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도 찬란한 백운산 줄기
우뚝 솟은 감투봉 맑은 시냇물
기름진 이 땅을 길이 빛내는
우리들은 대평교 힘찬 어린이
우리들의 모임은 2013년 초 부산에 사는 친구들이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여 몇 개월의 작업과 우여곡절을 거쳐
드디어 5월 27이부터 2박3일 동안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모교인 대평국민학교가 있던 부지위에 세워진 '두레원'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학교를 졸업한지 꼭 52년만이다.
그간 남자 졸업생들은 동창회라는 명목으로 매해 한 차례 모임을 가졌다는데
여자 졸업생들은 도회지로 나가 직장 생활을 하다 결혼 후 생활에 얽매어
동창회라는 모임을 참석하지 못하고 살았다.
수년전 자녀들이 성장하고 경제적 여유도 생기고 하여
여자 졸업생들이 동창회에 참석하려는 의향을 보였으나
부부가 함께 모임을 갖는 대평국민하교 5회 동창회가
여자 졸업생들의 동참을 어려워하여 그동안 몇 번 모임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각자 마음속에서는 그 시절의 추억이 점점 간절함으로
응어리 잡게 되어 동창회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들만이라도 모임을 갖자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마침 학교가 있던 자리에 졸업생 중 한 사람이
책임을 맡아 함양군에서 '두레원'이라는 컨벤션센터를 지었다는 말들 듣고
그곳에서 모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정식 동창회 모임은 아닐지라도 졸업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들이 있어
우리들의 바람은 남자졸업생들도 잠시 얼굴이라도 보기를 원했으나
끝내 반응이 없다는 주체자들의 말에 다소 섭섭함이 있었으나
기대보다 많은 친구들이 참석하여 너무 반갑고 의미있는 모임이 되었다.
출발 전 주에 양지말 하 춘자의 부산에 사는 동생 춘희 후배에게
연락이 되어 소식을 전했으나 춘희 후배가 19일 며느리를 봐서
그 때에 다녀갔다는 아쉬운 소식을 들었으나 다음 해를 기대해 보게 되었다.
5월 13일에 모임을 예정했는데 몇 친구들의 가정에 뜻밖 일이 생겨
27일로 연기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처럼
27일부터 29일까지 비가 온다고 예보하더니
새벽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일산과 상암동과 분당에서 사는 친구들이 서울 구의동 동부터미널에서
오전 8시 30분 함양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로 했다.
나는 7시에 짐을 챙겨 남편이 동부터미널에 데려다 주어 7시 31분에 도착했다.
동무들도 모두 8시 전에 도착하여 함양행 시외버스를 탔다.
대평국민학교 5회 졸업생 남생도 26명 여생도 14명 중
부산에 사는 3명과 서울, 경기도에 사는 6명, 고향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는 1명이 함양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모였다.
함양에서 백전국민학교 학생 통학을 맡고, 함양군 주변의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광관 버스를 가지고 있는 강 진숙 부부가
차를 너미널에 대기하고 있다가 도착하는 사람들을 태웠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상림 근처의 식당에서 근사하고 맛있는
점심을 대접하여 미안스럽기는 했으나 너무 감사하고
모임의 시작부터 우리를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게 했다.
부산에서 이번 모임을 위해 애쓴 능경이 박 채주, 그래 승리의 V자를 만들자.
부산의 친구들을 태우고 손수 운전하는 수고를 한 싸리골 노 상순 친구,
10여 년 만의 만남인데 우리 많이 늙었지. 고맙다. 반갑다. 친구야.
봉이, 일산에서 온 아래재 김 갑봉, 분당에서 온 능경이 박 순달 친구.
인천에서 온 음지말 김 월순, 월순이가 타고온 버스가 안산에 머물렀을 때 기적처럼 버스를 탄 애래재 노 상남,
그대들!! 고맙다. 이번 모임에 모든 동무들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준 그대들!!
(일단 함양읍에서 진숙이 부부가 대접한 맛난 점심을 먹으며 오랫만의 해후를 누리는 우리 동무들)
부산에서 온 우두재 한 변시 친구와 분당에 사는 음지말 노 경숙 친구.
