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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판이와 은정이의 “새문밖여행”
여우사랑의 6월 여행은 서울 중구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도심속 역사 되돌아보기 프로젝트, “새문밖여행” 입니다. 48년만에 찾아온 “6월의 이른 장마비”로 인해 회원들과 다같이 걷는 “새문밖여행”이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여행 일주일을 남겨놓고 대표님과 교육주체가 답사차 다녀온 “일주일 먼저 다녀온 두판이와 은정이의 새문밖여행”으로 이번 달 여우사랑의 6월 여행을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왜 이번 여행의 제목을 “새문밖여행”이라고 했는지가 궁금하실 듯 하여 “새문”이라는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새문은 한자로는 '신문(新門)이라고 불렸고, 바로 현재의 서대문이 바로 조선시대 불리웠던 새문의 첫 유래이며, 바로 이 새문이 조선시대 돈의문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서대문은 한양 도성 서쪽의 큰 문이라 하여 서대문이라고 불리웠고,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중의 하나로 서쪽의 정문을 일컫습니다. 그렇기에 현재 중구 정동에 나 있는 신문로나 새문안길, 새문안교회등의 이름들은 돈의문의 다른 이름인 신문, 새문에서 따온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돈의문 혹은 신문의 외각 길을 따라 걷는 여행이라 하여 여우사랑의 6월 여행 이름이 “새문밖여행”이 된 것입니다. 멋지지 않나요?^__^
6월 26일 여행을 일주일 남겨놓은 주말인 6월 18일 토요일 오후 우리 여행의 출발지인 대한문 앞에서 두판 대표님을 만났습니다. 전일 폭음으로 인해 아침에 집으로 들어가시고도 정확히 약속시간인 오후 1시, 대한문앞에 나타난 대표님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절로 들더라구요! 더욱 대단했던 것은 아침까지 술을 먹고 도너츠와 커피로 해장을 하더라는 ㅎㅎ 암튼 그렇게 전날 술독에 빠져있었지만 너무도 멀쩡해 보이는 대표님과 대한문 앞에서 만나 본격적인 새문밖여행 길에 나섭니다!
두판 대표님과 만난 곳에서 잠깐 저희 첫 여행지가 있어 소개를 하고 가야 할 것 같네요! 저희 6월 여행의 첫 코스는 바로 “대한문” 입니다. 시청에 가면 의례껏 지나치는 곳이고, 촛불집회가 시청에서 한창일 때, 노무현 전대통령 추모기간 내내 늘 서울 시민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바로 그 대한문이지요.
우선 덕수궁은 사실 덕수”궁”이 아니라고 합니다. 덕수궁은 고종황제 퇴위후 황제위에게 밀려난 고종황제에게 부쳐진 궁호일뿐이며 원 명칭은 경운궁입니다. 덕수란 조선시대초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던 태조에게 붙혔던 명칭으로 물러난 왕에게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올리는 일종의 보통명사입니다.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1987년)후 환궁하시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는데 이유는 이미 1880년대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 서양 여러나라와 수교하면서 공사관 부지로 떼어준 관계로 각국 공사관옆에 위치했기 때문 입니다. 즉 서양세력의 그늘을 이용하여 일본의 압박을 피해보려는 궁여지책이였다지요! 이런 이야기를 지닌 덕수궁은 1904년 큰 화제가 발생하여 약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수리를 거칩니다. 참고로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엿습니다. 경복궁은 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 창경궁은 홍화문, 경회궁은 홍화문으로 보통 궁궐의 정문은 화자를 돌림으로 쓰죠. 1896년 중건 당시 부터 고종황제의 환궁이나 독립협회원들이 복합상소를 올리때까지도 인화문은 정문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엿습니다. 하지만 인화문이 정문이 된데는 아마 남향이라는 것만 고려된 듯 보입니다 대한문은 고종실록에 따르면 1904년 4월 14일에 일어난 경운궁의 대화재로 경운궁을 중건할 때 공사를 하는 김에 대안문도 함께 수리하려는 논의가 일었다고 합니다. 고종황제는 이를 허락하면서 그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정동길을 걷는중에 발견한 어느 무명 화가님의 그림>
