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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라인의 씨사(氏寺)로서 창건된 고류지(廣隆寺)
예전부터 교토(京都)의 추억이 많다. 소중한 인연들로 맺어진 우리의 삶들을 정망 잘 가꾸고 만들어가고 싶다. 문득 법정(法頂)스님의 글이 떠오른다.
귀한 인연 / 法頂 스님
진심어린 맘을 주었다고 해서
작은 정을 주었다고 해서
그의 거짓 없는 맘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깊은 정을 받았다고 해서
내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깊은 사랑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를...
한동안 이유 없이 연락이 없다고 해서
내가 그를 아끼는 만큼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가 내게 사랑의 관심을 안준다고 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쉽게 포기하는
그런 가볍게 여기는 인연이 아니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힘든 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내게 가장 미더운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교토(京都)
교토는 일찍부터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주변에서 야요이 시대(彌生時代:BC 300~AD 300경)와 고분시대(古墳時代:300경~600경)의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교토 분지의 내부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의 발전기부터로, 중국과 한반도에서 온 귀화씨족(歸化氏族)들에 의해서였다. 하타우지(秦氏)·오노(小野)·이즈모(出雲) 등의 귀화씨족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절·신사(神社) 등을 지어 이 지역을 발전시켜 갔다.
794년 간무 천황(桓武天皇:737~806)은 나라(奈良)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이때 세워진 수도가 헤이안쿄(平安京)로 중국의 장안(長安)을 모방하여 건설된 도시였다(헤이안 시대). 이후 교토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초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일본의 황실이 자리 잡았고 문화·경제·종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85~1333)에는 간토지방(關東地方)의 가마쿠라에 쇼군(將軍)이 바쿠후(幕府)를 설치하여 통치를 하였으므로 교토의 정치적 비중은 다소 약화되었다. 그러나 상점이나 도소(土倉:중세의 전당포) 등이 활기를 띠는 등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많은 사원들이 건설되고 정토종·선종 등 여러 종파의 불교가 발전되었다. 즉 전대(前代)의 우아한 귀족문화에, 상층 무사층을 중심으로 한 강건한 무가문화(武家文化)가 가미되어 발전되어갔다.
이후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6~1573)에 다시 이곳에 바쿠후가 설치됨으로써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 이 시대에 직물업자들이 교토의 니시진(西陣)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이는 이후 견직물 산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무사들에 대한 통제책의 일환으로 지방의 유력 무사들을 교토에 이주시켰기 때문에, 교토의 소비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을 비롯하여 노(能:일본의 전통연극)·한문학·서화·다도·꽃꽂이·통속소설 등이 성행하여 독특한 일본적인 문화를 형성해갔다.
그 뒤 오닌(應仁)의 난(1467~1477) 때 무참히 파괴되었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에 의해 통일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1603~1867)에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에 바쿠후가 설치되면서부터 바쿠후에서 교토에 두었던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에 정치적 중심은 에도였지만 교토는 에도·오사카와 함께 '삼도'(三都)라고 불리며 발전해갔다. 또한 포목점 등을 중심으로 한 대상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미쓰이 구미(三井組), 시마다 구미(島田組), 오노 구미(小野組) 등의 대금융업자도 등장했다. 도쿠가와 시대 중기부터는 요업도 발전했다.
도쿠가와 시대 말기 존왕파(尊王派)가 대두되어 천황의 위치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교토는 존왕운동(尊王運動)과 반바쿠후 운동(反幕府運動)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유행하기도 하였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뒤인 1869년 도쿄로 천도함에 따라 교토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고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문물과 교육제도 등을 선도적으로 받아들여 문화·교육 도시로 발전했으며 새로운 산업계획을 추진하여 근대적 산업도시로 변모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다행히 폭격을 받지 않아 전통적인 유적·유물이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교토에는 일본의 역사와 전통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신라인의 씨사(氏寺)로서 창건된 고류지(廣隆寺)
이제 우즈마사 광륭사로 이동한다.