함양읍에서 진숙이가 안내하는 대로 과일과 음료수 등을
사가지고 두례원으로 갔다.
비가와서 질척대는 길로 들어가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건물 뒷쪽 길에서 넓은 천을 깔아 숙소 입구 테라스로 올라가도록
배례를 해 주었다.
도착하니 두례원을 책임 맡고 있는 정 학상 친구와
관리하고 있는 정 예진이라는 예쁜 후배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건물은 아직 미완성이었으나 우리 모임을 갖는 숙소는
넓고 깨끗하고 전망이 좋았다.
주방 또한 넓고 잘 갖추어 있고 식당도 펀안하고 좋았다.
월순이랑 순달이와 갑봉이, 상남이가 가지고온 반찬들과 장보아 온 것들을 주방에서 정리하는 중이다.
이곳의 책임을 맡은 아래재 정 학상 친구로부터 숙소 사용에 관한 안내를 경청 중.
숙소에서 마주보이는 머구봉을 찍었다.
첩첩이 산중인 이곳이나 모두 산이 야트막하게 둘러앉아있는 중에
유난히 우뚝 솟은 머구봉이 어제부터 안개에 가려있어 좀 아쉽긴 했다.
대평국민학교 교가의 가사에 적힌 "우뚝 솟은 감투봉"일 학교에서
바로 올려다 보이는 이 산, 머구봉이라고
교가를 지으신 초대 교장 선생님이셨던 김 환용 교장선생님께서 일러 주셨단다.
'감투봉'이라 부르신 이유는
모두 자라 어른이 되면 대한민국을 위하여 높은 감투를 쓰고(벼슬) 일하는
일꾼들이 되라는 뜻에서라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 학교 뒷쪽 갈모리의 높은 봉우리를 감투봉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김 환용 교장선생님이 교가에 올린 감투봉과 의미를 알게 되었다.
두례원은 아직 완공되지 못해 공사를 진행 중에 있으나 내년에는 더 편리하고 좋은 공간이 될 것이다.
이곳이 고향인 모두에게 고향을 부담없이 찾을 수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 계획은 아침은 간단한 차와 빵, 과일로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알뜰하고 지혜로운 5회 여자들, 갑봉이, 상남이, 경숙이들이
갖가지 밑반찬을 풍성하게 준비하여 오고 고향에 사는 진숙이가
쌀, 고춧가루, 된장 등을 가지고 왔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박 채주가 잠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고 하여
"양지말을 다녀오면 어떨까" 내가 제안을 했다.
나와 채주와 박 순달이와 이 말순이 우산을 들고양지말을 다녀왔다.
운동화와 바지가 젖어 나는 부모님 묘소까지 가자는 말을 못하고 돌아왔다
월순이와 상남이가 주방을 맡아 정말 부짐하고 맛있는 저녁을 차렸다.
능경이에 사는 강 신철 친구와 이경희 친구가 와서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여
더욱 즐거운 모임이 되었다.
나는 강 신철 친구를 졸업 후 처음 보았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였다면 피차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52년 만인데 그는 어려서 얼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밤에 능경이에 살았던 이 성호 친구가 물나드리에 살고 있어서 연락하여
함께 자정이 넘게 놀다 갔다.
옛적 우리 어머니들이 동네 회치라는 것을 하실 때처럼
옛 유행가를 부르며 즐거워해 보려고 애를 쓰는 52년 만에 만난 우리 친구들
저 꾸부정한 어깨랑 약간씰 불편한 다리로, 그래 늙은이의 몸짓으로춤을 춘다.
"아무개야, 옛날 그대로다. 안 늙었다.'라고 위로처럼 말을 주고 받으나
어느 세월에 얼굴에는 깊은 실금들이 그어졌다.
저마다 각처에서 제몫을 알차게 이루어낸 이들이다.
그런데 감개무량하다는 감동 속에 가슴 밑에서 안개처럼 치바치는 이것은
그리움일까, 서러움일까!
많은 동무들이 고달픈 삶에 지쳐 이 세상에 사는 일을 그만 두었다.
