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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스콜라주의(medieval scholasticism)
최영식(언약의 나무교회)
개론(Introduction)
1054년 동방과 서방교회의 분리 이후,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서유럽에 일어난 여러 특징들 중의 하나는 농도가 진한 지적인 활동이었다. 기독 신앙의 지리적인 확장과 삶의 전 영역으로의 기독신앙의 영향력 확대, 수도원의 발흥과 아울러 농업의 발전으로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고, 풍부한 노동력으로 인한 도시의 형성과 상업의 발전 등 12세기 유럽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흥지식을 습득하는데 열의를 갖게 하였다.
'스콜라주의' 는 중세 신학과 철학 을 가르치던 수도원 학교와 논리학 등 일반학문을 가르치던 사립학교 등 중세학교를 의미하는 ‘스콜라’ 에서 유래된 용어로, 일반적으로는 수도원 학교 등에서 표현된 신학적 철학적 사변의 총합적인 체계화를 가리키지만, 협의적으로는 기독교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理性)을 통해 입증하고 이해하려 했던 지적활동(知的活動 )을 말한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로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신앙과 이성에 대한 학문의 발전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중세의 지성들은 플라톤과 새로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지고 “학문의 여왕”인 “신학”연구에 몰입하게 되었다.
스콜라주의 는 관찰과 실험 대신에 논증[1] (論證, reasoning)으로 지식을 획득하려 했다. 조사와 관찰을 통한 귀납적 논증(inductive reasoning)보다는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특정한 진리를 도출하는 연역적 논증(deductive reasoning)을 사용한다. 논증에 활용하는 권위로는 성경, 어거스틴, 교부들, 신조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대체적으로 어거스틴은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법론인 변증법[2](辨證法, dialectics)을 제공하였다.
역사적 발전(Historical development)
1. 초기 (11-12세기): 지적인 호기심이 증가했던 11-12세기에 이성을 그리스도의 전통 안에 접목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기독교 교부들이 가르친 기독교 근본교리에 대해 이성을 이용한 스콜라 철학적 탐구가 시작되었다. 스콜라의 변증론이 득세하면서 권세를 갖게 되자 변증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모든 진리의 기준이다.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은 믿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하여 기존의 가치를 고수하는 반(反)변증론자들은 ‘진리에 다가서는 기준은 이성보다 신앙이 우선이다.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마귀의 발명품이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극단의 견해를 아우르고 조화하기 위하여 문을 연 이가 있는데 캔터베리의 안셀름이었다.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년)는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I believe that I may know)'고 말함으로써,“신앙이 지식의 전제 조건, 즉 신앙이 이성에 우선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신앙의 영역에 이성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중세 스콜라주의의 길을 열었다. 그는 이성만 앞세우는 변증론자에게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신앙만 앞세우는 반변증론자에겐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는 말을 남겼다.
스콜라철학자들의 논증 초기엔 교부들이 발전시킨 플라톤적 경향의 신학과 철학이 우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득세하였다. 안셀름의 다음 세대인 천재 아벨라르두스(Abelard, 1079-1142)는 향후 중세 스콜라철학의 변증방법의 표준이 된 ‘그렇다 와 아니다(sic et non)’를 개발했다. 이것은 서로 반대되는 양쪽의 권위 있는 견해들을 대비시키고, 대비된 권위들 중에 어느 쪽이 더 타당한 근거를 가지는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함으로써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권위가 인정되는 이 신학자의 주장과 동일한 권위가 인정되는 저 신학자의 주장이 다를 때, 성경의 이 구절과 성경의 저 구절이 다를 경우에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그는 이성적인 근거를 가지고 판단하면 된다고 답변했다. 그는“나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 (I understand that I may believe.)”면서 “신앙보다 지식을 추구하였다. 즉 이성이 신앙에 우선한다”고 안셀름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2. 절정기 (13세기): 이슬람세력의 확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서유럽에 도입되면서, 신플라톤주의에 기초한 어거스틴 신학과는 결이 다른 지적(知的)인 연구가 점차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주지주의적 사상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대표자가 신앙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이성을 중요시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년) 이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한 것이다. 앞 세대가 신앙과 이성의 우선권 문제로 논쟁했지만,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영역을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비록 '철학은 신학의 시녀'로 간주되었지만, 시녀인 철학을 무시하지 않고 신학에 버금가는 위치를 부여했다. 이 시기에 스콜라주의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3. 후기 (14세기): 점차로 이성과 권위가 분리되면서 스콜라주의가 쇠퇴하게 된다. 영국의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cam, 1280 - 1349년)이 대표 주자이다. ‘오캄의 면도날’은 본래 관찰된 사실, 논리적 자명성, 신적 계시 등 충분한 근거 없이는 어떤 명제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중세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복잡하고 광범위한 논쟁[3] 속에서 지나친 논리비약이나 불필요한 수 많은 가정과 전제들을 토론에서 배제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는‘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4. 신스콜라주의(neo-scholasticism, 19세기): 유물론, 자유주의 등이 발흥하던 19세기 변환기적인 상황에서 1879년 천주교의 교황레오 13세는 신앙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 스콜라 철학정신을 부흥시키고자 시도했다. 신토마스주의'(neo-Thomism)라고도 한다.
