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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소통적 공존으로 껴안기
임은희
1. 인간, 현실을 향한 불완전한 응시, 진정한 ‘자유’란?
인간은 시간 속에서 그리고 시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시간의 음영아래 이루어진 인간의 삶은 과학 발전과 문명 팽창을 가속화하였다. 그것은 인류의 행복을 보장해 줄 거라는 분홍빛 약속을 철저히 저버렸다. 오히려 노동소외의 증가, 실업 문제, 그로인한 인간 공동체와 환경파괴, 독점자본에 의해 사생활까지도 관리되는 위기감을 팽배 시켰다. 또한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에 의해 인간의 정서적, 미학적 욕구의 가치마저도 체계적으로 억압하며 인간간의 관계성마저도 위협한다. 계몽주의 이래 합리적 판단의 기준이 되었던 과학 기술 문명의 위기의식은 탈구조주의자였던 푸코와 해체주의자인 라깡, 데리다에 의해 고도화된다. 그들의 사유를 담고 재현한 소설이 바로 박성원의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와 김이은의 『코끼리가 떴다』이다. 인간의 해방을 지향하는 현대의 발전이 인간의 퇴보를 가져왔다는 료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인식을 방불케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1세기 과학을 통한 낙관적 신념은 하나의 환상이며, 자본화된 문명의 발달이 초래한 암울한 공간을 디스토피아적 표현을 통해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은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단순히 문제적인 현실을 반영하거나 재현하는 데 머무르기보다 불완전한 방식으로나마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디스토피아이다. 이런 현실에서 배태되는 인간의 ‘불안’, 자아를 지키며 살아남기 위한 몸짓을 담고 있다.
2. 시간이 빚어낸 체제의 악몽, 해체된 공간 ‘울란바토르’
- 박성원의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박성원의 「유서」, 「이상, 이상, 이상」, 「델러웨이 창」등 수많은 작품들에는 근대서구문명으로 인한 현실의 냉철한 진단과 해체와 전복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번 박성원의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도 근대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침없이 토해내고 있다. 특히 현재의 우리들에게 ‘시간’의 문제를 묻고 있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가 허구적 세계에 재현되어 거대한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알 수 없는 힘의 근원적 샘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작동하는 무서운 힘을 “시간이 만들어낸 체제”로 간주한다. 인간을 철저히 길들이기 때문에. 분명 “창살없는 감옥”에 살고 있지만 자신들이 갇혀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들, 그 안에서 “자신들이 믿는 것을 진실이라고 착각하며 자신이 보는 것만을 진실”로 규정하는 ‘진실’의 이중성, 따라서 “시간이 만들어낸 체제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시간 안에 머물며, 시간의 바깥으로 나간 사람은 그 누구도 돌보아주지 않는다. 또한 시간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세상은 절대 용납하지도 않는” 체제 순응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도시, 시간 안에서만 살아가기에 ‘전체와 규칙에 의해 이어달리기를 하는 주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도시. 이것이 재현되는 도시는 디스토피아이다. 이는 객관적이고 직선적이며 개량화된 시간의 누적을 통해 발전과 진화라는 관념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근대적 시간관에 대한 회의적 발상이다. 작가는 근대의 도그마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주체적 지각도 없이 살아가는 인물의 위악적 행위를 조명함으로써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지독히도 염세적이어야 할 소설의 세계가 그다지 암담하지 않다. 이 소설에는 시간에 맞춰 작동되는 근대적 공간을 탈주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타자적 위치에 놓여진 사람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논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몽과도 같은 디스토피아 안에서 유토피아를 찾기 위한 작가의 자성적 성찰에서 비롯된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지 않는가? 살아야하지 않는가? 라는 끊임없는 반문이다. 시간 안에서 말하는 ‘진실’, 정말 진실이야? 그것은 어쩜 전체를 보지 못한 자신이 그려놓은 선 안에서의 ‘진실’ 아닐까? 좀 더 넓게, 좀 더 크게 바라보자. 