학교 졸업 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이 바보들아!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보고싶어했는지 모르지?
고향은, 6년을 한 교실에서 부딛고 자란 우리 동무들은
지치고 힘든 세월에 누구도 내게 등을 기댈 대상이 없는 그 세월에,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었다.
우리 이렇게 만나보니 세월이 만지고간 자리가 남겨졌을지언정
모두 다 잘 살아왔는데, 졸업가에서 노래했듯이
있는 곳에서 우리나라 짊어지고 잘 살아왔고
또 우리 나라 짊어지고 나갈 자녀들을 잘 키워낸 우리 동무들이다.
그대들 조금만 더 견디고 버텨주지. 보고싶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동무들아 , 그대들도 보고싶다.
물나드리에 사는 능경이 이 성호, 함야읍에 사는 양지말 강 대훈. 항상 우수한 성적을 받던 5촌 당숙이다.
남자아이면서도 우리 반에서 가장 눈이 예쁘던 순둥이 고향 능경이에서 살고있는 이 경희 친구가
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담소를 나누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다 노래를 하게 되었고 흥을 돋구어 보자는 생각에 몇 친구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들도 친구가 되신지라 학교를 마치면 서로의 집으로 가서 함께 숙제도하고
놀며 밤을 새웠던 우리들이다.
모처럼 함께 밤을 보내고 중늙은 할멈들의 부시시한 얼굴을 담아보았다
28일 아침, 6시쯤, 늦잠에서 일어나 잡담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르려 열어보니
이 경희 친구가 손수 농사지은 깻입 2 박스를 가지고 왔다.
"작지만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가.
나도 오늘 같이 해야하는데 일이 있어서 함께하지 못해 미안해 정말."
그는 진정으로 미안해하고 아쉬워했으나 어찌 그의 탓이겠는가.
오랫 동안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늙어가는 우리들의 철없음이다.
지금은 죽은 송장이라도 일어나 일손을 거들어야하는
농번기인데 오랫만에 단비가 내렸으니 얼마나 바쁘랴!
미안하기 짝이 없다.
"경희는 국민학교 다닐 때 남자 여자 생도 중에서
눈이 가장 크고 예쁜 친구였는데 왜 저리 많이 늙고 여위였을꼬?"
내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더니
"경희가 마음 아픈 일을 당해 그래.
서른 한 살 묵은 아들을 급성 백혈병으로 보냈어.
그러니 사는 기 사는 것 겉것나."라고 한 친구가 귀띔을 하였다.
그랫구나, 쯧쯧...
얼매나 맴이 아팠겠나.
평생 산을 가심에 얹고 사는 친구구나!
뭐라 위로할 수조차 없이 측은하다.
어제 약속대로 진주에서 강 호상이와
어제 왔던 강 신철이가 식전에 와서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그는 오늘 모심는 날인데 우리와 함께 일정을 같이하려하여
그의 아내되는 분에게 여간 미안하고 고맙지 않았다.
그는 필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에 분명하다.
두레원을 맡고있는 학상이와 호상이, 부산에서 차를 가지고 온
노 상순이가 우리 일행을 차에 태워 함양 근처의 명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고향 근처의 명소들은 어려운 성장기에는 우리들이 그곳이 있는지 조차 모르든 곳이다.
안의면 상원리 용추계곡에 있는 물레발아 공원을 들렸다.
1780년 사신 일행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연암 박지원 선생은 열하일기를 통해 물레방아를 처음 소개했다는데
1792년 연암 박지원 선생이 함양군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물레방아를 만들어 이곳에서 실용화했다고 한다.
이 지역 노인들이 전하 바로는 함양 내에서도 최초로 물레방아가 만들어진 곳은 안심마을(안의면 신안리) 근처
였다고 하여 함양군은 이를 기념하는 연암물레방아공원을 안의면 용추계곡 가는 길에 조성했다.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삼진동의 용추계곡과 용추폭포다 가히 장관이었다.
함양 심진동 용추폭포는 우리나라 동천구곡의 대표격인 안의삼동(安義三洞)의 하나인 심진동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심진동 상류에 있는 용추폭포를 유람하면 안의삼동의 명승유람이 끝이 난다는 말이 있으며, ‘용추폭포’라는
이름의 수많은 폭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명소이다.
