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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로 끝나 제 1차대전에서 미국은 여러가지 교훈을 얻었고, 이는 나중에 제 2차대전에서도 그 경험이 십분 활용되었습니다.
저번 편 마지막에 빌리 미첼에 대해 살짝 언급하고 끝났는데 오늘은 미국공군의 선각자 빌리 미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려
합니다. 영국공군에는 휴 트렌차드가 있고, 독일공군에는 발터 베버가 있었다면 미국공군에는 빌리 미첼이 있습니다.
-전장에서의 빌리 미첼, 사제 군복을 입고 있다네요-
전에 제가 소개해드렸던 10성장군 헨리 아놀드 장군도 빌리 미첼의 덕을 본 사람중 하나 였을정도로 미국공군은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휴 트렌차드는 영국공군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나중에 미국에 독립공군이 창설되어 헨리 아놀드 장군이
첫 공군원수가 되었을만큼 존경받았지만 왜 빌리 미첼은 미국역사에서 그렇게까지 존경받을수 없었을까요? 그럼 빌리 미첼에
대해서 알아 봅시다.
윌리엄 빌리 미첼은 1879년 프랑스의 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존 미첼은 부유한 위스콘신의 상원의원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위스콘신의 유명한 은행사업가였습니다. 즉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지요.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했고, 18살이 되던해에 일어난 미국-스페인 전쟁에 사병으로 입대해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상원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입김이었는지 그는 고속 진급하여 장교가 되었고 그후에 그는 통신장교로 보직을 변경햇습니다.
그리고 1906년 캔자스에 있는 통신학교서 그는 미래의 전장은 육지가 아닌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가족이 라이트
형제와 아는 사이였기에 그는 익히 비행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8년 그는 통신장교로써 라이트 형제의 비행을
처음으로 관람하였고, 거기서 감명을 받은 그는 버지니아에 있는 커티스 항공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렵지 않게
비행면허를 딸 수 있었고, 그는 그 후에 필리핀과 알래스카를 비행기를 타고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때 그는
진급을위해 교육과정이 들어갔고-그때 그 사람들 중 가장 어린 32세 였다네요 -_-;- 한참을 교육을 받다가 1916년 다시 미국 통신
사령부예하에 있는 육군 항공대로 옮겨 갔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38였는데 오랫동안 비행을 안한 나머지 다시 교습을 받았어야
했다네요. 1917년 미국이 제 1차대전에 참전하자 빌리 미첼역시 중령으로 참전했는데 그는 파리로 날아가서 프랑스-영국 연합
항공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당시 사령관이었던 휴 트렌차드 장군에게 항공 전략과 항공기에 대해서 배웠
습니다.
-빌리미첼에게 큰 영향을 끼친 휴 트렌차드-
그리고 그는 미국장교중 처음으로 독일전선에서 항공기를 타고 날았습니다. 다만 프랑스 조종사와 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말이죠.
그리고 충분한 경험을 통해 전략을 학습하였고, 이제 그의 지휘로 미국 공군의 독자적인 항공작전이 가능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
했죠. 그리고 그는 대령으로 진급한뒤에 그는 프랑스에 있는 모든 미국 항공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1918년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항공대로 구성된 대규모 공습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제 1차대전이 승리로 끝나자 그는 유럽에서 제일
유명한 미국인이 되었지요. 그리고 그는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서 18개월동안 소외된 채로 지내야 했습니다.
상사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거든요. 그는 탁월한 리더쉽과 훌륭한 전투기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난
도련님 성격이었는지는 몰라도 'ㅅ' 주변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드디어 항공대가 통신병과서 분리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내심 자기가 그 항공대의 사령관을 맡았으면 했지만
그 자리는 이미 미국 원정군 사령관 퍼싱 장군의 추천을 받은 Charles T. Menoher소장이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공대의
경험이 전무했고, 야전 포병 지휘관이었던데다가 "공군이 절대로 육군에게 도움될일은 없다"란 생각을 가진 보수적인 사람이었
습니다. 실망한 빌리 미첼은 대신 훈련과 교육을 맡았고, 나름 미래에 대한 준비로 그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1920년 6월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군대를 재편하기 시작했고, 징집병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갔고, 군대의 규모는 축소되었습니다.