“대한문(大漢門)”의 유래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정설은 원래는 ‘매우 편안하다’라는 뜻의 ‘대안(大安)’이었다가 1906년에 수리하면서 ‘대한(大漢)’으로 바뀌었다고 전합니다.. 본디 ‘대한(大漢)’은 “창대한양(昌大漢陽)”의 준말입니다. 직역하면 ‘한양을 창대하게 한다’는 뜻이 되고, 여기서 “창대(昌大)”가 ‘세력이 번창하고 왕성하다’라는 뜻이니 의역하면 ‘대한제국의 국운을 번창하고 왕성하게 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두판 대표님 말이, 조선시대때에 유생들이나 선비들이 국운을 걸고 임금에게 읍소를 하거나 상소를 올릴 때 혹은 백성들이 억울하고 힘든 일이 있어 읍소를 할 때 엎드려 절했던 곳이 바로 대한문 앞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대한문은 여전히 국민들의 “광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장소라고 말이지요! 듣고 보니 오며 가며 그냥 보고 지나쳤던 대한문의 모습이 그날따라 참 넓고, 선명해 보이더군요! 노무현 대통령 서거때 대한문 앞에서 시민분향소를 만들어놓고 싸웠던 날의 흔적과 효순이 미선이 사건 이후 시청광장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촛불의 흔적도 오버랩이 되고 말이지요! 여전히 우리에게 대한문은 그렇게 광장의 의미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의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다시 정동길을 걷다 보면 발걸음은 바로 현재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법원터로 향하게 됩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법원)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자리에 일제에 의해 1928년 경성재판소로 지어진 건물로 광복 후 대법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간 후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02년 본 건물을 신축하면서 아치형 현관이 특징적인 전면부를 보존하여 ‘구 대법원청사’의 상징성만 표현하고 있는데요! 역사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대법원 건물 그대로를 두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지금은 미술관한답시고 많이 개조하고, 바꾸어 놓아서 오히려 역사적인 가치는 조금 떨어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근세 고딕 양식으로 지었으나 일반적인 고딕 양식과는 달리 뾰족한 아치가 아닌 둥근 아치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 및 벽돌조 구조인 본 건물의 외벽에는 화강석과 갈색 타일을 붙였으며, 이러한 외장은 후에 지어진 관공서의 전형이 되어 널리 보급되었다고 전합니다. 2006년 3월 2일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역사적인 건축물 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이 온전하게 남지 못한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지요. 4.19혁명 학살주범재판에서 정치깡패 두목이었던 이정재, 임화수, 315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최인규, 경무대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 등이 이곳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1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답사를 갔던 날은 한창 무슨 한국-호주 친선의 해라고 하여 호주 관련 미술품들을 전시해 놓느라 건물 전면이 더욱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 보였더랬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곳을 나오는 발걸음이 쓸쓸하네요!
대법원터를 나오면 바로 앞 건너편에 배재공원이 보입니다. 원래 이곳은 큰 의미라기 보다는 점심 도시락을 먹으려고 코스에 넣었던 곳인데요! 배재학당이 원래 자리하고 있던 이곳은 1885년 8월 5일 서울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 오늘날 배재중*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의 전신이라고 합니다.