일본인들이 교토에서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절중의 하나인 광륭사(廣隆寺)는 규모가 작고 조용한 절이지만 일본의 국보1호인 보관미륵반가상이 있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일본의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한국의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상과 흡사한 모양으로 고대 일본에는 없는 적송으로 만들어져 현재 백제가 왜 황실에게 선물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알려져 있지만 주변 어디에도 그런 안내문은 볼 수 없어 안타깝다. 광륭사 안 성덕태자전을 지나 영보전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조명아래 보관미륵반가상이 엷은 미소를 띄우며 반갑게 맞이한다. 양쪽으로는 일명 우는 불상과 함께 옆으로는 광륭사를 짓고 불상을 안치시켰다는 신라인 진하승 부부상이 안치되어 있으나 이 불상이 한국에서 전해준 글귀는 여전히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중국의 영향을 받아들였다는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 많은 한국인이 교토로 여행을 찾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일본 패키지 상품에 들어있지 않는 것 또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 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미래에 부처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로 정해져 있는 보살인 미륵보살은, 지금은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진과 사색에 매진하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미륵보살 반가상은 그러한 미륵보살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주로 사색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금동미륵보살반가상(대한민국 국보 제83호)과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일본 국보 제1호)
안내팜플렛의 글을 읽어보기로 하자.
고류지(光隆寺)
고류지(光隆寺) 절은 진언종의 사원으로, 스이코 천황11년(603년)에 쇼토쿠 태자가 건립했다고 전해내려오는 야마시로(교토)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며,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일본 7대 사원중의 하나입니다.
1165년에 건립된 '강당'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입니다. 강당에는 높이 약 2m40cm에 이르는 아미타여래상(국보)를 중심으로, 그 오른편에는 지장보살상(중요문화재), 왼쪽으로는 허공장보살상(중요문화재) 등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강당의 뒤쪽에는 대웅전에 해당하는 조구오인(上宮王殿)이 위치하고 있으며, 본존상은 33세 무렵의 쇼토쿠 태자(573~621)상으로 전해 내려오는 목조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720년에 재건되었습니다.
경내의 북쪽에는 게이큐인(桂宮院`국보)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1251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게이큐인은 1층의 팔각원당 건조물로 1변의 길이는 약 2m30cm,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이어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로, 일반적으로 핫카구도(八角堂)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조구오인의 뒤쪽에는 신레이호덴(新靈寶殿)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다수의 귀중한 불상이 안치`전시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아스카시대(552~645)에 만들어진 유명한 목조 미륵보살상으로, 1951년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안내팜플렛 뒤편에 광륭사의 국보라고 해서 미륵보살반가사유상(백제전래)라고 표기되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류지(廣隆寺)에는 목조미륵보살반가상(木造彌勒菩薩半跏像)에 대해 실존철학자인 독일의 야스퍼스(1883-1969)는 이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된 높이 123.5cm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神品이라고 할 만큼 너무도 훌륭한 불상으로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 초이다. 서기 603년에 추고천황(推古天皇, 592-628)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574-622)가 교토 땅의 신라인 지도자였던 진하승(秦河勝) 공에게 전해주었고, 진하승(秦河勝)공은, 즉시 봉강사(蜂岡寺)를 창건했다. 이 봉강사가 현재 교토의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고류사(광륭사, 廣隆寺)의 옛 이름이다. 진(秦)공은 이 백제 불상을 모시고 오늘의 고류사의 前身인 봉강사를 신라인의 씨사(氏寺)로서 창건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 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중앙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 90Cm)'이 바로 고류사의 목조 백제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의 이 백제 목조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만 나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 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한 이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 초이다. 서기 603년에 推古天皇(592-628)의 섭정이었던 聖德太子(574-622)가 京都땅의 신라인 지도자였던 秦河勝공에게 전해주었고, 진하승공은 즉시 蜂岡寺를 창건했다. 이 봉강사가 현재 교토(京都)의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廣隆寺의 옛 이름이다. 秦공은 이 신라불상을 모시고 오늘의 광륭사의 전신인 봉강사를 신라인의 氏寺로서 창건했던 것이다.