진실은 어쩜 우리가 생각하는 이편 저편도 아닌 우리가 그렇게 추종하던 시간을 벗어난 그 무엇인지도 몰라. 가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아니 생각지도 못한 일들 그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 잣대로 해석될 수 있니? 시간이라는 체제 안에서 해명될 수 없는 ‘우발성’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래도 모든 것들이 동일한 잣대로 재단될 수 있을까? 우연한 만남 그런데 그것이 어떤 과거 시간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한 ‘인연’일 때 그것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지? 이것이 바로 허구적 질서를 통해 밝히고 싶었던 작가의 문제의식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빗나간 답변이다. 빗나감으로 미끄러지는 들뢰즈의 탈주의 쾌미를 독자에게 끊임없이 제공한다. 질문을 통해 사건은 일어나지만 그 누구도 그 정답은 알 수 없다. 시간이 만들어 논 체제를 탈주하려는 사람들…… 그래 탈주해보자.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자, 그럼 여길 떠나봐. 시간을 떠나봐.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보는 거야. 냉동인간이 되어 백년 후에 나타난 그녀, ‘SF소설’안에서만 사는 ‘나’. 너희들이 욕망하는 세상은 유토피아적이니? 그럼 공간을 떠나봐, 사막으로 갈까? 몽고로 갈까? 늘 배낭을 싸며 떠날 준비를 하는 아버지. 왜 그는 여길 떠나지 못했던 것일까? 왜 정착하는 사람이 없는 낚시꾼을 상대로 서점을 열고 그가 열망하는 몽고를 여기에 만들었지? 정말 우리는 시간을 떠난 것인가? 떠날 수 있는 것인가? 떠날 수 있다? 없다?
시간에 길들여져 수직적 발전 속에 만들어진 도시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폐비닐 그리고 생활 쓰레기가 강물을 뒤덮어” 악취를 내뿜는 ‘고지혈증 환자의 혈관’같은 부패와 타락의 징후가 나타나는 디스토피아이다. 그 안에서의 악몽은 우발적 사고를 통해 점철화된다. 시간의 인과성을 거역하는, 불확실성이나 우연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한 철학적인 의미에서 어떤 존재나 사건, 인물 등에 있어서 아직은 확실치 않은 그 무엇에 의존하는 ‘우발성’이 자행되는 범죄 행위가 그 도시를 더욱더 칠흑같은 어둠으로 음울하게 한다. 의도되지 않는 우발성은 바로 근대의 합리주의적 여로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빗나감’에서 환기되는 ‘진실’의 잣대... 그건 정말 합리적인가?
「몰서」에서 ‘그’는 예술이 상품이라는 돈의 가치로 환산하는 세상을 향해 자살을 생각하나 우연히 만난 낯선 여자의 자살로 시간범(屍姦犯)이 되거나,「논리에 대하여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7」에서 ‘친구’는 대형 태풍 속에 고향 떠난 애인 집을 몰래 훔쳐보다가 우연히 다른 침입자가 저지른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된다.「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 지는가」에서 부모 잃은 여자애는 아버지를 찾아주겠다며 우연히 만난 남자 때문에 유아 매춘 대상이 된다. 살기 어려워 매미 용역 일을 하게 된 ‘나’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여자애의 매춘을 돕게 된다.
절대적 시간개념에 의한 인과율적 인식에 의해 ‘진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행위가 도시를 얼마나 위악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과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일까? ‘나’가 행한 행위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때 그 진실은? 동일한 시선으로 재단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을 범한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평가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란 말이다. 난 범죄를 행하지 않았어. 난 평소 한 번도 생각조차도 못했던 일이야. 단지 궁금했을 뿐이야. 라는 그들의 절규가 도시를 메운다. 그래서 더욱더 암담하다.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1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한 두 자식들이 아버지가 로또에 당첨된 사실을 알게 되자, 아버지를 상실했다는 슬픔도 잠시 바로 그 복권을 찾기 위해 태풍이 몰아치는 무시무시한 날도 마다하지 않고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친다. 이복누나는 아버지의 무덤에서 꺼낸 1등 담청 복권을 몰래 갖고 도망간다. 그렇게 남겨진 나는 “전기가 차단된 집에서 전화도 먹통이고, 소변을 보면 변기 속 오줌과 섞인 하수는 솟구쳐 올라 바닥을 누비는 그리고 구멍으로 물이 빠지지 않는, 기름 낀 녹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쇳가루들이 악취와 함께 떠다니는 곳”에서 어둠을 지켜내야 했다. 