그리고 항공대는 육군과 포병대의 3분의 1수준만 유지하도록 축소되어버렸습니다. 실망한 전쟁영웅 빌리 미첼에게 항공대 사령관
Charles T. Menoher소장은 그를 추천하여 준장으로 진급하게 되었고, 새로이 대통령이 된 하딩대통령과 상원의 동의를 얻어
항공대 부사령관으로 진급시켜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에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믿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즉 모든 전쟁을 끝낸 전쟁 제 1차대전이었기에 앞으로의 전쟁은 없을 것이고 따라서 군대의 규모는
그렇게 크게 유지 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말이죠. 그는 가까운 10년내에 공군 전력이 전쟁의 중심이 된다고 믿었고, 그는 유럽
에서 불고있는 독립 공군의 열풍에 미국도 동참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가능성을 역설했고, 그의 이론에 동조한 몇몇 상원
의원들의 지지하에 그는 독립 공군의 가능성을 조사하러 유럽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독립 공군의 필요성과
새로운 이론을 접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그동안 자신이 배운 경험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바다로
둘러 쌓인 미국을 지키기 위해 적의 해상 전력을 공군으로 격파해야한다는 이론을 펼쳤습니다. 즉 바다에 '항해하는 기지'를
만들어 적의 해상 세력을 먼 바다에서 격퇴 시키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즉 그는 항공모함을 공군 소속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주장은 -_- 해군의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전에도 설명했다시피 제일 보수적인 단체인 군대에서 게다가
바다의 적을 격퇴하는 임무가 주요 임무인 해군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육군을-당시에는 아직 분리안되었으니-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해군이 아니었죠. 해군은 빌리 미첼을 비난 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빌리 미첼은 이에 굴하지 않고 본토를 침공하려는
적을 격퇴하는 제 1선의 임무를 해군이 아닌 공군이 맡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을 뒷받침 해주는 공군의
기술 발전이 -급강하를 위한 장치, 큰 폭탄을 적재할수 있는 공간의 발명,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어뢰등-그의 이론을 뒷받침
해주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해군은 빌리 미첼의 주장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빌리 미첼은 이를 증명해
보이겠다며 육군과 해군 모두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뺏어온 독일의 전함과 퇴역한 미국의 전함으로 그는 항공력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육군은 한번 실험해볼까란 생각에 승낙을, 해군은 그게 그렇게 쉽게 침몰될것 같냐?란 생각에
어렵지 않게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1921년 6월 20일 빌리 미첼이 이끄는 항공대가 옛 독일 전함 Ostfriesland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격침 시켜버렸습니다.
-폭탄을 맞으며 격침되는 전함-
사람들은 경악했고, 전함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작은 항공기가 거대한 전함을 손쉽게 격침 시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빌리 미첼은 한번더 실험을 했고 이번에는 미국의 알라바마 호가 비행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격침 되었습니다.
-퇴역 전함 알라바마호 빌리 미첼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폭탄을 일부러 마스트에 맞췄다고 하네요-
그 이후로도 빌리 미첼은 여러번 이런 실험을 펼쳤고, 사람들은 항공전력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고, 해군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실험을 지켜본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딩은 거대한 전함의 필요성에 회의를 느꼈고, 즉시 의원들과 함게 해군의 군비
축소를 논의하게 되었고, 군비 축소 지지자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즉 돈만 먹는 거대한 전함 따위
필요없다란 인식이 미국에 퍼지게 된것이었죠. 열받은 해군은 빌리 미첼을 철전지 원수로 여기게 되었고,
고의로 빌리 미첼의 보고서를 조작했습니다. 하지만 보고서의 원본은 언론으로 흘러들어갔고, 사람들은 해군의 행태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보고서의 유출은 책임자였던 Menoher소장과 빌리 미첼에게도 책임이 어느정도 있었기에 빌리 미첼은 Menoher소장에게
자신의 사임을 얘기했지만 원래 항공대에 미련이 없었던 Menoher소장은 자신만 책임지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결국 Menoher
소장은 항공대를 떠나 다시 포병대로 돌아갔고, 육군 사령관 퍼싱은 새로이 패트릭 소장을 항공대의 사령관으로 빌리 미첼준장은
부사령관으로 다시 발령을 냈습니다. 패트릭 소장은 Menoher소장보다는 항공대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고, 그와 빌리 미첼은
같이 일하며 항공대의 발전을 꾀했습니다. 1922년 빌리 미첼과 패트릭 소장은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이탈리아
에 들린 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항공 전략가 줄리오 듀헤를 만나게 됩니다.
