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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安炳瓚)
1派27世-참판공파
의병장 독립운동가
(安炳瓚)
1854(철종 5) 충남 청양~1921.
한말의 의병장·독립운동가.
기타 인명 안병찬(安炳燦)/한일선(韓一善)
연령 76
항일/국방 / 의병
1854(철종 5)∼1929. 한말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치규(穉圭), 호는 규당(規堂). 충청남도 청양 출신. 창식(昌植)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 홍주의 교임(校任)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당시 초토사(招討使) 이승우(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그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처음에 동학농민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로 승진하여 와있던 이승우를 의병장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
뒤에 오히려 배신당하여 그를 비롯한 홍주칠의사(洪州七義士)가 모두 잡혔을 때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후 홍릉주사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 그해 2월 23일 박창로(朴昌魯) 등
40여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1만여명으로 구성된 홍주의진은 그해 윤4월 9일 적의 포위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잡히고 그 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간신히 피신하였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병림(炳琳)·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병찬(安炳瓚)1854(철종 5)∼1929.
한말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치규(穉圭), 호는 규당(規堂). 충청남도 청양출신. 창식(昌植)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홍주의 교임(校任)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당시 초토사(招討使) 이승우(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金福漢)·이설(李설)·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그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처음에 동학농민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로 승진하여 와있던 이승우를 의병장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 뒤에 오히려 배신당하여 그를 비롯한 홍주칠의사(洪州七義士)가 모두 잡혔을 때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후 홍릉주사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 그해 2월 23일 박창로(朴昌魯) 등 40여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1만여명으로 구성된 홍주의진은 그해 윤4월 9일 적의 포위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잡히고 그 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간신히 피신하였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병림(炳琳)·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병찬(安炳瓚) 지역 홍성군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안병찬의 자는 치규(稚圭)요 호는 규당(規堂)이다. 순흥인 안창식의 아들로 철종 계축년에 당시 홍주군이었던 화성면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에 초연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오던 중 아버지를 따라 동학운동 때 목사 이승우를 도왔고 국모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아버지와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승우에게 체포되어 홍주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왜경에게 삭발을 당하고 굴욕과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옥의 창지를 찢어 ‘志士不忘在湯 勇士不忘喪其元 寧作斷頭鬼 不爲削髮人(지사부망재탕 용사부망상기원 영작단두귀 부위삭발인)’이라는 혈서를 쓴 뒤 목을 찔러 옥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경이 달려와 생명이 겨우 붙어 있음을 보고 치료를 하자 음식을 전폐하고 투약을 거절하여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옥중 동지들의 설득으로 겨우 연명하게 되었다.
경성 감옥으로 끌려가 재판장 이범진에게 재판을 받으며 법정 진술에서 “지난해 국변이 있은 후 또 다시 삭발령을 내리고 길가는 행인까지 함부로 붙들어다가 삭발을 시키는 이러한 역적들을 없애고 국사를 바로잡는 것이 나의 소원인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다만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특사를 내리고 홍릉주사(洪陵主事)에 임명하였으나 거절하고 돌아왔다.
광무 10년 을사조약에 분노한 그는 기어코 역적의 무리들을 소탕하여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향하여 진격하려 하다가 결국 일경에세 체포된 뒤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관찰사 서리 (觀察使署理) 박찬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그의 태도가 태연자약하여 왜경들도 경탄하였다 한다. 병찬의 아우 병림도 민종식과 의거할 것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미년에는 또 다시 왜신의 무고로 형제가 공주감옥에 투옥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안병찬(安秉瓚) 지역 청양군
출생·사망 1854(철종 5) ∼ 1921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안병찬의 자는 치규(穉圭)요, 호는 규당(規堂)이다. 순흥인 안창식의 아들로 당시 홍주군(홍성)이었던 화성면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에 초연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오던 중 아버지를 따라 동학 혁명 때 목사 이승우를 도왔고, 을미사변때 아버지와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승우에게 체포되어 홍주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왜경에게 삭발을 당하고 굴욕과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옥의 창지를 찢어 혈서를 쓰고 목을 찔러 옥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경이 달려와 생명이 겨우 붙어 있음을 보고 치료를 하자 음식을 전폐하고 투약을 거절하여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옥중 동지들의 권유로 겨우 연명하게 되었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 체결이 발표되자 전 국민은 비탄에 잠기어 항쟁에 나섰다. 이에 한규설 등 대신을 비롯하여 유생, 여성, 학생, 노비에 이르기까지 조약의 무효를 부르짖고 을사오적을 규탄하니, 비록 국가는 존망지추의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했지만, 이로부터 한국인의 항쟁은 시작된 것이다.