용추폭포는 높이 약 15m, 호소의 직경이 약 25m로 지우천 상류에 형성된 좁은 골짜기를 따라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의 울창한 삼림과 암반 위를 흐르는 맑은 계류, 용추에서 떨어지는 우레와 같은 폭포수, 그 아래의 깊은 연못 등이
어우러진 명승지이다.
계곡 쥐위로 유럽풍의 펜션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어 여름 휴가 장소로도 아주 좋을듯.
부산에서 어렵게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친구들을 태운 상순이 차의 밧테리 엥코가 나서 고치기를 기다리는 중.ㅋㅋ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842번지에 위치.
2005년 10월 13일에 경상남도 문화재 제 381호로 지정.
임진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하였다.
남강천 담소 중의 하나인 옥녀담에 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전각을 세운 목재가 자연 그대로를 유지한 동호정도 색다른 풍미를 엿보게 했을 뿐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하여 잘 관리가 되어있었다.
전 날 진 종일 비가 내려 너럭바위 위를 넘치게 흘러가는 계곡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화림동계곡은 해발 1,508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서하를 흘러내리면서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소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곳으로 장장 60리에 이른다고 한다.
전 날 진 종일 비가 내려 너럭바위 위를 넘치게 흘러가는 계곡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화림동계곡은 해발 1,508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서하를 흘러내리면서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소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곳으로 장장 60리에 이른다고 한다.
동호정 앞에서 폼을 잡은 우리 동무들. 상남이, 순달이, 말순이, 갑봉이, 채주.
<거연정; 주위의 풍강이 너무 아름답다. 물 좋고 산 좋고 정자 좋은 곳이다.
2005년 10월 13일에 경남 유형문화재 제 433호로 지정 되었다.
고려 말기 전 오륜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 시서(全時敍)가 1640년경 서산서원으 짓고 그 곁인
현 거언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처음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고 이듬해 복구하였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었다.
1872년 전시서의 7대손인 전재학(全在學), 전민진(全愍鎭)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건립하였으며 1901년 중수하였다.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의 암반 위에 1동으로 건립되어 있다.
우리는 서하에서 백전면으로 넘어가는 해후령으로 차를 몰았다.
아직 비가 그치지 않고 오락가락하고 있어 안개가 산을 휘감고 있어 옷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백운산 입구에 있는 옛날의 영암사는 백운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어져 있고 들어가는 길도
잘 닦여져 있어 차가 절 입구까지 들어갔다.
우리가 국민학교 시절 봄, 가을 소풍을 갔던 곳인데 지금 그 때의 정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매칫재를 넘어 인월에서 추어탕을 먹기로 했어나 추어탕의 본고장에는 추어탕이 없었다.
메뉴에 있는대로 어탕이라는 것을 주문하여 먹었다.
본 고장에서 맛있게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 화서 음식점을 하는 것인지?
서울 오금동의 남원골 추어탕 생각이 나는 것은 어찜인가?
점심을 먹고 지리산을 향했다.
다 돌아볼 수 없으니 안내자가 그 중 아름답다는 서암정사를 들렸다.
불도동무들은 법당엘 들렸으나 나는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아직 봄이 머무러있어 꽃들도 신록도 너무 아름다웠다.
내 고향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에 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리산을 내려와 산청의 "세계 한약재 엑스포 박람회장 " 건설지로 가는 길에 가야제국의
구형왕릉" 지라고 전해지는 유적지를 관람했다
드라마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한의 허 준과 그의 스승이신 유 의태 의 유적 위에 세워지는
"세계 한약재 엑스포" 박람회장은 아직 공사중에 있었으나 규모가 방대하였다.
친구이며 집안 조카 뻘이 되는 강 호상이 진주에 차를 가지고 와서 우리 일행을 28일 왼 종일
더 많은 곳으 구경시켜주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산청의 돼지고기가 맛있다는 말을 듣고 삼겹살로 저녁식사를 하자고 결정하여
고기를 사서 두례원으로 돌아왔다. 나는 꺽정이처럼 샤워실로 들어갔는데
종일 피곤하였을터인데도 월순이와 상남이가 맛있는 저녁식사를 만들어 일행의 피곤을 풀게했다.
