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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21 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운주사는 석불과 석탑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는 특이한 사찰입니다ㆍ
현재는 석불 100여구와 석탑21기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18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불, 석탑이 각 1천구씩이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는 실재했었을 것입니다ㆍ
여러 종류의 석불상은 10m의 거불에서 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산과 들에 흩어져 있습니다ㆍ
이들 불상은 대개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모양, 돌기둥 모양의 신체,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는 팔과 손, 거칠고 규칙적인 옷주름, 두툼한 돌다듬 기법 등은 운주사에 있는 불상만의 독특한 모습입니다ㆍ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석불상 양식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ㆍ
석탑21기도 산이나 들 여기저기에 즐비하게 서 있는데 전형적인 석탑 이외에도 구형탑, 원판형탑 같이 특이한 탑도 있으며 3층, 5층, 7층, 9층 등 층수도 다양합니다ㆍ 일반적인 사각형 탑들은 탑신의 너비가 좁고 높이가 높으며 옥개석이 평면적이어서 고려석탑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ㆍ
또한 기단이나 탑신석의 면석에 × ◇ |||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돋을새김과 선새김 등으로 새겨져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ㆍ
이러한 무늬를 사용한 것은 불상의 기하학적 주름과 더불어 큰 특징으로 주목됩니다ㆍ이처럼 특이한 석불, 석탑이 한 절에 수십기씩 봉안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예로 천불천탑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아울러 불교 미술사 연구에 크게 이바지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ㆍ
또한 운주사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네 차례의 발굴조사를 하였지만 정확한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지 못하여 여전히 신비스런 사찰로 남아 있으며, 문헌 기록이 거의 없어서 창건 연대와 목적, 창건 주체에 대한 의견이 다양합니다.
운주사 창건 설화에 의하면, 도선 국사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천불 천탑을 세워 비보 진압을 하여 국운이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자 하룻밤 사이에 천불 천탑을 도력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운주사 창건 주체도 신라 말 능주 호족 세력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
*능주 지방에 이주해 온 외부 세력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
*미륵 사상을 믿는 노비들이 미륵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
*도교 사원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와불(북극성)과 칠성바위(북두칠성)를 두고 밤하늘의 별자리
"천문도"의 근거로 탑과 불상이 세워졌다는 설에 신빙성을 두고 있습니다ㆍ
문학소설에서는
*황석영이 <장길산>에서 관군에 패한 장길산이 능주로 숨어들어 와서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가설이 있고
*이재운은 소설 <토정비결>에서 황진이의 미모에 빠진 지족선사가 속죄의 마음으로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픽션을 제시하고
*박혜강은 소설 <운주별곡>에서 고려 무인시대 노비 만적 일당이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노비 해방을 기원했을 것이란 상상력을 동원했습니다.
운주사는 발굴 조사에서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해무리굽 청자 조각이 출토되어 늦어도 11세기 초반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656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지』에는 ‘전하기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며 혹은 고려 승 혜명이 무리 수 천으로 하여금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혜명은 광종 때 은진 관촉사의 석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혜명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습니다ㆍ
발굴 조사에 의하면 창건 이후 운주사는 세 차례 중창이 있었는데
첫 번째 중창은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이며
2차 중창은 12세기, 3차 중창은 12세기 후반 내지 13세기 초반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상층에서 (홍치 8년)이라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습니다.
석탑과 불상 등이 조성된 것은 3차 중창 시기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상층에서 발굴된 명문 기와로 보아 운주사는 1495년(홍치 8, 성종26) 다시 중창되었습니다ㆍ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운주사가 있어 조선 전기까지는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현종 때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정유재란 때 폐사된 이후 사찰의 중심지가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에서 도암면 대초리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초리 사지는 17세기 이후로 파악되는 2동의 건물지가 조사되었습니다.
설담 자우의 「운주동 불탑 수리 후 중건약사전 권선문」에 의하면 19세기 초반 훼손된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중수하고 새로이 약사전을 중건하였고 이를 약사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다시 폐사되었던지 1921년에 간행된 『도암 면지』에 의하면, 1918년에 전 군수 박윤동 등 16명이 시주하여 재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72년~1978년 비구니 승려의 중건으로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하였고, 근래에 송광사의 말사로 편입되면서 대대적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수많은 전각을 건립하고 주변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지장전· 미륵전· 산신각· 보제루· 종루· 운주 선원·
일주문· 사천왕문· 원융당· 지혜당· 공양간 등 16동의 전각이 산재해 있고 계곡 깊숙한 곳에 암자 목우암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 독존상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지장전의 외벽에는 처참한 지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참배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구층 석탑[보물 제796호]
석조 불감[보물 제797호]
원형 다층 석탑[보물 제798호]
와형 석조 여래불[유형 문화재 제273호]
광배 석불 좌상[유형 문화재 제274호]
마애 여래 좌상[유형 문화재 제275호]
칠층 석탑[유형 문화재 제276호]
쌍교차문 칠층 석탑[유형 문화재 제277호]
석조 불감 앞 칠층 석탑[유형 문화재 제278호]
거북 바위 교차문 칠층 석탑[유형 문화재 제280호]
운주사 대웅전 앞 다층 석탑[유형 문화재 제279호]
칠성 바위 앞 칠층 석탑[유형 문화재 제281호]
발형 다층 석탑[유형 문화재 제282호]
거북 바위 오층 석탑[문화재 자료 제256호]
수직문 칠층 석탑[문화재 자료 제257호] 등이 있습니다.
운주사 서쪽 언덕 위에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 있으며
일어나면 미륵이 도래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전합니다.
운주사에는 1942년까지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으나
현재 석불 93좌와 석탑 21기가 보존되어 있으며
사찰일원은 사적 제31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ㆍ
https://youtube.com/watch?v=tkJKHfgY0kY&si=2qEL9dCzFAOzbYh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