이 비분의 소식을 들은 안병찬은 그달 24일 입궐하여 궁내부 비서원에 들어가서 승지에게 상주문을 주고, 고종 황제에게 돌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상주문을 접수한 비서감승 박승봉은 <요즘 유생들의 소도 아무 장애없이 바치거늘 하물며 품임관의 상소를 바치지 못하리오>하며 즉시 올려졌는데, 이를 보고 난 안병찬은 곧 도끼를 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비지(批旨)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비를 받을 경우 5적의 목을 찍으리라>고 다짐하며 적성을 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니 이 때에 그의 나이 51세였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눈물로 호소하는 그의 상주문이 무력한 왕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자 그는 감연히 떨쳐 일어나 적극 무력 투쟁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31세 때에 홍주 교임으로 부임하여 충청도 일원에서 명망을 얻었다. 이듬해 단발령이 내리자 김복한(金複漢) 이설(李 )등과 함께 기의의 기치를 들게 되는데 민중의 덕망과 흠모를 받던 당시의 그의 위치로 보아 의당 가야할 길이었을 것이다. 이 때의 의병 사건으로 그는 체포되었으나 그의 사람됨을 크게 느낀 재판장 이범진에 의해서 방면, 홍릉 주사에 배병되었다가 곧 사퇴하고 말았다.
그 후 을사조약이 조인되자 민종식, 김복한, 이세영 등과 빈번한 모임을 갖던 중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전국 유림들과 연락을 가지면서 존양토왜(尊壤討倭)의 기치를 들었으나. 이 때에도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후 1909년에는 반도 침략의 원흉 이또오를 처치한 안중근의 재판에서 그는 영국인 더글라스와 대동공보 사장인 미하일로프와 함께 변호인으로 자원했으나 기각되고 다만 관선 변호인만으로 재판을 끝내었으니 이로써 안중근은 사형 언도를 받게 되었다. 이듬해 3월 15일 그가 여순 감옥에 있는 안중근을 찾았을 때 안중근은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 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노니……나의 유지를 계승하여 자주 독립을 회복하면 사자무감(死者無憾)이라>고 하였으니 이 때 그의 감회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추측할 수 있겠다.
그 후 3.1 운동이 일어나고 상해 등지에서의 구국 운동이 본격화하자 그는 가재를 정리하여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함석은(咸錫殷), 오동진(吳東振), 김승만(金承萬) 등의 동지와 함께 대한 청년단 연합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하면서 기관지 「대한청년보」를 발행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민족 독립의 대사업에 일대 만군의 나팔을 불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대한청년단 연합회의 취지에서도 보듯이
<청년은 국민의 중심이요 국가의 기초라, 이번 우리 대한 광복 사업의 추(秋)를 당하여 우리 나라의 흥망과 우리 민족이 자유되고 노예됨은 우리 청년의 활동 여부에 전재함은 실로 다언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전제하고 그는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그칠 줄 모르는 항일의 불꽃은 쉬지않고 타올랐다.
다시 출옥한 후 안병찬은 상해로 들어가 임시 정부의 국내연락망인 '연통제(聯通制)' 조직에서 평안북도 독판(督瓣 - 제 2대)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솔선하여 나섰다.
안병찬은 1910년대 만주 일원의 독립 혁명 대열의 최선두에서 활약하였지만 그는 평생의 사업인 조국 광복의 뜻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사적은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에 있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 체결이 발표되자 전국민은 비탄에 잠기어 항쟁에 나섰다.
이에 한규설 등 대신을 비롯하여 유생(儒生)・여성・학생・노비에 이르기까지 조약의 무효를 부르짖고 을사 5적을 규탄하니, 비록 이로부터 국가는 존망지추(存亡之秋)의 파국으로 몰아가기 시작했지만 또 이로부터 한국인의 항쟁은 시작된 것이다.
이 비분의 소식을 들은 안병찬은 그달 24일 입궐하여 궁내부 비서원에 들어가서 승지에게 상주문(上奏文)을 주고, 고종황제에게 올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상주문을 접수한 비서감승(秘書監丞) 박승봉(朴勝鳳)은 「요즘 유생들의 소(疏)도 아무 장애없이 바치거늘 하물며 품임관(品任官)의 상소를 바치지 못하리오.」
하며 즉시 올려졌는데, 이를 보고 난 안병찬은 곧 도끼를 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비지(批旨)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비(優批)를 받을 경우, 5적의 목을 찍으리라」고 다짐하며 적성(赤誠)을 토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찰청에 구금되었으니, 이때에 그의 나이 51세였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눈물로 호소하는 그의 상주문이 무력한 왕실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자, 그는 감연히 떨쳐 일어나 적극 무력 투쟁의 길에 몸을 떨쳐나섰다.