아버지의 냄새를 맡으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독하게 느낄 수 있는 도시의 비정함이다. 선형적 시간 안에서는 평생 그렇게 가난했던 아버지에게 복권당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누이의 배반은 우리의 예상을 비껴간다. 그 당첨된 복권은 아주 엉뚱하게도 그녀의 미래의 시간을 위해 모두 사용된다. “냉동인간” 그녀는 복권을 타면 동생의 의도대로 사막을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현재의 시간을 벗어나고자 했던 누나는 “미래는 아름다울”거란 생각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그 돈은 “그 여자가 백년으로 갈 수 있는 딱 그만큼”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을 배반한 누이의 이유는 근대적 질서의 논리를 철저히 빗나간다. 그래서 살만하지 않은가?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2에서 ‘나’는 현재가 지긋지긋해서 “SF문학”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며, 꿈을 꿀 수 있는 미래 속에서만 살아가는 작가지망생이다. 늘 현실을 벗어나 사막을 욕망했던 아버지의 실패한 삶에서 현실을 부정하는 일은 익숙한 일이다. 그런 ‘나’가 우연히 백 년 동안 냉동인간이었던 여자를 폭우 속에서 만나 자신의 뒤차에 태우게 된다. 그가 그토록 미래를 가기 위해 꿈꾸었던 자신의 “SF문학”은 ‘과거의 시간들을 담은 식상한 내용의 반복’(pp.111~112)으로 쳇바퀴 돌고, 현재의 문턱까지도 오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그녀가 백년 전의 인물이다. 백년 후의 그녀는 “백 년 전이나 이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는 걸 알아야지. 여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거 알아? 내가 백년 만에 깨어났지만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p.113.) 시간을 통해 탈주를 계획했던 ‘그녀’와 ‘나’는 역설적이게도 미래는커녕 과거시간조차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어떤 욕망도 실현시키지 못한 채 시간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답답하면서도 더욱더 우울한 미래의 모습이다. 자신이 우연히 얻은 복권 당첨금을 모두 다 쏟아 흥분된 마음으로 백년 후를 왔지만 백 년 전과 달라진 것 하나도 없고, 오히려 숫자화 된 논리들, 인간의 쾌락적 욕망들만 더욱더 견고해진 미래세상의 모습이니 더욱더 암담하다. 시간 안과 밖에서는 그녀의 욕망이 결코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신기루 같은 거니까. 그러나 우발적으로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게 된 ‘그녀’는 ‘나’의 아버지를 배신하고 떠났던 배다른 누이 즉 ‘나’의 고모란 점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은 텅 비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고 텅 비어있는 것은 모두 물질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에서 더 나아가 세상 만물이 ‘인연’에 따라 모이고 흩어질 뿐 색이랄 것도 공이랄 것도 영원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 이항대립적인 개념들의 공존으로 해석되는 데리다의 파르마콘을 상기시킨다. 그래 세상은 허무하지만 살만하지 않은가?
결국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1에서 ‘나’의 아버지가 현실을 탈주하기 위해 꿈꿨던 ‘울란바토르’나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2에서 ‘나’의 아버지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추구하고자 했던 ‘사막’이나 ‘그녀’의 ‘냉동시간’이나 ‘나’의 ‘SF소설’이나 ‘탈영토화’된 지점에서의 유토피아 또한 “시간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1편에서 아버지는 몽고에서의 유목민 생활을 꿈꾸지만 몽고도 사막도 아닌 아주 작은 마을에서 ‘울란바토르’라는 북카페를 경영하다 죽는다. 그는 아들에게 “그저 궁색한 패배자”로 기억될 뿐이다. 2편에는 그 아들이 다시 시간의 바깥에 사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아들에게 ‘사막’이라는 시간의 바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지만 그도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는 “술주정꾼에 못질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수”로 남겨질 뿐이다. 동물원에서 나와 도로를 질주하며 탈주를 꿈꿨던 코끼리가 다시 소방차와 경찰차에 갇혀버리고, 수몰된 고향을 찾아갔을 거라고 믿어지는 소설가 C가 결국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듯이, 소설집에서의 인물들의 탈주는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거나 패배자가 된다.