보편논쟁 [controversy of universal, 普遍論爭]
보편(보편, universals[4])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와 보편과 개별(個別,individual[5])에 대한 우위 여부를 두고 벌어진 철학적 논쟁이다. 사과’가 ‘보편’이라면, ‘홍옥’, ‘부사’,’아오리’등은 ‘개별’이다. ‘사람’이 ‘보편’이라면, ‘노아’,’아브라함’, ‘다윗’,’이순신’,’최진실’은 ‘개별’이다. 예루살렘,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교회등 동방교회가 이슬람에 의해 무너지고 위축되자 홀로 남은 로마교회는 교황을 머리로 전세계 교회가 하나로 뭉쳤고, 그 로마교회가 보편교회를 상징했다. 그러나 상업과 개인의 발달로 서 유럽에 개별교회가 증가하게 되자 개별교회와 보편교회, 어느 것이 중요한가에 대한 의문과 토론이 일어났다.
1. 실재론 (實在論, realism) – ‘보편’은 단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적 견해로서, ‘보편’이 ‘개별’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universalia ante rem[6]). 안셀무스가 이 견해를 가졌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지상에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개체 교회들’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 속에 ‘보편 교회’로서 실제로 존재했다.
2. 온건 실재론(moderate realism) –‘보편’은 실제로 존재하나, ‘개별’과 연결되어 존재한다(universlia in rem[7]). 개체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그곳에 인간의 정신이 가서 그 개체들 안에서 공통적인 성질을 끌어내어 그것을 이해했다. 즉, 보편은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에 상응하는 공통된 특성이 개체들 안에 존재한다. 아벨라르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견해를 주장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보편교회는 ‘하나님의 마음’과 ‘지상’에 연결되어 실제로 존재한다.
3.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 보편자(普遍者)는 단지 이름일 뿐이라며‘보편’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는 입장(universalia post rem[8])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이고 특정한 사물(thing)이다. 교회는 비록 근원과 본성에 있어서 신적(神的, divine)이지만, 하나님의 마음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교회는 개별적인 회원들로 구성되어 지상에 서있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개체들이다. 윌리엄 오캄이 이 견해를 세웠다.
스콜라 철학이 교의에 미친 영향 (Dogma affected)
실재론자들(realists)은 “개별”은 “보편”의 복사라고 생각했다. 교황을 머리로 하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로마 교회를 ‘하나님의 마음속에 실재하는 보편교회[9](catholic church)’의 이 땅에서의 구현 혹은 복사본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배경 하에 천주교의 교황체제가 13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천주교의 성찬 교리인 화체설(Transubstantiation)도 실재론에 근거하여 정립되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보편적인 몸이 신부의 축사로 빵은 예수님의 실제 몸으로, 포도주는 예수님의 실제 몸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아담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상속된다는 원죄교리(原罪敎理)나, 예수님의 속죄행위로 획득한 의가 모든 이에게 효력을 미친다는 ‘의의 전가(義의 轉嫁,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교리도 보편실재론으로 설명했다.