-지겹게 등장하시는 줄리오 듀헤씨-
그리고 거기서 패트릭 소장과 빌리 미첼은 줄리오 듀헤의 이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즉 전략 폭격 이론에 대해서 말이죠.
-미국의 쑥재배는 이때부터 예견되었던걸까요?-
줄리오 듀헤의 이론은 미국 육군 항공대에 받아들여졌고, 이는 나중에 제 2차대전때 큰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뒤에
1924년 그는 혼자서 하와이와 아시아로 출장을 다녀왔는데 그때 느낀 경험으로 책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는 미래의 적을 일본으로 보았고 항공모함에 의한 진주만 공습을 예언했습니다.
-항공세력에 의한 진주만 공습을 예언한 빌리 미첼 하지만 해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해군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짓만하는 빌리 미첼이 싫었고, 어떻게든 빌리 미첼에게 한방 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던 때에 1925년 9월 해군 소속 비행선 셰넌도어호가 폭풍에 추락하여 14명이 죽는 사건이 터졌고, 같은 때에 하와이 서부
해안에서 해군소속 비행기가 3대나 떨어지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빌리 미첼은 해군이 무능력하게 공군을 운용하여 피해를
봤다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가뜩이나 짜증나는 해군은 철전지 원수 빌리 미첼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자 결국에는
폭발해버렸고, 해군은 빌리 미첼을 군법회의에 고발했습니다. 결국 군법회의에 소환된 빌리 미첼은 해군을 과도하게 비난했다는
점에서 유죄를 받게되었고, 처벌은 불명예 제대를 받게되었습니다.
-군법회의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빌리 미첼-
그는 불명예제대후에 예전에 사놓은 땅으로 농장을 꾸려 생활하였고, 나중에 193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당선되자 그의 이론에
흥미를 느낀 루즈벨트가 그를 초청하여 그의 이론을 들었습니다. 그때 빌리 미첼은 전략폭격의 필요성을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역설했고, 머지 않아 전쟁이 터질것이라고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에 루즈벨트는 만일 전쟁이 터진다면
빌리 미첼에게 많은 조언을 구할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36년 빌리 미첼은 독감과 심장병이 동시에 발병하여
치료를 받던중에 5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그의 고향인 위스콘신에 묻혔고, 많은 항공대 사람들이
슬퍼 했다고 전해집니다.
-미첼가의 가족묘 저기에 빌리 미첼도 함께 있다고 합니다-
빌리 미첼이 선보인 항공대의 위력은 육군, 해군 모두 항공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줬고, 이는 두 세력 모두 독자적으로 항공대
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육군은 폭격기를 대규모로 만들었고, 해군은 항공모함과 항공대를 만들게 되었죠. 비록 빌리
미첼의 독립공군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미국은 육군과 해군 항공대 모두 고루 발전 시킬수 있었고, 결과는 세계 제 1위의 공군력
미국공군, 제 2위의 공군력 미국해군을 갖출수 있게되었죠. -_-;
-천조국의 위엄을 보아라-
그는 미국 공군의 선각자로 인정 받지만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여 휴 트렌차드나 헨리 아놀드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존경 받지는 못하는 사실을 생각 해보면 가끔은 빌리 미첼이 자신의 성격을 누그러 뜨렸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빌리 미첼의 노력으로 미국은 항공대의 위력에 눈뜨게 되고 이는 나중에 발발 하는 제 2차대전에서 미국 항공대의
큰 활약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화의 주인공은 바로 나-
첫댓글 너를 폭격하러 갑니다
너를 폭격하러 갑니다
천조국은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앗다능...
대단한 사람이였군요..빌리 미첼...
오오..... 막짤....
헤에...역사를 만든 사람입네다. 그려 테크를 아주 잘 골랐네요. 그런데, 성격이 좀 아쉽구만요. 한비자 같은 책에서 간언하는 요령이나 윗사람을 대하는 요령도 자신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말 중요한데...나중에 평전이라도 있으면 구해다 봐야겠습니다.
이분도 대단한 선각자였군요..
오오 천조국의 위엄은 역시 시작부터 무시무시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