들뢰즈․ 가타리는 1980년 ‘자본주의와 분열증’의 2편인 『천의 고원』을 통해 ‘노마돌로지’라고 불리는 창조와 생성의 요지로서의 새롭고 풍부한 ‘탈영토화’ 를 제기한다. 그러나작가는 결국 그것이 현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인가? 라고 반문한다. 그것은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1.2에서 아버지와 자식, 손자를 통해 되뇌인다. 백년이란 시간은 변했지만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체제는 변했는가?. “다만 바뀐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주를 본뜬 보드일테고, 뉴욕이 아니라 화성의 수도는 천 달러, 안드로메다 성운 일만달러, 블랙 홀에 빠지면 주사위 짝수가 세 번 연속으로 나와야만 탈출하는 보드게임의 규칙정도지.”(「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2, p.113) 결국 모든 가치들이 자본의 논리로 더욱더 견고해졌을 뿐이다. 아버지가 “시간 안에 길들여진 것을 미친 놈”이라며 탈주하고자 했던 ‘3만여권의 책’은 ‘고작 삼백오십만원짜리’로 교환되는 현실인 것이다. 미래로 탈주를 꿈꿨던 누이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추가된 해동비용뿐이었다. 그 비용은 빚”으로 남았다. 결국 그녀는 “몸을 추스르자마자 강제출국조치를 당해” 빚더미를 짊어진 채 고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과거 동생에게 남겨진 혼자라는 외로움을 감내하며 쫓기면 살아야 하는 삶만 주어졌을 뿐이다. 욕망을 결핍으로 간주함에 맞서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여 욕망을 능동적인 힘이요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흐름으로 파악했던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도 자본주의의 허위적 질서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작가의 해답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절대적 영토화”가 ‘절대적’일 수 있는가?
이 쯤 되면 박성원이 추구한 세계가 온통 염세주의로 가득 채워져 버릴 뻔 한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소통의 지점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가 몽고에서의 유목민 생활로 현실의 시간에서 그렇게 탈주하고자 했던 공간은 결국 “몽고도 사막도 아닌 아주 작은 마을” 그것도 “낚시꾼을 상대로 한 민박집과 그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북카페” ‘울란바토르’였던 곳이다. 그곳은 의외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곳은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에서 부모를 잃은 “선택받지 못”했던 여자애와 아내를 잃은 ‘나’가 결국 잠시라도 가서 숨을 쉴 수 있는 공간, 유토피아인 것이다. 누이의 배신과 아내의 죽음으로 용역일을 해야했던 ‘나’가 우연히 자신이 태웠던 그 여자애의 일기장을 통해 그녀의 성매매를 자신이 돕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의도치 않게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와 함께 잔혹한 도시를 탈출한다.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는 캠핑카를 타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자신들이 마트에서 구매한 통조림의 기간만큼만 행복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지만, 잠시라도 시간의 족쇄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벗어날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이며 유토피아를 내재한 소통의 공간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하다. 그것이 바로 작가 박성원이 이 도시에서 찾은 해법은 아닐까?
박성원의 소설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온통 디스토피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빗나감’의 미학이 있기에 즐거움도 존재한다. 그것은 ‘찰라’이지만 그게 인생 아닌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서 해방되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찰라’. 그렇기에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반문한다. 그래도 살만한가?
3. 균열과 불시착된 현실, 타자와의 공존 ‘심율처’
- 김이은의 『코끼리가 떴다』
김이은의 소설들『마다가스카라 자살예방센터』등에는 ‘상처와 치유’의 문제가 늘 내재되어 있다. 이번에 발간한 『코끼리가 떴다』에도 근대의 자본가치에 의해 상처 입으며 살아야 하는 인물들,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인물들, 살아내야만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왜 살아야하는가? 그냥…… 그러기에 세상은 온통 디스토피아이다. 주체적 주관도 없이 작동하는 원리에 자동인형처럼 살아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암담하고 불확실한 현실이지만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있어. 우리가 딛고 있는 바닥은 생각처럼 그리 대단한 게 아니야” (「지진의 시대」, p.174)라며 현실의 균열지점을 자각하는 인물, “당신이 과거에 겪었던 모든 상처들, 그 고통들을 치유해줄게요” (「가슴 커지는 여자이야기」p.15)라는 인물을 주목하고 있기에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은 그다지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외롭지 않다.
