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색(色)』이란 것은,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만생만물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도 역시 『색(色)』입니다.
즉 육체주(肉體舟)와 선장인 의식, 중심인 마음이란,
이 현상계에서는,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육체주(肉體舟)는 마음의 표현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을 비롯해, 대자연은 신불의 마음의 표현체라는 것입니다.
조금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현상계의 태양은 1초 동안에
우주 공간으로 9.3X10²²㎉∕sec의 열에너지를 방사하고,
이 지구에 대해서는 9.3X10²²∕2.5X10³ ㎉∕sec,
약 2백만 톤의 석탄을 매 1초마다 연소시킨 만큼의 열에너지를 무료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 열에너지에 의하여, 물이 증발되어 하늘로,
그리고 냉각되어 육지에 비를 뿌리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식물은 성장하고,
녹색식물은 이산화탄소와 물을 동시에 흡수하여서
광합성으로 전분, 단백질, 지방, 당분 등을 만들어,
동물의 육체 보전의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동물의 배설물과 그 외의 것을 식물은 다시 토양에서 흡수하여,
상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야말로, 신불의 자비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태양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생존할 수 있습니까.
식물의 호흡작용에 의해, 산소가 나오고,
또 우리의 호흡작용에 의해, 탄산가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공중에서 이산화탄소가 되어,
이것을 식물은 흡수하고, (=광합성 작용) 동물은 산소를 흡수하고 있습니다.
산소가 부족하면, 동물은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 상호관계도 신리(神理)에 의한 것입니다.
이 좋은 환경을, 생활의 지혜로 만들어 낸 물질문명이,
산소를 오염시키고, 황화물이나, 질소화합물을 만들어 공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광화학 스모그는, 인체는 말할 것도 없이
식물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이 마음을 잃고, 족한 것을 잊은 물질문명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겠지요.
이익의 추구, 노사의 투쟁, 보은감사의 마음을 잃은 인간에게.
어디에 신(神)의 자식으로서의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신 공해도 또한 같습니다.
많은 종교는, 타력 신앙으로 인간의 마음을,
잘못된 신불의 이름 아래 속박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조와 그 일부의 지도자가 단물을 빨아, 대중은 희생되고 있습니다.
부정한 돈으로, 그들을 부양하고 있는 그런 형태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 가르침은, 아편보다도 더 무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불의 이름 아래, 금품을 강요하는 지도자는, 위선자입니다.
보시의 말, 공물에 의하여,
신불의 자비가 좌우되는 등등의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 경제에 집착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돈은, 살아 있을 때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고,
만약 남아서 쓸데가 없다면,
사회 인류를 위해서 그때야말로, 서로 보시해 나누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불구의 사람들이나, 늙고 병든 사람들을 구해야 하겠지요,
저 태양의 에너지를, 무상(無償)의 행위라고 진리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보은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유토피아는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보은이라고 하는 행위에 의해 윤회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노사의 부조화한 투쟁은, 이 마음의 결여가 제일 큰 원인이겠지요,
투쟁과 파괴.
이것이 서로의 목을 조인다는 것을 결국 인간은 깨달을 때가 오겠지요,
(주; 팔정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준이, 바로 “감사하라”입니다.
모든 팔정도의 시작의 기준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범사에 감사하라.”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족(足)함을 아는 것은 감사하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연 있는 이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감사함으로 시작하여, 감사한 것의 끝은
마음의 기쁨이며, 평안이며, 자기 자신의 행복이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이 세상의 생활을
행복하게 보내라는 가르침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지옥이 아닌 천국을 가고 싶어서 행하는 보시는,,,
내 생활을 희생하는 보시는,,,
잘못된 보시라고 할 수 밖에 없군요.
감사함의 반대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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