배재공원까지 보고 길을 걸어 다시 큰길로 나오면 동양극장터와 이기붕 집터를 만나게 됩니다. 먼저 현재 서대문 경향신문 길에 위치하고 있는 동양극장터는 원래 1935년 11월에 준공된 동양극장이 자리하고 있던 터입니다. 동양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공연만을 위한 전용극장으로써의 의미가 크고, 신극과 함께 연극계의 양대 산맥을 이룬 신파극의 본산이라고 하네요! 극장의 규모는 건평 373평의 2층으로 된 건물, 객석은 684석, 회전무대에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호리즌트(방음효과를 위해 천장에 휘장처럼 두른 창공벽)까지 갖춘 최신식 연극전용극장이었다고 하고, 의자 또한 1인용으로 접는 식이었으며 무대 밑으로는 스팀까지 들어온 최신식 극장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극장들은 모두 영화 상영을 위주로 했는데 동양극장만이 유일하게 연극만을 위해 지어져 한국 연극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충정로 경향신문 앞에 동양극장터라는 석돌만이 그곳이 원래의 동양극장터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양극장터>
동양극장 터를 지나 길을 건너가면 강북삼성병원에 채 못미쳐 이기붕 집터로 불리우는 4.19혁명기념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기붕(李起鵬, 리기붕, 1896년 ~ 1960년 4월 28일, 충청북도 괴산군 출생)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었고, 대한민국이 들어서면서 정치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옷을 탈바꿈한 인물입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비서,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 시장, 국회의장직을 수행한 인물로,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의 창당을 주도하였다지요!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고,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으나, 사퇴하였고, 그 해 4월 28일 아들 이강석에 의해 권총으로 사살된 인물로 전해집니다. 유명한 일화로 419 혁명 당시 “이기붕 집에 오이가 있다!”라는 말이 당시 국민들에게 전해져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419 혁명 당시 국민들의 경제사정은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비참하고 어려웠는데, 그 어려운 시기에 집에 한참 귀하고 비싼 오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국민들에게 지탄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기붕 집터와 419혁명기념도서관>
지금 현재 이기붕 집터에는 419혁명기념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이라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잠깐 들어가 보았는데 이게 웬걸, 1층 로비를 모두 419혁명 관련 내용으로 사진과 자료들이 즐비하네요! 대표님과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그곳을 돌아보고 나왔습니다. 이곳은 1963년에 이기붕 소유의 재산으로 국가에 환수된 집을 4·19 혁명 희생자 유족들에게 무상으로 대여해 주어, 1964년 9월 1일 4·19기념사설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게 되었고, 1966년에는 4·19도서관이 공공도서관으로 등록되었다고 합니다. 1993년부터 김영삼 정부에서 국립4·19민주묘지 성역화 사업을 벌이면서 4·19도서관도 현대식 도서관으로 재건립을 추진했고, 1998년부터 신축 건물을 지어서 2000년 현재의 4·19혁명기념도서관을 개관했다고 합니다. 시간되실떄 한번쯤 돌아보셔도 좋을 곳으로 보입니다.
이기붕 집터까지 돌아보고 나오면 처음에 설명한 돈의문터가 나옵니다. 돈의문은 1915년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경성도시개발계획따른 전차의 북선화로 인해 일제로 인해 헐려 버렸습니다 .이름에 따라 서대문구에 위치했던 것으로 혼동할 수 있으나, 현재 알려지는 실제 위치는 지금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서대문구가 아닌 중구 관할 지역에 존재했다고 하네요!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이 있고, 한창 이런저런 공사들이 진행중입니다. 서울특별시는 인근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3년까지 이 자리에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고 하고, 새로 복원되는 돈의문과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경교장(현 삼성서울병원 본관)과 서울성곽 등을 한 축으로 묶어 서울의 역사문화중심지로 개발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답사를 떠난 날에도 공사들이 여기저기서 한참 열심히 진행되고 있더군요!
돈의문 터를 지나쳐 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로 강북삼성병원이 보이고, 그곳에 바로 역사적인 장소인 경교장이 있습니다. 경교장은 서울시 종로구 평동에 위치한 곳으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님이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실제 사용했던 개인 사저 건물입니다 .2001년 4월 6일 서울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에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습니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라는 의미와 더불어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으로 불리웁니다. 건물은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1층의 좌우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하였습니다. 현관 2층부에는 6개의 붙임 원주를 사용하여 5개의 들임 아치창을 냈다고 합니다.
