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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의 역사문화
▣ 배산의 역사·문화 산책 이 재 익 (전 부산남일고 교사)
봄날 배산에 오르다 이 재 익 (2001.05)
과정로(瓜亭路) 지나서 배산(盃山)에 오르다 거칠산국(居漆山國) 허물어진 토성지(土城地) 우물터 물은 말랐지만 겸효대(兼孝臺) 선경은 의구하구나.
정과정곡(鄭瓜亭曲) 예서 지었세라 산접동새 소리는 사라지고 북향 망미인(望美人)하여 망미동(望美洞) 이름만 남았어라.
햇송순이 뼘을 웃자란 어린 소나무 가지 친 덩그런 윗둥과 망해정(望海亭) 지붕에 어린 취로인부들 아린 손길에 아카시아 향기로운 봄날이 사윈다.
바라보니 광안 현수교(懸垂橋) 웅장한 주탑 배산의 한(恨)도 저다리가 실어가네.
망미1동 부산남일고 뒤에 술잔을 엎어놓은 모양을 한 배산(盃山 ; 255m, 일명 잔뫼산)은 수영구 연제구의 경계가 되는 조그만 산이지만 이 산에 오르면 사방에 동래구, 금정구, 부산진구, 연제구, 해운대구, 수영구, 남구 등 부산의 16개 구 중에 7개구를 조망할 수 있으며 광안리 앞바다는 잡힐 듯이 가깝고, 해운대 동백섬이 보이는 전망 좋은 천혜의 산이다. 등산객은 무심코 오르지만 이 작은 산에도 적지 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산 중턱에서부터 정상까지 나선형으로 쌓은 테뫼식 토성은 허물어졌으나 옛 그릇과 기와조각들로 보아서 신라이전에 있었던 이 지방 거칠산국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1972년 부산광역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 거칠산(居漆山)국은 부산 동래구와 경남 양산군 일부 지방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장산국 또 는 내산국(萊山國)이라 하여 한 나라를 이룬 것을 신라가 정복하였다. 『삼국사기』 "거도열전(居道列傳)"에는 신라 제4대 탈해왕때 거도(居道)라는 장수가 거칠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병합하고 거칠산군을 두었다고 하였다. 거칠산군은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
배산은 고려조에는 선인 김겸효(金兼孝)가 기거했다는 겸효대(兼孝臺)가 있었다고 하나 역시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겸효대는 해운대, 태종대, 오륜대, 몰운대(다대포), 의상대(범어사), 강선대(사상), 신선대(용호동)와 함께 부산 8대로 꼽힌다. 산 정상에 서면 바다가 바라보이는 강구연월((康衢煙月 ; 사통팔달로 뻗은 거리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 시가지에 분주히 살아가는 모습이 사방에 들어오는 수려한 경치는 여기가 바로 겸효대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중기 문벌귀족 사회도 기울어져 갈 무렵 의종의 이모부인 정서(鄭敍)는 반역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고 의종 5년(1151년)에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 동래 유배 시에 그가 거처하던 곳이 바로 이 배산 기슭 과정로였다. 수영교차로~연산9동 토곡 사거리 일대의 도로를 과정로(瓜亭路)라고 이름 지은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의종은 정서에게 ‘그대 무죄한 줄 알지만 신하들의 의론이 분분하니 잠시 가 있으라'하였지만 영영 다시 부르지 않았다. 20년이 지나서 무신정변이 일어나 의종이 쫓겨나고 명종이 즉위(1170년)한 후에야 정서는 복권되었다.
정서(鄭敍)의 유배지인 정과정(鄭瓜亭) 옛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동래현 남쪽 10리 지점으로 현재 연제구 연산9동 지역내 온천천과 수영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배산과는 2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이므로 정서가 전망이 좋은 이 산에 올라서 먼 서울(개성)을 바라보고 임금을 그리워하며 정과정곡을 구상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어차피 '정과정 옛터'라고 한 곳도 '동래현 남쪽 10리'라는 애매한 표현을 추정한 지점일 뿐이다.
망미동은 정서가 북향망미인(北向望美人, 미인=의종임금)하였다는데서 명명된 것 같다. 망미동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용주면(龍州面), 남상면 등으로 불렸고 1914년 동래군 남면(南面) 망미리(望美里)라고 명명되었는데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세 가지로 추측되고 있다.
첫째 고려 충신 정서가 귀양살이를 하면서 초하루와 보름날에 임금을 향하여 망배를 들이고 임금을 사모하였다는 뜻의 望美人에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
둘째 망미동은 옛날 동래부의 고읍성이 있던 자리이고, 수영성의 북문 밖에 있어 좌수영의 수사(水使)가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향해 망배(望排)를 올린데서 왔다는 설.
세째 망산(望山, 수영동과 망미동 사이의 산)의 '망' 자와 배미산(배산의 다른 이름)의 '미' 자가 합쳐서 望美가 되었다는 설.
