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 논공읍 본리리(本里里), 남리(南里) 마을
예로부터 달성군 논공읍 본리리(本里里) 이른바 소도촌(蘇塗村) 마을에, 그 후 논공공단이 조성된 현재는 논공읍 남리(南里) 일원으로 이거하여 도합 400년 역사의 제갈씨(諸葛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예부터 대구 근역에는 상게 남양(南陽) 제갈씨와 함께 남양갈씨(南陽葛氏) 일족이 다수 분포하여 살았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주지하듯이 제갈씨, 갈씨는 모두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어쩌다가 그 연원(淵源)을 잊게 되어 역대의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계속적으로 대구제갈씨(大邱諸葛氏-2015년 221명), 대구갈씨(大邱葛氏-2015년 690면)로 조사된 인구수가 적지 않았다.
제갈씨의 대구 달성 근역 입향은 임란 때 창의혀 영천(永川)에서 순절하였다는 제갈호(諸葛灝)의 증손이며 시조의 52세손인 제갈자경(諸葛自慶), 중경(重慶), 연경(連慶) 3형제들로 비롯한다고 알려졌다. 그들이 고향 진주(晉州)를 떠나 대구, 달성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장자 자경은 달성군 구지면 덕곡동에 정착하고 차자 중경은 달성군 논공읍 본리리, 삼자 연경은 서울로 이거하였다.
이 가운데 중경의 자손들은 400년 가까이 본리리 소도촌(蘇塗村)에 세거하면서 1947년에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였다. 6.25 전란 때 소실되었으나 1960년에 중건되었다가 후에 달성공단이 조성됨으로써 새로이 논공읍 남리(南里)로 이거하게 된 일족들이 1981년에 그곳으로 옮겼다.
영모재 안의 무후사(武侯祠)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후손들이 제향(祭享)한다. 집성촌은 대구 달성군, 경기도 가평군, 천안시 성환읍, 강원도 철원군 등지이다.
『제갈(諸葛), 제(諸), 갈(葛)』 씨는 중국에서 유래된 성씨로 그 본관은 대개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 칠원제씨(漆原諸氏), 남양갈씨로 하였다. 그러나 역대의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소수이지만 대구제갈씨(大邱諸葛氏), 대구갈씨(大邱葛氏)가 계속 나타났다. 비근한 예로 201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본관에서도 대구제갈씨 221명, 대구갈씨 690명이 보인다. 사정이 그러한 까닭은 예로부터 달성군 구지면(求智面), 논공읍(論工邑) 일원에 제갈씨 집성촌이 있었음에서 보듯이 대구 근역에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 남양갈씨(南陽葛氏)가 다수 분포하여 살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곧 그 후손 일부가 대구광역시 지역으로 이거하여 오랜 세월을 보내는 사이에 『남양』의 관향을 잊고 거주지인 대구로 본관을 삼은 것인 아닐까 생각한다.
제갈(諸葛), 제(諸), 갈(葛)씨는 시조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태산군승(泰山郡丞)을 지낸 제갈규(諸葛珪)이다. 그는 삼국지에서 촉한(蜀漢)의 승상으로 유명한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이다. 그의 5세손 제갈충(諸葛忠)이 한(漢)) 나라가 망하자 위(魏) 나라는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하여 뗏목을 타고 동쪽 우리나라에 도래(渡來)하여 전라도 지리산(智異山)에 복거하였는데, 그 때가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 5년이었으며 이로써 우리나라에 성씨 제갈(諸葛)의 역사가 비롯한 것이라 하였다. 그밖에 제갈충의 20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興德王, 826-836) 때 귀화한 사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데 제갈량의 원래 성씨는 갈씨(葛氏)였다고 한다. 제갈량의 조상은 진(秦)나라 말기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봉기에 가담한 장군 갈영(葛嬰)의 후손이라고 한다. 갈영은 전공을 올렸으나 진승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한문제(漢文帝) 때 그 공로로 자손이 제현후(諸縣侯)에 봉해졌는데 제현은 당시 낭야군(琅琊郡)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 뒤 여러 대(代) 지나 일족이 제현에서 양도(陽都)로 옮겨 갔는데, 양도에는 원래부터 갈씨(葛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둘을 구별하기 위해 양도의 사람들은 그들을 '제현의 갈씨'라는 의미로 제갈(諸葛)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이후로 언제부터인가 두 글자인 제갈이 통용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정착한 제갈씨 후손으로 고려 현종(顯宗) 때 시조의 32세손 되는 제갈한(諸葛漢)이 학문과 인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현종이 이를 칭탄하고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이를 사양하였다고 한다. 현종이 크게 탄복하여 두 아들에게 사분성(賜分姓)하기에 이르렀는데, 형인 제갈홍(諸葛泓)은 제씨(諸氏)로 하여 낭야군(琅琊君에) 봉해지고, 아우 제갈형(諸葛瀅)은 갈씨(葛氏)로 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남양은 와룡(臥龍) 선생 제갈량이 은거했던 중국 형주(荊州)의 남양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로부터 제씨[漆原諸氏]와 갈씨[南陽葛氏]가 분성되어 세전하였다. 구한말 고종(高宗) 때 성씨 환원운동이 일어나자 제씨와 갈씨 일부가 제갈씨로 복성하였는데 그렇게 해서 결국 우리나라 『제갈, 제, 갈』 3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남양제갈씨가 중시조로 삼고 있는 인물은 우은(愚隱) ‘제갈성룡(諸葛成龍)’이다. 그는 여말 선초의 인물로 조선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무공을 크게 세운 인물이었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낙향하여 초야에서 생을 마쳤다. 이후 ‘충일(忠一)’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의 네 아들은 각각 봉군(封君)이 되었다.
기타의 현조(顯祖)로 고려 공민왕 때 화순군(和順君)에 봉군된 ‘제갈매(諸葛邁)’, 조선 태조 때 대구부원군에 봉군된 화헌(華軒) ‘제갈원(諸葛薳)’, 조선 태조 때 청주군(淸州君)에 봉군된 ‘제갈과(諸葛薖)’,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창의해 영천전투에서 전사한 증병조판서 충의공(忠毅公) 학포(學圃) ‘제갈호(諸葛灝)’, 어려서부터 조선과 명나라를 오갔으며, 임란 때는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 ‘제갈봉하(諸葛逢夏)’ 등이 이름이 알려졌다.
제갈씨의 대구 달성 근역 입향은 임란 때 창의한 제갈호(諸葛灝)의 증손이며 시조의 52세손인 제갈자경(諸葛自慶), 중경(重慶), 연경(連慶) 3형제들로 비롯한다. 그들이 고향 진주(晉州)를 떠나 대구, 달성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장자 자경은 달성군 구지면 덕곡동에 정착하고 차자 중경은 달성군 논공읍 본리리, 삼자 연경은 서울로 이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