<현재의 경교장의 모습과 경교장 복원공사 현장>
김구 선생님이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고도 하고, 또한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님이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곳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역사적인 이곳이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 국가차원에서의 경교장 복원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찾아간 경교장은 복원공사에 한창인지라 들어가볼 수는 없었습니다만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복구하고, 역사적 의미를 찾아간다고 하니 한참 많이 늦은 복원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교장 복원은 단순히 건물만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굴절된 한국 현대사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이며 남북협상의 산실이 동시에 백범 선생이 암살된 현장인 이곳을 복원하는 일은 건물만 바꾼다는 의미 그 이상일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2012년 광복절까지 경교장 복원공사가 마무리 된다고 하니 이제 그 복원 이후 다시 한번 역사의 현장에 가봐야 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이렇게 역사적인 곳에 자리한 강북삼성병원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들어 그곳의 부지는 국가재산으로 환수시키고, 오롯한 우리의 역사를 밟아 갈 수 있는 곳으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경교장을 돌아 나와 조금 걷다 보면 근대식 예쁜 집이 하나 보입니다. 그곳이 바로 홍난파가옥입니다! 홍난파는 본명은 영후, 난파는 그의 호로 난이 피어나는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향의 봄, 봉선화, 퐁당퐁당과 같은 중, 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음악 교과서를 도배할 정도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도 일제강점기에 민족음악 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 운동을 펼쳤는데, '봉선화'가 일제에 의해 금지곡으로 처분돼 '민족음악가'로 알려졌었지만 이후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조선의 문예가 30명이 결성한 사회교화단체 '조선문예회'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작년 친일반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음악가의 이름에 홍난파 역시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홍난파는 음악가들의 친일단체에 가입한 것에 그치지 않고, 친일가요와 글을 계속해 발표했는데 중일전쟁 이후 발표한 친일가요 '희망의 아침'이 그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홍난파의 친일행적을 반민족친일파가 득세하는 대한민국은 미래세대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초중고 교과서에 실을뿐만 아니라 마치 엄청난 민족음악가인것처럼 교육을 해 왔으니 우리의 교육이 얼마나 틀어져 있었는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하기사 일본 출신의 '전과14범'이 대통령도 해먹는 나라이니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올바른 역사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곳이 바로 이곳, 홍난파 가옥입니다.
<홍난파가옥>
홍난파 가옥을 돌아 나와 골목길을 조금만 올라가다보면 권율장군의 은행나무터와 딜쿠샤라는 곳이 나옵니다. 권율장군의 은행나무터는 임진왜란중 행주산성에서 2800명의 군사로 왜군 3만명을 격파한 권율장군의 생가터라고 전하며, 은행나무 역시 권율장군이 직접 심어 450년동안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하여 권율장군의 은행나무터라고 합니다.
<권율장군집터와 그가 손수 심었다고 전하는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
그리고 그 바로 옆으로 딜큐샤라고 불리우는 집터가 보입니다. 딜쿠샤는 흰두어로 '행복한 마음', '희망', '기쁨, '이상향' 등을 의미한다고 하고, 딜쿠샤 가옥은 UPI 통신의 서울특파원이었던 알버트 테일러가 살던 집입니다. 알버트 테일러는 일본의 철저한 감시를 뚫고 독립선언문과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미국에 보냈으며, 그로 인해 전세계에 3.1운동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여 그 의미를 가지는 유적지라고 합니다. 해방 후 딜쿠샤는 18가구가 집을 나누어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하고 현재에도 많은 가구들이 그곳에 나누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딜쿠샤라고 적힌 초석의 이유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오래도록 주목 받지 못하다가 독립선언서를 숨겨 두었던 요람의 아기 브루스 테일러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 65년만에 지구 반대편의 고향집을 찾아오면서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 이야기는 손녀에 의해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될 계획이라고도 합니다. 잠시 들어가보니 아주 옛날 오래된 건물 양식이 그대로 보여지는 듯하여 신기함을 느낌과 동시에 또 다른 시간여행을 한 듯한 오묘한 느낌 또한 지울 수 없었습니다.
<딜쿠샤외부전경>
<딜쿠샤 내부전경>
<딜쿠샤가 국유재산소재지라는 것을 알리는 안내문>
이렇게 짧았지만 많은 이야기를 가진 긴 저희 여행을 마무리하고, 서울성곽길에 올랐습니다. 서울의 중심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성곽길을 바라보면서 서울 교남동에 얽힌 역사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의 이야기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듯 합니다. 많은 회원들, 대중들과 걷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서울 중심가에 자리잡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잘 찾아내고, 그 의미를 우리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드는 그런 의미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서울성곽길에 올라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첫댓글 동양극장터는 경향신문이 아니라 문화일보예요ㅎㅎ
앗.. 나는 다녀오고도 이런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