신철이 친구는 식사 후 집으로 가고 낮 시간에 중학동창의 장례식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던
당숙뻘이 되는 강 대훈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9일이 되었다.
설레이며 기다리며 준비한 2박 3일의 마지막 날 아침에 어제 저녁 일찍 집으로 돌아간 강 신철이
함께 아침식사를 참여하고 우리가 함양을 출발하는 시간까지 동행해 주었다.
참 그의 아내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속이 좁은 나는 거듭 감탄을 했다.
아내가 보내주지 않으면 어찌 올수 있겠는가!
오늘은 진숙이의 남편 박 동환씨도 함께 하였다.
특별히 내게는 고마운 조카 사위뻘이 되는 형편이다.
오후 2시 30분 서울행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에 먼곳을 들릴 수 없었다.
언제 봐도 편안하고 위로가 되었던 상림은 이제 관광명소에 꼽힐만하게 아름답다.
우리는 일단 상림을 구경하기로 하고 자동차를 주차장에 대고 숲가운데를 걸으면서
옛날을 회상도 하고 새로난 길들을 걸어보며 야생양귀비밭과 유채밭을 들러
사진을 찍으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점심시간,
하루를 약정하고 진주에서 온 6학년 반장이었던 강 호상.
이틀 동안 이 모임을 위하여 힘을 다해 우리를 도운 정을 정말 감사!
함께 해준 강 신철 친구, 진숙이 신랑 박 동환 친구 모두 감사합니다.
점심식사 후 시간이 어중간하여 하림에 만들어진 "토속어류 생태관 "과 칠갑상어 양식장을 관람했다.
우리가 자랄 때 다리 밑에서, 노딧돌 아래서, 큰조갑소와 작은 조갑소 중간의 물목에서
발목에 부디칠 지경으로 많던 그 시절의 토속 물고기들은 보이지 않는데 토속어류 생태관이라고 이름했다.
망태는 어디갔노? 탱사리야, 양고락지야!
세상은 발전하여 풍성한데 너그는 살기가 힘들더나?
이제 경제가 안정이 되면 생태계도 더 깊이 생각해 볼 시기가 이미 이르지 안았을까?
이곳 하랫숲은 원래 위천수의 범람을 막기위하여 고을을 맞아 다스리시던 최 치원(고운)께서
상림과 연결하여 방천뚝과 함께 조성 된 것인데 일본 놈들이 아랫숲을 베어내고 비행장을 만들어
하림 비행장이라고 우리는 불렀다.
차라리 이런 시설보다 상림과 함께 숲을 조성하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지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우리는 이렇게 소원하고 준비하며 기다리던 2박 3일을 마치고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사랑하는 동무들아 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다가 다음해에 만나자.
아직 다 보지 못한 곳이 많으니 내년에는 농촌이 바쁘지 않은 시기에
다시 대평국민학교에서 우리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하 춘자도 양 재순이도 모두 만나자.
사랑한다. 축복한다.
대평국민학고 5회, 동무들아!!!!!
첫댓글 갑봉이! 우리 누님이 제일 예쁘시네요~~~모처럼 자유 부인이 되어서 멀리 함양 >대평까지 출장을 가신 누님들의 외출에 , 얼굴에 꽃이핀 모습을 보니 보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상남이 누님은 뵌지가 아주오래 되었는데도 고운 그 얼굴이 뚜렸하구요, 게렌 합북 누님의 여행기 수필같은 일자 말풀이에, 빨려들어가듯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나이는 먹었어도 모이면 초등학교 시절의 밤샘 얘기는 끝이없이 이어지는게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지요, 무튼 즐거운 그 시간들 상상이 갑니다. 만남을 축하드립니다......
영삼이 후배 눈에도 갑봉이가 제일 예쁘가? 내 눈에도 그런데.^^
그런데 갑봉이와 내가 닮지 않았는가? ㅋㅋㅋㅋ
같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니 감사해요.