이 소설집에는 인간의 자율성의 영역이 자본력에 의해 붕괴되고 그것이 기호, 문화 그리고 재현의 영역까지 침투하게 된다는 프리드릭 제임슨의 포스트 모던관이 ‘몸’을 통해 형상화된다. ‘물질화된 몸’‘시간을 통해 저당잡힌 몸’‘훼손된 몸’‘생명력을 상실한 몸’등으로 형상화된다. 인간의 몸을 통해 세상은 은유화 된다. 몸이 자기 스스로의 자생력을 상실하며 기생하거나 저당 잡혀 살아갈 때 소진하는 생명력은 폐허가 된 암울한 도시와 닮아있다.
“여기가 대체 어디라는 거지?"(「너는 어느 별에서 온,누구냐?」p.252) "대체, 어떻게 내개 여기에 있는거지?"(「여의도 저공비행」, p.257)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여기 있는지도 모른 채 “너나 나나 추락하긴 마찬가지다. 인마. 넌 바닥으로 떨어져 곤두박질치고 난 공중으로 오르다 추락”(「여의도 저공비행」,p. 273)해. “한없이 추락한다. 땅으로 사정없이 내리 꽂힌다.”(「여의도 저공비행」,p. 283)추락하는 현실은 기형적 몸을 통해 의미화된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이다.
「쇼맨」에서 'p'는 자본력이 물질화된 몸으로 표상되어 ‘돈이 흐르는 불야성의 탑(㙮)에서는 탑(Top)에 올라앉은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안착’할 수 있다. 화려한 도시에서 환락가를 누비며 잘나가던 쇼맨인 ‘p’는 “탑(Top)에 올라와 탑(㙮)에 갇힌 신세”로 ‘탑클럽’에서 “발목이 잘릴 때까지 춤을 멈추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자본력에 이끌려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관리할 수 없이 ‘돈’의 힘에 의해 ‘몸’이 작동되는 기계적 몸을 지닌 인물이다.
「코끼리가 떴다」는 인간이 “모종의 프로젝트”에 의해 “수용소에 갇혀 감시를 당하는” 우리 안의 코끼리처럼 표상된다.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심한 훈련을 견디지 못해 탈주한 코끼리가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자, 코끼리를 향해 “‘도시 방위 사령부’소속 군인들의 총구에서는 일갈처럼 총성이 뛰쳐” 나오고, “도시의 감시자”로 등장한 헬기는 전장에서의 “살상 무기가 퍼붓는 공포와 죽음의 소리”처럼 다가온다. 우리 안의 코끼리나 "커다란 우리로 만들어진 것 같은 도시전체"에 살아가는 비정규직 근로자인 'S'가 동일시되면서 통제력을 행사하는 주체인 국가에 의해 조종당하며, 도덕적 기반조차 없이 부분별한 통치권만을 행사하는 국가에 의해 훈련되며 길들여진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천한 삶을 보여준다. 시간에 의해 저당잡힌 노동자의 훼손된 삶을 그리고 있다. 푸코가 말한 파놉티콘에 갇혀 ‘조정당하는 몸’이다.
「가슴커지는 여자이야기」의 입사시험에 번번히 낙방되어 스스로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칩거생활을 하는 'S'는 발기불능으로 ,「이건 사랑노래가 아냐」의 ‘나’는 스스로 고립되어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지내는 동안 “조기폐경과 골다골증”에 “비천하고 싸구려가 된 내 몸, 생명이 빠져 나간 소멸의 몸”에서 “방구석에 처박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와 환멸”을 느낄 몸으로.「잃어버린 몸을 찾아서」의 주인공 ‘그녀’는 유부남과 자유연애를 즐기지만 “유산에 이어 불임판정”을 받은 생명력을 상실한 몸으로.「외계인, 달리다」에는 “온 몸에 물기가 다 빠져나간 뒤 바스라져”버릴 듯한 몸으로 삭막한 현실은 몸의 사막화를 가속화한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내느라, 살아남느라” 그 외로움과의 사투로 인간의 ‘몸’은 바싹 말라버린 사막의 잡초처럼 나른하며 기진맥진하다. 숨이 차오른다. 가팔라서. 사회에서의 상처의 깊이는 몸에 각인되어 현실을 조명한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이다.
타인과 공존하지 못하며 스스로 자신의 삶의 고통을 감내하다 소진되어 버린 ‘몸’의 회복은 결국 타자와의 몸의 합일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김이은의 해법이다. 그것은 타자와의 소통이며 타자를 향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시선만이 아닌 타자의 응시를 통해 바라본 ‘나’를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가면을 벗을 수 있다. 이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는 그 누구나 자신의 불안을 가릴 가면을 쓰기에. 그리고 그 누구도 타자의 본모습에는 도달할 수 없기에. 내가 나를 보이지 않듯이.