그는 1854년 충남 홍주(洪州-홍성)에서 태어났는데 31세 때(1894)에 홍주 교임(校任)으로 부임하여 충청도 일원의 지도인사로서 명망을 얻었다. 이듬해 단발령이 내리자 김복한 이설(李偰) 등과 함께 기의(起義)의 기치를 들게 되는데, 민중의 덕망과 흠모를 받던 당시 그의 위치로 보아 의당 가야 할 길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의병사건으로 그는 체포되었으나 그의 사람됨을 크게 느낀 재판장 이범진(李範晋)에 의해서 방면, 홍릉(洪陵) 주사에 배명되었지만 곧 사퇴하고 말았다. 그후 을사조약이 조인되매 민종식(閔宗植) 김복한 이세영(李世永)등과 빈번한 모임을 갖던 중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전국 유림들과 횡적 연락을 가지면서 「존양토왜(尊攘討倭)」의 기치를 들었으나 이때에도 다시 체포되어 투옥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 등지에서의 구국운동이 본격화하자, 그는 가재를 정리하고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함석은(咸錫殷). 오동진(吳東振). 김승만(金承萬) 등의 동지와 함께 <대한청년단 연합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하면서 기관지 (대한청년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일방 민족독립의 대사업(大事業)에 일대 진군의 나팔을 불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대한청년단 연합회의 취지에도 있듯이
(청년은 국민의 중심이요 국가의 기초라, 이번 우리 대한광복사업의 때를 당하여 우리나라의 흥망과 우리 민족이 자유되고 노예됨은 우리청년의 활동여부에 전재(專在)함은 실로 다언(多言)할 필요가 없으리라.)
고 전제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그칠줄 모르는 항일의 불꽃은 쉬지 않고 점화(點火)되었다. 다시 출옥한 후 안병찬은 상해로 들어가 임시정부의 국내연락망인 <연통제(聯通制)> 조직에서 평안북도 독판(督辦-제2대)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솔선하여 나섰다.
이듬해(1921) 그는 유동열. 최고려(崔高麗)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참석,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그는 상해로 돌아가 국내연락기관으로 상해지부를 설치하였다. 상해지부의 위원에는 여운형.조동호 등의 대표를 선정하고, 전위(前衛)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별도로 설치하여 박헌영을 책임자로 하고, 후에 조직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대결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금의 부족으로 큰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으나 조봉암등을 국내에 침투시켜 항일 지하운동을 벌이는 데 커다란 업적을 남겨 놓았다.
부(父)
안창식(安昌植)
1838-1895
순흥인 안창식은 고려조 좌찬성 문성공(左贊成 文成公) 안유(安遊)의 후예(後裔)로 효행(孝行)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증직(贈職)을 받은 경양(璟良)의 손자(孫子)이다. 그는 헌종(憲宗) 4년 무술(戊戌 1838) 2월에 출생(出生)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고 네 살 때에 할아버지가 그의 재주를 시험(試驗)하기 위하여 글을 지으라 하니 곧 「사람의 소리에 산이 운다」하고 말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였다.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그때 판서(判書)였던 이건필이 그 의 재주와 효성이 아까워 벼슬 자리를 천거(薦擧)하였으나 늙은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이를 사양(辭讓)하였다. 갑오(甲午 1894) 동학운동 때 홍주성이 동학군(東學軍)에게 포위(包圍)되어 위급(危急)하게 되자 군사를 모집하여 초토사(招討使)였던 이승우를 도와 평정하였다. 이에 이승우가 조정(朝廷)에 보고하여 벼슬을 내리도록 하였으나 끝내 사양(辭讓)하였다. 을미(乙未)년 8월 국모(國母)의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창식은 그의 아들 병찬에게 ?나는 늙어 힘이 없으나 뒤에서라도 도울 터이니 나라를 위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라?고 하였다. 이에 병찬은 채광묵 과 같이 수백명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홍주성에 들어갔다가 당시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失敗)하여 이승우에게 김복한 등과 같이 체포(逮捕)되었다. 창식도 아들과 같이 체포(逮捕)되어 홍주옥에서 서울로 이수되어 형을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特使)로 다음해 병신(丙申)년 봄에 석방(釋放)되었다. 그 후 날로 기울 어지는 국사(國史)를 걱정하다가 을미(乙未 1895)년 11월1일 홍주 다동에서 세상(世上)을 떠났다.
안경양(安璟良)ㅡㅡㅡ> 안용(安溶) ㅡㅡㅡ>안창식(安昌植)ㅡㅡㅡ> 안병찬(安炳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