반면에 유명론자(nominalists)들은 ‘보편’은 실체가 없는 관념일 뿐이고 ‘개별’이 실체임으로, 교황의 권위보다는 개체 교회를 중시하고, 공의회의 권위를 우선시 하였다(supremacy of the General Council). 천주교의 교황체제보다는 개별 민족교회와 공의회의 결정을 우선시 하는 생각의 변화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토대를 미리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개체를 중시하는 유명론자들은 성부, 성자, 성령 각 삼위의 실체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삼위일체가 아닌 삼위삼체로 삼신론(三神論tritheism)의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고, 삼위일체를 보편실재론으로 설명했던 실재론자들은 사벨리우적인 양태론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기도 하였다.
결론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계시와 학문과의 상관 관계는 기독교 이천 년의 역사 내내, 그리고 지금도 기독교인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제이다.
고대교회에서,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은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는 표어로 신학의 영역에 철학이 필요 없음을 주장했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헬라의 철학으로 기독교 신학을 변증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중세교회에서는, 스콜라적 접근으로 신앙과 이성[10]의 상관 관계를 토의하였다. 캔터베리의 안셀름은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 아벨라르 (Pierre Abélard)는 “이성이 신앙에 앞선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모두 인정하면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였고, 윌리엄 오컴은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추구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오컴의 관점을 취하면서[11] 철학을 활용하여 신앙을 변증하려는 접근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오직 믿음(sola fide)”라는 종교개혁의 구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의미보다는, 성경 말씀을 해석함에 “논리적 이성”이 아닌, “오직 신앙”만이 필요함을 역설한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해석의 권위를 철학은 물론 교부들에게도 두지 않고,“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만 두는 태도와 연관이 있다 하겠다.
17세기에는, 16세기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더 면밀하게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데 이성의 에너지를 너무 집중함으로써 초기 개혁자들의 역동성을 많이 까먹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시대를 “정통주의(orthodoxy) 시대”, “신앙고백주의(Confessionalism) 시대”, 또는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Protestant Scholasticism)”라고 도 부른다.
18세기 계몽주의와, 19세기에 폭발적으로 발흥한 이후 현재까지 까지 이르는 자유주의는 신앙을 전혀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만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극단 좌파적인 오캄 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겠다.
오늘 날, 정통신앙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연구함에 지성을 사용하기를 게을리 하고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신앙지상주의자(信仰至上主義)들의 한 극단이 있고, 하나님의 계시 안에 있는 신비의 영역까지도 인간의 이성으로 기필코 파헤쳐서 수학공식 만들듯이 교리의 법칙을 발견해버리고 말겠다고 신앙에너지를 한곳에만 쏟아 붓는 주지주의(主知主義)자들 혹은 ‘죽은 정통주의자들’의 다른 한 극단이 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봄으로 오늘 우리는 그들의 성공을 본받고, 그들의 실패를 피하며, 말씀과 기도로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인도를 잘 받는 생명력 있는 참 신앙이 되어야겠다.
[2] 헬라어 Dialectike는 토론(討論), 변론(辯論), 논증(論證), 담론(談論), 추론(推論, reasoning) 등 우리의 생각을 합리적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3]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들이 춤 출수 있는가?’, ‘아침 여명의 빛이 밝은가? 아니면 정오의 햇빛이 더 밝은가?’, ‘성찬을 받다가 흘린 빵 조각을 생쥐가 먹었다. 이 생쥐는 영생을 하는가?’ 이러한 종류의 질문에 대한 논쟁으로 스콜라 신학자들은 서로 피 터지게 싸우기도 했다. [9] 천주교회는 ‘보편성(catholicity)’을 하나의 외형적 조직체제로의 관점에서 자기들의 교회를 보편교회라고 억지를 부리지만, 종교 개혁된 개신교회들은 영적인 의미, 즉 사도적 가르침에 바탕을 둔다는 관점에서 보편교회의 의미를 추구한다. [11] 로저 올슨은 가장 흥왕했던 중세스콜라철학을 붕괴시키고 종교개혁의 여명을 준비하는 200여 년의 과도기에 등장한 걸출한 인물 세 사람을 윌리엄 오컴, 존 위클리프, 에라스무스로 든다. 그렇지만, 가장 늦게 등장한 에라스무스에 비해 오컴과 위클리프를 스콜라학자로 보기도 한다 (이야기로 읽는 기독교신학(대한기독교서회, 2009),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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