「외계인, 달리다」에는 늘 가면을 쓰며 가면을 파는 여인이야기이다. 가면가게의 이름이 ‘뿔뿌러진 해골’의 이름처럼 그 공간은 ‘뿔’로 상징되는 남근이 상실되어 주체와 타자가 동등하게 공존하는 영역이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잊어졌”고, 이제 사람들은 “여자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녀의 본 얼굴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곳에는 어떤 “법칙이나 순리”를 따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판매 전략을 짜거나 가게 매출이 바닥이어도 그리 화나지 않는다. “혼자 남게 되는 게 두려워서 뛰”는 그녀는 거울을 통한 타자의 응시를 통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너는, 어느 별에서 온 누구냐」p. 244.) 는 것을 깨닫는다.
돌아보니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뛰고 있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 돔형 공연장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 모두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얼굴에 웃음을 지고 있다. 온 세상에 해골과 유령과 드라큘라가 차고 넘친다. (「외계인, 달리다」,p. 69)
웃음이라는 획일적인 가면 뒤에 가려진 실체는 “해골과 유령과 드라큘라”처럼 자신과 같은 모습임을 인식한 순간 타인을 발견한다. “가면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여자는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내서는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얼굴 가면을 뒤집어쓴다.” (「외계인, 달리다」,p. 69)「지진의 시대」에서 미세한 균열 속에서 불안함을 느끼며 죽음의 전조를 느낀 ‘장’은 ‘나비 랜드 개장’을 앞두고 환상적 경험을 한다. 흔들리는 자신을 “나비들이 소리 없이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는 타자의 응시를 체득한다. “나비들은 장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가, 장이 나비가 되었다가 하면서 끊임없이 교란된다.”(p.196) 타자와의 공존을 통한 타자의 껴안기는 선형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시간의 개념을 붕괴시킴으로써 시간의 혼재적 양상을 통해 데리다의 ‘데쟈-뷰’방식을 빌어 일종의 환각현상에서 타자와의 공존을 보여준다. 그곳이 바로 “당신처럼 지친사람들, 그리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 기쁨과 환희와 열락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걸 되찾아주는 곳”(「가슴커지는 여자이야기」p.33)즉 도시 한복판에 놓여진 대체의학의 장인 ‘심율처’는 아닐까? 타인의 고통을 감싸 안을수록 자신의 가슴이 커지는 고통과 아픔을 감수해야 하는. 그것이 바로 작가가 건네는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견뎌내는 삶의 해독방식이다.
4. 디스토피아, 치유와 대안으로서의 글쓰기
2009년에 나온 『코끼리가 떴다』,『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는 과학과 자본의 팽배가 일상을 지배하며 인간을 형성해내는 새로운 기형적 도식을 토해내고 있다. 그것은 온통 디스토피아의 세계이다. 불명확하며 불확실한 세계에서 빚어지는 인간의 불규칙적인 관계가 혼돈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함이 거짓되지 않은 사회의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다. 그 재현된 세계에서 보여진 혼재된 자아의식과, 혼재된 시간인식이 근대의 선형 시간의 개념을 해체하고 현실과 허구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기존의 인식론을 해체한다. 오로지 현재의 무수한 파편만이 존재하는 영원한 현재의 모습이 형상화되고 있는 현주소를 일깨운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여자가 하는 불랙잭을 보면서 어쩌면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차이가 블랙잭과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21을 넘는 숫자는 예술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 그러나 21아래, 그 숫자를 가지고 다투는 모든 숫자놀음은 모두 예술이 아니다. 서열과 등수를 매기고 높고 낮은 가치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그것은 상품들의 세계이지 예술의 세계가 아니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몰서」p. 255)
S는 버리지 못하는 오랜 습관처럼 깊은 가을이 되면 소설습작에만 매달리곤 했었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상처 치유 방법이기라도 한 듯. (「너는, 어느 별에서 온, 누구냐」p.251)
이상은 두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아닐까? 자본화된 가치 안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며 좀 더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가치를 소설 속에 끊임없이 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현실은 시간을 벗어날 수 없지만 살만한 세상이기에..... 그래서 우리는 견뎌야 하는 현실이지 않는가? 그리하여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지 않는가? 그들은 “요즘 시대에 소설은 필요없다”를 되뇌이면서도 현재도 자신의 붓을 멈추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우주를 혼돈스러운 세계의 메타포인 ‘도서관’으로 보았던 보르헤스는 인간을 불완전한 사서로 간주하며 우주 속에 존재하는 우연의 산물 또는 심술궂은 조물주들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며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는 합리적 사고의 시대적 종말을 고한다. 그가 바라보는 우주는 질서정연한 법칙이 없는 불규칙적으로 변화하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푸코 또한 『말과 사물』에서 이러한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라 정의하고 있다. 김이은과 박성원은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세상을 글쓰기 안에서 그들만의 세상 견디는 해법을 지금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임은희
1967년 광주 출생.