52년 만에 만나신 선배님들 !에게 ~~ 축하 박수를 보냅니다 .
참 보기 좋습니다 .
강산이 변해고 다섯번은 변해 .세월이 참 많이도 흐른뒤에 만나신 선배님들 !
제 언니 (하춘자)도 이번 모임에 자리를 같이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
한편의 여행기 책을 읽덧 어쩜 이리도 글을 잘 쓰시는 양희 언니 !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선배님들에 모습에서 어릴적 6년을 한 교실에서 지냈던 추억들이 새록 새록 묻어나 ,,,
참 다정한 모습들! 입니다 .
선배님들 ! 오래 오래 건강 하시고 내년에도 또 그 다음해도 지속적인 만남이 있으시길 기원 드리면서 ,,,
내내 행복 하십시요 .^^
감사! 자네가 있어서 춘자소식을 알게되어 우리 모두 기뻐했다네.
일단 내년에도 모이자는 발언들이 많은 것 같으니
그 때는 그친구도 일본에서 꼭 올 수있도록 해보고 싶고만.
여러가지로 동생에게 고맙구만.
항상 평안하시게.
아름답습니다 , 이모님도 보이시고요 저가 태어나기 3년전에 찍은 졸업사진부터...함양 주위 관광까지 여기서 다 해보는 것 같아, 어제부터 두번 세번 읽도 또읽어 보고 있습니다,카페 방도 생겼은 이것 저것 살아오신 얘기 많이 들려 주세요(21회 하성용)
우리학교 방장님이시군요. 고맙고 반가워요.
이모님이라? 어느 친구의 조카신지? ^^
져녁에 카페에 들어와 보니 5회방이 분리되어 약간 의아스러웠다오.
그냥 예전대로 두시는 것이 좋을듯...
5회 졸업생중 아무도 대평학교 카페에 출입하지 않는데
독방을 만들어 놓으면 민망해서 이 늙은이가 방문하기 어렵지않겠소.
하성용 후배가 귀한 헌선을 하여 나는 너무 감사하다오.
이렇게나마 대평학교를 기억할 수 있음을요.
맨아래 !
오른쪽 갑봉이 우리누님, 다음 상남 누님, 게렌누님은 몇번째 숙녀이신지요? 하성용 카페 운영자는 생질이지요 , (김갑봉 씨) 우리형제들 중 7명이 대평초등학교 선 후배로 형성되어있기에 누님 형님 친구분들 동생 친구들! 그시절 다자녀를 가진 가정들이 많았기에 대부분 저희와 같은 경우였으리라 생각됩니다...
네, 프로이신 갑봉이 칭구도 그냥 계셔서 본인은 찍사하느라 ...
귀한 순간들을 남기고 싶은 욕심에요.
저 위로 올라가면 아침에 부시시한 늙은 여자 세명중
(왼쪽; 싸리골 노상순, 가운데 양지말 강양희, 오른쪽; 아레재 김 갑봉이네요.
하성용 후배가 생질이시면 전봉이 형님의 아드님은 아닐 것 같고...
영삼이 후배님의 여동생의 자제시겠지요?
맞아요. 우리가 자랄 때는 손이 번성하여 모두 친인척지간이 되더라고요.
누님의 찍사 정신은 어딜가셔도 발동한답니다. 지나고보면 세월을 정지시키는것은 사진만이 대변해주지요, 제일 큰 누님(점봉)의 큰아들 성용입니다,
유난한 효자라서 저의 아내가 대단히 칭찬을 많이합니다.
보고싶은 친구들 !!! 그날의 감동을 고스란히 담아 멋있게 저물어가는 모습들
한결 여유롬이 느껴저 참 좋다 어쩜 이렇게 글솜씨 사진이 정겹게 보여 애쓰준 양희 친구가고맙고
그리고 방장님 까페 열어줘 감사해요 능경 5회 지금 부산에 산 담니다.^ 0 ^
아래 두번째 글에 있는 사진 나 다음에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그 다음에 박 채주,
닝기 사는 6회 임 경자, 이경자지? 너 이 사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