아좌태자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의 아들.〈니혼쇼키 日本書紀〉에 의하면 597년(위덕왕 44)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에 건너간 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 최고의 걸작품으로 전해지는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현재 일본의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서 태자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왕자가 조금 작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일부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아좌태자가 그린 것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호류사(法隆寺) 금당벽화를 그렸다고 하는 담징(曇徵)과 함께 아좌태자는 삼국시대의 회화미술을 일본에 전해주는 데 크게 공헌했다.
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태자상''
일본 최초의 스이코 여왕(推古 592∼628년) 시대를 꽃피운 백제 불교문화가 ‘아스카(飛鳥)문화’다. 이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인 또 하나의 백제인 문화유산이 있다. 일본 최초의 초상화인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唐形之御影)이 그것이다. 이 초상화는 세 인물이 칼을 허리에 차고 나란히 서 있는 그림으로, 가장 키 큰 쇼토쿠태자(574∼622년)가 가운데 서 있고, 어린 두 왕자가 양 옆에 서 있다. 불후의 명작으로 찬양받는 이 초상화는 현재 일본 왕실(도쿄 궁내청)에 보존되고 있는 비공개품이다.
서기 597년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년 재위)은 아좌(阿佐)태자를 왜 왕실로 보냈다(‘부상략기’, ‘일본서기’). 이 당시 왜 왕실에 건너가서 함께 지내던 아좌태자는 그림 솜씨가 뛰어나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의 전신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쇼토쿠태자와 스이코여왕 등 왕실에서는 모두 기뻐했다.
백제왕자인 아좌태자가 구다라에서 왜나라 왕실에 건너온 시기는 때마침 아스카데라(飛朝寺 법흥사)가 8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성대하게 준공(서기 596년 11월)된 그 이듬해 봄 4월의 일이었다. 스이코여왕(推古女王)은 아스카데라가 준공된 것을 매우 기뻐하며 이 사실을 모국 백제와 이웃 신라에까지도 알렸다.
쇼토쿠태자의 친고모인 스이코여왕은 사신 기시노이와카네(吉士磐金·길사반금)를 신라의 제26대 진평왕(579∼632년 재위)에게 보내 아스카데라 준공을 알렸다. 그 당시 진평왕은 축하의 뜻으로 까치 두 쌍을 기시노이와카네(吉士磐金)의 귀국 길에 보내주니, 스이코여왕은 기뻐하면서 까치를 구다라스(지금의 오사카부)의 나니와 땅 ‘구다라 사당’ 숲에다 풀어주었다. 그 후에 까치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깠다고 ‘일본서기’가 전하고 있다.
실은 신라에 갔던 왜나라 사신 기시노이와카네(吉士磐金)는 그 당시 나라 땅에 살고 있던 신라인 호족 가문 출신이었다. ‘길사(吉士)’라는 것은 신라의 17관등 중 14번째 관등 벼슬이다. 왜나라에서도 ‘길사’ 관위의 벼슬아치 여러 사람이 역사 기록에 보이며, 이들은 한결 같이 신라계 도래인들이었다. 스이코여왕은 왜나라에 사는 신라인 기시노이와카네(吉士磐金)를 사신으로 삼아 신라로 보냄으로써 나라 땅 아스카 왕실의 백제인 조정과 신라와의 친선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 신라의 진평왕은 왜나라 왕실로 녹나무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廣隆寺寺傳’)을 보내주었으며, 이는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오늘의 일본 국보 불상이다. 일명 ‘우는 미륵’이라는 애칭이 흥미롭게 붙어 있기도 하다.
지금 고류지에는 너무나도 이름난 신라 적송나무 불상인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일본국보 제1호·1951년 일본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함)이 있다. 그 밖에 또 하나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호류지 경내의 주쿠지(中宮寺)에 봉안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은 모두 3체의 미륵불상을 서기 603년, 616년, 623년에 각기 아스카의 스이코여왕에게 보내어 신라의 미륵 불교를 왜 왕실에 포교했다.