한양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한양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로 재직중.
공저 『1950년대 한국문학 연구』,『현대소설의 여성성과 근대성 연구』,『문화변동과 인간 그리고 문화연구』,『여원』 연구』,『이효석의 삶과 생애』가 있고, 논문으로는 「이태준 단편소설 연구」,「1920년대 소설인물의 성의식 연구」 등이 있다.
당선 소감 -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시간을 함께 할수록 흔들린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다만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을 뿐이고 그 재미있는 부분을 열심히 담고자 노력했을 뿐입니다. 이 영광을 저에게 주시다니요. 앞으로 더욱더 많은 소설들을 더 많이 읽고 열심히 쓰라는 의미로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선 소감을 쓰려고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이 ‘네이버 검색’이었다. 가장 식상하지만 무난한 표현이 ‘패러디’. 언제부턴가 세상을 접속하는 첫 번째 창이 컴퓨터였다. 내가 살아온 삶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했는데……. 40년을 함께 한 내 부모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의지하고 있다. 어느덧 기계 문명에 길들여져 그것으로 세상을 접속하고 그걸 통해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늘 주체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시간과 자본의 노예로 거짓 행복 앞에 가면을 쓴 채 미소짓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시간을 함께 할수록 흔들린다. 이런 모든 것들을 일깨워준 것이 ‘소설’이었다. 소설에는 각 작가의 삶의 철학이 유쾌하게 묻어 있다. 그들이 멋들어지게 세상을 향해 쏜 한 판 굿에 관객으로서 재미나게 놀아난 기분. 그 기분을 썼는데 신인상 당선까지 했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대학 첫 입학식에 인생관이 ‘새옹지마’였던 ‘나’는 삶이 그다지 흥미롭지 못해서인지 소설 안에서 많은 볼거리를 찾았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여기까지 왔다. ‘인연’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이 고리를 벗어난 일이 없다. 그래서 가끔 섬뜩하게 세상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겸손하게 살아야겠다. 그러다보니 감사할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70이 넘으신 나의 엄마 내음이 싸늘한 파스 냄새로 바뀐 지가 오래됐다. 손만 합장하면 어느 곳에서나 온 가족의 이름을 명명하시며 기도하신다. 지금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백일, 천일기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젠 엄마 몸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하얀 반창고를 볼 땐 눈이 시리다. 그게 파스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난 엄마만큼 자식을 위해 내 시간들을 할애하지 못한다. 그런 나를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무척이나 좋아하는 두 딸 근영․규란, 늘 대접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지만 나한테 손을 들어준 남편 눈물나게 고마울 따름이다. 한 여자가 엄마로 아내로 산다는 게 참 힘든 일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할 흔적들이다. 이런 글들을 남길 수 있게 해주신 유성호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참 감사할 일들이 많다. 그러니 세상은 살맛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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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학계를 뛰어넘어 인생철학이 진하게 묻어나는 고품격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마음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쓰신 삶의 의미를 잘 濃縮시킨 삶의 指針書 같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과 같이 감상하지 못함이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박 선생님, 주인공이신 임은희 선생님 버금가는 고생을 낳으셨습니다.
좋은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감사^^*
ㅎ -
2. 시간이 빚어 낸,,까지,,요. 오늘은.. (쬐끔, 여유있는 시간으로 마저 읽어야겠다는,, .)
좋은 글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갑니다. 철학과를 다닐 때, 예술철학연구수업에서 들뢰즈에 관한 레포트를 썼던 기억이... 평론 공부를 해 보고 싶은 사람으로써 부러움과 존경함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