그런데 수사가 망배를 하였다면 임금을 미인으로까지 사모하는 용어를 썼다는 것은 어색하다. 그런 전통이 있었다면 아마도 정서의 애절한 望美人의 전통이 내려온 것일 게다. 망산과 미산에서 온 이름이라는 것도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의미가 다 함축되어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망미동에는 정서와 관련된 지명이 있다. 망미2동 4-7번지 일원의 수영강변을 예전에는 '오옹건니' 라고 불렸는데 정서가 정과정 모래톱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오이할아버지(정서)라는 별칭에서 또는 정서를 수영강을 자주 건네준 오씨 어부에서 비롯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이곳(수영자동차학원 부근, [e편한 세상]이라는 아파트 단지와 도시고속도로 사이 언덕)에 1985년도에 정과정비 건립추진 위원회에서 화강암으로 된 시비를 세웠다.
정서(鄭敍/?~?)는 음보(蔭補=음서 ; 5품 이상 고관자제 특별등용)로 벼슬에 나아가서 후에 정5품 내시낭중(內侍郞中)에 이르렀다. 인종의 동서(인종비 공예태후 여동생의 남편)로 문장과 묵죽화(墨竹畵)에 뛰어나서 인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정과정곡 또한 뛰어난 노래이다.
정과정곡은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로 읊었는데 이를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는 삼진작(三眞勺, 속악에서 가장 빠른 템포)이라 하였고 후세인들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불렀다.
10구체 향가 형식으로 지은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이다. 형식과 내용으로 보아 광의의 향가로 처리하는 학자도 있어 향가의 시대적 하한선이 12세기까지도 내려올 수 있다고 하는 논란이 되는 작품이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이제현(李齊賢)의 한역시(漢譯詩)가 실려 전한다.
내 님믈 그리자와 우니다니 산접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아니시며 그츠르신 달 아으 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아르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데 녀져라 아으 벼기시더니 뉘러시니잇가 과(過)도 허물도 천만(千萬)업소이다. 말 힛마러신뎌 슬읏븐뎌 아으 니미 나를 하마 니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쇼서.
뜻을 새겨 풀어보면
우리 님을 그리워하여 늘상 울고 있는 나는 저 접동새(두견새)와 비슷도 합니다. 참이 아니고 거짓으로 꾸민 것인 줄을 아! 저 새벽하늘에 비쳐주는 조각달과 샛별만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우리 님이 계시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아! 우기시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지나친 일도 허물도 나에게는 털끝만도 없습니다. 뭇사람이 시기하여 남을 참소하는 말이신데 슬픕니다. 아! 우리 님이 나를 이미 잊으셨습니까? 아 우리 님이시여 나의 이 간절한 마음을 들어 주셔서 제발 나를 전과 같이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 산을 시민의 휴식공원으로 가꾸고자 연제구 수영구 양개 구청에서 노력을 많이 들인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원된 인력은 실업자 임시구제 근로노동으로 그들이 가지치기한 어린 소나무는 단박하고 간결하게 윗둥만 덩그랗다. 마치 그들의 울분을 나무에게나 풀려는 듯 한 모습이다.
지난해 정자가 4개 만들어졌는데 이산에 지천인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서 만드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이 정자의 소박한 지붕모습이나 윗둥만 덩그런 소나무가 흡사하다. 햇순이 가지런하게 쑥쑥 자라고 향긋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진동하는 호젓한 봄날이지만 느끼는 자에게는 그들의 아픈 마음의 상처가 찬 기운이 되어 이 봄날도 사위어(식어) 가는 듯이 느껴져서 필자는 자작시 ‘봄날 배산에 를 지었다.
배산 북쪽의 능선 기슭에는 연산동고분군 (蓮山洞古墳群)이 있는데 도로 개설로 더러 없어졌지만 현재 10기가 남아있다. 연산동고분군은 현재 남아 있는 부산지역의 유일한 고총의 원형성토분구 유적으로서 복천동고분군과 인접해 있어 연관성에 주목을 받고 있다. 연산동고분군은 일제 강점기부터 발굴되었고, 1988년에는 경성대(8호분)와 신라대(구 부산여대, 4호분)에 의해 조사, 발굴되었다. 철제갑옷과 투구 등 철제류들이 많이 나와서 고대 한,일관계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이 지역의 수장층은 정치적인 권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장악하고 상당한 자치권도 행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배산의 서쪽에는 그 옛날 목동들이 넘나들었던 소멍에 자리 같은 잘록한 멍에고개(잔뫼고개)에 신설된 정자는 멍에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 정상에 가면 망해정(望海亭)이 있고, 북쪽 사면으로 조금 내려가면 이 산성시절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터가 남아 있다. 그 옆에 새로 잔뫼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배산에서도 봄에 철쭉꽃이 가장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도록 가꾸어져 있다. 여기서 옆으로 산허리를 돌아서 동쪽으로 가면 또 하나의 정자 용화보궁이 있다.
배산 정상의 전망이 좋은 곳에는 망해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광안리 바다가 시원하게 바라보이지만, 그런데 답답한 것은 바다위의 광안대로 현수교 공사이다. 시공회사의 부도로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2001년 현재) 가운데 두 주탑기둥은 우람하여 그 높이가 116미터나 된다고 하는데, 바다 위를 달리는 부산의 명물이 될 테이지만 안타깝게도 중단되어 있다.