한편 위덕왕은 아스카데라 준공 축하 사절로서 아좌태자 일행을 직접 스이코여왕에게 보냈다. 본래 아좌태자는 성왕의 제2왕자이며,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서기 538년에 백제의 성왕이 왜나라 아스카 땅에다 불교를 포고한 지 장장 58년 만에 드디어 나라 아스카 땅에는 백제의 7당가람이 우뚝우뚝 섰으니 이 어찌 경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웅장한 칠당가람을 짓도록 위덕왕은 서기 588년에 사찰 건축가 등 다수의 기술진과 승려들을 아스카에 파견했고, 드디어 그 눈부신 큰 열매로서 대가람이 준공된 것이다.
왜 왕실에 간 아좌태자는 쇼토쿠태자와 곧 친숙하게 되었으며, 타고난 그림 솜씨를 발휘해서 마침내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필을 들기에 이른 것이다. 그 초상화가 뒷날 일본 국보가 된 것임은 두말 할 나위 없고, 대대로 일본 왕실이 잘 보존하면서 오늘에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며 일본 초상화의 효시로도 꼽히는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 이것이 백제 아좌태자의 그림이냐 아니냐를 따져 묻기 위해선 당초 이 그림을 보존하고 있던 호류지 학승의 기록을 도외시할 수 없다고 본다.
광륭사를 나와 앞에 있는 동네 골목길을 찾아 헤매 골목 끝 어귀에 있는 헤비쯔카에 도착한다.
헤비쯔카 ... 광륭사를 지은 진하승의 묘로 알려진 곳이다.
옛 부터 우즈마사 이곳은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곳으로 알려 졌지만 고분 약식이 백제식 횡혈식 양식으로 되어 있어 진하승이 백제인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신라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교토(京都) 서부 우스마사라는 지역일대는 신라인들의 개척 역사 숨결이 짙게 흐르고 있다. 고대 신라인 ‘하타’씨(秦氏, 진씨) 가문은 경상도 울진(蔚津)으로부터 왜나라로 건너왔다고 알려졌다. 유랴쿠(雄略, 456∼479 재위)천황이 존경한 야마시로(山城, 교토) 땅의 하타노 사카기미(秦酒公, 이하 진주공)에게 ‘우스마사’(太秦)라는 왕명 성씨를 부여하면서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주공은 우스마사라는 고대 교토 땅 신라인 터전에서 180개 조직을 동원해 거대한 뽕밭을 일구고 누에를 키워 비단을 짠 뒤 이를 일본 조정에 진상함으로써 유랴쿠(雄略)천황의 환심을 산 것으로 전해진다. 진주공이 신라로부터 누에치기와 비단 짜는 기술진을 거느리고 건너왔다는 설도 있는데 우스마사 고류지 바로 뒤쪽에는 진주공을 신주로 모신 오사케신사(大酒神社, 대주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곳으로부터 1㎞ 떨어진 지역에는 ‘가이코노야시로’(누에사당)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우스마사 지역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 비단의 최초이자 최고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다. 특히 우스마사 우교구(右京區)에서 생산되는 ‘니시진오리’(西陣織)라는 견직물은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있어 일본 최고급 명품으로 평가받으며 일본 왕실과 귀족들의 전통 의상에 사용돼 왔다. 지금도 이곳 골목길에 들어서면 직접 비단을 짜는 베틀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옛 신라인들의 베 짜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고대 신라의 비단 직조 기술을 우스마사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앞장선 진주공(秦酒公)은 거문고를 잘 뜯기로도 이름을 떨쳤다. 유랴쿠왕의 총애를 받아 재무장관을 지내기도 한 진주공은 왕의 요청으로 궁궐로 행차해 거문고를 즐겨 뜯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랴쿠왕 재위 시절 왕궁 건축가로 빼어난 기술을 가진 잘 생긴 ‘이나베노 마네’(猪名部眞根, 저명부진근)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건축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루 종일 열심히 목재를 다듬지만 자귀날을 돌판에 부딪혀 날을 상하게 하는 실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랴쿠왕 13년 9월 어느 날 왕이 그가 일하는 곳에 다가와 이나베노 마네에게 “한번도 실수로 돌판에 자귀날을 부딪힌 적이 없었느냐”고 넌지시 묻자 이나베노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궁녀들을 불러 모아 몸을 벌거벗기고는 아래쪽만 하대로 간단히 가리게 한 채 벌거숭이로 씨름을 하게 했다. 