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시리즈
제목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아픈 그 자리로 오신 의사
본문: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나아진 다음에 가겠다는 말
몸이 아플 때 우리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조금만 나아지면 병원에 가 봐야겠다." 가만히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병원은 나아진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픈 모습 그대로 의사 앞에 서는 것을 어딘가 부끄러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는 자주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금 더 정리되면, 이 습관만 끊으면, 마음이 좀 깨끗해지면 그때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아직 교회 문턱이 낯선 분도, 오래 신앙생활을 해 온 분도 마음 한쪽에 이 생각을 품고 삽니다. 오늘 본문은 그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보았습니다. 그 권세를 가지신 분이 오늘은 용서를 말로만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을 찾아가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바닷가를 지나가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나가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십니다. 마가복음을 처음부터 읽어 온 분이라면 이 장면이 낯익을 것입니다. 1장에서도 예수님은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그물을 던지던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따라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같은 바닷가, 같은 걸음, 같은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름을 받는 사람은 어부가 아니라 세리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사람
당시 가버나움 근처에는 큰길이 지나갔고, 그 길로 들어오는 물건에 세금을 매기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레위는 그 자리에서 지배 권력 편에 서서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정해진 몫보다 더 거두어도 막을 길이 없던 시절이라, 세리는 사람들의 원망을 샀습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면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신 곳을 보십시오. 그가 세관을 떠나 삶을 정리한 뒤가 아닙니다. 회당에 앉아 있을 때도 아닙니다. 그를 죄인이라 부르게 만든 바로 그 자리, 세관에 앉아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레위는 일어나 따랐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명령과 레위의 반응을 같은 동사로 기록합니다. 헬라어로 '아콜루테오', 곧 '따르라'와 '따르니라'가 한 단어입니다. 레위의 발걸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먼저 낸 길을 그대로 밟았을 뿐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지 마십시오. 먼저 보신 분이 계셨고, 부르신 말씀이 먼저 왔습니다. 일어난 것은 그다음입니다.
한 식구의 자리가 된 레위의 집
이어서 레위의 집에서 잔치가 열립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여기서 '앉았다'는 말은 잔칫상에 몸을 기대어 비스듬히 눕다시피 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 시대에 한 상에서 먹는다는 것은 배를 채우는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서로를 가까운 사이로 받아들인다는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피하던 이들과 한 식구의 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
식탁 밖에서 던진 질문
이것을 본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이들을 그저 나쁜 사람들로만 볼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진지하게 여겼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애쓴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진지함이 어느새 사람을 둘로 나누는 잣대가 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지키는 사람과 못 지키는 사람, 이 상에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율법주의, 곧 규칙을 잘 지켜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여기는 신앙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이 마음은 그날의 서기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도 자주 누가 이 자리에 어울리는지를 눈으로 재곤 합니다.
병자에게 가는 것이 의사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의사가 병자들 곁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습니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만 골라 만난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병자에게 가는 것이 의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 곁에 앉으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분은 죄인을 피해야 할 더러움으로 보지 않으시고, 찾아가야 할 환자로 보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픈 줄 아는 병자와 모르는 병자
그렇다면 "의인"은 누구입니까? 문맥을 따라 읽으면, 예수님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겨 의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그들은 식탁 밖에 서서 질문만 했습니다. 의사가 바로 앞에 계셨는데도 자기에게는 진찰받을 병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떤 병보다 무서운 병은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모르는 병일 것입니다.
본문은 이 이야기를 그날 그 마을의 세리와 서기관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이 이야기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넓힙니다. 한때 누구보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다른 사람을 정죄했던 바울은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식탁 밖에서 질문하던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이, 자기도 병자였음을 알고 식탁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레위가 있고 서기관이 있습니다. 둘 다 의사가 필요합니다. 한쪽은 아픈 줄 알고, 다른 쪽은 아픈 줄 모를 뿐입니다.
이 식탁에 치러진 값
그런데 이 식탁에는 값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장면부터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충돌을 연이어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했다고 씁니다(3:6).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그 자리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가는 길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복음서 뒤에서 같은 형식으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이 의사는 처방만 내리고 돌아간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병, 곧 하나님을 떠난 죄와 그 죄가 받아야 할 심판을 자기 몸으로 대신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죄인처럼 버림받으셨습니다. 그 대가로 죄인들이 아버지의 식탁에 자녀로 앉게 되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둘러앉았던 레위의 잔칫상은 이 놀라운 맞바꿈이 미리 비친 자리였습니다.
부르심이 향하는 곳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죄인이 죄인의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부름을 듣고 일어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그리고 그분의 식탁에 그분의 식구로 앉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첫 외침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로 요약했습니다. 부르심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맞아 주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레위는 세관에 그대로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 부르심을 듣게 하시는 분
그러면 그날 갈릴리에 있지 않았던 우리는 어떻게 이 부르심을 듣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우리 동네 세관 앞을 걸어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부르심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귀에 스치는 소리로 끝나지 않고 우리 각자를 향한 부르심으로 들리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1:8)으로 소개했습니다. 자기가 아픈 줄 모르는 우리의 눈을 열어 병을 보게 하시는 분도, 의사를 향해 일어서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12:3). 세관에 앉은 레위를 일으킨 그 부르심이, 오늘 성령을 통해 우리를 일으킵니다.
아픈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조금만 정리되면 그때 예수님께 나아가겠다"고 미뤄 온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순서가 거꾸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세관을 정리한 다음에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나아진 다음이 아니라, 아픈 그 자리에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준비가 아니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날 힘조차 우리의 결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부르시는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께서 그 힘을 주십니다.
식탁 밖에 서 있던 우리에게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새 식탁 밖 서기관의 자리에 서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배와 봉사를 성실히 해 왔기에,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 성실함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이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이 우리의 성실함 덕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 때, 성실함은 사람을 재는 잣대로 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면, 우리도 그날 레위의 집에 앉았던 병자 가운데 하나였음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판단하던 눈은 감사하는 눈으로 바뀝니다.
너무 아파서 앉을 수 없다고 느끼는 분께
반대로 자기 죄가 너무 커서 이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느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사이십니다. 병이 깊을수록 의사에게서 멀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그런 사람을 부르러 왔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병자들이 함께 앉는 교회의 식탁
이 부르심은 우리 교회의 식탁도 바꿉니다. 우리 모두가 초대받은 병자라면, 이 공동체는 건강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의사 곁에서 함께 치료받는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처음 오신 분, 오랫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온 분,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분이 들어오실 때, 우리는 자격을 묻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앉아 본 사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애써서 그런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렇게 맞아 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조금씩 빚어 가십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 앉으신 의사
오늘 본문의 마지막 시선은 레위에게도, 서기관에게도 머물지 않습니다. 세관 앞에 멈춰 서신 예수님, 죄인들 사이에 앉으신 예수님, 그리고 그 자리 때문에 끝내 십자가로 걸어가신 예수님께 머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 아들이 지금도 같은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부르심을 오늘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음성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일어나 따르는 것은, 우리의 결단보다 먼저 그분의 부르심이 우리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픈 모습 그대로 그분께 나아갑시다. 의사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앉아 계십니다.
한 줄 메시지
나아진 다음이 아니라 아픈 그 자리로 찾아오신 의사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아버지의 식탁에 부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