광안대로는 총 7천420m에 7천400억 원의 예산으로 1994년 12월 착공~ 2002년 6월 준공예정이다. 광안리 바다 위를 달리는 다리부분은 양쪽의 접속교 4천678m이며 가운데는 현수교 부분으로 국내최장의 900m, 현수교의 주탑 높이는 116.5m (해수면 위 7m 기초포함), 국내 최초의 해상 2층 왕복 8차선 교량이다. 동아건설이 시공하였다가 부도로 마무리 공사가 삼환기업에 넘어갔다.
그러나 저 웅장한 다리가 완성된다면 이 산에 얽힌 역사적으로나 오늘날 겪고 있는 소위 IMF구제금융의 시련과 우울도 어느 정도 씻어질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어렵지만 저 웅장한 다리에 희망을 걸고 그리고 태평양 너머로 시야를 넓혀 진취적인 기상을 한번 길러보자. 이것이 이산에서 길러야 할 호연지기(浩然之氣 ; 넓고 큰 기개)가 아니겠는가.
남쪽으로 금련산과 황령산이 잡힐 듯 가깝다. 태백산맥의 남쪽 끝 부산지역에 와서 금정산맥과 금련산맥으로 가지가 나눠지는데 황령산(428m)과 금련산(415m)은 금련산맥에 속한다. 황령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동래구의 안산이고 조선시대의 봉수대가 있어서 부산의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 풍신수길 왜군의 조총소리가 요란하던 임진란 시에도 그 다급한 상황의 봉화가 올랐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누를 '黃'의 황령산(黃領山)으로 기록되어 있고,「동래부읍지」에는 거칠 '荒'의 황령산(荒領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혼동은 있지만 거칠산국(居漆山國)에 있는「거츨뫼」라는 것이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거칠 '荒', 고개 '領'의 황령산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금련산(金蓮山)은 산의 형상이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 비춰진 모습이 금빛이 빛나는 연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연산동의 지명은 이 금련산 이라는 산이름에서 왔다고 하기도 하고 이 지역이 낮은 늪지대라 수련(水蓮)이 많아서 연산이라 했다고도 한다. 금련산 기슭에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마하사가 있는데 전국 적으로도 희소한 고찰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절의 16나한의 영험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해 동짓날 밤에 마침 절간에 있던 불이란 불은 다 꺼져버려 암흑천지가 되었다. 이튿날 아침 스님이 불을 피우려고 부엌에 들어가니 뜻밖에 화덕에 불이 붙어있어 깜짝 놀랐다. 봉화(烽火)를 지키는 사람이 절을 찾아와 말하기를 어제 밤처럼 눈보라가 심한데도 험한 산길에 상좌아이가 불을 얻으려 왔기에 불을 주고,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죽을 끊여 먹여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그런 동자를 보낸 일이 없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동지팥죽을 쑤어 나한전에 올리러 갔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16나한 가운데 오른쪽에서 세 번째의 나한 입술에 이미 팥죽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나한님이 불이 없는 것을 보시고 동자로 化身하여 불을 얻어다 죽을 쑤게 한 것임을 깨달았다.
또 이 고찰에는 이런 전설도 있다. 마하사 마당에 덕석(곡식 말리는 짚으로 만든 깔판)에 곡식을 말리는데 참새 떼들이 몰려와 곡식을 쪼아 먹어 피해가 많았다. 스님이 응진전에 가서 참새를 쫓아달라고 기원한 후로 참새 한 마리가 죽어 마당에 떨어지더니 그 이후 다시는 참새 떼가 말리는 곡식에 달려들지 않았다 한다. 나한이 신통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절에는 참새 떼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배산 동북쪽 아래 거울바위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의 연산8동 연산시립도서관 자리에 거울처럼 표면이 매끄럽고 평평한 바위가 있었는데 수은으로 만든 거울이 없었던 시대에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거울바위에 비친 자기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고 슬퍼서 거울바위를 깨뜨렸으며, 또한 어떤 처녀를 짝사랑하던 총각이 거울바위에 비친 험상궂은 자기 얼굴을 비관하여 거울바위를 돌로 쳐서 깨뜨렸다고 한다. 연산시립도서관을 건립할 때 깨진 거울바위마저도 없어졌다고 한다.
우리 학교는 이 배산의 남쪽사면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내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배산을 애호하고 향토사를 소중히 공부하여야 하겠기에 정리를 해 본 것이다. ●
배산에서 바라본 광안대교 (2012.04.16 촬영)
배산에서 바라 본 황령산
배산에서 바라본 망미주공/ 해운대 센텀시티(2012. 04.16)
망미1동에서 설치한 배산의 시문학
배산주위 아름다운 봄꽃들
라일락
라일락
완두콩 꽃
오죽
겹벗꽃
자목련
박태기나무꽃
배산 혜원정사 음악회
배산에서 바라 본 혜원정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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