이때 이나베노 마네(猪名部眞根)는 씨름판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자귀질을 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자귀날을 돌판에 쳐 이가 빠졌다. 그러자 왕은 대로하면서, “네 이놈! 속이 시꺼먼 녀석이 짐을 감히 두려워하기는커녕 주둥이만 가볍게 놀렸구나”라면서 형리를 불러 이나베노 마네를 반역죄로 처형하라고 명했다. 이를 지켜본 동료, 신라인 진주공이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읊기를 “애석하구나. 이나베노(猪名部)의 뛰어난 기술. 그의 먹줄 치는 솜씨 따를 자가 없거니, 그가 죽으면 뉘가 뒤이어 먹줄을 칠 것인가”라며 탄식하자 이를 들은 유랴쿠왕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서둘러 신하를 시켜 형장으로 달려가게 해 이나베노 처형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
진주공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대목장 이나베노 마네(猪名部眞根)는 신라 건축가 후손이라고 일본인명사전 삼성판(三省版·1978)은 설명하고 있다. 이나베노라는 성씨는 고대 일본 왕실의 신라 건축가들이 세습하여 대를 이었던 가문의 성씨였다. 8세기 때 활약한 이나베노 모모요(猪名部百世, 이하 저명부백세)도 이 가문이다.
일본 12세기 역사서 ‘도다이지요록(東大寺要錄)’에는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는 나라 땅의 대가람인 도다이지(東大寺)의 큰 불상 ‘비로자나대불’의 주조와 대불전(大佛殿) 건물인 전각 건축에 참여했으며, 그 공로로 ‘외종5위하’의 조정의 고관 벼슬을 서품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진주공은 이나베노 마네의 목숨만을 구해준 것은 아니었다. 불과 1년 전인 유랴쿠왕 12년 10월 10일, 진주공은 또 다른 건축가 쓰게노 미다(鬪鷄御田)의 중대한 실수를 무마해준 적이 있다. ‘일본서기’는 “유랴쿠천황은 목공 쓰게노 미다에게 왕실 누각을 건축하도록 명했다. 쓰게노는 드높은 전각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날 듯이 잽싸게 달리며 일했다. 그 광경을 넋 빠진 듯 열중하여 바라보던 이세(伊勢) 땅 출신의 궁녀가 미타의 재빠른 동작에 놀라서 그만 발을 헛디뎌 정원에 넘어졌다. 이때 궁녀는 쓰러지면서 왕에게 갖다 바칠 음식물 그릇을 뒤엎고야 말았다. 왕은 쓰게노가 궁녀를 범했다고 의심하고 그를 죽이도록 형리에게 넘겼다. 이때 진주공이 왕의 곁에서 왕을 깨우쳐줄 생각에 작사 작곡한 노래로 거문고를 뜯으며 읊었다. 노래는 ‘이세 땅, 이세 들판에 자라서 훌륭한 나뭇가지를 잔뜩 꺾어다가 나뭇가지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대왕에게 충성하며 제 목숨도 오래오래 살아가려던 목공은 참으로 가엽게 되었도다’고 하였다. 유랴쿠왕은 진주공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는 그의 죄를 묻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인 진씨 가문의 전통적인 활동 영역이었던 우스마사에서 진주공의 뒤를 이어 왜 왕실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은 6세기 하타노 오쓰치(秦大津父, 진대진부), 6∼7세기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 진하승), 8세기의 하타노 도리(秦都理, 진도리), 하타노 이로코(秦伊呂巨, 진이여거), 하타노 오이(秦大炬, 진대거) 등 일일이 열거하기 번거로울 정도로 많다.
특히 603년 우스마사 고류지를 창건한 인물은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인데, 백제계 스이코여왕(592∼628 재위) 조정의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신라 진평왕으로부터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왜국 왕실로 기증받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신라 사신이 왕도에 입경할 때면 도자(導者)로서 활약했다”고 일본 인명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광륭사 버스주차장에서 광륭사로 가다보면 연리근 나무가 서 있다. 꼭 그곳에 서서 부부의 연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다짐하고 가도록 일행들에게 얘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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