요치않은 멘토였슴에 자랑스럽다면.
천주교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代父를 모셔야하는데 내게는 대부나 마찬가지였슴다
@서되반 이낙기 7편의 이야기속에 서되반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밑거름이 되어 남은 생애도 보람있게 살아가리라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